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한사람교회 입니다.

 

서창희 목사님 설교음성 업로드 채널을 한사람교회 웹사이트와 유튜브 채널로 각각 일원화 하고 있습니다.

 

기존에 블로그/사운드클라우드를 통해 설교를 듣던 성도님들께서는 아래 웹사이트, 유튜브채널을 이용해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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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살아야 할 이유”
(3. 26. 2023.)

요한복음 12:14-16

 

지나고 나서 이해되는 것이 삶이다. 부모가 너무 싫었지만, 내가 부모 되어보면 이해되는 부분이 생긴다. 부하 직원일 땐 모른다. 조금만 올라가도 내 지난 생각이 틀렸음을 느낀다. 운동, 식단, 습관, 경건에 대한 잔소리들, 회사 생활에 대한 꼰대 같은 이야기들. 처음엔 무시했지만 세월이 조금만 지나도 깨닫는다. 어느새 내가 그 꼰대가 되어있음을 본다. 지나고 나야 보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신앙을 계속 붙들고 일단 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뜻도 지나고 나서 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나귀타고 오신다는 스가랴의 예언을 읽었다. 이해도 못하고, 중요하지도 않은 줄 알았다. 예수님이 눈 앞에서 나귀 타고 가시는 데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제자들은 나중에 깨닫는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요한복음 12:16) 나중에 모든 것이 연결되고, 모든 것이 해석될 날이 올 것이다. 그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은 ‘계속 오늘을 살아내는 것’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해되지 않고, 너무 답답한 상황 속에 처할 때가 있다. 전혀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기대도 되지 않는 적적한 삶일 때도 있다. 그래도 걸어야 한다. 그래도 돈 벌러 나가라. 그래도 또 시도해보라. 그래도 새롭게 살 길이 있나 좀 찾아보라. 어떻게든 우울을 딛고 일어나려고 해보라. 최대한 좋은 생각하고, 기쁨의 자리에 참여하라. 맹목적인 긍정이 아니다. 지나고 나면 주님이 무엇인가 깨닫고 보게 하실 것이 있음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제자들 마음이 다 무너졌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조금만 더 살아보라고 한다. “…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누가복음 24:6-7) 죽으신 3일 동안 말씀을 기억하고 버텼다. 주님이 다 이해되고 회복하게 하셨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가? 내 인생에 죽음 같은 일도 그렇게 계속 살아갈 때 이해되고 회복하게 하실 것이다. 가난하고, 병들고, 너무 어려워도 계속 살아보자. 날 위해 죽으신 예수님 만이 내 인생에 계속 살아야 할 유일한 이유가 되신다.

 

[1] 지나고 보면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전엔 몰랐는데, 요즘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 스가랴 9장 9절은 무엇이 예언되어 있었습니까? 요한복음 12장 14절을 읽어봅시다. 제자들은 나귀타는 예수님을 보고 예언과 연결시킬 수 있었습니까? 16절을 읽어봅시다. 제자들은 언제 그것을 깨달았습니까?

*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3-5] 가능성이 없어 보이고, 의미와 재미가 없어 보여도,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날 위해 하신 일에 비추어 생각해봅시다. 오늘 다시 힘내어 걸어가야 할 내 삶의 영역을 나누어봅시다.

“경중(輕重)의 기준
(3. 19. 2023.)

사무엘하 12:9

 

사람에게 욕을 하는 것과 사람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것은 죄질이 다르다. 죄에는 분명 경중(輕重)이 있다. 그런데 교회에 오면 하나님 앞에서 다 죽을 죄인이라고 한다. 내가 저 흉악한 사람보다는 좀 나은 사람 아닌가?

 

죄의 심각성은 행위의 경중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그 명령을 주신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서 결정된다. 행위가 심각한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무시했다는 것이 심각한 것이다. 나는 나쁜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반대한 것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며 범죄하자 나단 선지자가 “남사스럽게 어떻게 남의 여자를 그렇게 탐했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행위가 왜 심각한 것인지 이렇게 지적한다.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사무엘하 12:9) 에덴 동산에서 인류 최초의 악은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었다. 열매를 먹는 것이 뭐가 그렇게 나쁜 것인가? 이제 이해가 된다.

 

나의 죄의 심각함을 행위의 경중에서 찾지 말라. 그러면 분명 자기 의에 빠진다. 저 사람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더 잘 봐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 사람보다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 자체가 엄청난 죄성을 나타낸다. 죄에 대한 기준마저 내가 세우겠다는 자기 중심성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뜻과 다른 부분에서 그분의 말을 업신여기는 데에 너무 능숙한 자가 아닌가? 나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에서 어느 누구와 다를바 없는 동일한 죄인이다. 이 자기중심성을 보지 못하면, 나의 죄인됨을 인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 죄의 무게는 뒤집힌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죄를 능가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반대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자신을 반대한 자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셨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태도는 이제 바뀐다. 누가 봐도 처참한 삶을 살아갈 때에도, 주님이 내게 은혜 주실 것임을 믿을 수 있다. 누가 봐도 괜찮은 삶을 살아갈 때에도, 주님의 은혜를 능가할 선행이 없음을 알고 여전히 겸손할 수 있다.

 

죄의 경중을 따지며 나의 우월함을 내세우고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내 반역의 무게를 먼저 마주하라. 그리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은혜의 무게 앞에 엎드리라. 죄의 경중에 대한 기준이 바뀔 때, 비로소 자기 의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1] 내가 주변에서 그래도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주변 사람들을 비하하거나 무시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어떤 기준이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사무엘하 12장 9절을 읽어봅시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 나단 선지자의 지적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죄란 무엇입니까? 내가 특별히 내 마음대로 쉽게 무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4-5] 내가 세상적인 기준에서 심각한 죄를 저질렀을 때, 소망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세상적으로 괜찮을 때, 여전히 겸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와 타인의 죄를 바라보는 기준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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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법을 어기면
(3. 12. 2023.)

고린도전서 11:30-32

 

예수님이 내 죄를 모두 가져가셨다고 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한 형벌을 내가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죄를 지어도 사랑의 하나님이 내게 심판을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 요즘 하나님의 뜻에 신경 쓰고 있진 않지만, 나는 주님의 자녀이기에 그렇게 크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과연 맞는가?

 

하나님이 나의 죄의 대가로 복수하시는 진노와 형벌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내 삶을 망치는 신자의 행동에는 분명 아버지의 훈계, 아버지의 징계가 있다. 죄가 내 삶을 죽이는 것을 두고보실 수 없기 때문이다. 존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당신을 죽일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나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죄를 죽이기 위함이다.

 

징계는 생각보다 위험하다. 성찬에 함부로 참여하는 사람이 있었다. 분명 그 사람은 예수님 믿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생긴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린도전서 11:30) 예수님 믿는 사람인데 죄 때문에 약해지고, 병들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영생을 박탈당하진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는 질병을 넘어서 이 세상의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법을 경외함으로 받으라. 경외란 기쁨과 감격이 있는 동시에 두려움이 있는 감정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면 무적이다. 순종할수록 기쁨과 기적이 넘쳐날 것이다. 쓸데없는 세상의 온갖 재난에서 나를 지켜주실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분명 징계가 있다. 무엇을 해도 기쁨이 없을 것이다. 확신도 사라질 것이다. 평강과 지혜가 사라지고, 멍청함과 아둔함이 삶과 가정을 지배할 것이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의 법을 어겨서 그렇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운운하면서 내 행위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직 그리스도의 법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오늘 내 삶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법을 어기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예수님 때문에 율법을 벗어났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새롭게 묶여 있는 법을 소개한다.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고린도전서 9:21) 예수님 때문에 율법을 범한 형벌이 면해졌음을 믿는가? 하나 더 믿어야 한다. 나는 이제 감사함과 두려움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야 한다. 그래야 이 땅에서 그분이 주시는 복을 누린다.

 

오늘 막힌 나의 문제를 하나님의 징계로 바라보라. 돌이키지 않고는 해결이 없다. 징계는 결코 죽이시는 길이 아니다. 살리시는 길이다. 돌이켜 순종해보라. 지나고 보면 그 징계 때문에 내가 살았다고 고백할 것이다.

 

[1] 예수님의 공로를 너무 확실히 믿다보니, 사랑의 하나님 안에서 나의 안일해진 신앙생활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안일해져 갔습니까? 나누어봅시다.

 

[2-4] 고린도전서 11장 30절을 읽어봅시다. 성찬에 함부로 참여한 자들에게 닥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일은 ‘믿는 자’에게 일어난 일입니까, 아니면 ‘믿지 않는 자’에게 일어난 일입니까? 신자에게 형벌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5-6] 고린도전서 9장 21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은 자신의 인생이 무엇에 묶여 있다고 말합니까? 내 인생에 막힌 문제를 징계의 관점에서 다시 돌아봐야 할 부분이 생각난다면 나누어봅시다. 나는 어떻게 돌이켜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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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은 어디에
(3. 5. 2023.)

시편 4:7

 

사람마다 너무나 재미있어 빠져들었던 일들이 있다. 그 아이돌이 왜 그렇게 좋았을까? 그 스포츠가 왜 그렇게 재미있었을까? 지나보면 뭘 그렇게 목숨 걸었나 싶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손을 떼게 된다. 왜? 처음에 느꼈던 그 기쁨이 점점 시들해지기 때문이다.

 

기쁨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편 4:7) 경험하는 것에 따라 기쁨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같은 행동을 하는데 지겨울 수 있고, 같은 행동을 하는데 기쁨이 넘칠 수 있다. 기쁨을 주시는 주체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기쁨을 찾고 있다면, 당신은 사실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빼고 ‘기쁜 것’을 찾으러 돌아다닌다면, 당신은 곧 지칠 것이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일을 인생의 최우선에 두라. 늘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의 삶을 고백하라. 걸을 때마다, 일할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시도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거부하라. 예수님이 내게 하신 일을 끊임없이 묵상하라. 처음엔 지겹고 투박한 일 같다. 변화가 무엇인 줄 아는가? 삶이 기뻐지는 것이다. 별 것도 아닌데 기쁘고 감사하다. 여행 가지도 않았는데 삶이 충만하다. 기쁨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과 끊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옥은 무엇인가? 영원히 기쁨이 사라지는 곳이다. 하나님과 끊어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나 대신 기쁨 없는 운명을 맞이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가장 큰 기쁨을 만들어 내셨다. 그것이 부활이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는가? 그렇다면 오늘의 삶에도 그 능력이 임할 것이다. 상황은 최악인데, 내가 하나님만 즐거워하면, 분명 그 상황 속에 기쁨이 임하기 시작할 것이다.

 

상황이 바뀌어야 기뻐질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곡식과 포도주가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이 없어서 문제다. 기쁨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주인이 기쁨 주셔야 내 삶이 기뻐진다. 그분을 꼭 붙잡으라. 기쁨도 함께 올 것이다.

 

[1] 내 인생에 가장 큰 기쁨을 느꼈던 몇 가지 행동이나 취미들을 나누어봅시다. 얼마나 빠져들었고, 언제 시들해졌습니까?

 

[2-3] 시편 4편 7절을 읽어봅시다. 내 마음에 기쁨을 주신 주체는 누구입니까? 그 기쁨의 정도는 어느 정도라고 말합니까? 같은 상황인데 사람마다 기쁨을 느끼는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경험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4-5]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왜 기쁨이 사라집니까? 예수님이 죽음 속에서 만들어 내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분의 능력을 사모하며, 기쁨을 회복하기 위해 내 삶에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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