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술 무효
(5. 19. 2024.)

민수기 23:23

 

삶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쯤 매번 고개를 드는 생각이 점술과 미신이다. 올해 운세가 이러한데 정말 그렇게 흘러가는듯하여 두렵다. 이사마저 손 없는 날 가야 악귀가 없다고 한다. 지난 날 내가 아는 사람에 내 삶에 퍼부었던 나쁜 말과 저주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다. 미래가 궁금하고 결정이 복잡해질 때마다 운세는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영원히 지키시는 분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고 사주를 받은 발람은 억지로 저주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저주를 막으셨기 때문이다. “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냐 하리로다”(민수기 23:23)  하나님을 믿는다면, 자신감을 가지고 더 이상 운세와 미신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일이다.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출애굽기 22:18)

 

점술의 가장 큰 저주는 따로 있다. ‘나쁜 일을 나쁜 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나쁜 일이 벌어지면 내 삶은 망한다. 그래서 돈을 주고 조상을 달래서 나쁜 일을 피해야 한다. 좋은 일을 빨리 오게 하기 위해 신에게 정성을 바쳐야 한다. 사라진 것이 무엇인가? ‘나쁜 일이 와도 된다는 자신감’이다. 하나님 안에 거하면, 내 삶에 벌어지는 ‘모든 일’이 ‘좋은 일’로 바뀐다. 그 확신이 생길 때에 비로소 삶에 생기는 모든 일을 평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 확신이 어떻게 생기는가? 내 삶에 쏟아져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신 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3) 하나님과 끊어져 내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셨음을 믿는가? 그분이 받으셔야 할 모든 순종의 보상을 내게 대신 주셨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해보라. 당신의 삶의 앞길에는 저주가 단 한가지라도 남아있는가?

 

내 삶에 모든 요소가 더 이상 내 삶에 저주가 될 수 없음을 확신하라.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운세와 점술을 찾아다니는 더러운 일을 그만두라. 나 대신 저주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삶의 모든 요소를 선한 일로 확신하고 의연하게 받아들이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점술이 무효다.

 

[1] 내가 한참 점술과 운세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혹시 사람으로부터 들었던 저주와 비난이 내게 올무가 된 적은 없습니까? 나와 주변의 점술과 관련된 우상 숭배를 나누어 봅시다.

 

[2-3] 민수기 23장 23절을 읽어봅시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요구와 반대로 어떻게 예언하였습니까? 출애굽기 22장 18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금하시는 행위는 무엇입니까? 점술의 가장 큰 저주는 무엇입니까? 신앙을 갖고도 내 삶에 벌어지는 일 속의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쉽게 신뢰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 대신 당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내 삶에는 저주가 남아있습니까? 삶에서 생기는 모든 일을 어떻게 새롭게 바라보아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광대하심, 세밀하심
(5. 12. 2024.)

느헤미야 9:32

 

두려움은 큰 것에서 온다. 큰 돈을 갚아야 한다. 큰 무대에 서야 한다. 높은 분들 앞에서 발표한다. 두렵다. 지겨움은 작은 것에서 온다. 이 업무를 한다고 내 인생 바뀌지 않는다. 이 돈 모아봐야 갈 길이 멀다. 이런 일을 해봐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지겹다.

 

하나님은 가장 광대하신 분이시자, 가장 세밀하신 분이시다. 느헤미야가 바벨론 포로귀환 후 성벽을 재건할 때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조상들과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왕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옵소서”(느헤미야 9:32) 큰 것의 두려움은 광대하신 하나님 만나야 이길 수 있다. 작은 것의 지겨움은 세밀하신 하나님 만나야 감당할 수 있다.

 

내 인생에 크고 작은 것을 하나님과 연결시켜보라. 내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큰 문제는 무엇인가? 소리지르고 배포를 크게 갖는다고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크신 하나님 앞에서 떨어본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 광대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가장 큰 분 앞에서 나의 죄인됨을 깨닫고 용서받음을 경험하면, 세상의 큰 것들과 마주해도 죽지 않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작은 일들에 대한 태도도 변화되어야 한다. 내 인생에 사소한 것에 감사하거나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세밀한 마음과 행동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그렇다. 가장 작은 부분도 알고 계신 분을 만날 때, 내가 행하는 작은 일들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가장 크신 하나님이, 가장 보잘 것 없게 되셨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8) 예수님의 가장 낮은 모습이셨던 십자가의 죽음이, 나의 가장 큰 문제인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였음을 믿는가? 그 때에야 비로소 내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를 바라보는 모든 해석이 거듭나게 된다. 모든 큰 일들은 하나님보다 작다. 모든 작은 일들은 하나님이 계시기에 중요하다.

 

내 인생에 크고 작은 문제를 내 기준으로 평가하여 두려워하거나, 내치려 하지 말라. 광대하신 하나님과 마주하라. 세밀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라. 크고 작은 문제가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1] 큰 것은 두렵습니다. 작은 것은 지겹습니다. 내가 경험한 ‘큰 두려움’들, 내가 경험한 ‘작은 지겨움’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느헤미야 9장 32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환란을 어떻게 여기십니까? 하나님 없이 해석하려고 했던 내 인생의 크고 작은 일들을 생각해 봅시다.

 

[4-5] 빌립보서 2장 8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경험하신 가장 비천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 사건을 통해 성취된 가장 큰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세밀하심을 경험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그분의 성품을 따라 오늘의 크고 작은 일을 어떻게 다르게 바라보아야 할지도 나누어 봅시다.

“다른 계절 적응하기
(5. 5. 2024.)

전도서 3:1-2

 

내가 속한 시절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지혜가 생긴다. 겨울에 씨를 뿌리면 미련한 것이다. 한참 공부해야 할 때를 놓치면 후회를 낳는다. 사람 만나야 할 때 공부 더하면 안 된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지 말고, 내가 속한 시기가 어느 때인 것 같은지 물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시기마다 다른 계절을 허락하시는 분이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전도서 3:1-2) 모든 열심이 선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계절을 고려하지 않은 열심은 독이 된다. 시기의 변화를 이해해야 우리의 삶에 지속적인 승리가 가능하다.

 

일상에 중요한 적용은 이것이다. 계절에 적응하는 것을 불행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바뀐 계절에 적응하고 있지 못한 내 자신을 돌아보라. 나이가 이제 많이 들었는데 아직도 주변을 향한 수군거림과 편가르기를 하면 어떻게 하나? 주님 앞에 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부동산 걱정하면 어떻게 하나? 대학교 때 놀던 것처럼 30대 때에도 놀면 어떻게 하나? 가정과 아이가 생겼는데 친구 관계를 똑같이 유지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몸이 부서지는 것이 보이는데 어떻게 운동 안하고 버틸 생각을 하나? 하나님이 삶의 계절을 변화시키실 때 그 파도를 즐겨보라. 분명 더 큰 유익이 있다.

 

예수님이 결혼식에 초대받아 가셨다. 포도주가 떨어지자 말씀하신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한복음 2:4) 아직 결혼식을 즐기시겠다는 말이다. 자신이 마실 십자가의 잔을 바라보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직 살 때였다. 죽을 때가 오자, 단번에 다른 계절에 적응하신다.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26:45-46) 죽음의 계절에 적응하신 예수님 때문에, 나에게는 영원의 계절이 약속되어 있다.

 

주님이 내 대신 죽음의 계절을 감당하셨으니, 이렇게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계절이 선하다. 정말 그렇다. 다른 계절이 왔다고 아쉬워 하지 말고, 옛날 생각 말고, 다른 계절을 살아낼 준비를 하라. 그것이 지혜다.

 

[1] 열심은 적절한 계절을 만나야 합니다. 내가 속한 시절의 변화를 체감하는 최근의 이야기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전도서 3장 1-2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는 무엇이 존재합니까? 내가 요즘 바뀐 계절에 대해 무감각하거나, 회피하거나, 민감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있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2장 4절과 마태복음 26장 45-46절을 대조해 봅시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삶의 계절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순종하셨습니까? 죽음도 영생으로 바꾸신 약속 앞에서, 오늘 바뀌는 나의 계절을 어떻게 감사하며 적응할 수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온갖 좋은 것
(4. 28. 2024.)

야고보서 1:17

 

살아갈 재미가 없어지는 때가 있다. 더 좋은 것을 기대할 일이 없을 때이다. 바빠질 일만 남았다. 연봉 떨어질 일만 남았다. 돈 나갈 일만 남았다. 건강 나빠질 일만 남았다. 앞으로 더 좋을 것이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기뻐하나? 기대감이 사라지면 삶을 지속할 에너지를 잃는다.

 

하나님은 아직도 내 삶에 좋은 일을 남겨두신 분이다. “온갖 좋은 은사(Every good)와 온전한 선물(perfect gift)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is from above.)”(야고보서 1:17) 그 분 안에는 아직도 좋은 것(good)이 있다. 그분 안에 아직도 완전한 것(perfect)이 남아있다. 좋고 완전함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내 삶을 내 마음대로 예측하며 좌절하는 삶을 청산해야 한다. 하나님은 여전히 내 삶에 좋고 완벽한 것이 올 것임을 약속하고 계시다.

 

그러므로, 상황과 관계없이 더 좋고 더 완전한 선물을 사모하라. 이 직장을 통해 너무나 좋고 완전한 선물을 내게 주실 것을 끝까지 믿어야 한다. 이 갈등과 가난과 고통을 통해서도 여전히 완전하고 좋은 것은 약속되어 있음을 믿어야 한다. 사이즈도 커져야 한다. 단순히 이 급여 받고, 이 직장만 다니다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나는 교회와 사람들과 경험들을 통해 분명 내 인생, 내 신앙, 내 사업의 영역은 더 커지고,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질 것이다.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죽음의 자리에 오셔서 여전히 좋고 완전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게 하셨다. 그것이 영생이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5) 신앙은 인생의 마지막에 좋은 것이 있음을 믿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에 좋을 뿐 아니라, 오늘의 여정도, 좋고 완벽한 것을 향한 여정으로 보는 것이다.

 

여전히 가정과 자녀와 진로와 미래에 대해 긍정하라. 여전히 좋은 것이 남아있음을 확신하라. 빛들의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온갖 좋은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온다.

 

[1] 점점 좋아질 때는 살맛이 나다가, 나빠질 일 밖에 보이지 않아 삶의 기대감이 사라졌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야고보서 1장 17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무엇을 주시는 분입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지 못하고 상황을 예측하며 기대감을 잃어가는 것 자체가 죄가 될 수 있습니다. 회개해야 할 부분들을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3장 1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나 대신 죽으심을 통해 죽음의 자리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게 하셨습니까? 오늘 분명 더 좋고 완벽한 것이 올 것을 믿으며 변화되어야 할 내 삶의 태도를 나누어 봅시다.

“구원의 간접성
(4. 21. 2024.)

잠언 16:7

 

엄마가 보는 앞에서 자녀가 공부를 열심히 했더니, 엄마가 엄청 비싼 음식을 사줬다. 공부했을 뿐인데, 왜 음식이 오는가? 이 자녀는 ‘엄마 유니버스(universe)’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행위에 대한 보상이 엄마를 통해 온다.

 

신자의 삶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연결되어 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언 16:7)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한 행위를 했을 뿐인데, 나랑 원수였던 사람의 마음이 풀리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내가 ‘개별적’으로 하는 모든 행위를 ‘종합적’으로 살피신다. 신자의 삶에 나만 아는 사적인 일이란 없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적인 일들은 하나님 한 분 앞에서 하는 일이 된다. 이것을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언제나 구원의 간접성을 기대할 수 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은 어떻게 풀릴까?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서 풀린다. 오늘 이 단순한 삶을 회복하라. 개별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생각하며 행하라. 분노를 죽였을 뿐인데 내 필요가 채워질 것이다. 죄를 끊었을 뿐인데 진로가 열릴 것이다. 기도를 시작했을 뿐인데 자녀가 변할 것이다. 소외된 사람을 격려했을 뿐인데 승진이 빨라질 것이다. 세상이 자신의 이익을 향해 ‘개별적’이 되어 갈 때, 신자들은 점점 더 하나님 앞에서 ‘종합적’으로 산다.

 

예수님이 인류 구원의 큰 문제를 어떻게 감당하셨는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찾은 것이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가복음 14:36) 아버지의 뜻을 구하며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졌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일만 구할 때, 그분이 계획하신 놀라운 일들이 우리 삶의 전 영역에 펼쳐질 것이다.

 

내 힘으로 나를 구원하려고 발버둥치는 직접적인 구원의 추구를 그치라. 구원의 간접성 속에 살라.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원수와 화목해진다. 신자들에게만 주신 비밀의 약속이다.

 

[1] 부모, 친구, 상사 등 한 존재가 좋아하는 일을 했더니, 그로부터 다른 좋은 일이 흘러나왔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잠언 16장 7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은 무엇입니까? 내 삶의 모든 행위를 나의 이익과 편의에 따라 개별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나누어 봅시다.

 

[4-5] 마가복음 14장 36절을 읽어봅시다.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주님이 주실 종합적인 구원을 믿으며, 오늘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할 삶의 모습들을 나누어 봅시다.

“경험을 통한 사랑
(4. 14. 2024.)

신명기 32:11-12

 

엄마 돈 함부로 쓰던 청소년이 처음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했다. 인생이 이렇게 힘든 건가 느끼며 서럽게 집에 돌아왔다. 식탁 위에 어제와 똑같이 엄마가 두고 간 용돈 5천 원을 본다. 그는 오열했다. 경험을 통해 이미 존재하던 엄마의 사랑이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시키신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명기 32:11-12) 하나님 사랑은 모른다. 그런데 독수리의 자식 사랑을 본다. 그 때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는 방식도 이해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에서 관찰하고 경험하는 것들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게 하신다.

 

내가 하고 있는 지금 그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보라. 한 자매가 연애를 하다가 헤어졌다. 사랑에 빠지니 그 남자가 늘 생각나고, 생전 하지 않던 일들을 기쁨으로 했다. 그 남자는 떠났지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연애 경험을 통해 내 안의 하나님 사랑을 발견한 것이다. 개미를 관찰해 본다. 자녀를 낳아 본다. 부모를 떠나 본다. 부하 직원의 반항을 참아 본다. 경험은 하나님 사랑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자신의 마지막 사랑을 암탉에 비유하신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3:37) 예수님은 자신의 품을 원치 않는 자를 위해 죽으셨다. 암탉을 볼 때 그의 사랑과 인내가 위대해진다. 예수님은 그 품을 떠난 나도 결코 놓지 않으실 것이다.

 

개척 시작할 때 풋내기 전도사였는데, 이제 두 자녀의 아빠가 되었다. 아들을 죽이신 하나님 사랑. 도대체 아들을 어떻게 포기하나? 경험이 그 사랑을 더 크게 느끼게 만든다. 그 사랑 안에 살자.

 

[1] 경험할수록 사랑이 깊어집니다. 관찰이나 경험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과 사랑을 더 깊이 느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신명기 32장 11-12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무엇에 비유하고 계십니까? 나의 경험을 통해 (1)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알게 되었거나 (2)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을 돌아보게 되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23장 37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자신의 마지막 사랑을 무엇에 비유하고 계십니까? 품에 있고 싶지 않았던 우리를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셨습니까? 최근 경험하는 나의 일들을 통해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더 사랑할 수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규모무관
(4. 7. 2024.)

시편 3:5-6

 

나이가 들어갈수록 웃음기가 사라진다. 삶의 문제의 규모들이 커져서 그렇다. 학교 미술 준비물을 안 가져 온건 괜찮다. 그러나 인생의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은 크다. 초등학교 친구 중 하나가 날 싫어하면 괜찮다.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람이 날 싫다고 하면 크다. 규모가 커지면, 염려도 함께 커진다.

 

하나님은 문제의 규모와 상관없이 나를 보호하시는 분이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편 3:5-6)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온 나라가 자기를 죽이러 달려왔을 때 했던 고백이다. 천만인이라는 규모가 인상깊다. 다윗은 문제의 규모와 상관없이 편하게 잤다. 왜? 하나님은 문제의 규모와 무관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문제의 크기에 따라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만이 크신 분이기에, 그분 앞에 큰 문제는 없다. 큰 문제도 하나님 손 안에 있으며, 작은 문제 속에 하나님을 의지했던 동일한 방식으로 풀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1) 작은 문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이 붙드시지 않으면 규모와 상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2) 큰 문제라고 위축되지 말고 담대해야 한다. 붙드시는 하나님만 계시면 규모와 상관없이 승리할 것이다. 돈의 액수가 커져도 두려워하지 말라. 갈등의 골이 깊어져도, 자녀 마음의 완고함이 깊어져 가도 담대해야 한다. 큰 문제는, 크신 하나님이 푸신다.

 

사람의 가장 큰 규모의 문제는 무엇인가? 죽는 문제다. 죽음을 해결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규모와 무관하게 나를 구원하신 주님 앞에 오늘 확신해야 한다. 내가 소유한 구원은 규모에 무관한 구원이다.

 

일부러 하나님이 삶의 문제를 키우실 때, 나의 믿음도 함께 키우시는 여정이라고 생각해 보라. 작은 문제를 해결하셨던 동일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라. 내가 섬기는 나의 하나님이 훨씬 커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1] 삶의 문제의 규모가 커지면서 삶에 대한 압박감도 커지게 됩니다. 규모가 커지면서 믿음이 위축되었던 나의 삶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재정의 규모, 질병의 규모, 갈등의 규모 …)

 

[2-3] 시편 3편 5-6절을 읽어봅시다. 다윗은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규모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삶의 영역은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5장 24절을 읽어봅시다. 인생에 가장 큰 규모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요즘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나를 이끄시는, 큰 규모의 삶의 문제는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지속은 하나님께
(3. 31. 2024.)

학개 2:5

 

인생에서 제일 쉬운 것이 한 번 하는 것이다. 제일 어려운 것은? 지속하는 일이다. 결혼 생활 30년, 근속 30년은 그 자체로 위대하다. 지속이 능력이라서 그렇다. 유튜브 채널 하나가 소위 ‘떡상’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추락을 준비한다고 한다. 그만큼 지속은 어렵다.

 

지속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포로귀환 이후 성전을 다시 지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학개 2:5) 하나님이 계속 함께하시니, 지속할 능력이 생길 것이라는 말이다. 나의 판단과 성실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지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지속할 힘을 주신다.

 

하나님 없이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교만함을 버리라. 내가 만남을 지속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날까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지속하게 해주셔야 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너무 지겨운 일, 너무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났더라도, 하나님이 지속하게 하시면 계속 버틸 힘이 생긴다. 지속의 주인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지속할 힘이 없다. 죽음은 사람의 지속성을 영원히 빼앗아 간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무엇인가? ‘영원’이라는 지속성을 주신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8:51) 이제 부활주일도 이해된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의 지속성을 내게 주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 속에 오늘도 살 수 있다. 주님 온전히 섬길 때, 내가 지켜내야 할 것을 계속 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다. 내가 지속할 수 있다는 자만함을 버리고, 사랑도, 공부도, 사업도, 건강도, 지속하게 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라. 지속은 하나님께만 있다.

 

[1] 순간적인 성공은 쉬운데, 수성하고, 버티고, 지속하기는 어렵습니다. 관계나 학업, 사업 등을 지속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꼈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학개 2장 5절을 읽어봅시다. 성전을 건축할 때 하나님은 어떤 약속을 주십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인간적인 선호, 상황, 성실에 의지하여 지속할 수 있다고 자만하고 있는 삶의 영역이 있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8장 51절을 읽어봅시다. 모든 사람의 지속성이 끊어지는 사건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지속하게 하시는 힘을 구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 봅시다.

“기대와 다른 왕
(3. 24. 2024.)

요한복음 12:12-13

 

기대와 다른 일이 벌어질 때 실망이 제일 크다. 주식과 코인이 오를 것이라 ‘기대하고’ 산다. 떨어지면 실망한다. 안 오를 것이라 ‘기대하고’ 안 산다. 그때 오르면 돈을 안 잃었어도 실망한다. 기대와 다른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대와 다른 계획을 가지고 내 삶에 개입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에 오실 때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한다. 왜 환영했는가? 로마의 압제를 군사적으로 뒤엎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주실 것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한복음 12:12-13) 그러나 예수님의 계획은 십자가에 있었다.

 

기대와 다르게 내 삶을 이끌어 가시는 왕을 끝까지 신뢰하라. 좋은 차 타고 오실 줄 알았는데 나귀 타고 오셨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줄 알았지만 십자가 지시며 만왕의 왕이 되셨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일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환호가 사라지고 조롱이 난무할 때, 기대와 다른 일이 벌어졌을 때 신앙을 포기하지 말라. 끝까지 신뢰할 때 그가 주시는 구원을 누릴 수 있다.

 

내가 기대한 일들이 무너질 때, 하나님이 기대하신 일들이 내 삶에 성취된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한복음 19:30) 예수님이 내 인생의 가장 큰 기대, 영원에 대한 기대를 이미 다 이루신 분임을 믿는가? 그 믿음 안에서 오늘도 확신해야 한다. 내 기대와 다른 일이 벌어졌을 때에도, 하나님이 내 인생에 기대하고 계신 선한 일들이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내가 기대했던 대로 움직여주는 왕을 모시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만든 왕이다. 내 기대 밖으로 자유롭게 움직이시는 기대와 다른 왕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라. 그것이 종려주일이 주는 참된 의미이다.

 

[1] 기대 때문에 실망도 커집니다. 기대와 다르게 펼쳐지는 오늘 속에 내가 실망하고 당황했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기대와 다른 자녀, 성적, 업무환경, 사람 등)

 

[2-3] 요한복음 12장 12-13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하였습니까? 왜 그런 반응을 보였습니까? 인간적인 기대로 가득 찬 내 삶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영역은 없는지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19장 3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우리 기대와 다른 일을 행하시면서, 어떤 일을 성취해 주셨습니까? 그 믿음 안에서 내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고 다시 소망 가운데 삶을 바라봐야 할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내가 예비한 곳
(3. 17. 2024.)

출애굽기 23:20

 

길을 잃었다는 생각은 늘 마음을 힘들게 한다. 어렸을 때는 입학, 취업, 합격 등 인생의 표지판을 따라가면 목적지에 닿을 줄 알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제는 어디로 가야하지?’라는 질문에 답을 쉽게 내리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다. 광야 길에서 모세에게 약속하신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출애굽기 23:20) 광야를 지나고 있지만, 분명 예비하신 곳에 가고 있다. 준비된 자리가 있다. 준비된 위치가 있다. 준비된 단계가 있다. 보이는 상황에 속아서 방황하며 버리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전히 예비하신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과정이다.

 

분명한 방향성에 대한 확신을 회복하라. 이유 없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목적 없이 내 마음대로 이 시간 보낼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 눈에 그 길이 보이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꾸준히 묻고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빠 차를 타고 처음 가는 길을 창문으로 바라보는 어린 자녀와 같다. “아빠 여긴 어디야?”, “응 조금만 가면 도착해” 우리가 평안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길을 알아서가 아니다.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 있다는 하늘 아버지를 향한 신뢰 때문이다.

 

모든 인생은 확실한 한 가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죽음이다.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의 ‘영원한 방황’이다. 죽음 앞에서 방황하는 우리 인생을 대신하여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가 가야할 곳을 예비해 두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한복음 14:2) 예수님이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의 인생에 영원한 방황이 그치게 됨을 믿는가? 그렇다면 오늘의 인생도 다시 확신해야 한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지만, 분명 주님은 이 땅에서 내 삶을 향해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이끌고 계신다.

 

올 한해 나의 삶은 어떻게 될까? 분명 하나님이 예비한 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순간적으로 어려워지는 마음들을 부여잡고, 영원히 내 삶의 여정을 붙드실 주님을 신뢰하라. 내가 가야 할 곳은 예비되어 있다.

 

[1] 어렸을 때는 정해진 길을 가는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인생의 방황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마음이 분주했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출애굽기 23장 20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가 길을 알지 못해도 내 삶의 여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인도하심이 흐릿해 진다는 이유로 방향성에 대한 확신을 잃었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14장 2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죽음 이후의 삶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내 삶을 바라보는 관점도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겠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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