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히 감당하게
(8. 30. 2026.)

고린도전서 10:13

 

다른 사람들은 못 하지만, 나에게 능력과 여유가 있어서 주변 일을 감당할 때가 있다. 내가 일을 빨리 처리할 줄 알기에, 남의 일도 해준다. 내가 시간 여유가 좀 있어서, 가족 병간호를 돕는다. 자금 여유가 있어서, 장학금으로 돕는다. 나만이 가지고 있었던 능력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게 능력을 주시고, 감당하게 하시는 분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13) 그 일을 감당하라고, 그 능력과 상황을 더 주셨다는 뜻이다. 신자는 절대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돼?”라고 물으면 안 된다. “그 일을 하라고” 남들과 다르게 그 상황과 능력을 주시는 경우가 많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일을 회피하지 말라. 내게 그 일을 감당하라고, 그 상황을 주신 것이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상황에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무엇을 감당하라고 이 상황을 주시는지 분별하라. 시간에 여유가 있는가? 어떤 일을 돕고 참여하라고 하시는지 분별해야 한다. 재정과 능력에 여유가 있는가? 누구의 짐을 덜어주어야 하는지 살펴야 한다. 마음에 여유가 있다면, 마음이 무너진 사람을 격려해 주어야 한다. 능력을 그렇게 사용하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상황을 훨씬 많이 부어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 주시는 복의 선순환이다.

 

예수님은 무엇을 능히 감당하셨는가? 나의 더러운 죄를 감당하셨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사야 53:4) 예수님이 능히 감당하심으로, 나에게는 영생의 복이 주어진 줄 믿는가? 오늘부터 그 권세 안에서 살아야 한다. 나만 고생한다, 나만 손해본다고 말하지 말라. 내가 그 일 감당하라고 주신 것이고, 그 일 감당할 때 내가 복을 더 주실 것이다. 그건 기회이지, 불평의 주제가 아니다.

 

더 많이 감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그리고 지금 있는 것으로 먼저 더 감당하라. 당신은 지금보다 100배 더 커질 수 있다.

 

[1] 하필 나에게 조금 더 여유와 능력이 있어서, 주변의 일들을 감당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상황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감당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만 고생하는 것 같다는 불만과 불평 속에 움츠러든 삶의 모습이 있는지 돌아봅시다.

 

[4-5] 이사야 53장 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감당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로 인해 무엇을 얻었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지금 나에게 감당하라고 주신 것은 무엇인지 분별해 봅시다.

비공식의 시간
(8. 23. 2026.)

요한복음 3:2-3

 

세상의 모든 중요한 일은 ‘공식적’인 곳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 뒷문에서 이루어진다. 공식 행사 후 식사 자리에서 같이 앉게 되었던 사람, 강의가 끝나고 따로 교수님께 물었던 질문, 업계에 대해 알고 싶어서 따로 보냈던 메일. 내 인생의 모든 여정은 ‘비공식’의 여정이다.

 

하나님은 나를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이끄시는 분이다. 니고데모가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온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2-3) 밤 중에 갔다가 가장 중요한 거듭남 강의를 홀로 들었다. 하나님은 온갖 비공식적인 상황을 사용하시는 분이다.

 

하나님과 더 깊이 동행하길 원한다면, 비공식적인 상황에서도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내가 무시하는 비공식적인 상황들을 점검하라. 식사할 때 누구와 같이 앉을지 생각하며 기도하는가? 수업이 끝나고, 회사 퇴근할 때 누구에게 말을 걸며, 어떤 기회가 있을지 고민하는가? 예배드릴 때 옆 사람에게 먼저 자기를 소개하고 상대방에게 인사하는가? 따로 카톡을 하거나, 메일을 보내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최근에 병원을 방문하여 돈을 좀 써야 할 일이 있었다. 그 분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메일을 보냈더니, 비급여 병원비가 반으로 줄었다! 아직도 이 세상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하다. 공식적인 루트가 막혔다고 좌절하지 말라. 하나님은 비공식적인 일을 통해 나의 길을 여신다.

 

인간에게 공식적인 일이 있다. 죽음이다. 비공식적인 길을 공식처럼 열어버리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새로운 길이 열린 줄 믿는가? 나는 더 이상 죽음이라는 공식에 갇히지 않으니, 일상에서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세상이 말하는 공식에 막혔다고 낙심치 말라. 순간 순간 열어가시는 비공식적인 일을 기대하라.

 

꽉 막힌 사람 되지 말자. 바보 같이 살지 말자. 제발 어디를 가든 앞 뒤에 일찍 와서 인사하고, 제일 늦게 나가면서 스몰 토크를 만들라. 잡담하다가, 커피 한 잔 하다가, 길을 같이 걷다가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언제나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1] 삶에서 ‘공식’보다 ‘비공식’의 순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요한복음 3장 2-3절을 읽어봅시다. 니고데모는 누구이며, 언제 예수님을 찾아갔습니까? 얻은 대답은 무엇입니까? 내 삶에 ‘공식’으로 꽉 막힌 여유 없는 모습을 돌아보며 미련함과 편협함을 회개해 봅시다.

 

[4-5]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공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만드신 비공식은 무엇입니까? 믿음 안에서, 내가 새롭게 비공식 적인 부분을 기대한다면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할까요? 일상의 태도의 변화들을 다짐해 봅시다.

분명함은 매달림에서
(8. 16. 2026.)

시편 63:1

 

쉽게 얻은 것, 이미 있던 것은 기억도 안 난다. 별 짓을 다해본 것, 힘겹게 얻은 것, 너무나 고생하여 길이 열린 것은 평생 기억난다. 입시, 취업, 이직, 성과, 자녀, 결혼, 투병생활…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는 힘겨운 상황은 너무나 많다.

 

하나님은 매달림을 통해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는 것을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편 63:1) 하나님이 쉽게 자신을 드러내셔도 되는 것 아닌가? 숨바꼭질인가? 그렇지 않다. 그분이 하나님이셨음을, 정말 그분 만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할 때에는 매달리는 과정이 우리를 위해 선행되어야 함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분명하게 하나님을 보고 싶은 곳에, 매달리는 장치를 추가하라.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고, 이리저리 고민되는 부분이 있는가? 대충 넘어가지 말고, 그곳에 간절함을 추가하라. 매달림을 추가하라. 그 주제를 놓고 금식도 해보고, 작정기도 기간도 정하라. 스스로 그 답을 얻기 전까지 자신을 제한하는 절제의 삶을 다짐하라. 대충 하면 안 된다. 별 짓을 다해야 한다. 바로 그때 깨닫는다. 나는 분명하게 하나님을 원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나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을 바라지는 않고 내 생각대로 결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나에게 매달림이 필요하다. 매달려야, 분명하게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안다. 매달리면, 어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인지 분명히 알게 하신다. 나에겐 매달림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끝까지 아버지께 매달리셨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가복음 14:36) “대충 마음대로 하세요”라는 기도가 아니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누가복음 22:44) 매달리셔서 십자가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임이 분명해진 것이다. 나도 알 수 있다. 이 정도로 분명하게, 나를 놓치 않고 구원하실 것을 믿는가?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내게 주신 주제를 놓고 치열하게 매달리라. 분명히 나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대충 추측하다가 끝나지 말라. 중요한 문제라면, 매달려야 한다. 하나님께 매달릴만한 가치가 있다. 십자가에서도 그랬고, 당신의 삶도 그럴 것이다.

 

[1]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잊혀짐을, 어렵게 얻은 것은 영원히 남게 됨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시편 63편 1절을 읽어봅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어떻게 찾고 있습니까? 삶에 중요한 문제가 있음에도 내 삶에 결여된 매달림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가복음 14장 36절을 읽어봅시다. 누가복음 22장 44절도 함께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놓고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그 매달림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십자가 안에서 내게 주실 유익을 확신하며, 내가 오늘 주님께 매달려야 할 제목들을 나누고, 구체적으로 결단해 봅시다.

상황과 사람으로 오시는 하나님
(8. 9. 2026.)

마태복음 25:39-40

 

지나고 보면, 그 순간이 기회였음이 보일 때가 있다. 지나고 보면, 그 사람이 참 중요한 사람이었음을 깨달을 때가 있다. 오늘 드러나는 현상 속에, 또 다른 깊은 일들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람의 본능이다.

 

하나님은 사람과 상황을 통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고맙다고,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고 하신다. 제자들이 언제 우리가 그랬냐고 묻는다. 예수님이 대답하신다.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태복음 25:39-40) 하나님은 우리가 상황과 사람 속에 하나님의 뜻대로 반응하는 것을, 곧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한 일로 보신다는 뜻이다.

 

(1) 상황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라. 상황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신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간이다. 그러면 이 상황에 바르게 반응하는 것은, 곧 내가 하나님을 직접 상대하는 일이 된다. 하나님은 분명 그때 나는 너를 만났었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 상황을 겪으며 나는 하나님을 만났었음을 말이다. (2) 사람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라. 그 사람이 온 것이 곧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그 사람을 대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일이다. 사람 속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따르려고 하면, 오히려 그 사람을 통해 내가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모든 상황이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어떻게 확신하는가? 내가 당면한 상황이 예수님과 연결되기 전에, 예수님이 당면하신 상황이 나와 연결 되어있음을 먼저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5) 그가 경험하신 일이지만, 내가 겪었어야 할 일인 줄 믿는가? 그분이 경험하신 것이 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면, 내가 경험하는 모든 일도 이제는 그분과 연결된 일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기 전에 상황을 자세히 보라.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하기 전에 외면하던 사람을 보라. 상황과 사람 속에 분명히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 그 순간에는 모르는데, 지나고 나면 내 삶에 스쳤던 상황과 사람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됨을 깨닫게 될 때가 있습니다. 관련된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25장 39-40절을 읽어봅시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무엇을 묻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언제 섬겼다고 대답하십니까? 하나님과 쉽게 연결짓지 못하고 있는 내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4-5] 이사야 53장 5절을 읽어봅시다. 그가 경험하신 일은 누구와 연결되어 있었습니까? 그 일을 통해 내가 얻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상황과 사람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앞으로 그렇게 바라보아야 할 내 상황과 사람들도 소개해 봅시다.

지겨운 감사도 다시
(8. 2. 2026.)

시편 103:2

 

감사는 지나간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분명히 그때는 감사했는데, 오늘의 일들에 매몰되면 어느새 내 삶엔 감사할 거리가 사라진다.

 

하나님은 감사한 것을 다시 기억해내기를 명하시는 분이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편 103:2)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이다. 그 입은 은혜에 대한 반응은 기억하는 것이다. 표현하고, 헌신하고, 나타내는 일이 없는 감사는 ‘잊혀지는’ 감사이다. 감사는 달아난다. 꼭 붙잡아야 한다.

 

당연하고 지겨운 감사를 다시 시작하라. 당연한 것이었던 것을 새삼스럽게 감사하다고 표현해보라. “나랑 결혼해 준 것 정말 고마워” 갑자기 돈 필요해 졌냐고 묻거든, 진짜 그냥 고마워서 말해봤다고 대답하라. 그럼 진짜 돈이 나올지도 모른다. “선생님이 제 선생님이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네가 나의 친구로 존재해줘서 정말 고마워”, “팀장님 만난 것이 저한테는 인생의 복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했던 말이, 당연한 말이라는 것이 포인트이다. 지겨운 말이라는 것이 포인트이다. 그러나 감사는 표현할 때 지겹지 않아진다. 표현하는 순간, 내가 정말 감사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당연한 말을 내뱉어야 한다. 했던 말을 또 해야 한다. 당장 당연한 것을 하나 붙잡고, 상대에게 표현하라. 서운하고 서먹해졌던 모든 관계가 다시 풀릴 것이다.

 

내가 왜 기억해야 하는가? 그가 나를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먼저 경험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3:43) 그분이 나를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나를 실제로 영원히 살게한다는 것을 믿는가? 기억의 능력은 위대한 것이다. 그가 나를 기억하신다는 강력한 권세를 믿는다면, 나도 끝까지 귀한 것을 기억해주라. 그 감사를 통해서 그 사람도 살고, 관계가 회복되는 역사가 있을 것이다.

 

새로운 감사할 일들을 찾아다니지 말라. 지금 존재하는 당연하고 지겨운 것들을 감사의 제목들로 바꾸어보라. 그리고 뻔한 말을 내뱉으라. 나는 당신이 이 시대 한사람교회에 성도가 되어주어서 정말 감사하다. 그리고 설교 때 졸지 않고 유머에 크게 웃어줘서 감사하다. 당연하지만, 앞으로도 그래줬으면 좋겠다.

 

[1] 참 감사했던 일이었는데, 지나고 나면 또 시들해집니다. 감사의 유효기간이 짧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시편 103편 2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은혜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라고 명하십니까? 당연하고 지겹기 때문에 굳이 표현하거나 반복하지 않았던 감사의 내용들은 무엇입니까?

 

[4-5] 누가복음 23장 43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은혜를 잊지 않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나를 마지막 날 기억하실 것임을 믿으십니까? 내 삶에 지겹고 평범한 감사를 표현했을 때 나타났던 변화를 나누어 봅시다. 지금 다시 감사해야 할 제목을 찾아서 표현해 봅시다.

판단의 절제
(7. 26. 2026.)

로마서 2:1

 

판단은 순식간에 바뀐다. 좋아하는 찬양 인도자가 있었다. 갑자기 옆에 있던 전도사님이, “이 사람 청소년 때 애들 패고 다녔어요”라고 했다. 갑자기 은혜가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별 매력 없는 형제인 줄 알았다. 나중에 어마어마한 헌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르게 보였다. 아무리 잘 가르치는 선생도, 내 자녀 함부로 대하면 그때부터 인정할 수 없다. 무엇을 알고 경험했느냐에 따라, 판단은 달라진다.

 

신자들은 어느 때에든지 자신의 판단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로마서 2:1) 내 판단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최종 판단은 하나님께 있다. 신자는 어떤 상황에서든 나를 절대적으로 옳게 여기거나, 상대를 절대적으로 무시하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당신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대를 대하는 태도의 옳고 그름도 심판하신다는 것을 명심하라.

 

판단에 대해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 (1) 끝까지 몰아붙이지 말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를 너무 심하게 조롱하는 방식으로 공격해서는 안 된다. 당해보면 안다. 나도 그런 날 온다는 것을. 자꾸 상대를 몰아가면, 그런 판단을 돌려받게 될 것이다. 나랑 다른 편이어도 적당히 하라. 바울이 자기는 죄가 없는데 몰아 붙이니 대제사장에게 조금 심하게 말한다.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사도행전 23:3) 그러다가 대제사장인 것을 알자 바로 사과한다.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23:5)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존중과 절제가 있어야 한다. 심하게 때리지 말라. (2) 상대의 판단에 너무 반응하지 말라. 판단은 영적인 것이다. 반박하고, 복수하고, 처벌하는 데에 집중해선 안 된다. 상처 받았다고, 피해자라고 말하지 말라. 주님 주신 길을 계속 걸으면, 아무리 비난해도 하나님 뜻이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사람들의 판단 앞에 서셨다.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마가복음 15:29-30) 예수님의 대답은, 판단의 절제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누가복음 23:34) 죄인을 끝까지 몰아붙이지 않으신 예수님의 성품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음을 믿는가? 당신에게 구원이 임한 방식으로 상대를 대하라. 판단의 절제가 신자의 성품이다.

 

그 어떤 나쁜 사람, 그 어떤 다른 의견이라 해도, 극단적 정죄와 조롱은 빼라. 기다려주고, 늘 존중과 여유의 태도를 견지하라. 당신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하나됨과 화평이 임할 것이다.

 

[1] 판단이 순식간에 바뀐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들의 판단이 모두 다름을 경험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로마서 2장 1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명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열심히 남들을 판단하고 다녔지만 나도 같은 사람이었음을 경험하며 겸손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가복음 15장 29-3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은 어땠습니까? 누가복음 23장 34절을 읽어봅시다.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판단은 어땠습니까? 둘 중 어떤 판단의 자세가 내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습니까? 판단의 절제 속에 변화와 유익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팔리는 시간의 주권
(7. 19. 2026.)

마태복음 26:1-2

 

‘바른 결정’을 해봐야 소용없다. ‘바른 시간’을 알지 못하면 끝이다. 사업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업황이 안 좋아질 줄 누가 알았나! 타이밍을 잘못 맞추면 열정도 소용없다. 부동산 좋은 걸 누가 모르나! 집 살 타이밍을 놓치면 버스가 떠난다. 이직, 퇴직, 공부, 결혼의 타이밍이 중요하다. 이 시대는 놓친 시간, 잘못 잡은 시간 때문에 내 구원도 사라졌다고 믿게 만든다.

 

하나님은 언제나 시간의 주인이 되신다. 예수님은 자기가 팔릴 정확한 날짜가 언제인지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마태복음 26:1-2) 예수님이 팔리는 시간은? 딱 이틀 뒤였다. 하나님은 모든 일이 일어나는 정확한 시간을 알고 계신 분이다. 세상이 시간의 무서움으로 위협할 때, 우리는 끝까지 시간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시간의 정죄감을 복음으로 물리치라. (1) 잘못된 타이밍도 모두 구원받는다: 인생에 분명히 잘못되어 보이는 시간의 결정들이 있다. 왜 그때 준비하지 않았을까, 왜 이 사업을 지금 벌였을까, 왜 그때 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왜 지금 이 주식에 들어갔을까… 타이밍의 정죄가 있을 때, 하나님께 나아오라. 세상은 내 잘못된 시간의 결정을 구원해주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증인 되어야 할 타이밍에 세 번이나 부인했다. 가장 중요할 때 삐끗했어도, 가장 중요한 분이 가장 유익한 것 주신다. (2) 기다리는 타이밍도 주님께 있다: 예수님이 팔릴 날은 이틀 남았었다. 나는 언제 결혼할까? 내 공부는 언제 빛을 보나? 하나님은 시간을 가지고 장난치지 않으신다. 더 기다리는 것은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시간을 향한 과정이다. 주님은 내 인생의 앞으로의 때를 모두 주관하신다.

 

예수님이 정확한 시간에 팔리셨고, 정해진 시간에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분이 한가지 더 아시는 시간이 있다. 당신이 죽는 날이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누가복음 12:20) 당신이 죽음에 팔리는 날, 당신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가능하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내 마지막 죽는 타이밍도 ‘영생으로 다시 사는’ 날이다. 오늘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 시간 때문에 생긴 모든 원망, 기다림, 불안을 예수님께 드리면, 내게 가장 좋은 구원의 때를 주실 것이다.

 

시간의 위협에 속지 말라. 조급함, 아쉬움, 절망에 사로잡히지 말라. 시간으로 장난치는 시대에도, 시간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1] ‘결정’보다 ‘타이밍’이 중요해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타이밍 때문에 유익을 얻었던 / 어려워졌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26장 1-2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자신이 팔리는 시간을 언제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알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이 시대의 시간의 위협 앞에서 가장 후회스럽고 마음이 위축되어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4-5] 누가복음 12장 20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서 알고 계신 또 하나의 시간은 무엇입니까? 내 인생의 마지막 날 내 인생의 구원을 기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지금 죽으면 천국에 갈 자신이 있습니까? 근거는 무엇입니까? 오늘도 후회되는 시간을 뛰어넘어 구원을 소망해야 할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어려울 때도 그의 나라
(7. 12. 2026.)

마태복음 6:33

 

투자 세계의 명언이 있다. “하락할 때 주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상승할 때도 없다.” 미리 심고 기다린 사람, 어려운 시절을 거친 사람만이 열매도 누린다는 것이다. 심지도 않아놓고 남들이 거두는 시기에 입맛 다셔봐야 소용없다. 나는 내가 심은 것을 거두어야 한다.

 

신자는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이 말씀에 없는 것은? 예외가 없다. 병든 사람 예외, 가난한 사람 예외,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 예외가 아니다. 상황이 안 좋아서 헌신을 못하는가? 상황이 좋은 사람에게 물어보라. 너무 바쁘고 부유해서 헌신을 못한다고 한다. 다 핑계다. 당신이 누구든 당신이 직접 하나님 앞에 심은 것을 거두게 된다.

 

상황을 핑계 대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선순위를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을 점검하라. (1) 가정과 직장: 상처 탓, 남 탓 하지 말고 사랑과 섬김으로 배우자와 자녀를 끝까지 사랑하라. 감사로 일하고, 철저히 일하라. 지금 심으면 바뀐다. (2) 교회: 공부로 바쁠 때 예배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너무나 바쁠 때에도 시간을 내어 선교에 가고 헌신에 참여하라. 교회는 모든 복의 통로다. (3) 재정: 알바 신세에, 비정규직일 때에도 철저히 헌금하고 십일조 하라. 가난을 벗어나게 하시는 분은 주님 뿐이다. (4) 환대: 가장 피곤하고, 나의 삶에만 매몰될 때, 박차고 나가 사람들을 초대하고 남들을 격려하라. 어려울수록 심지 않으면, 모든 것을 더하시는 축복은 나에게 없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자신을 던지신 분이 예수님이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가복음 14:36) 그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삶 전부를 십자가에 심으신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에게 그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음을 믿는가? 앞으로 내가 잘하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이 이미 잘 해 놓으셨기에, 여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바보라는 말이다.

 

가장 어려울 때 목사 되기로 결심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 심었으니, 지금 거둔다. 그래서 두렵다. 지금 심는 것이 없을까봐! 다음 10년을 위해서는, 지금 10년 심어야 한다. 같이 인생 전체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심으러 가자.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 126:6)

 

[1] 오래 전 힘들 때부터 심었을 때에만, 수확을 경험한다는 것을 경험하거나 주변에서 관찰한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6장 33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명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에 예외는 누구입니까? 내 삶의 상황은 어떠하며, 그 상황이 말씀을 어떻게 회피하게 만드는지 나의 핑계의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4-5] 마가복음 14장 36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심으셨습니까? 내가 거두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조건입니까, 이미 이루어진 약속입니까? 이 약속이 실제임을 믿고, 내가 거두었던 간증과, 앞으로의 다짐을 나누어 봅시다.

몰라주면 감사
(7. 5. 2026.)

마태복음 6:3-4

 

제일 억울한 것은? 상대가 내가 한 일을 몰라주는 것이다. 한사람교회가 장소 대관 하던 시절, 몇 년 간 주일 아침마다 양복입고 화장실 청소를 했다. 혹시 모르고 넘어갈까봐 말해 놓는 것이다. 내가 책임졌던 것, 내가 몰래 도운 것, 내가 참아준 것, 상대는 모른다. 알아주길 그렇게 바라는 건 아니지만, 억울할 때가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몰라줄 때 일하시기 시작하는 분이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3-4) 내가 무엇을 해도 상대가 몰라줄 때, 억울해 하지 말고 감사하라. 사람이 몰랐던 것은 하나님이 직접 챙겨서 갚아 주신다. 신자는 상대방의 ‘인지 여부’가 행동의 동기가 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사람이 알아주면 감사하라. 하지만, 사람이 몰라줄 때도 감사하라! 사람이 몰라주는 것 때문에, 열정과 한결 같은 성실은 사라지고, 억울함만 토로하고 있지는 않은가? 상대가 알아주기 만을 기다리는 것은 결국 사람을 의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몰라주는 그 상황을 감사로 바꾸라. 사람이 모르는 곳에서 여전히 주님의 시선을 인식하기 시작할 때, 사람이 모르는 곳에서 갚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청년 때 정말로 열심히 전도했다. 전도한 것만큼 열매가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사람교회가 개척되는 과정 중에 하나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을 느낀다. 그분만 아시면 된다.

 

모든 것을 아셨지만, 그 억울함을 아버지께만 토로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누가복음 23:34) 십자가에 못박히는 목적을 아무도 몰라줬을 때, 아버지를 의지하신 예수님의 공로로 내게 구원이 임했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오늘도 동일한 구원이 내게 임할 것이다! 아무도 몰라줄 때, 절대 억울해 하지 말라. 죽음에서도 살리신 그분이, 나도 살리실 것이다.

 

남들이 모르는 선한 일을 계속해서 실행하라. 사람 눈치 보지 말고 꾸준히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라. 알아주면 땡큐다. 그러나 몰라줘도 좋다. 아무도 몰라줄 때도 억울한 표정 하지 않고 즐겁게 일하는 사람을 보고 싶다. 몰라주면 감사다.

 

[1] 알아주지 않을 때 가장 억울합니다. 내가 생활하는 곳에서 남들이 내가 하는 것을 몰라줘서 억울했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예 – 집안 일, 실수한 일 넘어가주기, 열심히 중보하기 등)

 

[2-3] 마태복음 6장 3-4절을 읽어봅시다. 신자들은 구제를 할 때 어떻게 해야합니까? 사람들이 몰라줄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서, 내 모든 생활이 억울함과 불만으로 바뀐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누가복음 23장 3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그 목적을 알았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그 결과 우리는 무엇을 누릴 수 있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누군가 몰라줄 때에도 즐겁게 삶을 감당하기 위한 결단들을 나누어 봅시다.

싸우지 않는 오류
(6. 28. 2026.)

히브리서 12:4-5

 

패션 사업체를 운영하는 젊은 형제님께 물었다. “원래 이런 유행에 관심 없으시지 않았나요?” 이렇게 답했다. “관심 없죠. 하지만 살아 남아야죠. ‘난 정말 유행에 관심 많은 사람이다’ 생각하며 살다 보니 바뀌더군요.” 세상엔 안 되는게 참 많지만, 악바리로 달라 붙으면 되는 것도 많다.

 

하나님은 우리가 피흘리기까지 성장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히브리서 12:4-5) 하나님의 형상까지 죄를 버리고 탁월해지는 과정을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한다. 성화는 하나님이 내게 행하시는 은혜이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의지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일이다.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탁월함을 향해 싸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류이다.

 

내가 의지를 가져야 할 곳에서 하나님을 말하는 오류를 점검하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라고 말하면 안 되고,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알기에 나도 일해야 하는 것”이다. 포기할 영역이 아니라 끊임없이 싸워야 할 일이다. (1) 하나님을 향한 경건을 점검하라: 변화와 탁월함을 바라기에 더 예배하고, 더 기도하며, 더 말씀보기를 철저히 갈망하고 있는가? 방구석에도 하나님이 계시겠지만, 그분이 당신을 세우기 원하시는 곳은 예배의 자리이다. (2) 삶의 현장 속의 경건을 점검하라: 삶의 태도와 성품을 훈련하고 있는가? 더러운 성격, 소심한 성격, 험한 말투, 분노, 나태, 게으름, 질투, 교만을 그대로 둘 것인가? 의지를 가지고 변화되는 자에게는 분명히 다른 열매가 있다.

 

아무리 실패해도, 끊임없이 내가 변화를 시도한 것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립보서 1:6) 예수님이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실패의 저주를 가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믿는가? 내 죽음도 영생으로 바뀜을 믿는다면, 오늘 열심히 시도하라. 끊임없이 시도하라. 정말로 예수님이 내게 새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믿는 자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한사람교회 온 이후에 몇 년이 지났는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가? 절대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시도하라. 계속 일어나고, 계속 싸우라. 앞에서 간증하고 있는 리더와 선배들을 (좋은 뜻으로) 우습게 보라. 당신은 더 큰 일을 할 사람이다.

 

[1] 정말 마음이 내키지 않고, 할 줄도 모르는데 억지로 의지를 가지고 꾸역꾸역 했더니 결과가 나왔던 삶의 경험들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히브리서 12장 4-5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무엇을 책망하고 계십니까? 성화란 무엇입니까? 성화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내가 의지를 가져야 할 일에 하나님 핑계를 대고 있는 삶의 영역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빌립보서 1장 6절을 읽어봅시다. 나의 변화는 분명 끝이 좋을 것임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내 인생이 죽는 날 내 끝은 어떻게 변합니까? 예수님 안에서 오늘 내가 자신있게, 끊임없이 시도해야 할 성화의 다짐들을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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