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재미
(10. 22. 2023.)

마태복음 7:7-8

 

재미를 느끼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골프 마니아들을 만나보았는가? 조그마한 홀에 공 넣는 게 뭐가 재밌다고 야단인지 이해 불가다. 그런 말하던 사람들이 골프를 배우더니 필드에 제일 많이 나간다. 운동이 힘들고 재미없다고? 당신은 아직 근육이 찢어지며 느껴지는 쾌감까지 못 간 것이다. 언제나 재미의 영역으로 나아가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신자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누리는 최고의 재미는 기도 응답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태복음 7:7-8) 처음엔 기도해봐야 하나도 응답되지 않았다고 투덜거린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며 점점 기도의 재미를 느낀다.

 

재미를 느낄 때까지 좀 더 끈기 있게 기도하라. 기도는 내 인생 전체의 무게를 거뜬히 들어올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무기이다. 인생 짐이 너무 무거워도 괜찮다. 도저히 답이 안 나와도 괜찮다. 다른 재미를 찾지 말고 그때 좀 더 집중적으로 기도해보라. 어떤 상황에 있든지, 그 상황을 궁극적으로 해결할 가장 효과적인 길은 기도에 힘쓰는 것이다. 당신은 인생의 무게에 비해 너무 적게 기도하고 있다. 기도의 재미를 누리기 전에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있다.

 

예수님을 잡으려는 자들이 포위망을 좁혀왔다. 잘 풀리지 않는 것 같을 때, 예수님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삶의 자세가 있다. 기도였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누가복음 22:44)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 삶에 있던 죽음의 세력을 멸하고 우리의 미래를 부활과 기쁨으로 바꾸어 놓았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오늘도 내 삶에 흐르고 있음을 믿는가? 그것을 누리기 원한다면, 인생이 재미없을 때 기도하라. 기도도 재미없을 때, 조금 더 기도해보라. 기도가 삶 전체를 뒤집어,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것이 기도의 재미이다.

 

[1] 재미를 느끼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정말 재미 없는 일이었는데, 배우고 시간이 지나며 재미를 느꼈던 삶의 영역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7장 7-8절을 읽어봅시다. 신자들에게 주시는 기도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기도에 실망하고, 기도에 꾸준하지 못하여 쉽게 포기하게 되는 기도제목들을 나누어 봅시다.

 

[4-5] 누가복음 22장 44절을 읽어봅시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이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취하신 마지막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기도는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 기도의 재미를 느꼈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앞으로 더 기도해야 할 제목들과, 변화되어야 할 기도의 태도들을 나누어 봅시다.

“공간의 주인
(10. 15. 2023.)

마태복음 28:18

 

어떤 장소에 가면 긴장하고, 어떤 장소에 가면 풀어진다. 왜 긴장하는가? 그곳에는 눈치 봐야 할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왜 풀어지는가? 그곳은 내가 주인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공간의 주인 되시는 분이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태복음 28:18) 공간의 개념으로 하나님의 권세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공간의 통치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한다. 신자의 삶에 벌어지는 가장 큰 변화는 장소에 따라, 공간에 따라 삶의 주인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 가장 긴장하며 눈치 보는가? 그 곳에서도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명심하고 평안과 자신감을 회복하라. 언제 가장 풀어지며 내 마음대로 하는가? 내가 주인 된 곳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깨어 있으라. 사무실, 회장님실, 수술실 등 긴장하는 모든 공간에서도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반대로, 내 방, 내 집, 데이트하는 공간에서도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주인이 나인 것처럼 행하지 말라. 소리지르고, 싸우고, 방탕하게 살 수 없다. 하나님이 주인이신 공간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약해지는 공간은 어디인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 공간의 압박을 받으셨다. 그분은 마귀와 독대하는 고립된 공간 속에서 승리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태복음 4:1), 그분은 모두가 바라보는 대중이 모인 공간에서 승리하셨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마가복음 15:29-30)

 

모든 공간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이, 내 영원한 공간 천국을 마련해주셨음을 믿는가? 그 믿음은 모든 공간에서 공간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섬기는 방식으로 드러나야 한다. 공간마다 바뀌는 나의 생활 방식을 청산하라. 가정과 직장, 홀로 있을 때와 대중 앞에 섰을 때의 한결같음으로 그분을 섬기라. 하늘과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1] 내가 가장 긴장하는 공간은 어디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내가 가장 풀어지는 공간은 어디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공간의 주인’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해 봅시다.

 

[2-3] 마태복음 28장 18절을 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내가 다른 주인에 굴복하거나, (2) 내가 주인이 되어 행세하는 두 가지 방향에서 가장 약해지는 나만의 공간은 어디입니까?

 

[4-5] 마태복음 4장 1절과 마가복음 15장 29-3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승리를 거머쥐신 분입니까? 그분을 믿는 자에게는 어떤 공간이 선물로 주어집니까? 내가 일상의 공간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 위한 변화의 다짐들을 나누어 봅시다.

“성장의 연료
(10. 8. 2023.)

에베소서 4:15-16

 

기름을 넣어야 차가 간다. 연료가 있어야 결과가 있다는 말이다. 학위를 위해서 고생했던 돈을 다 합쳐보라. 집 하나 산다. 자격증 따려고 얼마나 시간을 쏟았는가? 애 하나 키우는데 인생을 바치기도 한다. 모든 성장엔 연료가 필요하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나기 위해 필요한 연료는 사랑이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으므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에베소서 4:15-16) 앞 뒤에 ‘사랑 안에서’가 반복된다. 무슨 일이든 그 사람 사랑하는 마음으로 실행하면, 그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 안에서 성장한다는 보장이다.

 

결정적으로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생각해보라. 끝까지 나를 사랑하고 인정하는 몇몇 사람들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사람 끝까지 사랑하고 아껴주는 일이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다른 연료를 주려고 하지 말라. 성장을 보채지 말라. 경쟁에 뒤쳐진다고 조급해 하지 말라. 연료만 계속 주라. 사랑만 주라. 이걸 놓쳐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수 있었던 연료는 무엇이었는가?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요한복음 10:17)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심을 알기에 목숨까지 버릴 수 있었다. 목숨 버리시면서까지 주님이 나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임을 믿는가? 내가 주 안에서 성장했던 방식으로 당신도 사랑을 베풀 차례다.

 

장성하게 성장한 후 돌변하여 갑자기 바리새인 되지 말라. 주변에 지적하며 훈수 두러 다니지 말라. 내가 성장했던 연료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공급해주라. 사랑만 주면서 기다려보라. 연료만 충분하다면, 분명 그는 앞으로 갈 것이다.

 

[1] 성장을 위해서는 연료가 필요합니다. 인생에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쏟아부었던 시간, 돈 등 각종 연료를 태웠던 경험을 나누어봅시다.

 

[2-3] 에베소서 4장 15-16절을 읽어봅시다.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몸된 지체로서 세워져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누리면서 성장했던 나의 경험담을 나누어 봅시다. 어떤 사건이, 어떤 사람이, 어떤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4-5] 요한복음 10장 17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도 분명한 성장을 믿으며 끊임없이 사랑을 공급해야 할 삶의 상황들을 나누어 봅시다. 어떤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가족이라는 사명
(10. 1. 2023.)

디모데전서 5:8

 

무엇이 나를 방해한다고 느끼나? 방해한다고 느끼는 것이 내가 소홀히 하는 것이다. 직장 일이 바쁘고 가정 일도 바쁘다. 직장이 가정을 방해하는가? 아니면 가정이 직장을 방해하는가? 방해한다고 느껴지는 것이 내가 더 소홀히 여기는 것이다. 게임을 하다가 여자친구 전화가 왔다. 게임이 방해되는가, 여자친구가 방해되는가? 사람은 무언가를 더 중요하게, 무언가를 더 소홀히 여기며 산다.

 

하나님은 가정을 챙기는 것을 사람의 사명으로 여기시는 분이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디모데전서 5:8) 가족을 돌보지 않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이 되지 않는 죄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지 점검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렇게 계속 가면 가족을 더 잘 챙길 수 있는 구조가 되는가?”

 

가족이 나를 방해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돈 버는 일 어렵지만, 돈 벌어야 하는 것처럼, 가족 챙기는 일 어렵지만, 가족 챙겨야 한다. 가족이 나를 방해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동등하게 중요한 사명으로 바라보라. 쉬운 부서, 어려운 부서 있는 것처럼 평안한 가족, 어려운 가족 다 있는 것이다. 자기연민과 분노와 답답함에서 벗어나라. 끝까지 돌보려고 하는 그 헌신으로, 가족을 버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예수님의 마지막 사명은 가족 챙기는 일이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한복음 19:27) 예수님이 온전히 나를 구원하셨다는 말은, 순종을 소홀히 하는 부분이 없으셨다는 말이다. 주님의 순종으로 내가 구원 받았음을 믿는가? 그 길이 생명의 길임을 믿고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십자가 위에서도 가족 돌봄의 순종을 소홀히 하지 않으시면서 나를 하나님의 가족 삼아 주셨으니, 내가 많이 어려워도 늘 가족 돌보면 주님께 영광이 된다.

 

가족 너무 험담하지 말라. 잠잠히 오늘 내가 무슨 일과 무슨 말을 하면 작게 나마 가족에게 기쁨이 될지 생각해보자. 가족을 위한 기도를 오랜 기간 잊지는 않았는가? 오늘 우리 서로 가족 기도를 부탁해보자. 가족은 신자들의 위대한 사명이다.

 

[1] 내가 중요한 일로 바쁠 때 방해된다고 생각되어 소홀히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혹시 그것이 가족이 된 적은 없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디모데전서 5장 8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내 인생의 미래의 계획에 이 부분을 고려한 적이 있습니까? 요즘 가족에 대해 회피하고 싶은 어려움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4-5]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소홀히 여기지 않고 순종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그분의 완전한 순종으로 나는 누구의 가족이 되었습니까? 그분의 자녀로 다시 돌아보아야 할 나의 가족을 위한 기도제목을 나누어 봅시다.

“분위기를 통한 회심
(9. 24. 2023.)

사도행전 16:14-15

 

한 회사만 다니면 분위기를 모른다. 이직해봐야 분위기의 차이가 무엇인지 이해한다. 혼자 살면 다 이렇게 사는 줄 안다. 결혼해봐야 집안 분위기라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 나는 내가 살아온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서 이런 기질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분위기를 통해서도 회심 시키시는 분이다. 루디아라는 사람이 처음 회심한다. 그런데 그 집안 사람들도 갑자기 다 믿게 된다.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사도행전 16:14-15) 루디아가 믿는 건 좋다. 그런데 그 집도 다 세례를 받았다. 무슨 영향을 받은 것인가? 집안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 두 명 믿으면서 모두 믿게 되었다. 분위기에는 힘이 있다.

 

분위기를 통한 영향력을 기대하라. 전도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일단 교회에 데려다만 놓아도 효과가 있다. 분위기 때문에 변한다. 내 스스로 잘 변하지 않을 때, 그냥 모임에 계속 참석해 보아라. 어느새 내 생각과, 언행과, 사고방식이 바뀔 때가 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8:20) 성도가 있는 곳에는 성도만이 뿜어내는 분위기가 있다. 내가 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내가 그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기대하며 머물러야 한다.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사건 때, 분위기로 구원받은 자가 있다. 십자가 옆 강도이다. 예수님은 강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분위기였다. 옆에 매달려 있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이 사람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 같았다. 강도가 먼저 말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 예수께서 이르시되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3:42-43) 주님 주변에 머물렀는데 구원이 임했다.

 

난 십자가 옆에 없는데, 어떻게 나에게도 주님이 일하실까? 하나님의 분위기가 있는 사람과 장소에 나를 계속 밀어 넣으실 것이다. 거부하지 말고 계속 머물러 있어보라. 분위기가 당신을 변화시킬 것이다. 내게 선한 분위기가 온다면, 기대하라. 그 안에만 있어도 산다.

 

[1] 집안, 장소, 사람마다 확실한 분위기의 차이가 있음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사도행전 16장 14-15절을 읽어봅시다. 루디아가 믿은 후에 그 집안에 벌어진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교회나 가정, 친구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변화 되었던 삶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4-5] 누가복음 23장 43절을 읽어봅시다. 강도는 어쩌다가 구원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요즘 내 삶에 분위기로 다가오시는 것을 느끼는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졸던 그분
(9. 17. 2023.)

사도행전 12:6

 

사람의 불안이 분명하게 밖으로 표출되는 현상은 무엇인가? 잠이 안 오는 것이다. 잠을 위해 약을 먹는 시대가 되었다. 걱정과 불안, 염려와 긴장감은 우리의 잠을 빼앗아 간다.

 

하나님께 맡기면 잠이 회복된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베드로 죽일 준비를 했다. 잡아 놓고 사형 날을 잡았다. 사형 집행 바로 전날 베드로는 무엇을 하였나?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사도행전 12:6) 누워 잤다. 내일 내가 죽는데 잠이 오는가? 그는 잤다. 보이지 않는 염려와 근심을 주께 맡기니, 실제적으로 삶의 물리적인 질서와 평안이 회복된 것이다.

 

너무 피곤해서 머리만 베개에 닿으면 잔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역으로 물어보라. 그렇게 피곤할 정도로 밤새 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무리 억울해도 주말이 되면 잠도 안자고 실컷 놀고 먹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 질문해보라. (1) 내가 홀로 있을 때 곧바로 내 생각을 사로잡는 나의 주된 이슈는 무엇인가? (2) 다른 것에 몰두하면서까지 생각을 지워버리고 싶은 염려는 무엇인가? 매출? 자녀? 건강? 결혼? 진로? 그 영역을 주님이 붙들고 계시다는 확신속에 열심을 내는가? 아니면 내 열심과 걱정으로 확신을 대체하고 있는가?

 

아무리 그래도 베드로는 정신 나간 것 같다. 그런데 베드로가 잠을 자는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넜을 때 광풍이 불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마가복음 4:38) 베드로는 왜 잘 수 있었는가? 이제 이해가 된다. 베드로는 광풍 앞에서 ‘졸던 그분’을 보았다. 베드로에게 광풍은 죽음이었다. 예수님께는 잠자도 될 문제였던 것이다.

 

그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셨다. 죽음도 ‘자는 것’으로 바꾸어주셨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린도전서 15:20) 믿는가? 그분만 계시면, 어떤 큰 잎 앞에서도 난 염려 내려놓고 잘 수 있다. 잠이 안오는가? 풍랑 앞에 졸던 그분을 다시 바라보라. 주무시던 예수님이, 나보고 그만 염려하고 같이 잠이나 자자고 하신다. 이게 복음이다.

 

[1] 너무나 큰 염려와 두려움으로 잠이 오질 않았던 나와 주변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사도행전 12장 6절을 읽어봅시다. 사형 전날 베드로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수시로 떠오르는 내 인생을 사로잡는 문제는 요즘 무엇입니까?

 

[4-5] 마가복음 4장 38절을 읽어봅시다. 베드로는 감옥을 경험하기 전 예수님과 무엇을 경험하였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 2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들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내 인생이 예수님 안에서 죽음도 이미 이겼음을 묵상하며, 주님께 맡기고 평안과 잠을 되찾기를 원하는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사람의 단련
(9. 10. 2023.)

잠언 27:21

 

단련된 것은 다르다. 첫째 아이를 갓 낳고 힘들어하는 부부가 셋째를 다 키운 부모에게 물었다. “어떻게 셋째까지 키우셨어요?” 단련된 아이 셋 엄마가 답한다. “걱정하지 마. 셋째는 발로 키워.” 분명 단련에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인격을 단련하시는 분이다.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잠언 27:21) 칭찬받았더니 마음이 높아진다. 다 자기 아래 있는 줄 안다. 칭찬받아봐야 자기 마음의 연약함을 안다. 그러면서 다시 낮아진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환경은 나의 인격의 단련을 위한 도구일 때가 많다.

 

사람은 사람과 부딪치며 단련되어야 한다. 혼자 조용히 사는 사람이 자기 성격 제일 좋은 줄 안다. 착각이다. 직장에 들어가고, 말도 안되는 위아래 사람 만나고, 결혼하고 자녀를 키우며 온갖 사람을 만나봐야 한다. 날카로운 말도 들어보고, 사람들이 날 싫어하는 눈치도 좀 느껴봐야 한다. 말하고 싶을 때 참는 것도 배우고, 갈등을 잠재우는 법도 배워야 한다. 진상 고객도 만나야 한다. 그래야 단련된다. 오늘 너무 편하게 살려고 하지 말고 부딪치러 나오라. 처음엔 피곤한데, 어느새 단련된 나를 만나게 된다.

 

예수님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마지막 그분의 인격으로 이루어졌다.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마가복음 15:30) 예수님의 인격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구원이 달라지는 문제였다. 그분은 침묵하고 십자가에 머물기로 하신다. 그분의 완벽한 인격이, 나의 삶을 죄에서 구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격 단련에는 분명한 보장이 있다. 예수님의 완벽한 인격이 나의 구원을 위해 사용되었으므로, 분명 하나님이 단련하신 나의 인격은 나의 구원을 위해서 사용될 것이라는 보장이다. 오늘 사람과 부딪치는 일을 주저하지 말라. 더럽고 미련한 내 성격을 인정하고 마주하라. 팀모임으로 단련된 성품을 기대한다.

 

[1] 단련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품과 실력이 깎이고 다듬어지며, 다른 결과를 내었던 나와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본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예 – 회사 수십년 경력의 상사, 나이 많은 존경받는 어른, 다자녀 부모, 오랫동안 팀을 맡아온 교회 리더 등)

 

[2-3] 잠언 27장 21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무엇을 연단하시는 분입니까? 나의 특정한 시기, 특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나의 인격을 연단하신다는 것을 느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가복음 15장 3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의 마지막 구원 사역을 승리로 이끌었던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단련하시는 나의 인격은 무엇을 위해서 사용됨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오늘 부딪침을 주저하지 말고 내가 어떤 자세로 인격을 다듬어 가야 할지 삶의 다짐들을 나누어 봅시다.

“여전한 순종의 이유
(9. 3. 2023.)

마태복음 7:24-25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내 죄를 다 용서하셨다. 용서하셨는데 여전히 순종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너무’ 신뢰하다 보니 요즘은 내 모습이 점점 나태해지고 안일해지는 듯하다.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지 않는다. 약속 때문에 순종한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가 무조건 잘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태복음 7:24-25) 순종하는 자는 반석위에 집을 지은 자와 같다. 행복과 기쁨을 보장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죄인인 나에게 이 약속을 주셨다.

 

욕심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순종하라. 벌 받을까봐 억지로 하는 순종이 아니다. 형벌은 모두 예수님이 가져가셨다. 이제 내가 하는 순종은, 하나님이 나의 태도와 모든 행위를 감찰하시며, 그 행위를 기뻐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확신 속에 하는 것이다. 예수님 믿고 대충 산다는 말은 사실 여전히 “벌만 피하면 돼”라는 두려움에 기반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에베소서 5:1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욕심이 났던 적이 있는가? (1) 예배와 경건생활의 태도는 어떤가? (2)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하려 했던 적이 있는가? (3) 원치 않으시는 행동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주님을 믿는다면, 더 열정적으로 순종할 거리들을 찾아야 한다.

 

다 순종하셨는데, 완전히 망한 것처럼 보였던 분이 예수님이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브리서 5:8)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라”는 명령에 순종하셨다. 죽는 줄 알았는데, 다시 살았다. 나 대신 죽으라는 명령에 순종하신 그 분 때문에 내가 영생을 얻게 됨을 믿는가? 그 분 안에서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나를 살리려고 하신 분이, 내게 결코 손해가 되는 순종의 요구를 하실 리가 없음을!

 

순종은 정말로 가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수익률이 높은 것이다. 결혼할 배우자 찾는 것처럼, 집 값 오를 곳 찾는 것처럼, 급등할 주식 찾는 것처럼 순종할 거리를 찾으라. 그 순종 놓치면, 나중에 행복을 놓쳤음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신자는 여전히 순종한다.

 

[1] 예수님의 구원을 ‘너무’ 잘 믿다 보니, 오히려 나태해지고 대충 살게 되는 내 삶의 모습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7장 24-2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순종에 대해서 어떤 약속을 주십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을 때 순종의 이유는 어떻게 달라집니까? 순종으로 주어지는 약속을 충분히 가치 있게 여기지 못하는 내 모습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예수님은 어디까지 순종하셨습니까? 그 순종은 내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었습니까? 내게 순종하라 명하신 것이 복임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까? 오늘 새롭게 내가 순종에 도전해야 할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혼돈의 공존
(8. 27. 2023.)

마태복음 27:23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히 보이는 영역이 있다. 하지만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혼란이 계속 되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 헷갈린다. 하나님은 내 삶에 확실히 함께하시는 것이 맞는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혼돈이 공존한다. 내가 볼 때 헷갈려도, 하나님은 질서 가운데 일하고 계시다. 예수님이 구원이라는 큰 일을 하고 계셨다. 그런데 구원의 과정에는 혼돈이 공존했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마태복음 27:23) 분위기를 느껴야 한다. 이게 무슨 난장판인가? 사람들은 붐비고, 소리 지르고, 서로 싸우고, 사람들이 모여 모래 먼지는 풀풀 났을 것이다. 성경은 이것이 구원임을 묘사하고 있다. 구원은 혼돈이 공존한다.

 

오늘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가? 평안해도 된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언제나 혼돈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적용해보라. 마음먹고 교회를 오는데 교통사고가 나기도 한다. 은혜롭게 퇴근했는데 집안에서 대판 싸우기도 한다. 오늘 기도 열심히 했는데 하필 그날 자녀가 반항을 한다. 너무 바쁜 시기인데 갑자기 집안에 누가 아프다고 한다. 도대체 이게 뭐냐고? 바로 그게 구원이다. 놀리는 말이 아니다. 더 담대해야 한다. 더 정신차려야 한다. 혼돈을 뚫고 가야 한다. 하나님은 혼돈 속에 일하신다.

 

우리 삶의 혼돈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결코 가로막을 수 없음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 삶이 맞이할 가장 궁극적인 혼돈을 보면 된다. 그것이 죽음이다. 죽음은 인생이 영원히 생명을 떠나 혼돈에 빠지는 일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내가 경험해야 할 가장 큰 혼돈 속으로 들어가셨다. 죽음 속에 영생이, 지옥을 이기는 부활이 주어졌다. 믿는가? 그 믿음만 있다면 오늘 내 삶의 혼돈도 다시 해석된다. 이 혼돈은 내 삶에 저주도 아니고, 내 삶이 잘못 풀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의 혼돈 속에 나를 구원하신 그분이, 이 혼란스러운 삶 속에서도 마침내 주의 뜻을 이루시리라.

 

믿음 가지고 난장판을 걷는 법을 배우라. 혼돈 속에 계속 걷는 법을 배우라. 난리가 나도 괜찮다. 별의 별 일이 다 생겨도 믿음 지키리라. 구원은 혼돈 속에 옴을 믿기 때문이다.

 

[1]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한 부분과, 헷갈리고 혼란스러운 부분이 나뉠 때가 있습니다. 요즘 혼란스러운 삶의 영역은 무엇입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27장 23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구원 사역을 행하시는 과정에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분위기는 어땠을까요? 혼란스럽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이유만으로 믿음이 약해지고 있는 삶의 모습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내 삶에 궁극적인 혼돈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내 삶의 죽음 속에 들어가셔서 그 혼돈을 무엇으로 바꾸셨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혼란스러운 삶에 눌리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다시 붙들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봅시다.

“사랑과 변화의 분리
(8. 20. 2023.)

마태복음 5:46-47

 

왜 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다시 사랑할 것인가?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 사랑할 것이다. 여기서 사랑의 전제는 무엇인가? 그 사람의 변화이다. “변화되면 사랑할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과 변화가 분리되어 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태복음 5:46-47) 신자에겐 변화의 권한이 없다.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도 없다. 그걸 인정해야 편하다. 안되는 걸 하려고 하지 말라. 우리는 사랑은 불가능하고, 변화는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반대다. 내가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랑은 가능하다.

 

사랑하는 일과 변화시키는 일을 분리하라. 하나님만 사람을 변화시키실 수 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내가 해보려고 하니 인생에 너무 버겁고 열 받는 것이다. 변화시키려는 마음과 의도 자체를 목표에서 지워버리라. 목표는 사랑 뿐이다. 잘 해주고, 즐기고, 친해지면 모든 것을 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주님께 맡기라. 주님의 때에, 주님이 변화시키신다. 남편 아내, 부모, 자녀, 친구, 상사… 변화를 앞세우는 모든 곳에 분열과 미움이 있다. 사랑을 앞세우면 변화와 하나됨이 따라온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무엇을 하셨는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랑하는 것부터 하셨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한복음 13:1) 사랑하며 죽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 사건을 우리가 믿게 만드셔서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도록 변화시키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철저히 사랑에만 집중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화까지 이끄셨다.

 

내가 변화시키려는 고집을 내려놓으라. 훈계, 조언, 지적질로 잘 안 변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친해지고 사랑해보라. 변화의 영역을 주님께 내어드릴 때, 주님이 그 일을 완벽히 행하실 것이다.

 

[1] 그 사람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기까지도 중단되어 버렸던 모습이 있습니까? 나누어봅시다.

 

[2-3] 마태복음 5장 46-47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무엇을 명하고 계십니까? 신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남을 변화시켜 보려다가 고생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13장 1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참 인간으로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의 순종을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이루실 참된 변화를 기대하며, 내가 나의 관계 속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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