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싸움
(6. 4. 2023.)

마태복음 10:36-37

 

사람은 진공 상태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집안’에서 태어났다. 살아왔던 역사가 있다는 말이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생활습관, 말투, 몸짓까지 그냥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을 알고 싶은가? 그 사람이 살아온 집안이 어땠는지 먼저 알아보라.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면, 집안을 우상으로 삼으면 안 된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태복음 11:36-37) 예수님보다 다른 가족들을 더 사랑하면 우상이 된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적용해보라. 집안에서 배운 그 스타일이 오늘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결정을 해야 하는데, 내가 살아왔던 방식대로 타인의 의견을 함부로 정죄하고 무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린고비 집안에서 자란 남편이 있었다. 아내가 돈 쓰는 모든 게 다 꼴사납게 보였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셔서, 지금 이 순간 돈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정죄부터 한다. 집안에서 배운 생각이 예수님과 원수가 된 것이다. 학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집안에서 자랐다. 아무리 사람을 만나도 학력이 나쁘니까 무시하게 된다. 예수님이 주인이 된 것이 아니라 집안이 내 삶을 가로막는 원수가 된 것이다. 심지어 청결도 우상이다. 정리가 더러우면 그 놈도 더럽게 보인다. 이거 우상이다. 지금 당신, 내가 살아온 집안의 스타일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 객관화시켜 나의 집안으로부터 오는 ‘자기 의’를 돌아봐야 한다.

 

집안싸움에서 승리하신 분이 있다. 예수님이다. 예수님 집안엔 죄도 없고, 무질서도 없고, 무능도 없었다. 내 삶을 보니 정죄할 것 투성이셨다. 예수님은 어떻게 나와의 집안 싸움에서 승리하셨나?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심으로 승리하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더 사랑하셨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누가복음 23:46)

 

예수님이 승리하신 방식대로 집안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바란다.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지금 이순간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관계의 행동을 다시 정립해 나가라. 집안 싸움이 그치고, 나와 너 모두 승리하는 관계의 기쁨이 열릴 것이다.

 

[1] 나의 지금 이 모습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나의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온 나의 집안의 특징을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10장 36-37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자신의 원수로 무엇을 지목하고 계십니까? 내가 살아온 집안의 방식이 쉽게 자기 의가 되어 남을 정죄하는 모습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예수님의 집안(삼위일체)의 특징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분의 의로움이 의롭지 않은 나를 대하신 방식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과 원수 된 나의 자기 의를 내려놓고, 내가 만나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악이 만들어지는 곳
(5. 28. 2023.)

시편 37:8

 

모든 큰 일은 별 것 아닌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처음부터 컸던 것은 없다. 한사람교회의 시작은 한 고등학생의 전도(김현수 목사)였다. 누군가와 크게 싸웠던 날을 기억하는가? 싸운 이유를 들어보면 처음엔 너무 사소하다. 큰 것은 결과일 뿐이다. 이 세상에 모든 작은 것에는 우주가 담겨 있다.

 

큰 악이 만들어지는 길이 있다. 화내고 불평하며 사는 것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시편 37:8) 내 삶에 나쁜 일은 밖에서 오는게 아니라,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분을 내는 곳에서 악이 만들어 진다. 불평하는 곳에서 악이 만들어진다. 회사에서 큰 악을 보고 싶은가? 계속 분을 내라. 악이 몰려올 것이다. 가정에서 계속 불평해보라. 거대한 악이 만들어질 것이다.

 

작은 화를 방치하지 말라. 큰 소리로 화를 내는 것, 중얼거리며 불평하는 것을 내버려두지 말라. 순간적인 일이니까 그러려니 한다. 심지어 내 스타일과 성격이라는 말로 얼버무린다.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 앞에서 큰 범죄이다. 가는 곳마다 악을 불러오는 시한폭탄이다. 마음속에 화가 있는 사람은 교회에서 결코 직분자로 세우면 안 된다. 화와 불평이 있는 직장은 언제나 위험 덩어리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악을 대적하는 자로 부름 받았다. 내가 가는 곳에서 화냄과 불평을 죽이라.

 

화는 억지로 참아지지 않는다. 화내지 않으신 분을 만나야 변한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3) 나는 하나님의 화를 받아야만 할 존재였다. 진노의 자녀인 나를 향한 형벌을, 자신의 자녀에게 쏟으셨다. 그것이 예수님의 속죄이다. 예수님께 구원받았음을 믿는가? 그럼 하나님은 나에게 ‘화내지 않으시는 분’임도 믿는가? 그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달아지는가? 나에게 화내지 않으신 은혜를 안다면, 나도 결코 함부로 화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쉽게 화내지 않는 것’이다. 거창한 구호를 외치지 말고, 철저하게 이것부터 변화되라. 화와 불평은 그리스도인이 철저히 깨부숴야 할 악이다.

 

[1] 모든 큰 것에는 작은 시작이 있습니다. 작은 것이 엄청나게 커졌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특히, 작은 화가 큰 다툼으로 번졌던 기억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시편 37편 8절을 읽어봅시다. 내 삶에 악이 만들어지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악은 밖에 있습니까 내 안에 있습니까? 내 삶에서 악이 만들어지기 가장 취약한 순간, 취약한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4-5] 화가 쉽게 참아집니까? 에베소서 2장 3절을 읽어봅시다. 분내는 성격은 무엇을 깨달을 때 변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입니까? 그 은혜를 충만하게 회복하며, 내 삶에서도 화와 불평을 죽이기 위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봅시다.

“불만의 복음
(5. 21. 2023.)

전도서 3:11

 

사람만 ‘더 나아질 수 있는 상황’을 꿈꾼다. 원숭이는 자신의 피부가 나쁘다고 불만 없다. 그냥 산다. 다람쥐는 부모 다람쥐가 도토리를 적게 가져왔다고 부모 원망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것 먹는다. 사람만 다르다. 내 피부가 더 좋아질 수 있지 않을까? 왜 내 부모는 매번 이런 식일까? 왜 내게만 이런 상황이 벌어질까? 불만을 가지는 건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왜 사람만 불만을 갖는가? ‘바라던 이상’이 실재함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 3:11) 나의 불만은 곧 ‘에덴을 향한 갈망’이다. 사람은 원래 고난과 죽음이 없는 곳에 살도록 창조 되었다. 본능적으로 이 땅은 내가 살기에 충분하지 않은 곳이라는 생각이 있다. 불만이 있다면, 나는 사실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삶에 불만이 있는가? 끊이지 않는 불평이 있는가? 해결만 하려고 하지 말라. 그것만 해결된다고 불만이 끊어지는 게 아니다. 해결 되도 다시 불만이 생기는 걸 이미 알고 있지 않나? 한번 하나님 찾아보라. 어떠한 불만족도 결국 만족으로 바꾸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부터 회복하라. 그 신뢰가 회복될 때, 현재의 삶에 대한 인내와 감사도 같이 회복될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의 모든 불만을 짊어지셨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 이 땅의 부끄러운 오늘을 참으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들어가셨다. 내가 예수님 믿으면, 나도 이 삶을 누릴 수 있다. 이제 불만족스러운 모든 오늘은 예수님과 함께할 때, 영광의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오늘의 불만은 해결로 가라앉지 앉는다. 확신으로 가라앉는다. 천국에 대한 확신, 구원에 대한 확신, 회복에 대한 확신을 붙들라. 삶이 더 어려워져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1] 사람만 ‘불만’을 갖습니다. 나와 내 주변에서 들려오는 오늘의 불만을 나누어봅시다.

 

[2-3] 전도서 3장 11절을 읽어봅시다. 사람이 불만을 갖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삶의 불만 속에서 해결만 찾다가 지쳤던 경험이 있습니까? 불만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생각과 변화가 있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히브리서 12장 2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이 땅의 불만을 해결하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무엇이 보장되어 있습니까? 그 확신을 붙들고, 오늘의 불만스러운 내 삶을 어떻게 새롭게 바라보아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다 버리기 vs. 다 쓰기”
(5. 14. 2023.)

사도행전 20:24

 

미니멀리즘(minimalism)이 유행이다. 집안 곳곳에 쌓여 있는 물건을 치워버리고 싶다. 쓰지도 않는 것을 들고 있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안 쓰는 물건을 없애면 이상하게 기쁘다. 반면, 다 써도 기쁘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물건을 끝까지 다 사용했을 때 쾌감이 일어난다고 했다. 샴푸를 끝까지 다 썼다. 치약을 끝까지 다 썼다. 왠지 보람되지 않나? 다 비워지고 없어지는 기쁨이 분명 있다.

 

신자의 삶은 버리는 삶이 아니다. 다 쓰는 삶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삶에서 누리는 최고의 영광은 ‘완전한 헌신’이다. 다 드려지는 것이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 내 인생의 모든 재능, 물질, 시간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 인간은 최고의 뿌듯함과 의미를 얻는다. 이 시대의 미니멀리즘은 내 인생의 자원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영적인 갈망이다.

 

조지 휫필드의 유명한 이야기가 딱 맞다. “나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 없어지기를 원한다.(I would rather wear out than rust out.)” 녹슬어지면 버려야 한다. 그 전에 닳아 없어져버려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현재의 기회에 최선을 다해보라. 젊었을 때 팀모임 하며 헌신할 기회가 금방 사라진다. 마음껏 예배드릴 시간이 맨날 오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나중에 하다가 도대체 물질을 언제 이웃에게 나눌 것인가? 부서 바뀌면 그 사람 전도할 기회는 끝이다. 남기지 말고 다 써버려라. 신자의 삶은 미니멀리즘이 아니다. 헌신의 맥시멀리즘(maximalism)이다.

 

가장 크게 헌신하여, 가장 작아지신 분이 있다. 예수님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디도서 2:14) 자신의 인생을 다 쓰셔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작아지는 듯했지만, 가장 커지는 일이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립보서 2:9) 나도 예수님 믿으면, 그분 위해 모두 드려도, 영생까지 커질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다 드릴 대상을 찾지 못해 가진 것을 버리는 인생 살지 말라. 주신 모든 것을 주님께 다 드리는 인생, 다 쓰는 인생 살라. 다 써서 슬플 줄 알았는데, 하늘의 기쁨이 몰려올 것이다.

 

[1] 무엇인가를 다 버리면서 시원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무언가를 끝까지 다 쓰면서 보람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사도행전 20장 24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쓰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가장 큰 기쁨은 무엇입니까? 내가 ‘몸을 사리고’있다가 기회와 기쁨을 놓쳤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예수님이 나의 인생을 살리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분이 자신의 생명을 다 쓰셨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나의 인생도 예수님의 능력을 확신하며 그분 앞에 내 인생의 지금 이 순간이 어떻게 쓰여질 수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인생 최악의 낭비
(5. 7. 2023.)

베드로전서 4:7-8

 

왜 과거를 후회하는가? 지나고 나야 그 순간에 더 가치 있었던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서울 사는 어른들을 만나보라. 맨날 자기도 과거에 강남 땅 살 기회가 있었다고 후회하신다. 유재석은 자신의 멍때렸던 10년이 가장 후회된다고 고백한다. 과거에 낭비한 것은, 현재가 되어서야 보인다.

 

성경은 만물의 마지막이 올 때, 모두가 후회할 한 가지를 소개한다. 사랑하지 못한 것이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베드로전서 4:7-8) 정신 못 차리면, 서로 미워하고 무관심하다가 인생 다 지나간다는 것이다. 그 순간, 그 시절 만났던 그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지 못한 것이 인생 최악의 낭비이다.

 

개편된 팀 모임 첫 시간이다.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온갖 시험에 유의하라. “참 특이하게 생긴 분이네 / 이번엔 리더가 저번보다 별로야 /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말이 많아? / 말투가 기분 나쁘네 / 관심 없는 주제라 들을 필요 없어 / 너무 나대는거 아니야?” 내가 존재함으로, 그 사람의 연약함이 덮어지고 있는가? 당신은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을 할수록, 그 사람의 부족한점이 드러나고 있는가? 당신은 자기의에 빠져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충분히 사랑하며 살지 못했던 시기, 충분히 사랑해주지 못했던 대상은 누구인가? 오늘 그 실수를 다시 범하지 말라. 당신은 오늘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자신의 인생을 하나도 낭비하지 않으셨다.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한복음 13:1) 사랑하다가 죽으셨다. 낭비인 줄 알았다. 사랑하다가 죽어서 모든 죄인을 살리시고, 자신도 부활하셨다. 사랑만 있다면, 더 이상 인생에 낭비는 없다.

 

나중에 후회할 일 만들지 말라. 쓸데없이 미워하며 편가르고 오늘을 즐거워하지 못했던 것이 그분 앞에 뼈아픈 후회가 될 것이다.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만나기 어려운 지금 내게 주신 사람들을 뜨겁게 사랑하라. 그것이 낭비 없는 삶의 출발이다.

 

[1] 지나고 나서 내 인생에 가장 후회되고, 낭비였다고 생각했던 내 삶의 시기가 있습니까? 나누어봅시다.

 

[2-3] 베드로전서 4장 7-8절을 읽어봅시다. 만물의 마지막에 사람이 가장 후회하게 되는 일은 무엇입니까? 사랑 없이 살며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내 모습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가정, 교회, 직장 등)

 

[4-5] 요한복음 13장 1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인생을 낭비하지 않으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 결과 우리에게는 어떤 유익이 주어졌습니까? 결코 낭비되지 않을 것을 믿고, 열심히 사랑을 심어야 할 내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넓어지는 신앙
(4. 30. 2023.)

이사야 58:7-8

 

여기저기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로 가득 찬 지난 날이 있었다. 살다보니 내 인생 생존도 어렵겠다 싶다. 내 관심 주제가 아닌 것에 시간, 물질, 관심을 쏟는 것은 이제 나에겐 사치가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복이 있다. 주변을 돌아보면, 내 문제가 풀린다는 것이다.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이사야 58:7-8) 나의 인생의 문제가 풀리는 방식이 있다. 바로 어려운 이웃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넓어지지 않는다면 바른 신앙이 아니다. 예수님 처음 믿을 때보다, 지금 더 다양한 사람과 대화하고 친분을 유지하게 되었는가? 교회의 더 많은 영역에 헌신하고 있는가? 생각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도와 보았는가? 숨겨진 아픔이 있는 사람을 챙겨보았는가? 내 돈과 내 시간은 더 그쪽으로 향하고 있는가? 오늘 내 삶에 빛과 치유와 공의가 임하게 되는 약속이 여기에 있다. 아무리 어려워도 신앙이 좁아지지 않는 것이다.

 

죄 없으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마태복음 9:10) 나는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나님이 죄인인 나에게까지 넓어지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메시지가 보이는가? 넓어지면 죽지 않고 살 것이다!

 

내 영혼의 운명이 그렇게 살았음을 믿는다면, 남은 인생도 그렇게 살라. 죽을 것 같을 때, 문제의 해결책이 도무지 보이지 않을 때, 혹시 좁아지고 있지 않나 돌아보라. 한 번도 안 해본 헌신을 시작하라. 중단했던 헌금을 재개하라. 외면하고 차단했던 영혼을 다시 돌보라! 인생에 빛이 임할 것이다.

 

[1] 삶의 치열함과 바쁨 때문에 내게 주신 주변을 향한 관심과 사랑이 식어진 나의 모습을 나누어봅시다.

 

[2-3] 이사야 58장 7-8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약속은 무엇입니까? 그 특징은 무엇입니까? 말씀의 비추어 현재 내 삶의 방향을 나누어봅시다.

 

[4-5] 내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좁아지려고 할 때, 무엇을 근거로 다시 이 삶을 확신해야 합니까? 변화되어야 할 내 삶의 모습들, 넓어져야 할 내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봅시다.

“원하는 대로
(4. 23. 2023.)

시편 27:4

 

하나님이 좋은 것을 막으신다는 생각이 있다. 가난할 때 돈을 구하는 것이 죄인가? 병이 낫길 바라는 것도 죄인가? 평범한 요구가 응답되지 않는 것을 느끼며, 좋은 것을 막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하나님은 사람이 원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다. 사람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둘 중 하나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원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편 27:4) 하나님을 원하는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결국 당신은 하나님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필요 없는가? 좋다. 모든 과정을 통해 결국 당신은 하나님을 잃게 될 것이다.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이것이 하나님 약속이다. 이것이 무서운 말이다. 하나님을 원하면, 하나님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원하면, 하나님이 아닌 것을 받을 것이다. 멋진 배우자와 결혼하고 싶었다. 하나님은 필요 없다. 교회만 다녀주면 된다. 정말 그렇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없어질 것이다. 학군따라 교육시키고, 이사가고, 유학가며 자녀의 학업만 챙겼다. 교회는 늘 뒷전이었다. 자녀는 정말 하나님이 뒷전이 될 것이다. 돈을 원해보라. 돈이 오고, 하나님이 갈 것이다. 당신이 생업에서, 가정에서, 사업에서, 자녀교육에서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원하는 것을 주신다.

 

우린 모두 하나님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마음이 변하는 순간이 온다. 하나님이 비천한 나를 원하셨음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죄인일 때 그분은 나를 원하셔서 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나를 원하셔서 아들까지 주신 분이라면, 나는 어떤 순간에도 그분만 바랄 때 행복이 보장됨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억지로 지옥에 보내시지 않는다. C.S. 루이스의 ‘천국과 지옥의 이혼’의 문장을 기억하라. “하지만 버스를 못 타는 불쌍한 유령들은 어떻게 합니까?” “타고 싶어하는 사람은 다 타게 되어 있으니 걱정 말게.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어. 하나님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는 인간들과, 하나님의 입에서 끝내 ‘그래, 네 뜻대로 되게 해 주마’라는 말을 듣고야 마는 인간들. 지옥에 있는 자들은 전부 자기가 선택해서 거기에 있게 된 걸세.”

 

[1]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막으신다는 느낌에 답답했던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봅시다.

 

[2-3] 시편 27편 4절을 읽어봅시다. 다윗이 원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내 삶의 모든 경험을 통해 어떤 선택을 마주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4-5] 하나님을 원하지 않았던 내가, 그분을 원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왜 그분은 믿을 만한 분이십니까? 오늘 내가 그분을 진정 원한다면 변화되어야 할 행동이나 삶의 결정을 나누어봅시다.

“변화의 마지막 가능성
(4. 16. 2023.)

시편 119:67

 

사람 잘 안 바뀐다. 중2때 성격이 죽을 때까지 간다. 성격은 사실 자기고집이다. 성격이 변한다는 것은 자기고집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 인생 주인이 나인데 왜 남의 말 듣고 내가 바뀌어야 하나? 특별한 계기 없이 사람 바뀌기 쉽지 않다.

 

하나님이 사람 바꾸시는 방법이 있다. 고난을 주시는 것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편 119:67) 세상은 고난을 불행이라고 여긴다. 신자의 고난은 불행이 아니다. 변화를 위해 정교하게 고안된 하나님의 계획이다. 오늘 내 삶에 고난이 있는가? 이제 무조건 다르게 해석하라. 그 고난은 나의 불행이 아니라 나의 변화를 위한 선한 일이다.

 

솔직히 인정해보자. 이렇게 계속 살다가는 나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내 고집을 내가 더 잘알지 않나? 신앙의 감격도, 은혜도 그저 그럴 것이고, 행위도 절대 안 변할 것이다. 게으름, 험한 말투, 남을 무시하는 교만, 분위기 파악 못하는 무지함… 언제 변하나? 고난이 오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구원의 여정의 마지막 단계에는 ‘성화’와 ‘영화’가 있음을 기억하라.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라면, 하나님은 내가 변화되지 않을 때 분명 고난을 계획하고 계실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부모, 자녀,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고난이 변화될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고난은 결코 나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정말로 불행한 고난은 나 대신 예수님이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누가복음 24:26) 그의 고난은 나에게 영생과 부활을 보장해주었다. 나머지 내가 당하는 고난은 이제 예수님 안에서 겪는 고난이다. 이 고난은 내게 저주가 아니라, 무조건 선한 변화와 소망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현재 겪는 고난을 극복하려 하지 말고, 변화되려고 하라. 언제 극복되나 기다리지 말고, 무엇을 변화시키고 계신지 관찰해 보라. 하나님의 초점은 거기에 있다. 내 마지막 변화의 가능성을 붙들라. 고난 당한 사람만 신자가 된다.

 

[1] 내 자신, 혹은 주변 사람의 삶이 정말 고집스럽게 변화되지 않는다고 느꼈던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봅시다.

 

[2-3] 시편 119편 67절을 읽어봅시다. 한 사람의 ‘전’과 ‘후’가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중심에 있습니까? 전과 후는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성경은 고난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습니까?

 

[4-5] 예수님이 나를 위해 대신 당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님 안에서 현재 당하는 고난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나누어봅시다. 나는 어떻게 변화되고 있습니까? 최근 어떤 변화를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균형
(4. 9. 2023.)

누가복음 10:41-42

 

기준에 따라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치우쳐 보일 때가 있다. 자녀를 낳고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이 있다. 커리어 기준으로는 미련한 행동이다. 자녀를 위해서는 지혜로운 결정일 수 있다. 돈을 위해 야간 근무를 뛰는 사람이 있다. 돈을 위해서는 좋다. 건강을 위해서는 어떨까? 인생은 균형추의 싸움이다.

 

어떤 균형이 옳은 것인가?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만 균형을 찾는다. 예수님이 집에 오시자 마리아는 다 놓고 예수님 앞에 앉는다. 마르다는 이것 저것 일하며 분주해한다. 예수님이 균형을 말씀하신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0:41-42) 신앙인에게는 지금 집중하고, 지금 포기해야 할 균형이 분명히 있다는 말씀이다.

 

지금 내게 주신 균형을 사랑하라. 남들은 시간 낭비라고 하지만, 교회 사역에 헌신하게 하실 때도 있는 것이다. 남들은 모두 돈 벌러 갈 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녀를 돌보는 데에 시간을 써야 할 때도 있다. 남들은 즐기라고 하지만, 내게 주신 상황에서는 조금 더 돈을 모으고 아껴야 할 때도 있다. 남들보다 좀 더 공부하고, 좀 더 기도해야 할 때가 있다. 어디에 균형을 두어야 할지 막막할 때, 순간순간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라. 남들은 분명 균형이 깨졌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균형을 찾으면 분명히 인생에 평안이 올 것이다.

 

하나님만 따라가면 어떻게 완벽한 균형을 보장받는가? 나 대신 인생에 균형을 잃으신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두 생명에서 죽음으로 균형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될 운명이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잃고 죽어야 할 내 인생의 불균형을 영생의 균형으로 회복시키셨다. 내 인생에 생명주신 그분만 믿으면 앞으로의 삶도 확신할 수 있다. 순간순간 그분만 따라가면, 언제나 생명의 균형을 찾을 것이다.

 

요즘은 이래야 한다더라, 옆 친구는 저렇게 산다더라는 말에 속지 말라. 주님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 주님이 마음 주시는 그 일을 집중적으로 행하라. 신자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균형을 맞춘다.

 

[1]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균형이 달라보임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까?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혹시 내 삶은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 고민되었던 적이 있습니까?(시간, 재정, 커리어 등) 나누어봅시다.

 

[2-3] 누가복음 10장 41-42절을 읽어봅시다. 마르다는 왜 분주했습니까?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무엇을 권유하셨습니까? 최근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떠나 다른 이야기나 상황에 삶의 균형을 맞추고 있는 모습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4-5]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따라가면 균형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 하신 위대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분이 내게 세상과 다르게 균형을 맞춰보라고 최근에 요청하시는 일이 있습니까? 나누어봅시다.

“감사의 근거
(4. 2. 2023.)

데살로니가전서 5:16-18

 

감사는 쉬운 일이 아니다. 감사하지 못할 무겁고 중요한 이유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곤 한다. “저 사람 같은 상황만 되었어도 나는 충분히 감사할 수 있어!” 원하는대로 펼쳐지지 않은 상황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보니, 감사가 나오기 어렵다.

 

감사해야 할 유일한 근거는 한가지 뿐이다. 선하신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상황임을 믿기 때문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8) 모든 일, 모든 상황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상황의 질’에 달려있지 않다. 하나님의 성품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감사의 근거는 하나님이다.

 

감사는 습관도 아니다. 감사는 태도도 아니다. 습관과 태도를 무너뜨릴 엄청난 일이 생기면 감사의 습관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감사는 믿음이다. 하나님을 신뢰함에서 감사가 나온다. 상황이 나아지면 감사하게 될까? 그나마 삶 좀 나아졌지만 당신은 여전히 불평과 염려에 빠져 있지 않은가? 나의 지난 날을 돌아보라. 이것만 되면 감사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나? 감사의 근거를 계속 상황의 변화 속에서 찾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 바로 지금, 결단해야 한다. 상황이 안 좋아지고, 최악으로 변해도 감사로 받아들여야 한다! 감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아름다운 여정이다.

 

기도했는데도, 최악으로 변해갔던 삶이 있다. 예수님의 삶이다. 잔을 옮겨 달라고 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신다. 상황이 최악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신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누가복음 23:46) 그분이 최악을 경험하면서, 나의 최악을 구원해주셨다. 내 인생의 최악은 죽음, 곧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내 인생 최악을 이미 막으신 분이심을 믿는가? 그 신뢰는 범사의 감사로 나타나야 한다.

 

내게 주신 이 상황은 결코 최악이 아니다. 아예 반대로 말해야 한다. 내게 주신 이 상황은 믿음 안에서 ‘최선’이다. 이 믿음의 고백이 지속될 때, 별 것 아닌 것 같았던 감사가 내 삶의 모든 것을 역전시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1] 억지로 감사가 됩니까? 상황을 남과 비교하고, 원했던 상황이 펼쳐지지 않음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며 감사가 사라진 내 삶의 모습이 있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을 읽어봅시다. 언제 감사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감사하는 것과, 신자들이 감사하는 근거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4-5] 예수님은 나의 무엇을 가져가신 분이십니까? 무엇을 가져가시고 무엇을 주셨습니까? 특별히 감사가 나오지 않는 내 삶의 영역을 돌아봅시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어떻게 적용하며, 다시 그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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