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리프레시(refresh)”
(7. 14. 2024.)

창세기 2:2

 

열심히 살아간 삶의 끝은 무엇인가?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다. 지쳐서 도저히 공부를 더 못하겠다. 졸려서 더 일을 못하겠다. 더 돈을 벌다가는 몸이 망가지겠다. 더 가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하지 못하는 나의 인생에 답답함을 느낀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계를 지혜롭게 인정하는 삶을 산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세기 2:2) 하나님이 체력이 부족하셨나? 아니다. 하나님이 내가 피조물임을 깨닫도록 일부러 한계를 주신 것이다. 세상은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더 잘하고, 더 늦게 자며, 더 버틸수록 인정받는다. 성경은 그것을 ‘교만’이라고 한다. 게으름도 문제지만, 성실의 우상도 문제다. 더 할 수 없는 것은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삶에 겸손한 리프레시를 계획하라. 잠시 멈추고, 그만두는 시간을 지혜롭게 계획해야 한다. 인간 수면 과학 센터 원장 매튜 워커는 “수면 부족으로 인한 해로운 영향을 피할 수 있는 신체 기관은 단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더 못함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자야 한다. 기분이 맨날 좋은게 아니다. 기분도 주기적으로 리프레시 해야 한다. 쉬는 것은 예술이다. 쉬는 것을 미리 계획하고, 배울 필요가 있다. 나는 어떻게 쉴 때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다시 샘솟는가? 성실이 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지표들이 있다. 과도한 분노, 일탈의 욕구, 한없는 자기연민, 감사와 평안의 실종이 나타난다면, 내 성실은 안식을 무시하는 교만으로 바뀐 것이다.

 

한계를 인정하며 쉬어도 괜찮다는 확신을 어디서 얻는가?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히브리서 4:10) ‘그의 안식’은 예수님의 안식이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대신 일해주셨다. 우리의 죽음도 영원한 안식이 되었다. 그 예수님 안에서, 오늘의 내 삶은 이제 ‘무조건 더 해야 하는 삶’이 아니다. 주신 한계를 인정하고 안식할 때, 오히려 더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일상을 악바리로 밀어붙이고 있다면 교만한 것이다. 될 것 같은데, 휘어지다가 부러져버린다. 다 망가지기 전에 겸손히 안식하라. 훨씬 더 오랜 시간 열매를 거둘 것이다.

 

[1]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열심에도 한계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한계에 부딪쳐 자책하거나 괴로워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시간활용, 체력, 건강, 재정 등…)

 

[2-3] 창세기 2장 2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명령은 무엇입니까? 쉬지 않음이 교만의 죄일 수 있다면, 내가 오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과도한 죄책감과 책임감에 빠지는 삶의 영역이 무엇일지 나누어 봅시다.

 

[4-5] 히브리서 4장 10절을 읽어봅시다. 우리가 겸손히 쉬어도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쁜 내 삶에 어떤식으로 내 삶을 리프레시 하면 좋을지, 쉼의 지혜를 나누어 봅시다.

“개선불가”
(7. 7. 2024.)

로마서 7:24

 

다 끝났다고 생각한 죄의 문제는 다시 날 찾아온다. 이 나이 들면 화가 가라앉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분노가 살아있다. 염려는 오래 전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주제만 달라지고 걱정은 그대로다. 시기, 질투, 음란, 탐욕, 미움, 이기심이 시퍼렇게 살아있다. 내 안의 죄가 여전히 살아있음이 느껴진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없는 존재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삶을 ‘개선’해보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다. 죄를 버릴 ‘기회’를 주시는 분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다. 죄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분이다.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는가? 예수님이 내 죄를 모두 가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믿는다고 벗어나지지 않던데? 여전히 죄가 있던데? 그 말을 한다면 당신은 아직 벗어나고 싶은 게 아니다. 당신은 아직 믿지 않고 있다. 내가 노력하고 참으면 앞으로 괜찮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역사하지 않는 것이다.

 

정말 믿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 어느 날 다시 ‘믿는 것 밖에는 답이 없다’라고 느껴져야 한다. 나는 개선불가다. 죄는 내가 이길 수 없음이, 죄가 내 삶을 망치고 있음이 처절하게 느껴져야 한다. 그제서야 정말로 이 죄를 가져가신 예수님을 믿고 고백한다. 예수님은 내가 예수님 안에서 깨끗하고 사랑받는 존재라고 선언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것을 ‘칭의’(justification)라고 한다.

 

믿음 이후에도 죄가 계속 있다니까? 맞다. 그 죄는 더 이상 나를 지배하는 죄가 아니라 죄의 잔재다. 하나님은 남은 죄의 잔재가 (1) 바로 없어지게, (2) 점진적으로 없어지게, (3) 쉽게 없어지지 않고 애매하게 남아있게 하실 수 있다. 방법은 다르지만 깨닫게 하시는 것은 하나다. 그 모든 싸움의 여정을 통해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며, 믿음을 통한 구원 외에는 답이 없는 존재임을 알게 하시며, 오직 믿음만, 오직 은혜만 붙들게 하실 것이다. 그러다가 실제 변화도 경험될 것이다. 이것이 ‘성화’(sanctification)다. 절대 외적인 개선만이 성화가 아니다.  그래서 죄의 잔재도 복이다.

 

다 끝났다고 생각한 죄의 문제가 다시 찾아왔는가? 정말로 내가 죄인임을 깨달을 기회다. 내가 노력만 하면 다 될 줄 알았다. 아니다. 건지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믿으라. 믿는 자에게 구원이 있다.

 

[1] 나이스하게 살다 보면 나는 죄와 멀어졌다고 생각되다가, 특정한 상황이 닥치면 내 안에 여전히 살아있는 내 안의 죄성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요즘 그런 것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4] 로마서 7장 24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은 자신의 몸을 무엇이라고 표현합니까? “믿는데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던데?”라는 말 속의 속임수는 무엇입니까? 정말로 믿음을 붙드는 것 외에는 내 삶이 의로워질 길이 없다고 느껴졌던 때가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5-6] 믿고 난 이후에 성도의 삶에 남아있는 죄는 무엇입니까? 주님이 나를 성화시키셨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까? 남은 죄의 잔재와 싸우는 여정은, 믿음이 없었던 때와 어떤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냅니까? 오늘 나의 힘을 의지하던 것을 내려놓고, 다시 예수님의 죄사함을 믿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 봅시다.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기
(6. 30. 2024.)

잠언 4:23

 

집은 언제 청소하는가? 손님이 올 때이다. 혼자 있다면 더러워도 상관없다. 누군가를 모셔야 한다면 치워야 한다. 정돈되지 않은 초대는 그 자체로 무례함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거하시면서 생명을 공급하시는 분이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신다. 그것을 ‘성령의 내주하심’(indwelling of the Holy Spirit)이라고 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신다. 모든 삶의 순간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경험하려면 마음을 관리해야 한다.

 

성령님이 충만하게 일하시지 못하게 막는 마음상태를 관리하라.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분을 모실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내가 보고 듣고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임재를 가로막고 있지는 않는가? 하루 종일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생각을 품고 있지는 않은가? 매 순간 하나님을 의식하며 그분의 임재를 바라고 기대하는 기도를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는가? 예배나 경건생활이 끝나면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바로 지워지고 관심을 끄지는 않는가?

 

예수님의 삶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역이었다.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사도행전 10:38) 예수님은 성령님이 함께하실 수 없는 나 같은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믿는가? 그 분을 믿으면 나도 그분 만이 누리실 수 있었던 것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나도 예수님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간구할 때, 주님이 내 안에 충만히 거하셔서 그분의 생명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도대체 일상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한다면, 먼저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는 일부터 시작하라. 마음을 관리하기 위해 모든 언행과 생각에 주의하라. 막혀 있었던 성령의 능력이 우리 마음 속에서 터져 나와 온 인격을 사로잡을 것이다.

 

[1] 요즘 내 집, 혹은 방 상태는 어떻습니까? 언제 청소합니까? 집안 정리와 관련한 나의 습관이나 에피소드가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잠언 4장 23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무엇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까? 마음으로부터 무엇이 나오게 됩니까? 성령의 내주하심이란 무엇입니까? 성령님이 충분히 내 마음 속에서 일하실 수 없게 막는 나의 일상의 삶의 패턴들을 나누어 봅시다.

 

[4-5] 사도행전 10장 38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서는 어떤 일들이 나타났습니까? 내가 그분이 경험하신 일을 동일하게 경험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령님을 사모하며 일상을 어떻게 관리해 나갈지 나누어 봅시다. 주님을 사모했을 때 하나님이 마음 속에서 일하심을 경험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전도의 기회 만들기
(6. 23. 2024.)

디모데후서 4:2

 

일단 기회를 잡아야 일이 진행된다. 왜 장사는 목이 중요한가? 사람이 많이 지나다녀야 팔릴 기회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왜 만남의 횟수를 늘려야 하는가? 많이 만나봐야 내 사람 만날 확률도 높아지니까. 일이 되려면, 기회부터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전도의 기회를 통해서 일하시는 분이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디모데후서 4:2)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라는 말은 ‘시즌일 때’(in season)나, ‘비시즌일 때’(out of season) 모두 그렇게 하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자라면, 형편과 상황에 관계없이 나의 일상이 전도의 기회로 만들어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나의 일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구체적으로 찾으라. (1) 직접 말씀을 전할 기회: 따로 만나 복음을 전하기, 나의 간증하기, 함께 기도해주기, 기독교에 관해 변증하기 등. (2) 간접적으로 말씀을 전할 기회: 신앙서적 선물하기, 기도하고 밥 먹기, 설교 링크 보내기, 교회에 초대하기 등. 상대의 반응과 거절에 실망하지 말고 늘 기회를 만드는 것이 신자의 사명이다. 결국 그 사람을 전도하지 못한 것은 불순종이 아니다. 그러나 전도의 기회를 만들지 않고 있는 것은 불순종이다.

 

상대가 관심도 없는데 내가 왜 전도를 해야 하는가? 그게 바로 내가 받은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한일서 4:19) 하나님께 관심 없을 때 그분은 내게 자신의 아들을 보내주셨다. 아들이 싫어 거부했을 때, 그분은 아들을 십자가에 죽여 나에게 영생 주셨다. 죄인인 내게 구원의 기회를 주신 분이 나의 주님이시다. 나도 그 사랑받아 전도의 기회를 만들 때, 주님이 이 기회를 통해 일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수능 공부를 알려준다고 불러놓고, 자꾸 교회 오라는 선배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선 고등학생이 김현수 목사가 되었다. 기회는 그렇게 기적이 되는 것이다. 일단 기회를 만들고, 나머지는 주님께 맡기라. 주님이 당신을 통해 새로운 영혼들을 부르실 것이다.

 

 

[1] 삶은 기회를 만드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좋은 기회를 만나 삶의 변화를 경험했던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디모데후서 4장 2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내가 전도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 시도했던 방법들은 무엇이 있습니까? 전도의 불순종이란 무엇입니까?

 

[4-5] 요한일서 4장 19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해 여전히 내가 전도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새롭게 시도해볼 수 있는 전도의 기회에는 무엇이 있는지 나누어 봅시다. 내가 전도하고 싶은 사람도 소개해 봅시다.

“포기하며 전진하기
(6. 16. 2024.)

빌립보서 3:8

 

아쉬운 것들, 놓친 것들 투성이다. 꼼꼼히 살면 모든 것을 챙길 수 있을 거라 자부했지만, 결국 몇 가지는 놓고 가야 한다. 성적을 외면하며 계속 좋은 대학을 바랄 순 없다. 자기계발을 다 하면서 육아를 할 순 없다. 결혼을 원하면서 자유도 챙길 순 없다.

 

하나님은 포기하는 과정을 통해 주님을 닮게 하신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으려면 포기해야 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립보서 3:8) 그리스도를 얻으려면 이 땅의 무언가를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 속에서 포기는 결코 실패가 아니라, 주님이 계획하신 삶의 일부이다.

 

의도적으로 포기하도록 몰고가시는 삶의 영역이 있는지 돌아보라.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나를 전진시키시는 지점이다. 자존심 내려 놔야 회사 계속 다닐 수 있다. 계획적인 삶을 포기해야 무질서 속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발견한다. 내 실력, 내 외모, 내 상황이 이 정도라는 것을 철저히 인정해야 오늘의 삶을 누리기 시작할 수 있다. 뭐가 좀 안 풀리고 있다면, 지금 하나님이 포기하라는 것을 계속 붙들고 있어서 그렇다.

 

다 버리셨으나, 영원으로 전진하신 분이 예수님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한복음 10:15) 예수님 없을 때 삶의 포기는 실패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 대신 죽으심으로, 죽음을 영원을 향한 전진으로 바꾸어 주셨다. 믿는가?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서 내 삶의 모든 포기는 이제 전진으로 바뀐다. 이제 내 삶의 포기는 예수님 안에서 결코 실패일 수 없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삶에 종종 이런 느낌이 와야 한다. ‘지금은 이것을 포기하라고 하시나보다.’ 전진을 위한 주님의 음성이다. 모든 것을 붙잡고 있으려 하지 말고, 포기하며 하나님이 행하실 새로운 일을 기대해보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포기는 전진이 된다.

 

[1] 삶에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시기마다, 무엇을 포기 했었습니까? 무엇을 포기하지 못해 고민이 많았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빌립보서 3장 8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은 예수님을 얻기 위해 무엇을 결단합니까? 우리의 삶에 다시 해석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현재 내 삶에 하나님이 포기로 몰고가시는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10장 1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무엇을 포기하셨습니까? 그 때,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뜻하시는 포기를 결단할 때 경험하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인생에 포기를 통해 전진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오늘 포기를 결단해야 하는 삶의 영역들도 나누어 봅시다.

“닮아간다는 목표
(6. 9. 2024.)

로마서 8:29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명확히 보일 때도 있지만, 굳이 여기서 무엇을 하시려는지 알 수 없을 때도 많다. 이 반복된 업무 속에서 도대체 하고 계신 일이 있을까? 매일의 단조로운 일상 속에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닮게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8:29) 내 프레임에만 갇히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보이지 않는다.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계획 중의 하나는 나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 닮게 하시려는 것이다.

 

닮아간다는 관점에서 내 삶을 어떻게 이끌고 계신지 살펴보라. *창조: 무언가 학습하고 숙련되어 내가 직접 새로운 업무를 수행하고 창조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 닮게 하시려는 계획 중의 하나다. *성품: 예전보다 인내하고, 예전보다 부드러워지며, 상대를 품어내고, 언제나 기쁨을 유지하는 능력이 커져간다면 하나님 닮아가는 과정이다. *생활방식: 삶에 질서와 기준이 생기며, 악을 멀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삶의 열매가 맺히는 구조를 찾아간다면 하나님 닮아가는 것이다. 닮아감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일들이 꽤 많다.

 

예수님은 하나씩 배우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브리서 5:8) 차근차근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내 삶에 구원이 임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부름 받았다면, 우리도 똑같이 그렇게 이끄실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을 통해 분명 주님 닮게 하실 것이다.

 

내가 세운 목표들에 가려져 있는, 닮아간다는 목표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시고, 이 목표야 말로 인생에 영원히 남는 가치 있는 일이다.

 

[1] 주님이 하고 계신 일이 무엇인지 쉽게 알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명확히 보였던 때와, 그렇지 않았던 때를 대조하여 나누어 봅시다.

 

[2-3] 로마서 8장 29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닮아간다는 목표를 생각했을 때 분명 몇 년 전보다 나아지고 변화된 내 인생의 모습에는 무엇이 있는지 나누어 봅시다.

 

[4-5] 히브리서 5장 8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방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을 닮아간다는 관점에서, 나는 오늘 주님이 무엇을 배우게 하고 계시다고 느껴집니까? 나누어 봅시다.

“지키시는 이
(6. 2. 2024.)

시편 121:5-6

 

내가 노력해도 지킬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기분 좋은 마음. 분명히 기쁘고 평안했는데, 갑자기 우울해진다. 분명 내 안에 있는 내 소유의 감정인데, 내가 지킬 수가 없다. *건강. 운동 열심히 했는데도 이상한 병이 끊임없이 찾아온다. *사람.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하는 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내 삶을 내가 지킬 수 있다는 건 착각이다.

 

하나님은 내 삶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The Lord is your keeper.)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시편 121:5-6) 지금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보존’의 섭리라고 한다. 지키셔야 유지할 수 있다. 지키셔야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지키려고 애쓰지 말고, 지키시는 분을 의지하라. 기쁜 감정을 유지하려고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과 친밀해지면 감정이 지켜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 잡으러 다닌다고 될 일이 아니다. 하나님 뜻에만 순종할 때 관계가 지켜지게 되는 것이다. 돈, 마음, 자원, 사람, 건강 모두 하나님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켜지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지키시는 이는 하나님 뿐이기 때문이다.

 

나를 분명히 지키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나 대신 (1) 버려지시고, (2) 지켜지신 예수님 때문이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브리서 5:7) 죄인인 나는 하나님 앞에 버림받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 대신 버려지셨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는다. 동시에 의인인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지킴 받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예수님이 나 대신 순종하셔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 나를 지키신다.

 

죽음에서도 나를 지키실 것을 약속하신 예수님의 권세를 힘입어 살라. 내가 지키려고 하는 모든 것은 빼앗길 것이다. 지키시는 분을 의지하는 모든 것은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내 삶을 지키시는 이는 하나님 뿐이다.

 

[1] 내 인생의 작은 것조차 내 마음대로 지킬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예 – 마음, 건강, 사람 등) 요즘 내가 내 인생을 지킬 수 없다고 느꼈던 것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시편 121편 5-6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내가 직접 내 삶을 지키기 위해 애쓰며 지쳐 있는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히브리서 5장 7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왜 나를 버리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왜 나를 지키십니까?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이 지키실 것을 확신하며 그분을 의지해야 할 삶의 주제들을 나누어 봅시다.

“지지자 vs. 지시자
(5. 26. 2024.)

요한일서 2:6

 

유튜브를 통해 많은 유명인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속속들이 다 나온다. 내가 그들을 평가하고, 구독과 좋아요를 누르고, 지지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이 내게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결코 그들은 내게 지시할 수 없다.

 

예수님은 나에게 절대적 권위로 지시하시는 분이시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한일서 2:6)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 예수님을 좋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구원을 줄 수 없다. 예수님의 구원을 얻으려면 그분이 내 인생을 향해 지시하는 분이심도 함께 인정해야 한다. 하란 대로 해야 한다. 하신 대로 따라 해야 한다. 그분의 지시를 받지 않는데, 구원받았다고 할 수 없다.

 

신앙의 모든 초점을 순종에 맞추라. 예수님을 평가하는 일에서 내려오라. 교회 평가, 사람 평가, 설교 평가하는 일은 부수적인 일이다. 오늘 나는 여전히 지시를 받고 있는가? 하라고 하신 대로, 지시대로 무조건 수행하고 있는가? 왼 뺨을 치면 오른 뺨을 내밀고 있는가?(마 5:39) 분을 죽이고 노를 버리고 있는가?(시 37:8) 음심이 가득하며(벧후 2:14), 놀기만 좋아하고 있지는 않은가?(벧후 2:13) 하나님의 말씀을 에세이 읽듯이 읽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나는 유명인과 지지자 관계가 아니다. 지시자와 수행자의 관계이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지시를 끝까지 수행하셨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한복음 18:11) 아버지의 명령을 평가하지 않으신 예수님 때문에 나에게 절대적인 구원이 주어졌음을 믿는가? 예수님 안에서 그 지시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 내 인생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나를 평가자로 띄워주는 세상의 장난에 속지 말라. 남이 행한 일들을 보며 좋아요나 누르고 비난 댓글이나 달면서 대단한 평론가라도 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라. 그가 행하시는 대로 나도 행하는 것이 제자의 본분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다.

 

[1] 이 시대는 내 인생을 평가하는 자리에 머무르게 만듭니다. 최근 내가 유튜브나 언론을 보면서 평가하는 일은 무엇이 있었는지(좋아요 누르기, 댓글 달기, 속으로 비난하기) 나누어 봅시다.

 

[2-3] 요한일서 2장 6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특별히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을 외면하거나 둔감해진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18장 11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명령에 반응하신 방식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분의 지시가 강요가 아니라 내 삶의 확신과 즐거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평가자로서의 정체성을 벗어나서, 지시받은 대로 순종하기 위해 애써야 할 내 삶의 다짐들을 나누어 봅시다.

 

“점술 무효
(5. 19. 2024.)

민수기 23:23

 

삶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쯤 매번 고개를 드는 생각이 점술과 미신이다. 올해 운세가 이러한데 정말 그렇게 흘러가는듯하여 두렵다. 이사마저 손 없는 날 가야 악귀가 없다고 한다. 지난 날 내가 아는 사람에 내 삶에 퍼부었던 나쁜 말과 저주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다. 미래가 궁금하고 결정이 복잡해질 때마다 운세는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영원히 지키시는 분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고 사주를 받은 발람은 억지로 저주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저주를 막으셨기 때문이다. “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냐 하리로다”(민수기 23:23)  하나님을 믿는다면, 자신감을 가지고 더 이상 운세와 미신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일이다.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출애굽기 22:18)

 

점술의 가장 큰 저주는 따로 있다. ‘나쁜 일을 나쁜 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나쁜 일이 벌어지면 내 삶은 망한다. 그래서 돈을 주고 조상을 달래서 나쁜 일을 피해야 한다. 좋은 일을 빨리 오게 하기 위해 신에게 정성을 바쳐야 한다. 사라진 것이 무엇인가? ‘나쁜 일이 와도 된다는 자신감’이다. 하나님 안에 거하면, 내 삶에 벌어지는 ‘모든 일’이 ‘좋은 일’로 바뀐다. 그 확신이 생길 때에 비로소 삶에 생기는 모든 일을 평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 확신이 어떻게 생기는가? 내 삶에 쏟아져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신 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3) 하나님과 끊어져 내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셨음을 믿는가? 그분이 받으셔야 할 모든 순종의 보상을 내게 대신 주셨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해보라. 당신의 삶의 앞길에는 저주가 단 한가지라도 남아있는가?

 

내 삶에 모든 요소가 더 이상 내 삶에 저주가 될 수 없음을 확신하라.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운세와 점술을 찾아다니는 더러운 일을 그만두라. 나 대신 저주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삶의 모든 요소를 선한 일로 확신하고 의연하게 받아들이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점술이 무효다.

 

[1] 내가 한참 점술과 운세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혹시 사람으로부터 들었던 저주와 비난이 내게 올무가 된 적은 없습니까? 나와 주변의 점술과 관련된 우상 숭배를 나누어 봅시다.

 

[2-3] 민수기 23장 23절을 읽어봅시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요구와 반대로 어떻게 예언하였습니까? 출애굽기 22장 18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금하시는 행위는 무엇입니까? 점술의 가장 큰 저주는 무엇입니까? 신앙을 갖고도 내 삶에 벌어지는 일 속의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쉽게 신뢰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 대신 당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내 삶에는 저주가 남아있습니까? 삶에서 생기는 모든 일을 어떻게 새롭게 바라보아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광대하심, 세밀하심
(5. 12. 2024.)

느헤미야 9:32

 

두려움은 큰 것에서 온다. 큰 돈을 갚아야 한다. 큰 무대에 서야 한다. 높은 분들 앞에서 발표한다. 두렵다. 지겨움은 작은 것에서 온다. 이 업무를 한다고 내 인생 바뀌지 않는다. 이 돈 모아봐야 갈 길이 멀다. 이런 일을 해봐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지겹다.

 

하나님은 가장 광대하신 분이시자, 가장 세밀하신 분이시다. 느헤미야가 바벨론 포로귀환 후 성벽을 재건할 때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조상들과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왕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옵소서”(느헤미야 9:32) 큰 것의 두려움은 광대하신 하나님 만나야 이길 수 있다. 작은 것의 지겨움은 세밀하신 하나님 만나야 감당할 수 있다.

 

내 인생에 크고 작은 것을 하나님과 연결시켜보라. 내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큰 문제는 무엇인가? 소리지르고 배포를 크게 갖는다고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크신 하나님 앞에서 떨어본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 광대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가장 큰 분 앞에서 나의 죄인됨을 깨닫고 용서받음을 경험하면, 세상의 큰 것들과 마주해도 죽지 않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작은 일들에 대한 태도도 변화되어야 한다. 내 인생에 사소한 것에 감사하거나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세밀한 마음과 행동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그렇다. 가장 작은 부분도 알고 계신 분을 만날 때, 내가 행하는 작은 일들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가장 크신 하나님이, 가장 보잘 것 없게 되셨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8) 예수님의 가장 낮은 모습이셨던 십자가의 죽음이, 나의 가장 큰 문제인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였음을 믿는가? 그 때에야 비로소 내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를 바라보는 모든 해석이 거듭나게 된다. 모든 큰 일들은 하나님보다 작다. 모든 작은 일들은 하나님이 계시기에 중요하다.

 

내 인생에 크고 작은 문제를 내 기준으로 평가하여 두려워하거나, 내치려 하지 말라. 광대하신 하나님과 마주하라. 세밀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라. 크고 작은 문제가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1] 큰 것은 두렵습니다. 작은 것은 지겹습니다. 내가 경험한 ‘큰 두려움’들, 내가 경험한 ‘작은 지겨움’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느헤미야 9장 32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환란을 어떻게 여기십니까? 하나님 없이 해석하려고 했던 내 인생의 크고 작은 일들을 생각해 봅시다.

 

[4-5] 빌립보서 2장 8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경험하신 가장 비천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 사건을 통해 성취된 가장 큰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세밀하심을 경험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그분의 성품을 따라 오늘의 크고 작은 일을 어떻게 다르게 바라보아야 할지도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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