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으로 말하는 죄
(2. 18. 2024.)

누가복음 3:8

 

사람은 연륜이 생길수록 사람들의 속마음이 읽힌다. ‘저 알바생은 분명 대충 하고 돈이나 많이 벌고 싶어 하겠지?’, ‘이 일을 시켜서 속으로 엄청 욕하고 있겠지?’ 속마음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사람의 스트레스 해소 창구가 된다.

 

하나님은 속마음을 알고 판단하시는 분이다. 세례 요한의 첫 사역은,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춰내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누가복음 3:8) 유대인들은 속으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우월하다는 자기 의에 빠져 있었다. 속마음이 바뀌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다.

 

속으로 말하는 죄를 살피라. 겉으로 참고 웃는 것은 매너 있는 지성인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속을 정결케 하는 것은 신자가 해야 할 일이다. 웃어주지만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다. 겸손한 척하지만 속으로 자랑하며 우월감에 만족하는 것은 마귀가 준 것이다. 내 속으로 말하는 죄를 인지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신자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된다.

 

어떻게 내 속마음이 바뀌는가? 속마음으로부터 나를 사랑하신 분을 만나면 바뀐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복음 18:35)” 나는 결코 마음으로부터 그 사람이 용서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마음으로부터 나를 미워하지 않으심을 보여주셨다. 당신은 십자가를 볼 때마다 확신해야 한다. 보잘 것 없고, 잘한 것 없는 내 인생을, 주님은 미워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깨끗한 마음이 보이는가? 마음으로부터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는가? 속이 깨끗하신 그 분 만날 때 비로소 내 인생도 변화의 갈망이 생긴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진다. 마음으로부터 깨끗하고 싶다는 갈망이 생긴다. 내가 만나는 상대에게 매너만 선물하지 말고, 깨끗한 속마음도 선물하라. 그것이 이 시대가 찾는 깨끗함이다.

 

[1] 살아갈수록 상대의 속이 훤히 보이고, 내 속을 감추며 겉을 포장하는 지혜도 늘어만 갑니다. 상대의 더러운 속이 뻔히 보였거나, 내 안에 더러움과 악을 감추며 겉을 포장했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누가복음 3장 8절을 읽어봅시다.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하며 처음 지적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기준을 핑계로 내 속마음을 정당화하는 부분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18장 3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 속마음은 언제 변할 수 있습니까? 그분의 진실된 마음을 경험하거나 느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나도 이 땅에서 속이 깨끗한 자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선악을 뛰어넘는 인도하심
(2. 11. 2024.)

창세기 31:24

 

세상의 세계관은 단편적이다. 앞으로 가면 좋다. 뒤로 가면 나쁘다. 위로 가면 좋다. 떨어지면 나쁘다. 선악도 마찬가지다. 선한 것은 좋은 것이다. 악한 것은 나쁜 것이다. 그래서 내 삶에 생기는 모든 부정적인 일들은 내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하나님의 세계관은 입체적이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도망쳤다. 라반 입장에선 나쁜 일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반이 야곱을 바라봐야 할 새로운 관점을 주신다.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창세기 31:24) 순간적인 선악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야곱과 라반 사이의 관계를 직접 다루고 계시다는 확신을 주신 것이다.

 

선악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라. 그 상사가 잘못한 것 맞다. 그 자녀가 잘못 나가고 있는 것 맞다. 선악을 기준으로 보면 다 나빠 보인다. 그러나 야곱과 라반의 인생은 선악을 뛰어넘어 하나님 앞에 붙들려 있었다. 오늘도 내가 다 통제할 수 없는 모든 선악의 상황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내 삶에 펼쳐진 갈등과 방황, 온갖 부정적인 일들 속에서 하나님이 입체적으로 행하실 일들이 분명 있다. 선악 간에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할 수 있는 그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만 선하시면 된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주신 악한 일을 선악 간에 판단하지 않으신 분이 계시다. 예수님이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태복음 27:46) 선악의 관점으로는 억울한 죽음일 뿐이다. 그러나 묵묵히 십자가를 지신 그분의 삶에 선악을 뛰어넘는 인도하심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죄인이었던 나의 구원이다. 그 구원을 보장받은 존재임을 믿는가? 나머지 삶도 선악을 넘어선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명절이다. 가족과 친지들의 온갖 군상이 다 보여 답답한 때이기도 하다. 선악 간에 함부로 말하면서 우리 가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하지 말라. 당신도 악인이었는데 구원받았음을 언제나 기억하라. 입체적인 세계로 들어오라. 분명히 내 삶의 모든 여정에 선악을 뛰어넘어 유익을 주실 것이다.

 

[1] 세상의 시각은 단편적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삶을 바라보는 단순한 시각에 허무함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내가 자꾸 내 삶을 단편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삶의 영역은 어디입니까?

 

[2-3] 창세기 31장 24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라반에게 야곱에 대해 어떤 새로운 관점을 주셨습니까? 단순히 나쁘게만 볼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체적인 일하심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27장 46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단편적으로, 그리고 입체적으로 해석해봅시다. 그의 죽음은 나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습니까? 그 구원을 믿으며, 오늘의 나의 삶과, 가족 친지들, 그리고 주변의 일들을 어떻게 새롭게 바라보아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성경을 보는 단 하나의 관점
(2. 4. 2024.)

요한복음 5:39

 

성경을 읽을 때마다 헷갈린다. 여기서는 축복, 저기서는 저주다. 여기서는 번영, 저기서는 멸망이다. 말씀을 통해 위로 받으며 확신을 얻다가도, 이 말씀을 도대체 어떻게 내 삶의 빛으로 삼아야 할지 헷갈린다.

 

성경은 오직 예수님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읽을 때에만 이해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한복음 5:39) 예수님이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의 모든 구절을 예수님과 연결시켜 읽을 때에 내 삶에 유익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두 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1) 저주를 읽어도 소망이다. 나는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였으나, 예수님이 내 모든 저주를 받으셨다. 저주를 읽을수록 나의 무력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 심각한 저주를 나 대신 감당하신 예수님이 계시니, 나는 오늘 하루 벌어진 이 모든 상황이 내게 저주가 되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을 ‘당하신 순종’이라고 한다. (2) 약속을 읽어도 의심하지 않는다. 약속만 읽으면, 그 약속이 실행되기 위해서 내가 충분히 잘 살고 있는지 늘 불안하다. 그러나 나는 충분치 않아도, 이 모든 여정 속에 약속하신 복이 내 삶에 모두 펼쳐질 것을 믿는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 모든 율법에 순종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행하신 순종’이라고 한다.

 

내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가져가지고, 그 분이 누리셔야 할 모든 복을 내게 주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한복음 19:30) 다 이루셨음을 믿어야, 오늘 내 삶에 펼쳐진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다. 고난도 저주가 아니요, 잘됨도 내 공로 아니다. 오직 그분이 내 삶에 다 이루실 계획만 신뢰하며 담대할 수 있다.

 

예수님 빼고 성경을 읽다가, 좋은 곳만 발췌하고 나쁜 곳은 덮어두지 말라. 다 읽어도 된다. 예수님 때문에 모두 은혜로 읽을 수 있다. 이것이 성경을 보는 단 하나의 관점이다.

 

[1] 성경을 집중해서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 축복과 저주가 교차되어 헷갈리거나, 내가 원하는 구절만을 찾아 붙들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요한복음 5장 39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하고 계십니까? 행하신 순종과 당하신 순종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삶의 해석을 어떻게 변화시킵니까?

 

[4-5] 요한복음 19장 3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그 시선 속에서 성경을 읽으며 새롭게 깨달았던 점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내 삶의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도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개선의 저주
(1. 28. 2024.)

마태복음 12:43-45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열악했던 삶이 개선될 때이다. 위기가 왔으나 건지시고, 병들었으나 고치시고, 백수였으나 돈 벌게 하신 개선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왔다. 잘 되게만 해주신다면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

 

하나님 없는 삶의 개선은 저주이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태복음 13:43,45) 예수님은 내 삶을 망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 주셨다. 그러나 그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오히려 삶은 더 강한 악의 세력에 사로잡힌다.

 

개선되는 내 삶과 하나님은 비례하고 있는지 점검하라. 개선의 저주란 하나님을 찾게 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더 많이 생긴 만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시간을 쏟고 있는가? 삶이 더 견고해진 것에 비례하여, 기도시간도 충분히 늘어나고 있는가? 살려주신 만큼, 하나님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고 있는가? 개선에 취하면, 더 이상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반대로 표현도 가능하다. 하나님이 개선되지 않고 머무르게 하신 자리는, 더 하나님을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나를 훈련시키시는 과정이다.

 

죄인이 받아야 할 심판은 무엇인가? ‘개선되지 않는 저주’이다. 그것이 죽음이다. 죽으면 끝이다. 죽음은 좋아질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죽음을 영생으로 개선하셨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한복음 6:40) 이제 내 삶은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개선이 보장되어 있음을 믿는가? 오늘의 삶도 확신해야 한다. 내 삶에 모든 ‘좋아지는 것’은 하나님께만 있다. 더 좋아지려면, 주님만 사랑해야 한다.

 

현재의 개선에 안주하는 미련함을 버리라. 죽음도 개선하신 분이, 내 삶을 더 좋게 개선하실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두려운 경고로만 받지 말고, 초대와 사랑으로 받아들여 보라. 더 좋아지고 싶지 않은가? 끝까지 하나님께만 매달리라. 그것이 개선의 저주를 피하는 길이다.

 

[1] 지나보면 하나님이 예전보다 형편을 훨씬 개선시켜 주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확실히 개선되었던 내 삶의 변화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13장 43절과 45절을 읽어봅시다. 귀신이 쫓겨나간 사람 안에는 무엇이 없었습니까? 그러자 무엇이 들어왔습니까? 내 삶이 현재 개선의 저주에 빠져 있는 상황은 없는지 살펴봅시다.

 

[4-5] 요한복음 6장 4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나 대신 죽음을 통해 받으신 저주는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님 믿을 때 영원히 보장되는 약속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개선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을 기대하기 위해 변화되어야 할 내 삶의 생각과 태도를 나누어 봅시다.

 

“마르지 않는 샘
(1. 21. 2024.)

이사야 58:11

 

세상의 먹거리에는 끝이 있다. 삼성전자 스마트폰 사업부 친구가 엄청난 성과급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갤럭시가 뜰 때였다. 지금은 추억이다. 어렸을 때 피씨방 사장님들은 벤츠를 타고 다녔다. 지금은 물이 다 빠졌다. 이디야 커피를 운영했던 사장님께 요즘은 메가커피가 대세이지 않냐고 물었더니, 메가커피도 끝났다고 한다. 이제는 컴포즈라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주시는 분이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이사야 58:11) 세상의 유행을 따라가면 성장과 쇠퇴에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 의지하면, 유행과 상관없이 그분이 언제나 내 인생을 먹이고 입히신다.

 

하나님이 내 삶에 끊어지지 않는 샘물이심을 확신하라. (1) 유행도 지나고, 쇠퇴하는 영역에서 변화를 준비해야 할 때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이 물을 대어 주시기에, 새로운 공급처를 주시고, 시기에 맞는 새로운 인생을 열어 나를 먹이실 것이다. (2) 물 들어온 곳에서 일하고 있다면 주의하라. 물을 대어주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겸손하게 유행을 따르지 않고 주님 끝까지 따라가야 한다. (3) 물 빠진 영역에서 계속 일해야 한다면 위축되지 말라. 감당할 새로운 능력을 대어 주셔서, 같은 상황이지만 다른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여전히 공급해 주실 것이다.

 

물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과 끊어지는 것을 나 대신 경험하신 분이 있다. 예수님이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한복음 19:28) 마르지 않는 샘 되신 하나님과 끊어져야 할 심판을 나 대신 예수님이 당하셨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은 영원히 내 삶에 생명의 물을 공급하실 것도 함께 믿어야 한다.

 

평생에 나를 이끄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물 들어오고 물 빠지는 시대 가운데 위축되거나 교만해지지 말라. 내 인생에 마르지 않는 샘은 오직 한 분, 하나님 뿐이시다.

 

[1] 돈도 잘 벌리고 잘 되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니 물이 빠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내가 경험했던 시대의 변화가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이사야 58장 11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가 처한 상황을 살펴보고 지금 나의 믿음을 점검해 봅시다.

 

[4-5] 요한복음 19장 28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나 대신 경험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내 인생에 영원히 주어진 약속은 무엇입니까? 마르지 않는 샘 되신 하나님을 믿으며, 내 삶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좋은 것과 충돌하는 경험
(1. 14. 2024.)

마태복음 10:37

 

나쁜 일만 피하면서 살면 인생 잘 살 줄 알았다. 살아 보면 깨닫는다. 삶에서는 좋은 것끼리 충돌한다는 것을! 일도 하고 싶지만, 아이도 돌보고 싶다. 결혼도 하고 싶지만, 혼자 살고 싶을 때도 있다. 돈도 벌고 싶지만, 놀러만 다니고 싶기도 하다. 하나를 하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좋은 것을 포기하는 경험을 해야 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태복음 10:37) 좋은 걸 다 그만두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좋은 것을 예수님보다 앞세워서는 결코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좋은 것은 언제나 하나님 아래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가로막는 나의 좋은 것과 직면하라. 자녀가 너무 귀하지만, 그 자녀는 하나님 아래에서 움직여야 한다. 연애와 결혼이 너무 좋지만, 하나님을 무시하고 진행하면 그것이 우상이다. 돈이 너무 귀해서 하나님 앞에 헌금도 못하고 커리어를 좇는다면, 그 돈이 하나님을 막는 원수이다. 내 스케쥴과 일상이 너무 귀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수 없다면, 그 일상 전부가 하나님과 충돌하는 것이다.

 

왜 좋은 것을 막으시는가? 하나님이 좋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야고보서 1:17) 하나님을 놓치지 않도록, 예수님은 나 대신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심판을 당하셨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가복음 15:34)

 

예수님은 내게 가장 좋은 하나님을 주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가? 하나 더 믿어야 한다. 예수님 뜻대로 삶의 모든 것을 정렬하면, 나는 결코 좋은 것을 놓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 사실 믿고 새해에는 좋은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는 경험을 해보라. 시간을 내려놓으라. 돈을 내려놓으라. 자녀를 내려놓으라. 나쁜 것과 싸우지 말고 좋은 것과 싸워보라. 새해의 내가 해야 할 가장 큰 싸움이다.

 

[1] 삶의 좋은 것들이 서로 충돌합니다. 좋은 것끼리 비교하며 인생의 미래를 고민하는 내 모습이 있다면(있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10장 37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나열된 것들은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좋은 것을 하나님보다 앞세워 후회하거나 삶의 질서가 파괴 되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야고보서 1장 17절을 읽어봅시다. 좋은 것은 어디로부터 옵니까? 마가복음 15장 3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무엇을 잃는 심판을 대신 당하셨습니까? 예수님이 가장 좋은 것 주시는 분임을 믿고, 올 한해 치열하게 싸워 하나님 앞에 복종시켜야 할 나의 좋은 것이 무엇일지 나누어 봅시다.

 

“판단의 말 사용하기
(1. 7. 2024.)

요한복음 1:47

 

남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내 인생 사는 시대이다. “네가 뭘 안다고 나보고 훈수를 둬?”, “남 일에 신경 끄시고 본인 일이나 보세요.” 욕 먹을까 두렵다. 그러다 보니 남을 판단하는 이야기가 점점 조심스럽다. 속으로만 생각한다. 내 인생이나 잘 해야지!

 

예수님은 판단의 말을 지혜롭게 사용하신 분이다. 나다나엘을 처음 만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한복음 1:47) 야곱은 속이는 사람이었다. 하나님 만나고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다. 너도 그런 사람이라는 판단을 긍정적으로 표현해주신 것이다. 그 사람의 삶에 있는 긍정적인 것을 꺼내어 일부러 표현하셨다.

 

그 사람을 향한 긍정적인 판단을 일부러 표현하라. 상대를 정죄하는 판단은 경계해야 하지만(롬 2:1) 그렇다고 상대를 긍정적으로 판단해주는 격려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잘 했을 때, 그냥 넘어가지 말고 꼭 잘 한 것 같다고 표현해주라. 장점과 매력이 보일 때, 넌 그게 참 장점인 것 같다고 꼭 짚고 넘어가라. 고마운 일을 해줬을 때, 수고했을 때, 그것 때문에 고마웠다고, 참 수고했다고 분명하게 전달하라. 긍정적인 판단의 말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괜히 좋은 말 하는 것은 말장난 아닌가?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상대에 대한 긍정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그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린도후서 1:20)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No(아니오)’ 당하셨기에, 우리의 삶의 소망은 언제나 예수님 안에서 ‘예(Yes)’가 된다.

 

내 주변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말라. 이번 대화에는 어떤 긍정적인 판단을 집어넣을 수 있을지 늘 고민하라. 갑자기 상대가 눈이 커지고 몸을 가까이하며 당신의 말을 듣고 싶어 할 것이다. 나를 좋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현대인들은 다들 그렇게 좋은 판단에 목말라 있다. 예수님이 나를 주의 자녀라 판단해 주셨으니, 나도 예수님 따라 이 땅에서 그렇게 살면 된다. 당신 주변에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할 것이다.

 

[1] 남에게 판단의 한 마디 해주고 싶은데 참았던 경험이나, 판단의 한 마디 들어서 기분이 좋고/나빴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2-3] 요한복음 1장 47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처음 만났을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것은 어떤 의미였습니까? 내가 상대를 긍정적으로 판단해주는 사명을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4-5] 고린도후서 1장 20절을 읽어봅시다. 왜 우리는 상대방의 삶에 대해 긍정해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지나쳤던 사람들을 향해 어떤 판단의 말을 해줄 수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오늘 모임에서 한 사람을 정해, 내가 긍정적인 판단의 말(칭찬, 감사, 강점 말해주기 등)을 해봅시다.

“날을 계수하는 지혜
(12. 31. 2023.)

시편 90:12

 

한 해가 저물어간다. 사람은 시기마다 나의 이 시절이 계속 지속될 것이라고 착각한다. 만년 학생이었다. 이제 아무도 나보고 학생이라고 안 한다. 아직 젊다는 말 많이 들었다. 어느새 주위엔 후배들 뿐이다. 언제 애들 다 키우나 싶었는데, 이제 손자가 날 보러 온다고 한다. 흐르는 시간은 나를 당황케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한된 날수만을 허락하신 분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편 90:12)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세면서 살라는 말이다. 날을 계수할 줄 아는 것은 분명 지혜다. 시간에 대한 감각 없이 사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미련함이다. 이제 몇 살인가? 몇 년 차인가? 몇 년 남았는가? 내 모든 행동에는 시계를 달아야 한다.

 

시간에 대한 두 방향의 죄악을 모두 벗어나라. (1) 후회의 죄: 지금 시기에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는데, 지난 세월만을 아까워 하는 것이다. 그 때 결혼 했어야 하는데, 그 때 공부 했어야 하는데… 그 말 하다가 오늘의 집중을 놓친다. (2) 여유의 죄: 지금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여유 부려도 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집중해서 그 일을 끝내라고 그 시간 주신 것이다. 아직 괜찮다고 말하지 말고 해야 할 일은 미리미리 서두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날을 계수하며 순종하신 분이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날을 계수 하신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한복음 2:4)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날을 계수하며 진행하신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마가복음 14:41) 시간을 계수하는 지혜로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예수님의 구원을 믿는다면, 나도 시간을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주신 시간마다 그 이유와 해야 할 일이 있다. 주신 세월에 맞게 행할 때, 내 인생은 분명 주님 주신 열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이유 없이 여유부리지 말고, 쓸데없이 조급해지지도 말라. 날을 계수하는 지혜를 구하라. 분명 내년에 많은 열매를 거둘 것이다.

 

[1] 세월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을 느끼며 당황하곤 합니다. 언제 그것을 가장 크게 느낍니까? 시간이 지나며 급격히 변화되는 나의 삶의 모습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시편 90편 12절을 읽어봅시다. 성경은 무엇이 지혜라고 말합니까? 그 반대는 무엇입니까? 시간의 관점으로 현재 내 인생을 생각해 봅시다. 미련함과 죄악을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겠습니까?

 

[4-5] 요한복음 2장 4절과 마가복음 14장 41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었습니까? 그분의 구원을 믿고, 내가 지금 주어진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행할 수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주변의 지혜도 구해 봅시다.

 

“감춰진 구원
(12. 24. 2023.)

마태복음 1:21

 

그게 기회인 줄 몰랐던 순간들이 있다. 자녀가 옆에 있을 때가 행복이었지. 부모님이 옆에 계실 때가 행복이었지. 직장 다닐 수 있다는 것이 감사였지… 지나보면, 그 순간, 그 사람이 기회였고, 나의 행복이었다.

 

하나님은 감추어진 구원을 주시는 분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태복음 1:21) 어느 누가 젖을 주고 돌보아야 할 아기를 구원자라고 믿었겠는가? 그러나 구원은 그렇게 왔다. 아기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는 사람이라면, 삶에서 또 한가지를 더 믿어야 한다. 나의 삶의 구원도 내 삶에 감춰진 형태로 올 것이다. 구원은 세상이 멸시하는 약함, 수치, 가난, 질병, 열등함 속에 숨어 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요소는 이미 내 삶에 감추어져 있다. 내가 모를 뿐이다. 아기 예수님 처럼, 내 삶에 감춰진 구원을 찾으라. 방황하는 자녀, 잔소리 하는 부모, 집 나간 남편, 재산 날린 아내, 호통치는 상사, 말썽 피우는 알바생! 읽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것들이지만, 원래 구원은 그런 것이다. 감춰져 있고, 나만 모를 뿐이다. 지나고 나면 보인 적이 있지 않은가?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내 고집 꺾으시고, 주님만 의지케 하시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셨다. 구원은 여전히 내 삶에 감춰져 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셨다. 동시에 예수님은 감춰진 구원을 찾아내신 분이다. 예수님 삶의 구원은 어디에 감추어져 있었는가? 죽음이었다.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브리서 2:9)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죽음 속에 감추어 두셨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를 구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랬더니 숨겨진 부활이라는 구원이 튀어나왔다.

 

예수님 때문에 내 죽음은 이제 영생으로 바뀌었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매일의 모든 삶도 확신해야 한다. 주님은 ‘내게 구원이 되지 않는 것을 주실 수 없는 분’이다. 다시 말하면, 내게 주신 모든 것이 내 삶에 구원이 될 것이다. 그 시선 가지고, 주어진 삶 다시 바라보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일을 통해, 난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크리스마스의 믿음이다.

 

[1] 그때가 기회였습니다. 지나가봐야 압니다. 한 해 동안 참 행복했고, 감사했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느껴졌던 순간들을 나누어 봅시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라고 즐기지를 못했던 것일까요?

 

[2-3] 마태복음 1장 21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그것은 어떤 뜻입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신 환경들이 감춰진 구원으로 느껴졌던 순간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히브리서 2장 9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삶에서 감춰진 구원으로 받아들이신 사건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분을 믿을 때 내 삶의 모든 환경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주신 삶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죽어도 살겠고
(12. 17. 2023.)

요한복음 11:25

 

다 막혔을 때까지 가보는 경험이 중요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 슬픔에 인생 끝날 것 같지만, 또 어떻게 살아진다. 돈이 없어서 이제 끝나는 줄 알았다. 어떻게 또 살 길이 생긴다. 불합격, 이별, 실패, 탈락… 인생의 여러가지 끝을 경험하면서, 사람은 점점 살아내고 견디는 힘이 세진다.

 

하나님은 끝나는 곳에서 은혜를 주시는 분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한복음 11:25) ‘죽음을 피하겠고’가 아니라 ‘죽어도 살겠고’이다. 예수님을 믿어도 똑같이 죽는다.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끝나는 곳에 은혜가 임하여, 죽음이 부활의 시작이 된다. 이것이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 예수님 믿는다고 어려운 일이 안 생기는 것이 아니다. 똑같이 생긴다. 더 많이 생기기도 한다. 상관없다. 여러 번 끝나도 좋다. 끝나는 곳에 은혜가 임하는지가 중요하다.

 

하나님이 끝장나게 하시는 내 삶의 모든 지점을 감사와 은혜로 받아들이라. 어려운 일을 피하게 하셔도 감사하지만, 어려운 일 한복판에 있어도 감사해야 한다. 죽어도 살 수 있는 예수님의 권세가 내 삶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끝장 난 곳에 은혜가 임한다. 이미 극복한 예전에 끝장난 일들을 돌아보라. 그렇게 절망할 일이었는가? 좀 더 열심히 살아볼 걸 후회되지 않는가? 끝장난 상황에서도 성실히 살아내야 한다. 하나님이 내 삶의 끝장난 곳에서 이미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끝장나는 순간까지 성실하게 삶을 감당하셨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한복음 19:28) 시편 69편 21절에 ‘목마르다’는 말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끝까지 일하셨다. 죽을 때까지 순종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살게 되었다.

 

그 예수님 믿는다면, 나도 같은 능력을 체험할 것이다. 내게 허락하신 모든 끝은, 은혜 주시기 위함이다. 그것을 믿고 이 땅에서 끝난 것 같은 곳에서 여전히 성실과 소망으로 살기를 원한다. 끝나는 곳에서 은혜를 주시는 그분을 기대하는 것, 그것이 성도의 삶이다.

 

[1] 그 당시는 다 막혔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또 살아졌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끝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삶의 길이 열렸습니까?

 

[2-3] 요한복음 11장 2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에 주시는 선물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아닙니까? 끝났다고 생각한 곳에서 삶의 열정과 소망마저 잃어버린 내 삶의 모습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19장 28절을 읽어봅시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마지막에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모든 ‘끝나는 곳’에서 가져야 할 나의 태도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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