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게 받은 자의 죄
(9. 15. 2024.)

마태복음 25:24-25

 

주인이 사라지면 권리만 남는다. 스승이 있던 시절 제자는 권리를 말하지 않았다. 권리는 스승으로부터 오는 것이니까. 자녀는 부모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다. 부모로부터 권리가 주어질 뿐이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시대이다. 인생의 주인이 사라졌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모두가 내 권리만 찾는다. 나도 부자 될 권리, 나도 편안할 권리, 나도 힘든 일 안 할 권리, 나도 놀 권리. 인생의 주인이 사라지니, 남보다 내 삶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남이 내 인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나님은 내가 처한 모든 형편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다. 주인이 그 재능에 맞게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었다. 가장 적게 받은 자가 죄를 짓는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태복음 25:24-25) 왜 내게 한 달란트를 주을까? 내가 판단할 권리가 없다. 그 자체가 화가 난다면, 내 인생의 주인이 없어지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다는 증거이다.

 

내가 현재 처한 형편에 감사하지 못하고, 계속 화가나는 부분을 회개하라.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해야 하는지는 주인이 판단하시는 일이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why) 질문 자체가 틀렸다. 그건 주인이 생각하실 일이다. “나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how) 이것이 주인이 있는 사람의 질문이다. 더 실천적으로 적용해보겠다. 각 영역의 주인을 인정하라. 자녀라면 성인이 되기 전에 부모에게 함부로 토 달지 말라. 가정에선 부모가 주인이다. 부모와 잘 지낼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아르바이트생인 주제에 사장의 결정에 뚱한 표정 짓지 말라. 적어도 그 회사에선 그 사장이 주인이다. 어떻게 주인 마음에 들지를 고민해야 맞다. 교수와 선생님의 강의 앞에서는 그 방향을 일단 따르려고 하라. 그 수업 시간에는 그 교수님이 주인이다. 회사가 싫다고? 회사는 나를 좋아하는지를 묻는 것이 맞지 않을까? 각 영역의 주인과 윗사람을 인정하는 것이 적게 받은 자가 순종해야 할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를 가나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지 않고 주인을 인정한다. 왜? 자격 없는 자로서 주인에게 구원 받았음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하나님 앞에 가진 것 없는 내가 영생을 거저 얻었음을 알기에, 이 땅에 적게 받은 상황을 나는 결코 불평할 수 없다.

 

모두가 자기 삶의 주인이라고 하니, 회사와 학교와 조직이 도저히 운영될 수가 없는 시대이다. 시대는 적게 받은 자의 온전한 순종을 찾고 있다. 어디 가서 제발 주인 좀 인정하라. 주어진 것 감사히 받고 일해보라. 아마 훨씬 빨리 주인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1] 나에게 권리가 없음을 인정하며 살다가, 모든 게 내 권리라고 생각될 때 시대는 어떻게 바뀌게 되었습니까? 모두가 권리만 주장하며 자신의 형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대의 변화를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25장 24-25절을 읽어봅시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을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지은 죄는 무엇입니까? 내 삶에 가장 불평이 많아지고,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삶의 영역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로마서 5장 8절을 읽어봅시다. 신자가 인생의 주인에게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내 영적인 정체성을 회복할 때, 그것을 믿을 때, 오늘 적게 받은 상황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평가받을 수 있는 귀
(9. 8. 2024.)

잠언 9:9

 

무서워서 남에게 뭐라고 말도 못하는 시대이다. 청소년이 담배피면 지나가는 어른들이 꾸짖었다. 지금은 그랬다간 천국에 빨리 간다. 분명 나보다 아랫사람인데, 내 말을 듣질 않는다. 뭐라고 한마디 하면 모두 상처받았다고 한다. 바야흐로 책망 불가의 시대이다.

 

하나님은 책망 받는 것이 지혜라고 말씀하신다.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언 9:9) 지적만 당하고 살라는 말인가? 이렇게 이해하면 좋다. 나에 대해 평가받을 수 있는 귀를 언제나 열어놓으라는 말이다. 내가 요즘 어떤 상태에 있는 것 같은지, 무엇이 부족한 것 같은지, 나의 강점은 무엇인 것 같은지 상대의 평가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놓는 것이 겸손이다.

 

이렇게 실천해야 한다. 요즘 서로 무서워서 먼저 말을 안 건다. 그러니까 먼저 말을 걸고 먼저 질문해야 한다. 처음부터 안 친한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으면 충격 받을 수 있으니, 나를 확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라. 내가 잠잠히 듣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라. “요즘 집에서 내 상태가 어떤 것 같아?”, “팀장님, 요즘 제가 잘 하고 있나요? 어떤 부분들에 신경을 더 쓰면 좋을지 편하게 이야기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제가 요즘 공부를 이렇게 하고 있는데, 이 방향성이 맞을까요?” 아무도 서로 간섭하지 않는 시대에, 먼저 간섭해달라고 달려오는 사람이 있다니! 그 사람은 어디를 가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만이 사람의 평가를 자유롭게 받을 수 있다.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로마서 8:33)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의롭다 평가 받게 되었음을 믿는가? 그것만이 절대적이기에, 나는 이 세상의 평가에서 자유롭다. 상대가 나를 평가할 때 나의 세상적인 부족함을 의연히 받아들이고 겸손히 노력할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인 평가가 아니라서 그렇다. 상대의 평가가 틀렸어도 과도하게 서운하지 않을 수 있다. 절대적인 평가자는 하나님 뿐이시니 괜찮다.

 

PT 선생님에게 운동 자세가 괜찮은지 봐달라고 말하지만 말고, 인생의 자세가 괜찮은지도 물어보라. 물으면 훨씬 좋게 나아진다. 평가 받으면 훨씬 빨리 전진한다. 평가받을 수 있는 귀를 열고 살라. 먼저 평가를 요청하라.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지혜이다.

 

[1] 남에게 함부로 뭐라고 말을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말했다가 욕먹었거나, 말 하려다가 참았거나,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해서 기분 나빴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잠언 9장 9절을 읽어봅시다. 성경은 누가 지혜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에 사라져버린 것은 무엇입니까? 타인의 평가가 개입되면서 내가 성장하거나 변화되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로마서 8장 33절을 읽어봅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의 평가는 절대적입니까 상대적입니까? 예수님 안에서 내 정체성을 새롭게 하고, 나의 현재에 대해 평가를 겸손하게 요청해야 할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주변 사람에게 나에 대해 무엇을 물어보면 좋을까요?

“폄하하지 않기
(9. 1. 2024.)

빌립보서 2:3

 

모든 관계의 깨짐은 폄하에서 시작된다. 상대가 하는 일의 가치를 깎아 내리는 것이다. 학생의 고단함을 폄하한다. “공부 좀 했다고 뭘 그렇게 피곤해 해?”, 아내의 가치를 깎는다. “집에서 애만 보는데 뭐가 그렇게 어려워?”, 잘 나가는 사람에게도 시비건다. “돈도 많으면서 너도 우울할 게 있니?” 기분 나쁘고, 손절하고 싶은 관계 속에는 언제나 폄하가 숨어있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명하신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립보서 2:3) 남을 낫게 여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상대가 하는 일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타인을 ‘자신’과 비교하여 평가한다. “쟤는 나보다 가치 없는 일을 해, 나보다 못해, 나보다 돈을 못벌어” 반면 신자는 ‘하나님’ 앞에 선 그 사람을 바라본다. 어린아이도, 청소년도, 싱글도, 부자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감당하는 과정에 있기에 가치 있다.

 

내 자신을 기준으로 상대의 수준이나 실력을 폄하하지 말라. 상대가 하는 일들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언어를 배우라. “어떻게 이렇게 매일 운동을 하세요? 대단해요.”, “학생 때가 원래 제일 고민 많을 때야. 지금 너는 정말로 잘하고 있는 거야”, “나는 이 시기에 너처럼 버티지 못했는데, 네가 나보다 훨씬 낫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더 힘차게 감당할 수 있도록 격려하라. 그것이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사람들의 권세이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죄인인 나를 폄하하지 않으신 분이다. 죄인인 나의 인생이, 예수님의 생명과 교환될 가치가 있다고 보셨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5,8) 그분이 나를 대하신 방식 때문에 내가 영생을 얻었음을 믿는다면, 나는 그 누구도 결코 폄하할 수 없다.

 

사람은 자기가 당한 대로 남에게 행하며 산다. 부모와 사회에서 비난만 받았던 사람은 남을 폄하할 줄만 안다. 가치를 인정받은 사람은, 상대의 가치도 인정한다. 예수님이 내 인생을 폄하하지 않으셨음을 기억하며, 사랑받은 대로 행하라.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다시 일어서게 될 것이다.

 

[1] 폄하 때문에 기분 나빴던 적이 있습니까? 반대로, 내가 쉽게 남을 폄하함을 스스로 인식하며 놀랐던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빌립보서 2장 3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객관적으로 상대가 나보다 못할 때에도, 상대가 하는 일을 폄하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남을 바라보는 기준은 어떻게 바뀌어야 합니까?

 

[4-5] 빌립보서 2장 5절과 8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나의 인생은 어떤 가치가 있습니까? 내가 받고 있는 사랑을 근거로,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겠습니까? 내가 변화를 다짐해야 할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시작은 속히, 실행은 꾸준히
(8. 25. 2024.)

에베소서 5:15-16
 

삶의 열매를 빼앗아가는 최악의 실수는 무엇인가? 시작과 실행의 속도를 착각하는 것이다. 늦게 시작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저축, 취업, 건강관리… 빠르게 시작해야 할 일들에 여유를 부린다. 반면, 실행은 한두 번 해보고 포기한다. 공부, 언어, 예배, 투자, 기도… 꾸준히 해야 하는데 결과가 너무 느리게 나오니 쉽게 지친다.

 

하나님은 내 삶에 주어진 기회를 분별하라고 명하시는 분이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베소서 5:15-16)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기회를 잘 살려라’는 말이다. 꾸준히 해야 기회를 살릴 수 있는 일이 있고,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기회를 놓치는 일도 있다. 내 삶에 오늘 주신 기회가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적용적으로, 속히 해야 할 일과 꾸준히 해야 할 일을 분류해보라. 당장, 일단 시작해야 하는데 해보지도 않고 미루고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는가? 계획하기 전에 일단 시작하는 것만으로 삶 전체가 바뀔 수 있다. 반대로, 이미 잘 하고 있고, 꾸준히만 하면 될 일인데 너무 조급해지고 실행을 포기해 버리는 일에는 무엇이 있는가? 지겹다고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냥 계속 가면 승리할 수 있는 길이다.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나보다 앞서 시작하신 분이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립보서 1:6)”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 인생의 선한 일을 앞서서 시작하셨다. 꾸준히 실행하고 계심도 확신하겠는가? 오늘 내 삶도 그렇게 바라보아야 한다. 앞서 시작하신 그 분을 신뢰함으로 오늘 속히 시작하고, 꾸준히 실행해야 한다.

 

하던 일 계속 하면 되는데 조급해지면서 망치지 말라. 나중에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시작을 미루지 말라. 내게 주신 기회를 잘 살리는 것, 그것이 세월을 아끼는 성도의 참된 모습이다.

 

[1] 시작과 실행의 속도는 다릅니다. 내 인생에 시작을 미뤘던 경험들과, 실행에 있어서 너무 조급해졌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에베소서 5장 15-16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오늘 내 삶에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시작’과 ‘실행’으로 분류해봅시다. 무엇을 속히 해야 하고, 무엇을 꾸준히 해야 합니까?

 

[4-5] 빌립보서 1장 6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내 삶의 기회를 잘 살릴 때, 열매를 거둘 수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미 시작된 예수님의 구원이, 오늘도 꾸준히 실행되고 있음을 믿으십니까? 그 신뢰함 속에 내 삶을 향한 새로운 다짐, 도전의 계획들을 나누어 봅시다.

“하나님을 잃는 자리
(8. 18. 2024.)

시편 139:7-8

 

휴가철 바닷물은 과연 깨끗할까? 물 밖에서 웃으며 노는 저 사람이 물 속에서 무슨 일을 행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만 잘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저 사람을 막을 재간이 없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두 악해지고, 약해진다.

 

하나님은 나를 어느 자리에서나 지켜보시는 분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편 139:7-8) 삶의 이중성은 죄이다. 죄는 내 삶의 기쁨을 앗아간다. 그래서 이중적일수록 기쁠 것 같은데, 오히려 불행해지고 우울해진다. 내 삶의 모든 이중적인 모습은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삶의 일관성, 삶의 진실함으로부터 오는 기쁨은 어느 자리에서나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할 때에만 회복된다.

 

특별히 내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자리를 찾으라. 운전대를 잡을 때, 교회 사람들 없는 직장에 출근할 때, 혼자 스마트폰을 할 때, 윗사람이 없고 아랫사람들만 함께 있을 때 … 하나님을 잃어버린 그 자리가 내 삶의 열매를 계속 가로막는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없으니, 세상에서도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하나님 앞에서 일관된 경건을 회복할 때, 삶의 자신감과 능력이 생긴다.

 

베드로가 예수님 부인할 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친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누가복음 22:61-62) 베드로는 왜 울었을까? “너 딱 걸렸어!” 들켜서 부끄러워서? 아니다.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음에도 자신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혼자서 실패했을 때, 자책하지 말고 다시 예수님의 시선을 보라. “난 네가 넘어질 것을 이미 보았음에도, 너를 놓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사랑의 시선이 없다. 이렇게 바라보아 주시는 주님 앞에, 인생 헛되이 살 수 없다. 하나님을 잃는 자리에, 다시 예수님과 시선을 맞추라. 하나님의 시선 앞에 일관된 삶은 평생의 복이다.

 

 

[1]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사람은 변합니다. 누군가 지켜보는 것의 차이가 행동의 변화를 일으켰던 나와 주변의 이야기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시편 139편 7-8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 삶의 이중성이 가장 극심해지는 삶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는 모습이 삶의 자신감과도 연결되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누가복음 22장 61-62절을 읽어봅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베드로는 왜 울었을까요? 내 모습을 이미 보셨음에도 사랑하시는 분의 시선 앞에서 내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환대, 받아주는 사랑
(8. 11. 2024.)

히브리서 13:2

 

가장 힘들면 어디로 가는가? 나를 받아주는 곳으로 간다. 부모님 집, 술집, 친구 집, 심지어 내연녀의 집을 들락거린다. 장소는 달라 보여도 모두 같은 곳이다. 받아주는 사랑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내가 오늘 갈 곳이 마땅치 않다면, 나를 받아주는 곳이 없다는 말이다. 내게 찾아온 누군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대접하는 것, 그것을 환대라고 한다.

 

하나님은 환대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브리서 13:2) 아브라함이 천사가 방문했을 때 잘 대접하여 아들을 얻게 된다. 환대를 통해 삶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내게 주신 기회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환영하고 대접해야 한다. 환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의무이자, 하나님이 일부러 계획하신 복의 통로이다.

 

내 삶의 모든 구조를 환대 중심적으로 바꾸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누군가가 쉽게 집에 올 수 있게 하고, 주기적으로 사람을 초대해야 한다. 내 사무실에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지 말고, 누구나 잠시 방문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평생 환대를 잃어서는 안 된다. 인생이 전부 무너졌다가 새로 신앙을 갖게 된 어떤 형제가 교회의 팀 모임을 이렇게 표현했다. “교회 공동체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매주 저를 조건 없이 기다리며 환대하는 곳이었어요.” 환대는 사람을 살린다.

 

이 바쁜 인생에 왜 내가 환대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나를 환대하셨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태복음 9:11) 이 세상에서 외모로, 실력으로, 나이로, 학벌로 조건을 걸고 나를 거부할 때, 주님은 나를 받아 주셨다. 예수님이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는 하나님 나라에서 환대 받는다. 그분이 받아 주셨기 때문에 내가 살았음을 생생히 인식한다면, 나는 이 땅에서 결코 환대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쎈 척, 도도한 척 좀 그만하라. 튀어나온 입 좀 집어넣고 웃으며 눈을 맞추라. 어딜 가서 사람을 만나면 일단 먼저 인사하라. 먼저 이름을 물으라. 먼저 어색함을 깨고 나아가라. 낯선 사람을 환대하고 받아주라. 환대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 나의 구주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이다.

 

[1] 어려울 때, 받아주는 사랑 때문에 살아나게 됩니다.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누구에게 환대 받으며 회복되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히브리서 13장 2절을 읽어봅시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창세기 18:5, 9절) 내 삶이 누군가를 환대하는 구조인지 나누어 봅시다. 폐쇄적으로 바뀌어 가는 부분들도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9장 11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낯선 사람들을 환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통해 내가 받게 되는 궁극적인 환대는 무엇입니까? 그 사랑 안에서, 환대를 그리스도인의 의무로 바라보고 내가 변화되어야 할 삶의 태도와, 구체적인 환대의 계획들을 나누어 봅시다.

“네 모습이 싫지 않아
(8. 4. 2024.)

시편 22:24

 

자기 인생이 가장 무겁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 내게 짐이 될 때가 많다. 아이 키우는 엄마를 보라. 자녀를 많이 사랑해도, 너무 피곤할 때 보채면 저리 갔으면 좋겠다. 회사 일에 치이니까, 옆에 지친 동료를 위로할 여유가 없다. 나 살기 바쁘다 보니 내 옆의 지친 사람들은 점점 싫어지고, 멀리 하게 된다.

 

하나님은 나의 지친 모습을 멀리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시편 22:24) 하나님은 의연하게 서있는 사람만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나의 곤고함을 좋아하신다. 그분은 내가 무너진 모습으로 나아갈 때 자신을 숨기지 않고 나를 맞으시는 분이다.

 

지쳐있는 모습을 좋아하는 분께로 나오라. 이 세상에 그런 존재는 없다. 하나님은 자기 일 하느라 바쁘신 분이 아니다. 나를 위로하고 일으키실 여력이 무한하신 분이다. 그것이 우리의 위로가 된다. 지쳐있는 내 모습을 환대하신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지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필연적인 여정이다. 그래야 지치지 않으시는 주님만 의지할 수 있으니까.

 

하나님 떠나면 내 스스로 버티며 살아야 한다. 그러다 지치면 세상에서 버림받는다. 나도 그렇게 살다가 죽을 뻔했다. 그러나 나 대신 예수님이 지치셨다. 지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나, 하나님께 버림 당하셨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가복음 15:34)  나 대신 버림당함을 경험하신 예수님 때문에, 나는 내 힘이 다하는 생명의 끝에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을 얻는다. 

 

예수님 믿을 때 오늘의 내 삶도 이제 확신할 수 있다. 마지막에 지쳐 내 인생이 끝날 때, 내 인생 전체를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이 나와 함께 계시니, 지친 오늘의 인생도 주님이 나를 놓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이 오늘 이 모습을 결코 싫어하지 않으심을 확신하라. 오늘도 주님 의지하면, 내게 없는 힘과 위로가 그분으로부터 공급될 것이다. 이 분이 내가 의지할 구주이시다.

 

 

[1] 내 삶이 지치면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집니다. 내 컨디션이 좋지 않아질 때, 주변의 힘들다는 모습들이 내게 부담으로 다가왔던 경험이 있다면 돌아봅시다. (예 – 육아, 남편과 아내, 자녀, 직장 동료 등)

 

[2-3] 시편 22편 24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과 사람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나의 연약한 모습들을 하나님이 싫어하실 것이라고 느꼈던 순간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말씀에 비추어볼 때, 그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맞습니까?

 

[4-5] 인생의 마지막에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15장 3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내 대신 경험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그 분 안에서, 지친 내 삶의 순간들을 어떻게 다시 해석하고,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큰 일을 본 자
(7. 28. 2024.)

사사기 2:7

 

제대로 배우는 것은 다 사람으로부터 온다. 사업을 책으로 배울 수 있나? 사람 옆에 있어야 사업을 배운다. 결혼 생활 잘하는 법은 유튜브에 없다. 좋은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가 본능적으로 잘한다. 기도하는 부모 밑에 기도하는 자녀 있다. 타이거 우즈는 2살 때부터 아빠가 골프치는 걸 보며 자랐다. 사람은 보면서 커진다.

 

하나님은 보여주는 것을 통해 사람을 이끄시는 분이다. 사사시대 타락의 직전에 이스라엘이 버텼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사사기 2:7) 이스라엘의 윗 세대는 하나님의 큰 일을 본 자들이었다. 요단강 갈라지고, 여리고 성 무너지고, 가나안 입성하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 큰 것을 본 자들이 사라지자, 다음 세대가 무너졌다.

 

하나님의 큰 일을 보는 첫 세대가 되라. 내가 먼저 본 것이 없으니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하나님을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지 전해줄 것도 없는 것이다. 내 삶에 먼저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지독한 고난을 지나 영광으로 들어가는 시험에 통과해야 한다. 그래야 ‘큰 일을 본 자’가 된다. 그 다음엔 존재하는 것만으로 쓰임 받는다. 큰 일을 본 자로서 존재할 때, 아직 하나님의 큰 일을 보지 못한 가정과 주변의 타락이 늦추어지고 자녀와 주변 사람들이 보고 배우기 시작할 것이다.

 

예수님은 죽었다 살아나는 큰 일을 경험하신 분이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태복음 28:6)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볼 때 구원이 임한다. 나도 예수님 안에서 죽었다가 살아날 것이다. 가장 큰 것을 경험하신 분이 내 삶에 함께 하시니, 나도 내 일생 동안에 큰 일을 경험하는 자가 될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아직 하나님의 큰 일을 보지 못했는가? 당장 하나님의 큰 일을 본 자를 찾으라. 따라다니라.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따라하라. 당신도 곧 하나님의 큰 일을 본 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면 누군가 당신을 따라다닐 것이다. 영광은 그렇게 확산 된다.

 

[1] 내가 신앙과 일상의 영역에서 가장 많이 영향을 받은 사람을 소개해 봅시다. 나는 무엇을 보고 배웠습니까?

 

[2-3] 사사기 2장 7절을 읽어봅시다. 사사시대 초기에 누가 살아있었습니까? 10절을 읽어봅시다. 그들이 사라지자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내가 속한 조직(교회, 회사, 학교 등)에서 좋은 사람들이 사라지면서 다음 세대가 겪는 방황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10절: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4-5] 마태복음 28장 6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일을 경험하신 분이십니까? 예수님 안에서 나도 (1) 내 주변에 큰 일을 본 자로부터 어떤 선한 영향력을 받아야 할지 (2) 큰 일을 본 자로서 내가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현실에 대한 실망감
(7. 21. 2024.)

누가복음 5:4-5

 

어른이란? 현실을 알게 된 사람이다. 꿈 없던 사람이 어디 있던가? 현실은 꿈꾸며 사는 것이 아니라 꿈 깨야 살 수 있는 곳이다. 신앙만큼 비현실적인 것이 어디 있는가? 결국 현실은 신앙을 밀어낸다.

 

하나님은 현실에 대한 실망감을 통해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다. 베드로는 어업 종사자였다. 현실이 중요함을 깨닫고 현실에 집중했지만, 현실이 베드로를 실망시킨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누가복음 5:4-5) 베드로는 물고기가 충분히 잡히지 않는 현실에 실망했다. 그래서 그물을 가득 채우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현실에 실망하는 것은 하나님 주신 기회이다. 현실만큼 허황된 것이 없다. 이렇게 현실적으로 열심히만 살면 돈이 모아지는가? 정말 공부만 열심히 하면 내가 원하는 자아실현이 가능한가? 성공한 사람을 따라하기만 하면 정말 인생 역전이 가능한가? 혹시 당신은 ‘현실’이라는 말 자체를 섬기며 이루지 못할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현실만큼 헛된 꿈이 없다. 인생은 현실에 집중하면서 얻어지지 않는다. 그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릴 수 있다.

 

현실 속에서 현실 따라 살지 않으신 분이 있다.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비현실적인 요구를 받았다. 십자가에 올라가서 죽는 것이다. 30대 인생에 이게 무슨 현실을 모르는 소리인가? 예수님이 순종하실 때, 우리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신자의 삶은 불멸이 현실이다. 영생이 현실이다. 믿는가? 그렇다면 오늘도 다르게 살아야 한다. 현실은 현실에 집중하며 살아지는 곳이 아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살 수 있는 곳이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6)

 

현실에 실망할 때, 허황되고 의미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신앙으로 다시 돌아오라. 현실에 집중하는 척, 어른 된 척하지 말라. 현실이라는 허세를 버리고, 신앙이라는 참된 영적인 실체와 마주하라. 내 삶의 그물도 찢어지게 될 것이다.

 

[1]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현실을 깨달으며 신앙이 하찮게 여겨졌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누가복음 5장 4-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무슨 명령을 하셨습니까? 베드로는 그 명령을 들을 때 어떤 현실에 놓여있었습니까? 현실에 집중했으나, 현실 자체가 살기 어려운 허상임을 깨달았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요구 받으신 가장 비현실적인 일은 무엇입니까? 믿는 자마다 현실이 되는 영적인 실제는 무엇입니까? 실망한 현실 속에 주님이 나를 다시 부르고 계신다고 느꼈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다시 주님을 의지하기 위해 순종해야 할 삶의 영역들도 나누어 봅시다.

“겸손한 리프레시(refresh)”
(7. 14. 2024.)

창세기 2:2

 

열심히 살아간 삶의 끝은 무엇인가?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다. 지쳐서 도저히 공부를 더 못하겠다. 졸려서 더 일을 못하겠다. 더 돈을 벌다가는 몸이 망가지겠다. 더 가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하지 못하는 나의 인생에 답답함을 느낀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계를 지혜롭게 인정하는 삶을 산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세기 2:2) 하나님이 체력이 부족하셨나? 아니다. 하나님이 내가 피조물임을 깨닫도록 일부러 한계를 주신 것이다. 세상은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더 잘하고, 더 늦게 자며, 더 버틸수록 인정받는다. 성경은 그것을 ‘교만’이라고 한다. 게으름도 문제지만, 성실의 우상도 문제다. 더 할 수 없는 것은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삶에 겸손한 리프레시를 계획하라. 잠시 멈추고, 그만두는 시간을 지혜롭게 계획해야 한다. 인간 수면 과학 센터 원장 매튜 워커는 “수면 부족으로 인한 해로운 영향을 피할 수 있는 신체 기관은 단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더 못함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자야 한다. 기분이 맨날 좋은게 아니다. 기분도 주기적으로 리프레시 해야 한다. 쉬는 것은 예술이다. 쉬는 것을 미리 계획하고, 배울 필요가 있다. 나는 어떻게 쉴 때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다시 샘솟는가? 성실이 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지표들이 있다. 과도한 분노, 일탈의 욕구, 한없는 자기연민, 감사와 평안의 실종이 나타난다면, 내 성실은 안식을 무시하는 교만으로 바뀐 것이다.

 

한계를 인정하며 쉬어도 괜찮다는 확신을 어디서 얻는가?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히브리서 4:10) ‘그의 안식’은 예수님의 안식이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대신 일해주셨다. 우리의 죽음도 영원한 안식이 되었다. 그 예수님 안에서, 오늘의 내 삶은 이제 ‘무조건 더 해야 하는 삶’이 아니다. 주신 한계를 인정하고 안식할 때, 오히려 더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일상을 악바리로 밀어붙이고 있다면 교만한 것이다. 될 것 같은데, 휘어지다가 부러져버린다. 다 망가지기 전에 겸손히 안식하라. 훨씬 더 오랜 시간 열매를 거둘 것이다.

 

[1]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열심에도 한계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한계에 부딪쳐 자책하거나 괴로워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시간활용, 체력, 건강, 재정 등…)

 

[2-3] 창세기 2장 2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명령은 무엇입니까? 쉬지 않음이 교만의 죄일 수 있다면, 내가 오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과도한 죄책감과 책임감에 빠지는 삶의 영역이 무엇일지 나누어 봅시다.

 

[4-5] 히브리서 4장 10절을 읽어봅시다. 우리가 겸손히 쉬어도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쁜 내 삶에 어떤식으로 내 삶을 리프레시 하면 좋을지, 쉼의 지혜를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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