“가족이라는 사명
(10. 1. 2023.)

디모데전서 5:8

 

무엇이 나를 방해한다고 느끼나? 방해한다고 느끼는 것이 내가 소홀히 하는 것이다. 직장 일이 바쁘고 가정 일도 바쁘다. 직장이 가정을 방해하는가? 아니면 가정이 직장을 방해하는가? 방해한다고 느껴지는 것이 내가 더 소홀히 여기는 것이다. 게임을 하다가 여자친구 전화가 왔다. 게임이 방해되는가, 여자친구가 방해되는가? 사람은 무언가를 더 중요하게, 무언가를 더 소홀히 여기며 산다.

 

하나님은 가정을 챙기는 것을 사람의 사명으로 여기시는 분이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디모데전서 5:8) 가족을 돌보지 않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이 되지 않는 죄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지 점검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렇게 계속 가면 가족을 더 잘 챙길 수 있는 구조가 되는가?”

 

가족이 나를 방해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돈 버는 일 어렵지만, 돈 벌어야 하는 것처럼, 가족 챙기는 일 어렵지만, 가족 챙겨야 한다. 가족이 나를 방해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동등하게 중요한 사명으로 바라보라. 쉬운 부서, 어려운 부서 있는 것처럼 평안한 가족, 어려운 가족 다 있는 것이다. 자기연민과 분노와 답답함에서 벗어나라. 끝까지 돌보려고 하는 그 헌신으로, 가족을 버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예수님의 마지막 사명은 가족 챙기는 일이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한복음 19:27) 예수님이 온전히 나를 구원하셨다는 말은, 순종을 소홀히 하는 부분이 없으셨다는 말이다. 주님의 순종으로 내가 구원 받았음을 믿는가? 그 길이 생명의 길임을 믿고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십자가 위에서도 가족 돌봄의 순종을 소홀히 하지 않으시면서 나를 하나님의 가족 삼아 주셨으니, 내가 많이 어려워도 늘 가족 돌보면 주님께 영광이 된다.

 

가족 너무 험담하지 말라. 잠잠히 오늘 내가 무슨 일과 무슨 말을 하면 작게 나마 가족에게 기쁨이 될지 생각해보자. 가족을 위한 기도를 오랜 기간 잊지는 않았는가? 오늘 우리 서로 가족 기도를 부탁해보자. 가족은 신자들의 위대한 사명이다.

 

[1] 내가 중요한 일로 바쁠 때 방해된다고 생각되어 소홀히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혹시 그것이 가족이 된 적은 없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디모데전서 5장 8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내 인생의 미래의 계획에 이 부분을 고려한 적이 있습니까? 요즘 가족에 대해 회피하고 싶은 어려움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4-5]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소홀히 여기지 않고 순종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그분의 완전한 순종으로 나는 누구의 가족이 되었습니까? 그분의 자녀로 다시 돌아보아야 할 나의 가족을 위한 기도제목을 나누어 봅시다.

“분위기를 통한 회심
(9. 24. 2023.)

사도행전 16:14-15

 

한 회사만 다니면 분위기를 모른다. 이직해봐야 분위기의 차이가 무엇인지 이해한다. 혼자 살면 다 이렇게 사는 줄 안다. 결혼해봐야 집안 분위기라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 나는 내가 살아온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서 이런 기질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분위기를 통해서도 회심 시키시는 분이다. 루디아라는 사람이 처음 회심한다. 그런데 그 집안 사람들도 갑자기 다 믿게 된다.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사도행전 16:14-15) 루디아가 믿는 건 좋다. 그런데 그 집도 다 세례를 받았다. 무슨 영향을 받은 것인가? 집안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 두 명 믿으면서 모두 믿게 되었다. 분위기에는 힘이 있다.

 

분위기를 통한 영향력을 기대하라. 전도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일단 교회에 데려다만 놓아도 효과가 있다. 분위기 때문에 변한다. 내 스스로 잘 변하지 않을 때, 그냥 모임에 계속 참석해 보아라. 어느새 내 생각과, 언행과, 사고방식이 바뀔 때가 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8:20) 성도가 있는 곳에는 성도만이 뿜어내는 분위기가 있다. 내가 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내가 그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기대하며 머물러야 한다.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사건 때, 분위기로 구원받은 자가 있다. 십자가 옆 강도이다. 예수님은 강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분위기였다. 옆에 매달려 있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이 사람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 같았다. 강도가 먼저 말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 예수께서 이르시되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3:42-43) 주님 주변에 머물렀는데 구원이 임했다.

 

난 십자가 옆에 없는데, 어떻게 나에게도 주님이 일하실까? 하나님의 분위기가 있는 사람과 장소에 나를 계속 밀어 넣으실 것이다. 거부하지 말고 계속 머물러 있어보라. 분위기가 당신을 변화시킬 것이다. 내게 선한 분위기가 온다면, 기대하라. 그 안에만 있어도 산다.

 

[1] 집안, 장소, 사람마다 확실한 분위기의 차이가 있음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사도행전 16장 14-15절을 읽어봅시다. 루디아가 믿은 후에 그 집안에 벌어진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교회나 가정, 친구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변화 되었던 삶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4-5] 누가복음 23장 43절을 읽어봅시다. 강도는 어쩌다가 구원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요즘 내 삶에 분위기로 다가오시는 것을 느끼는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졸던 그분
(9. 17. 2023.)

사도행전 12:6

 

사람의 불안이 분명하게 밖으로 표출되는 현상은 무엇인가? 잠이 안 오는 것이다. 잠을 위해 약을 먹는 시대가 되었다. 걱정과 불안, 염려와 긴장감은 우리의 잠을 빼앗아 간다.

 

하나님께 맡기면 잠이 회복된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베드로 죽일 준비를 했다. 잡아 놓고 사형 날을 잡았다. 사형 집행 바로 전날 베드로는 무엇을 하였나?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사도행전 12:6) 누워 잤다. 내일 내가 죽는데 잠이 오는가? 그는 잤다. 보이지 않는 염려와 근심을 주께 맡기니, 실제적으로 삶의 물리적인 질서와 평안이 회복된 것이다.

 

너무 피곤해서 머리만 베개에 닿으면 잔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역으로 물어보라. 그렇게 피곤할 정도로 밤새 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무리 억울해도 주말이 되면 잠도 안자고 실컷 놀고 먹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 질문해보라. (1) 내가 홀로 있을 때 곧바로 내 생각을 사로잡는 나의 주된 이슈는 무엇인가? (2) 다른 것에 몰두하면서까지 생각을 지워버리고 싶은 염려는 무엇인가? 매출? 자녀? 건강? 결혼? 진로? 그 영역을 주님이 붙들고 계시다는 확신속에 열심을 내는가? 아니면 내 열심과 걱정으로 확신을 대체하고 있는가?

 

아무리 그래도 베드로는 정신 나간 것 같다. 그런데 베드로가 잠을 자는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넜을 때 광풍이 불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마가복음 4:38) 베드로는 왜 잘 수 있었는가? 이제 이해가 된다. 베드로는 광풍 앞에서 ‘졸던 그분’을 보았다. 베드로에게 광풍은 죽음이었다. 예수님께는 잠자도 될 문제였던 것이다.

 

그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셨다. 죽음도 ‘자는 것’으로 바꾸어주셨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린도전서 15:20) 믿는가? 그분만 계시면, 어떤 큰 잎 앞에서도 난 염려 내려놓고 잘 수 있다. 잠이 안오는가? 풍랑 앞에 졸던 그분을 다시 바라보라. 주무시던 예수님이, 나보고 그만 염려하고 같이 잠이나 자자고 하신다. 이게 복음이다.

 

[1] 너무나 큰 염려와 두려움으로 잠이 오질 않았던 나와 주변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사도행전 12장 6절을 읽어봅시다. 사형 전날 베드로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수시로 떠오르는 내 인생을 사로잡는 문제는 요즘 무엇입니까?

 

[4-5] 마가복음 4장 38절을 읽어봅시다. 베드로는 감옥을 경험하기 전 예수님과 무엇을 경험하였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 2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들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내 인생이 예수님 안에서 죽음도 이미 이겼음을 묵상하며, 주님께 맡기고 평안과 잠을 되찾기를 원하는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사람의 단련
(9. 10. 2023.)

잠언 27:21

 

단련된 것은 다르다. 첫째 아이를 갓 낳고 힘들어하는 부부가 셋째를 다 키운 부모에게 물었다. “어떻게 셋째까지 키우셨어요?” 단련된 아이 셋 엄마가 답한다. “걱정하지 마. 셋째는 발로 키워.” 분명 단련에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인격을 단련하시는 분이다.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잠언 27:21) 칭찬받았더니 마음이 높아진다. 다 자기 아래 있는 줄 안다. 칭찬받아봐야 자기 마음의 연약함을 안다. 그러면서 다시 낮아진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환경은 나의 인격의 단련을 위한 도구일 때가 많다.

 

사람은 사람과 부딪치며 단련되어야 한다. 혼자 조용히 사는 사람이 자기 성격 제일 좋은 줄 안다. 착각이다. 직장에 들어가고, 말도 안되는 위아래 사람 만나고, 결혼하고 자녀를 키우며 온갖 사람을 만나봐야 한다. 날카로운 말도 들어보고, 사람들이 날 싫어하는 눈치도 좀 느껴봐야 한다. 말하고 싶을 때 참는 것도 배우고, 갈등을 잠재우는 법도 배워야 한다. 진상 고객도 만나야 한다. 그래야 단련된다. 오늘 너무 편하게 살려고 하지 말고 부딪치러 나오라. 처음엔 피곤한데, 어느새 단련된 나를 만나게 된다.

 

예수님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마지막 그분의 인격으로 이루어졌다.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마가복음 15:30) 예수님의 인격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구원이 달라지는 문제였다. 그분은 침묵하고 십자가에 머물기로 하신다. 그분의 완벽한 인격이, 나의 삶을 죄에서 구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격 단련에는 분명한 보장이 있다. 예수님의 완벽한 인격이 나의 구원을 위해 사용되었으므로, 분명 하나님이 단련하신 나의 인격은 나의 구원을 위해서 사용될 것이라는 보장이다. 오늘 사람과 부딪치는 일을 주저하지 말라. 더럽고 미련한 내 성격을 인정하고 마주하라. 팀모임으로 단련된 성품을 기대한다.

 

[1] 단련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품과 실력이 깎이고 다듬어지며, 다른 결과를 내었던 나와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본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예 – 회사 수십년 경력의 상사, 나이 많은 존경받는 어른, 다자녀 부모, 오랫동안 팀을 맡아온 교회 리더 등)

 

[2-3] 잠언 27장 21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무엇을 연단하시는 분입니까? 나의 특정한 시기, 특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나의 인격을 연단하신다는 것을 느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가복음 15장 3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의 마지막 구원 사역을 승리로 이끌었던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단련하시는 나의 인격은 무엇을 위해서 사용됨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오늘 부딪침을 주저하지 말고 내가 어떤 자세로 인격을 다듬어 가야 할지 삶의 다짐들을 나누어 봅시다.

“여전한 순종의 이유
(9. 3. 2023.)

마태복음 7:24-25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내 죄를 다 용서하셨다. 용서하셨는데 여전히 순종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너무’ 신뢰하다 보니 요즘은 내 모습이 점점 나태해지고 안일해지는 듯하다.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지 않는다. 약속 때문에 순종한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가 무조건 잘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태복음 7:24-25) 순종하는 자는 반석위에 집을 지은 자와 같다. 행복과 기쁨을 보장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죄인인 나에게 이 약속을 주셨다.

 

욕심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순종하라. 벌 받을까봐 억지로 하는 순종이 아니다. 형벌은 모두 예수님이 가져가셨다. 이제 내가 하는 순종은, 하나님이 나의 태도와 모든 행위를 감찰하시며, 그 행위를 기뻐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확신 속에 하는 것이다. 예수님 믿고 대충 산다는 말은 사실 여전히 “벌만 피하면 돼”라는 두려움에 기반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에베소서 5:1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욕심이 났던 적이 있는가? (1) 예배와 경건생활의 태도는 어떤가? (2)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하려 했던 적이 있는가? (3) 원치 않으시는 행동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주님을 믿는다면, 더 열정적으로 순종할 거리들을 찾아야 한다.

 

다 순종하셨는데, 완전히 망한 것처럼 보였던 분이 예수님이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브리서 5:8)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라”는 명령에 순종하셨다. 죽는 줄 알았는데, 다시 살았다. 나 대신 죽으라는 명령에 순종하신 그 분 때문에 내가 영생을 얻게 됨을 믿는가? 그 분 안에서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나를 살리려고 하신 분이, 내게 결코 손해가 되는 순종의 요구를 하실 리가 없음을!

 

순종은 정말로 가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수익률이 높은 것이다. 결혼할 배우자 찾는 것처럼, 집 값 오를 곳 찾는 것처럼, 급등할 주식 찾는 것처럼 순종할 거리를 찾으라. 그 순종 놓치면, 나중에 행복을 놓쳤음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신자는 여전히 순종한다.

 

[1] 예수님의 구원을 ‘너무’ 잘 믿다 보니, 오히려 나태해지고 대충 살게 되는 내 삶의 모습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7장 24-2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순종에 대해서 어떤 약속을 주십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을 때 순종의 이유는 어떻게 달라집니까? 순종으로 주어지는 약속을 충분히 가치 있게 여기지 못하는 내 모습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예수님은 어디까지 순종하셨습니까? 그 순종은 내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었습니까? 내게 순종하라 명하신 것이 복임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까? 오늘 새롭게 내가 순종에 도전해야 할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혼돈의 공존
(8. 27. 2023.)

마태복음 27:23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히 보이는 영역이 있다. 하지만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혼란이 계속 되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 헷갈린다. 하나님은 내 삶에 확실히 함께하시는 것이 맞는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혼돈이 공존한다. 내가 볼 때 헷갈려도, 하나님은 질서 가운데 일하고 계시다. 예수님이 구원이라는 큰 일을 하고 계셨다. 그런데 구원의 과정에는 혼돈이 공존했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마태복음 27:23) 분위기를 느껴야 한다. 이게 무슨 난장판인가? 사람들은 붐비고, 소리 지르고, 서로 싸우고, 사람들이 모여 모래 먼지는 풀풀 났을 것이다. 성경은 이것이 구원임을 묘사하고 있다. 구원은 혼돈이 공존한다.

 

오늘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가? 평안해도 된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언제나 혼돈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적용해보라. 마음먹고 교회를 오는데 교통사고가 나기도 한다. 은혜롭게 퇴근했는데 집안에서 대판 싸우기도 한다. 오늘 기도 열심히 했는데 하필 그날 자녀가 반항을 한다. 너무 바쁜 시기인데 갑자기 집안에 누가 아프다고 한다. 도대체 이게 뭐냐고? 바로 그게 구원이다. 놀리는 말이 아니다. 더 담대해야 한다. 더 정신차려야 한다. 혼돈을 뚫고 가야 한다. 하나님은 혼돈 속에 일하신다.

 

우리 삶의 혼돈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결코 가로막을 수 없음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 삶이 맞이할 가장 궁극적인 혼돈을 보면 된다. 그것이 죽음이다. 죽음은 인생이 영원히 생명을 떠나 혼돈에 빠지는 일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내가 경험해야 할 가장 큰 혼돈 속으로 들어가셨다. 죽음 속에 영생이, 지옥을 이기는 부활이 주어졌다. 믿는가? 그 믿음만 있다면 오늘 내 삶의 혼돈도 다시 해석된다. 이 혼돈은 내 삶에 저주도 아니고, 내 삶이 잘못 풀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의 혼돈 속에 나를 구원하신 그분이, 이 혼란스러운 삶 속에서도 마침내 주의 뜻을 이루시리라.

 

믿음 가지고 난장판을 걷는 법을 배우라. 혼돈 속에 계속 걷는 법을 배우라. 난리가 나도 괜찮다. 별의 별 일이 다 생겨도 믿음 지키리라. 구원은 혼돈 속에 옴을 믿기 때문이다.

 

[1]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한 부분과, 헷갈리고 혼란스러운 부분이 나뉠 때가 있습니다. 요즘 혼란스러운 삶의 영역은 무엇입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27장 23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구원 사역을 행하시는 과정에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분위기는 어땠을까요? 혼란스럽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이유만으로 믿음이 약해지고 있는 삶의 모습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내 삶에 궁극적인 혼돈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내 삶의 죽음 속에 들어가셔서 그 혼돈을 무엇으로 바꾸셨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혼란스러운 삶에 눌리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다시 붙들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봅시다.

“사랑과 변화의 분리
(8. 20. 2023.)

마태복음 5:46-47

 

왜 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다시 사랑할 것인가?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 사랑할 것이다. 여기서 사랑의 전제는 무엇인가? 그 사람의 변화이다. “변화되면 사랑할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과 변화가 분리되어 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태복음 5:46-47) 신자에겐 변화의 권한이 없다.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도 없다. 그걸 인정해야 편하다. 안되는 걸 하려고 하지 말라. 우리는 사랑은 불가능하고, 변화는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반대다. 내가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랑은 가능하다.

 

사랑하는 일과 변화시키는 일을 분리하라. 하나님만 사람을 변화시키실 수 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내가 해보려고 하니 인생에 너무 버겁고 열 받는 것이다. 변화시키려는 마음과 의도 자체를 목표에서 지워버리라. 목표는 사랑 뿐이다. 잘 해주고, 즐기고, 친해지면 모든 것을 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주님께 맡기라. 주님의 때에, 주님이 변화시키신다. 남편 아내, 부모, 자녀, 친구, 상사… 변화를 앞세우는 모든 곳에 분열과 미움이 있다. 사랑을 앞세우면 변화와 하나됨이 따라온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무엇을 하셨는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랑하는 것부터 하셨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한복음 13:1) 사랑하며 죽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 사건을 우리가 믿게 만드셔서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도록 변화시키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철저히 사랑에만 집중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화까지 이끄셨다.

 

내가 변화시키려는 고집을 내려놓으라. 훈계, 조언, 지적질로 잘 안 변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친해지고 사랑해보라. 변화의 영역을 주님께 내어드릴 때, 주님이 그 일을 완벽히 행하실 것이다.

 

[1] 그 사람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기까지도 중단되어 버렸던 모습이 있습니까? 나누어봅시다.

 

[2-3] 마태복음 5장 46-47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무엇을 명하고 계십니까? 신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남을 변화시켜 보려다가 고생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13장 1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참 인간으로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의 순종을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이루실 참된 변화를 기대하며, 내가 나의 관계 속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환대와 경계
(8. 13. 2023.)

누가복음 15:20

 

학교 교실에서 한 학생 가방에 있던 지갑이 없어졌다. 그 범인 하나 때문에 모두가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사회도 똑같이 움직인다. 한가지 나쁜 일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분위기를 바꾼다. 두려운 범죄들이 사회에 많이 일어날수록, 사람들은 서로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나를 환대(hospitality)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적인 삶의 표지는 환대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 재산을 탕진한 아들이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여전히 환대한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누가복음 15:20) 구원의 시작은 환대였다.

 

환대란 접대와 비슷한 말이다. 나의 수고로 상대를 초대하고, 대접하며, 기쁘게 맞이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 사람으로서 살아보고 싶거든, 환대를 실천하라. 최근 누군가를 나의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는가? 별로 상관없는 사람에게 내가 밥과 차를 사겠다고 손을 내민 적이 있는가? 서로 경계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에게 먼저 나아가 대화를 시도하며 관계를 맺은 적이 있는가? 이상하다. 환대한 곳에서는 밥만 먹고 끝나는 게 아니다. 온갖 진실과 참회, 위로와 우정, 사랑과 나눔이 싹튼다. 환대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길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우리는 그를 환대하지 않았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요한복음 4:44) 환대하지 못한 자들 손에 죽으셨으나, 그 죽으심을 통해 내가 죽을 때 천국에서 환대 받게 하셨다. 그분은 ‘죽는’ 수고를 통해 나를 끝까지 환대하셨던 분인 것이다. 내가 주님의 환대를 이미 경험한 자임을 믿는가? 경계의 시대 분위기를 뛰어넘어 사람들을 환대하라.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다.

 

팀마다 서로 먼저 과일을 싸오고, 먹을 것도 싸오고, 커피도 싸온다는 말을 듣는다. 내가 뭐라고 그 사람이 내 먹을 것을 챙기나? 경계심은 그만 내려놓고, 일단 먹으라. 환대의 즐거움을 누리라. 그리고 나도 환대하라. 경계심은 마귀의 것이다. 환대가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다.

 

[1] 경계심이 높아진 요즘 사회에서 관계를 맺는 방식이 달라졌던 것을 경험했던 적이 있습니까? 환대와 경계의 분위기가 달랐음을 경험했던 나라, 조직, 공동체 등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누가복음 15장 20절을 읽어봅시다.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기독교인들이 이웃을 대하는 삶의 기본 방식은 무엇입니까? 내가 가장 큰 환대를 경험하거나 시도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4장 4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떤 대접을 받으셨습니까?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환대하셨습니까? 내가 환대 받은 존재임을 기억하며, 내가 관계 맺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환대를 실천할 수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그것에 대한 말씀
(8. 6. 2023.)

예레미야 14:1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나? 벌어진 사건에서 메시지가 발견될 때 만난다. 일본선교를 준비하는데 일본어를 잘 하는 사람 한 명이 교회에 왔다. 갑자기 선교까지 가게 되었다. 그 사람 없으면 큰일 날 뻔했다. 통역을 너무 잘했다. 그 때, 한 사람이 교회에 오는 현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이해가 되었다. 현상 자체에는 힘이 없다. 그 사건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계획과 메시지를 찾을 때 기쁨이 있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그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분이다. 남유다에 가뭄이 든다. 가뭄은 현상일 뿐이다. 현상만 보면 의미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뭄에 대한’ 말씀을 주신다.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가뭄을 보면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 그 가뭄에 대해서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말이다. 오늘 내 인생에 그 일이 벌어졌는가? 그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인생의 모든 일을 “이런 일도 다 생기네”라고 넘기지 말라.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 왜 자녀가 이렇게 방황하는가? 왜 내게 이런 사고를 당하게 하셨나? 왜 이 일이 잘 안되게 하실까? 왜 그 사람이 나를 떠나게 하셨나? 순간순간 하나님께 ‘그것에 대한 말씀’을 달라고 간구해보라. 그냥 넘기고, 해결하고, 잊어버리고 끝내려 했던 인생의 여러 일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숨겨져 있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에 대한 말씀을 구했다. 십자가였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가복음 15:34) 예수님은 죄인인 나 대신 하나님께 ‘그것에 대해’ 말씀을 듣지 못하는 심판을 대신 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를 확신할 수 있다. (1) 아무리 내가 연약해도 예수님 안에서 간구하면 언제든 하나님은 내게 그것에 대한 말씀을 주실 것이다. (2) 아무리 기도해도 그것에 대한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더 큰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그것에 대한 말씀’을 구하라. ‘하나님 이 일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으세요?’라고 물어보라. 하나님은 친히 응답하시고 그 뜻을 보여주실 것이다.

 

[1] 벌어진 일들 속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겨 있었음을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봅시다.

 

[2-3] 예레미야 14장 1절을 읽어봅시다. 여호와의 말씀은 ‘무엇에 대해’ 임하였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인생에 벌어지는 중요한 일들에 대해 요즘 너무 ‘그냥 넘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4-5] 마가복음 15장 3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당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오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새롭게 내 인생에 ‘그것에 대한 말씀’을 구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봅시다.

“잠의 순종”
(7. 30. 2023.)

시편 127:2

 

전혀 보이지 않지만, 내가 완전히 이기적인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는 영역이 있다. 그것이 잠이다. 내 수면은 요즘 어떤가? 내가 원할 때 자고, 내가 깨고 싶을 때 깬다. 잠의 인도하심을 받아본 적이 과연 있는가? 잠은 온전히 내 마음대로 했다.

 

하나님은 내 잠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내 수면 패턴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순종해야 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 127:2) 잠은 하나님이 주신다. 언제, 얼마나 자는지를 통제하는 것은 중요한 순종의 행위 중에 하나이다. 잠이 파괴되면, 삶의 전 영역이 순종에서 멀어진다.

 

이 때 자고, 이 때 깨는 것이 가장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방법인지 생각해보라. 기분 내키는 대로 늦게 자려다가 하루 종일 피곤하지 않은가? 너무 잠을 안 자고 열심을 내다가 하나님과 역으로 멀어지지는 않는가? 감리교 목사 조지 휫필드는 일기에서 늘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점검할 때 수면과 음식을 평가했다. “먹고 마시는 것에 침착했는가?, 감사했는가? 잠 자는 것에 있어서 훈련되어 있었는가?” 수면 훈련은 순종 훈련이다. 수면 훈련은 경건 생활이다. 당신이 왜 아직도 삶 전체에 주님과 동행이 힘든지 아는가? 잠을 여전히 내가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방법은 무엇인가? 잠에 순종하면서 구원하셨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누가복음 22:44-45) 제자들은 잠을 통제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원하시는 뜻에 따라 자신의 수면습관을 맞추셨다. 그분의 수면 습관의 순종이 내게 구원을 주었다. 믿는가? 나도 그 은혜를 입어 그렇게 살아야 한다. 늦잠, 지각, 피곤, 함부로 밤샘은 귀여움과 안쓰러움이 아니다. 아직 순종의 첫 발도 떼지 못한 것이다.

 

잠의 주인에게 순종하라. 잠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야 가장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가? 얼마나 자야 가장 하나님의 일을 충만히 할 수 있는가? 잠을 통해 영광 돌리라. 그것이 성도의 삶이다.

 

[1] 요즘 나의 수면 패턴은 어떻습니까? 열심과 방종의 양극단을 달리며 내 수면 습관이 상황과 감정에 따라 변화되었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2-3] 시편 127편 2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엇을 주시는 분이십니까? 잠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조지 휫필드의 점검을 참고한다면, 나의 잠의 패턴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방해합니까?(예 – 과도한 열심으로 주님을 신뢰하지 못함 / 과도한 방종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하지 못함 / 과도한 수면 패턴 변화로 삶의 일관성이 없음 등)

 

[4-5] 누가복음 22장 44-4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직전에 어디까지 순종하셨습니까? 나도 그분의 구원을 힘입어 수면 습관을 어떻게 바꾸어 주님 앞에 순종할 수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