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와 경계
(8. 13. 2023.)

누가복음 15:20

 

학교 교실에서 한 학생 가방에 있던 지갑이 없어졌다. 그 범인 하나 때문에 모두가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사회도 똑같이 움직인다. 한가지 나쁜 일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분위기를 바꾼다. 두려운 범죄들이 사회에 많이 일어날수록, 사람들은 서로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나를 환대(hospitality)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적인 삶의 표지는 환대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 재산을 탕진한 아들이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여전히 환대한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누가복음 15:20) 구원의 시작은 환대였다.

 

환대란 접대와 비슷한 말이다. 나의 수고로 상대를 초대하고, 대접하며, 기쁘게 맞이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 사람으로서 살아보고 싶거든, 환대를 실천하라. 최근 누군가를 나의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는가? 별로 상관없는 사람에게 내가 밥과 차를 사겠다고 손을 내민 적이 있는가? 서로 경계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에게 먼저 나아가 대화를 시도하며 관계를 맺은 적이 있는가? 이상하다. 환대한 곳에서는 밥만 먹고 끝나는 게 아니다. 온갖 진실과 참회, 위로와 우정, 사랑과 나눔이 싹튼다. 환대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길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우리는 그를 환대하지 않았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요한복음 4:44) 환대하지 못한 자들 손에 죽으셨으나, 그 죽으심을 통해 내가 죽을 때 천국에서 환대 받게 하셨다. 그분은 ‘죽는’ 수고를 통해 나를 끝까지 환대하셨던 분인 것이다. 내가 주님의 환대를 이미 경험한 자임을 믿는가? 경계의 시대 분위기를 뛰어넘어 사람들을 환대하라.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다.

 

팀마다 서로 먼저 과일을 싸오고, 먹을 것도 싸오고, 커피도 싸온다는 말을 듣는다. 내가 뭐라고 그 사람이 내 먹을 것을 챙기나? 경계심은 그만 내려놓고, 일단 먹으라. 환대의 즐거움을 누리라. 그리고 나도 환대하라. 경계심은 마귀의 것이다. 환대가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다.

 

[1] 경계심이 높아진 요즘 사회에서 관계를 맺는 방식이 달라졌던 것을 경험했던 적이 있습니까? 환대와 경계의 분위기가 달랐음을 경험했던 나라, 조직, 공동체 등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누가복음 15장 20절을 읽어봅시다.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기독교인들이 이웃을 대하는 삶의 기본 방식은 무엇입니까? 내가 가장 큰 환대를 경험하거나 시도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4장 4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떤 대접을 받으셨습니까?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환대하셨습니까? 내가 환대 받은 존재임을 기억하며, 내가 관계 맺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환대를 실천할 수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그것에 대한 말씀
(8. 6. 2023.)

예레미야 14:1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나? 벌어진 사건에서 메시지가 발견될 때 만난다. 일본선교를 준비하는데 일본어를 잘 하는 사람 한 명이 교회에 왔다. 갑자기 선교까지 가게 되었다. 그 사람 없으면 큰일 날 뻔했다. 통역을 너무 잘했다. 그 때, 한 사람이 교회에 오는 현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이해가 되었다. 현상 자체에는 힘이 없다. 그 사건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계획과 메시지를 찾을 때 기쁨이 있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그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분이다. 남유다에 가뭄이 든다. 가뭄은 현상일 뿐이다. 현상만 보면 의미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뭄에 대한’ 말씀을 주신다.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가뭄을 보면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 그 가뭄에 대해서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말이다. 오늘 내 인생에 그 일이 벌어졌는가? 그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인생의 모든 일을 “이런 일도 다 생기네”라고 넘기지 말라.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 왜 자녀가 이렇게 방황하는가? 왜 내게 이런 사고를 당하게 하셨나? 왜 이 일이 잘 안되게 하실까? 왜 그 사람이 나를 떠나게 하셨나? 순간순간 하나님께 ‘그것에 대한 말씀’을 달라고 간구해보라. 그냥 넘기고, 해결하고, 잊어버리고 끝내려 했던 인생의 여러 일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숨겨져 있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에 대한 말씀을 구했다. 십자가였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가복음 15:34) 예수님은 죄인인 나 대신 하나님께 ‘그것에 대해’ 말씀을 듣지 못하는 심판을 대신 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를 확신할 수 있다. (1) 아무리 내가 연약해도 예수님 안에서 간구하면 언제든 하나님은 내게 그것에 대한 말씀을 주실 것이다. (2) 아무리 기도해도 그것에 대한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더 큰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그것에 대한 말씀’을 구하라. ‘하나님 이 일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으세요?’라고 물어보라. 하나님은 친히 응답하시고 그 뜻을 보여주실 것이다.

 

[1] 벌어진 일들 속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겨 있었음을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봅시다.

 

[2-3] 예레미야 14장 1절을 읽어봅시다. 여호와의 말씀은 ‘무엇에 대해’ 임하였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인생에 벌어지는 중요한 일들에 대해 요즘 너무 ‘그냥 넘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4-5] 마가복음 15장 3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당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오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새롭게 내 인생에 ‘그것에 대한 말씀’을 구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봅시다.

“잠의 순종”
(7. 30. 2023.)

시편 127:2

 

전혀 보이지 않지만, 내가 완전히 이기적인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는 영역이 있다. 그것이 잠이다. 내 수면은 요즘 어떤가? 내가 원할 때 자고, 내가 깨고 싶을 때 깬다. 잠의 인도하심을 받아본 적이 과연 있는가? 잠은 온전히 내 마음대로 했다.

 

하나님은 내 잠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내 수면 패턴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순종해야 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 127:2) 잠은 하나님이 주신다. 언제, 얼마나 자는지를 통제하는 것은 중요한 순종의 행위 중에 하나이다. 잠이 파괴되면, 삶의 전 영역이 순종에서 멀어진다.

 

이 때 자고, 이 때 깨는 것이 가장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방법인지 생각해보라. 기분 내키는 대로 늦게 자려다가 하루 종일 피곤하지 않은가? 너무 잠을 안 자고 열심을 내다가 하나님과 역으로 멀어지지는 않는가? 감리교 목사 조지 휫필드는 일기에서 늘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점검할 때 수면과 음식을 평가했다. “먹고 마시는 것에 침착했는가?, 감사했는가? 잠 자는 것에 있어서 훈련되어 있었는가?” 수면 훈련은 순종 훈련이다. 수면 훈련은 경건 생활이다. 당신이 왜 아직도 삶 전체에 주님과 동행이 힘든지 아는가? 잠을 여전히 내가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방법은 무엇인가? 잠에 순종하면서 구원하셨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누가복음 22:44-45) 제자들은 잠을 통제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원하시는 뜻에 따라 자신의 수면습관을 맞추셨다. 그분의 수면 습관의 순종이 내게 구원을 주었다. 믿는가? 나도 그 은혜를 입어 그렇게 살아야 한다. 늦잠, 지각, 피곤, 함부로 밤샘은 귀여움과 안쓰러움이 아니다. 아직 순종의 첫 발도 떼지 못한 것이다.

 

잠의 주인에게 순종하라. 잠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야 가장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가? 얼마나 자야 가장 하나님의 일을 충만히 할 수 있는가? 잠을 통해 영광 돌리라. 그것이 성도의 삶이다.

 

[1] 요즘 나의 수면 패턴은 어떻습니까? 열심과 방종의 양극단을 달리며 내 수면 습관이 상황과 감정에 따라 변화되었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2-3] 시편 127편 2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엇을 주시는 분이십니까? 잠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조지 휫필드의 점검을 참고한다면, 나의 잠의 패턴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방해합니까?(예 – 과도한 열심으로 주님을 신뢰하지 못함 / 과도한 방종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하지 못함 / 과도한 수면 패턴 변화로 삶의 일관성이 없음 등)

 

[4-5] 누가복음 22장 44-4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직전에 어디까지 순종하셨습니까? 나도 그분의 구원을 힘입어 수면 습관을 어떻게 바꾸어 주님 앞에 순종할 수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받을 수 있는 사람
(7. 23. 2023.)

시편 96:8

 

생활이 여유로운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선물할 때 고민이다. 다 가졌으니까 내가 그에게 줄 것이 없다. 나는 그를 기쁘게 할 수가 없다. 자녀에게 묻는다. “필요한 거 없어?”, “없어요.” 그때부터 자녀와 멀어진다.

 

하나님은 받으시는 분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시편 96:8) 하나님은 돈이 필요 없으신 분이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개 2:8) 그런데 왜 예물을 들고 들어가는가? 왜 받으시는가? 받는다는 것은, 상대가 나를 채워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고상한 행위이다. 상대가 나를 기쁘게 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받는 것은 신앙이다. 받는 것은 겸손이다. 반대의 말도 참이다. 줄 수 있다,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다.

 

교만한 자는 자기가 주려고 하지, 절대로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받으면 낮아지고 굴욕이라고 생각한다. 돈도 주고, 조언도 주고, 관심도 주지만, 절대 받지 않는다. 우월감이다.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 상대가 당신에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라. 그래야 주면서 그 사람이 기뻐진다. 사소하게 필요한 것을 말하라. 어려움을 인정하라. 받지 않는 교만함을 버리라. 그래야 당신의 필요를 채우며, 주변의 기쁨이 늘어난다.

 

예수님의 십자가 마지막 순간이 기억나는가? 예수님이 받으신 것이 있다.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한복음 19:28) 마지막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30) 예수님은 목마름을 채워주는 사람의 손길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아서 구원받았음을 인정하는가? 이미 받았음을 아는 신앙인은, 결코 자신이 ‘주면서’ 우월해 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필요할 때, 언제든 즐거움과 감사로 받을 수 있다.

 

체면 차리지 말자. 어려울 때, 필요할 때, 위로도 받고, 선물도 좀 받으라. 격려를 좀 받고 싶다고 말하라. 외로워서 관심 좀 받고 싶다고 말하라. 목사도 격려 받고 싶을 때가 있다! 받자. 받을 수 있는 사람, 참 된 신앙인이다.

 

[1] 형편이 여유로운 사람에게, 그 사람을 기쁘게 해 줄 방법이 없어서 고민했던 적이 있습니까?(예 – 생일선물 등) 내가 누군가의 필요를 채우면서 기쁨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시편 96편 8절을 읽어봅시다. 여호와의 궁정에 무엇을 들고 들어갑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준다’는 것 속에 숨겨진 자기 의와 우월함을 느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예 – 불쌍한 사람을 보면 마음이 쓰이지만,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는 전혀 마음이 안 쓰이고 나쁜 점만 보인다 등)

 

[4-5] 요한복음 19장 28절과 3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의 마지막 구원은 무엇을 받으심으로 성취되었습니까?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까?’ 내 삶에 겸손하게 받는 법을 배우게 하셨던 시기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처음이 작은 것
(7. 16. 2023.)

마태복음 13:31-32

 

호기롭게 시작한 자영업자들이 쉽게 무너지는 모습들을 본다. 특징은 처음부터 너무 크다는 것이다. 매장도 너무 크고, 시설도 너무 좋다. 1년 뒤 그 가게는 없어져 있다. 투자도 처음에 너무 크게 넣는다. 내가 넣었던 그 돈 다 지금 어디로 갔나? 처음부터 크면 알맹이가 없음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다.

 

천국은 무엇인가? 천국은 ‘처음이 작은 것’이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태복음 13:31-32) 하나님의 말씀이 작게 내 삶에 심긴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결국 내 인생을 변화시키고, 주도하며, 지배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작게 시작하신다.

 

오늘 내 삶을 작게 시작할 수 있도록 재편하라. 처음이 큰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1) 돈: 큰 돈을 한 방에 벌 궁리만 하고 있지 않은가? 작은 소득을 활용하는 반복적인 승리가 있는가? (2) 관계: 작은 대화와 호감이 쌓여 가는가? 말투와 눈빛이 바뀌는가? 큰 이벤트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닌가? (3) 습관: 언제 살 빼고, 언제 기도하나? 언제 내 아이 성적 오르나? 공허한 목표보다 확실히 잡혀가는 작은 하나의 습관이 있는가?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판별식이 있다. 세상의 큰 것에 정신이 팔려 있는지, 아니면 작게 변화시키시는 움직임에 민감한지를 보면 된다.

 

내 인생의 구원의 시작은 언제부터였는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아기로 심기셨을 때부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마태복음 1:18) 아기 예수님 혼자, 인류의 구원을 담당하신 것이 천국의 모습이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나도 이 길을 걷게 된다. 언제나 작지만, 언제나 승리하고, 언제나 전진하고, 언제나 커질 것이다.

 

오늘부터 예배 준비 기도회를 시작한다. 보통 처음 교회 행사를 시작하면 인원을 동원한다. 처음부터 크게 하려고! 그 다음주부터 아무도 안 온다. 우리 교회는 그렇게 안 할 거다. 작게 시작해야 한다. 최소 진행 인원은 1명이다. 하나님 뜻이면, 분명 커지게 되어 있다. 어디를 가나 작게 시작하는 한 사람이 되라. 천국이 임할 것이다.

 

[1] 크고 좋아 보이는 것이 의외로 맹탕일 때가 많습니다. 크게 시도했다가 낭패를 본 적도 있을 것입니다. ‘큰 것’의 함정과 허탈함을 경험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예 – 유명 맛집, 유명 여행지, 처음부터 무리했던 큰 시도 등)

 

[2-3] 마태복음 13장 31-32절을 읽어봅시다. 천국은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임합니까? 나중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오늘 내 삶에서 작은 시도를 무시하고 큰 것에 마음이 쏠려 있는 영역이 있지는 않은지 나누어 봅시다.

 

[4-5]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첫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내 삶에 하나님께서 작게 시작하신다고 느껴지는 천국의 시작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예쁘게 말하기
(7. 9. 2023.)

에베소서 4:29

 

질서가 없는 마음은 밖으로 표출된다. 중독자들의 삶은 무질서하고 폭력적이다. 무기력한 은둔자의 집은 어질러져 있다. 반면, 새로 마음을 다잡을 때 우리는 외적인 질서를 회복하려고 한다. 머리를 자르고, 몸을 씻고, 주변을 정돈한다. 마음의 질서가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사람의 내적인 상태는 내뱉은 말을 통해 나타난다. 예수님이 안에 계신 사람은 말을 예쁘게 해야 한다. 말을 통해 내 마음의 질서가 표현되기 때문이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에베소서 4:29) 내 컨디션이 나쁘면, 말부터 험하게 나갈 것이다. 컨디션이 회복되면, 말이 예뻐진다.

 

집안을 정리하는 방법을 배우듯, 말을 예쁘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1) 정당화: 언제나 나보다 네가 훨씬 잘못했다는 식의 화법을 구사한다. (2) 무시: 대충 말하거나, 거칠게 말하거나, 함부로 말을 끊는다. (3) 길이와 소리: 나는 똑똑하니까 너보다 길게, 더 크게 말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4) 지적: 잘못한 게 보이면 무조건 그때그때 말해도 되는 줄 안다. 바꿔보라. (1) 오늘 내 말 속에 그 사람이 기분 좋을만한 말을 한 번 이상 섞었는가? (2) 그 사람의 미래를 밝게 바라보는 말을 포함시켰는가? (3)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동반되었는가?

 

예수님이 죽음 앞에서 자기를 배신한 제자의 무리들을 만나신다. 나 같으면 배우 이경영처럼 말할 것이다. “내 성질 까먹은 모양이네” 예수님이 말을 조심조심 건네신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한복음 21:5),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10), “와서 조반을 먹으라”(12) 뜸을 들이시다가 다시 사랑을 회복시키신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 베드로의 구원은 어떻게 왔나? 말로 왔다. 예수님이 따뜻하게 말 걸어 주셔서, 배신한 베드로가 살았다.

 

삼성 이병철 회장 비서팀장으로 정준명이란 천재가 있었다. 이 회장이 암 치료로 고생한 후 출근길 차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군, 이제 내가 현역에서 물러날 때가 되었지?" 정준명은 대답했다. "네, 회장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말 한마디에 이 회장은 표정이 굳었다. 노년에 들어 수명에 대한 집착에 그토록 강했던 것을 몰랐던 것이다. 오늘 당신도 예수님이 다시 따뜻하게 말 걸어 주셔서 살았음을 고백하는가? 예쁘게 말하라. 조심조심, 고민하며, 뜸들이며 말하라. 무조건 은혜가 끼쳐지게 말하라. 무조건 상대가 기분 좋아지게 말하라. 당신의 말이 부모와 자녀와 내 주변 사람을 모두 구원할 것이다.

 

[1] 요즘 내 삶의 외적인 질서는 어떻습니까?(청소, 바탕화면 정리, 체력관리 등) 내 컨디션에 따라 외적인 질서가 바뀌었음을 경험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에베소서 4장 29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내주하시는 신자들의 외적 표현 중에 중요한 영역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말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거나 나빠졌던 최근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나는 어떤 순간, 어떤 말에 취약합니까?

 

[4-5] 요한복음 21장 5절, 10절, 12절, 1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배신한 제자들에게 무엇으로 다가가셨습니까? 무엇을 통해 그들을 회복시키셨습니까? 내 마음에 느꼈던 따뜻한 예수님의 음성을 경험했던 적이 있습니까? 앞으로의 내 언어생활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구체적인 영역과 방식을 나누어 봅시다.

 

“치우치는 오류
(7. 2. 2023.)

여호수아 1:7

 

집중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것을 무시하면 오류다. 괜찮은 목사가 있었다. 목회만 하느라 운동을 너무 안 했다. 오래가지 못했다. 일을 너무 잘했다. 연인 관계, 직장 관계에는 너무 서툴렀다. 결국 관계가 성과를 막았다. 하나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이, 다른 것을 무시하라는 말이 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치우쳐서 지키면 안 된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여호수아 1:7) 사람은 본능적으로 내가 해오던 것, 잘하는 것만 계속 하려는 성향이 있다. 안 해본 순종, 미처 신경쓰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지켜야 한다.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열심히 예배하지만, 게으름은 외면할 수 있다.(잠언 6:9)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나와 다른 스타일의 사람을 쉽게 정죄할 수 있다.(사도행전 11:9) 복음을 전하라 하셨는데, 한 번도 전도해보지 않았다.(마태복음 28:19) 자녀를 위해 기도는 하지만, 자녀를 늘 화나게 만든다.(골로새서 3:21, 에베소서 6:4), 친구들은 사랑하지만, 부모를 행복하게 할 줄은 모른다.(잠언 23:25), 일은 잘하는데,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는 법은 모른다.(빌립보서 2:14). 보이는가? 내 삶의 문제들은 사실 내가 외면하고 있는 말씀들 때문이다. 나는 이미 치우쳐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치우침이 없는 구원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로마서 10:4)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일부만 하시고, 나머지는 우리보고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심지어 무엇까지 대신하셨는가? 죽는 것까지 대신하셨다. 치우치지 않고 다 행하여 나를 구원하신 분 앞에, 나도 자신감이 생긴다. 그리스도 안에서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할 때, 분명 오늘의 삶에도 풍성한 구원이 임할 것이다.

 

일부의 순종을 극대화하여, 치우친 순종을 숨기지 말라. 새롭게 순종할 영역을 찾으라. 난 늘 외면했으나, 하나님은 늘 명령하셨던 그 일을 하라. 치우치지 않으면 승리가 더 빨리 온다.

 

[1] 내 삶의 방식에 치우쳐 살다가, 다른 부분에 신경쓰지 못해 삶의 균형이 깨졌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여호수아 1장 7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 전체 다양한 내용을 알아가며 내가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 봅시다.

 

[4-5]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디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까? 예수님 안에 있을 때 내 삶에 새롭게 생길 수 있는 확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 새롭게 신경써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 봅시다.

“흉한 소문
(6. 25. 2023.)

시편 112:7

 

사람은 평생 소문 때문에 괴롭다. 그런 전공으론 취업 안 된다고 한다. 그 병 걸리면 인생 힘들다고 한다. 회사가 어렵다고 한다. 그 나이는 늦었다고 한다. 들을수록 내가 작아진다. 다 소문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시편 112:7) 소문에 빠진 것이 있다. 하나님이다. 소문은 상황만 말한다. 내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이 빠져있다. 소문 따라 가면 늘 상황에 휘둘린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뢰하면 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소문 따라 마음을 정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정하라.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확신만 있다면, 어떤 소문에도 담대할 수 있다. 상황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이 정해주신 길이 있는가? 그것만 있으면 그냥 하던 거 해도 된다. 굳이 다른 길 찾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전까지, 소문 따라 움직이지 말라. 패배의 첩경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흉한 소문에도 담대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좋은 소식 때문이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누가복음 2:10) 죄인을 구하러 오신 예수님이 내 삶의 구주가 되신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죽는다는 소문을, 자신이 직접 죽으심으로 잠잠케 하셨다. 믿는가? 날 위해 죽으신 그분이, 오늘 당면한 이 소문 앞에서도 나를 지키실 것이다.

 

흉한 소문이 한 번 들릴 때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소식을 100번 외치라. 그 어떤 소문도 하나님의 날 향한 선하신 계획을 막을 수 없다. 복음은 소문을 이긴다.

 

[1]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소문에 시달리며 삽니다. 소문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던 순간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시편 112편 7절을 읽어봅시다. 신자들의 삶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안에서 확신이 없는 내 삶의 흔들리는 영역을 나누어봅시다.

 

[4-5] 누가복음 2장 10절을 읽어봅시다. 내 인생에 가장 기쁜 소식은 무엇입니까? 소문 속에서 다시 복음을 붙들고 담대히 서야 할 삶의 결단들을 나누어봅시다.

“홍해에서 거역
(6. 18. 2023.)

시편 106:7

 

멋지고 기막힌 반전들은 바닥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대포알 심프’라는 그림책이 있다. 심프는 주인에게 버림받은 개다. 떠돌다가 서커스단에서 일하는 어릿광대를 만난다. 그도 공연을 못해 쫓겨날 처지다. 심프는 자신을 보살펴준 광대를 돕기로 결심한다. 서커스에서 대포에 들어간다. 대포알처럼 몸을 웅크려 공중으로 날아가서 굴렁쇠를 통과한다. 대포알이 검은 개였음을 알게 되자 관객들은 환호한다. 바닥이었던 개와 광대의 역전이다.

 

역전은 늘 아름답지만, 역전 전에는 바닥의 거역이 함께 있음을 명심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다. 기막힌 역전의 상황에서 거역한다.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시편 106:7) 홍해는 기적의 장소 아닌가? 아니다. 그곳은 거역의 장소였다! 홍해는 온갖 욕설과 원망, 분노와 불신이 가득한 곳이었다. 홍해는 결코 아름답지 않다. 하나님 빼면 그곳은 사방이 막힌 거역의 장소가 된다.

 

내 삶의 홍해는 어디인가? 하나님은 밑바닥의 역전을 준비하시지만, 나는 그곳에서 지금 거역하고 있지는 않은가? (1)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내가 원망하고 불평하고 거역하는 바로 그곳에서, 주님은 분명 새 일을 준비하고 계심을 확신해야 한다. (2) 경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은 가장 큰 일을 계획하시는 곳인데, 난 그걸 모르고 계속 원망하며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내 삶의 홍해는 거역과 역전이 동시에 공존하는 곳이다.

 

거역했다고 다 물에 빠져 죽었는가? 거역했는데 역전되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8)”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였다. 그러나 거역한 그곳에서 나를 구원하셨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거역했다. 거역한 그 사건이 내게 홍해가 아닌 죽음이 갈라지고 부활이 열리는 사건이 되었다.

 

십자가 사건을 믿는다면, 오늘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버리고 싶은 바로 내 삶의 그 영역에서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실 것이다. 아무리 거역했어도 주님은 그곳에서 나에게 구원을 베푸실 것이다. 아들을 죽여 나를 살리신 그분 앞에, 더 이상 거역은 없다. 이제 홍해는 거역이 사라지고, 역전만 경험하는 곳이 될 뿐이다.

 

[1] 내 인생이 가장 밑바닥이었던 경험을 소개해봅시다. 그 바닥에서 어떻게 벗어나게 되었습니까? 역전의 경험을 나누어봅시다.

 

[2-3] 시편 106편 7절을 읽어봅시다. 홍해는 긍정적으로 어떤 곳입니까? 그러나 홍해는 부정적으로 어떤 곳이었습니까? 내 삶에 하나님이 가장 크게 일하시는 곳에서 내가 범할 수 있는 거역의 위험은 무엇인지 나누어봅시다.

 

[4-5] 시편 106편 8절을 읽어봅시다.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을 죽인 거역이 우리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습니까? 거역할만한 곳에서, 내가 십자가 사건을 믿으며 다시 그분의 역전을 기대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봅시다.

“틀어진 계획
(6. 11. 2023.)

잠언 16:9

 

사람은 계획이 틀어질 때 실망한다. 그 사람과 결혼할 줄 알았는데 헤어지자고 한다. 이쯤이면 승진해야 하는데 통보가 없다. 병에 걸려 이렇게 오래 누워있을 줄은 몰랐다. 차라리 계획 없이 살자! 틀어지는 계획들에 지치면 다 그렇게 된다.

 

계획의 틀어짐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사람의 계획보다 더 큰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계획이 무산되었을 때 일반 사람들은 플랜 B를 떠올린다. 최선의 계획에는 실패했지만,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을 찾는다. 아니다. 신자는 인생을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틀어진 지금 상황을 최선으로 본다. 계획을 틀어버리신 하나님의 계획이 나음을 믿기 때문이다.

 

내 삶에 결코 틀어져서는 안 되는 계획이 있는가? 그것을 우상이라고 한다. 우상을 어떻게 버리는가? 틀어져도 괜찮은 세계에 들어가면 된다.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세계이다. 절대 계획이 틀어져서는 안 된다고 고집부리고 분노하는 모습을 내려놓으라. 반대로, 이미 망했다고 되는대로 사는 안일함도 회개하라. 내 계획이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지금의 형편은 맘에 들지 않아 열정이 사라진 것 아닌가? 만약 지금이 최선이라면, 여기서 하실 일을 기대하며 열심을 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과 충돌을 경험하신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36) 예수님은 ‘사는 것’을 원하셨다. 아버지는 ‘죽는 것’을 계획하셨다. 아들 예수님이 죽는 계획이, 죄인인 내가 사는 계획이 되었다. 우리가 이것을 믿을 때 삶에 확신이 회복된다. 아들까지 내어 주시며 내가 죽는 계획을 틀어버리신 분이시라면, 지금 이 상황도 분명 살게 되는 최선의 계획임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틀어져도 된다. 틀어지는 게 낫다. 틀어지는 게 최선이다. 내 계획을 버리고,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들어가라. 최선임을 믿는다면, 열심도 내보라. 더 나은 길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1] 어떻게 계획했고, 어떻게 틀어졌습니까? 호기롭게 세웠던 계획들이 처참하게 무너졌던 지난 기억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잠언 16장 9절을 읽어봅시다. 사람의 계획은 누구의 계획 속에 있습니까? 틀어진 상태는 차선입니까, 최선입니까? 내 계획이 틀어져버린 이후에 혹시 열정이 사라진 삶의 모습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4-5] 마가복음 14장 36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의 원함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의 계획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결과 내게 무엇이 주어졌습니까? 예수님의 일하심을 근거로 내 인생의 현재 상태를 어떻게 다르게 바라보아야 할지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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