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을 계수하는 지혜
(12. 31. 2023.)

시편 90:12

 

한 해가 저물어간다. 사람은 시기마다 나의 이 시절이 계속 지속될 것이라고 착각한다. 만년 학생이었다. 이제 아무도 나보고 학생이라고 안 한다. 아직 젊다는 말 많이 들었다. 어느새 주위엔 후배들 뿐이다. 언제 애들 다 키우나 싶었는데, 이제 손자가 날 보러 온다고 한다. 흐르는 시간은 나를 당황케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한된 날수만을 허락하신 분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편 90:12)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세면서 살라는 말이다. 날을 계수할 줄 아는 것은 분명 지혜다. 시간에 대한 감각 없이 사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미련함이다. 이제 몇 살인가? 몇 년 차인가? 몇 년 남았는가? 내 모든 행동에는 시계를 달아야 한다.

 

시간에 대한 두 방향의 죄악을 모두 벗어나라. (1) 후회의 죄: 지금 시기에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는데, 지난 세월만을 아까워 하는 것이다. 그 때 결혼 했어야 하는데, 그 때 공부 했어야 하는데… 그 말 하다가 오늘의 집중을 놓친다. (2) 여유의 죄: 지금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여유 부려도 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집중해서 그 일을 끝내라고 그 시간 주신 것이다. 아직 괜찮다고 말하지 말고 해야 할 일은 미리미리 서두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날을 계수하며 순종하신 분이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날을 계수 하신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한복음 2:4)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날을 계수하며 진행하신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마가복음 14:41) 시간을 계수하는 지혜로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예수님의 구원을 믿는다면, 나도 시간을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주신 시간마다 그 이유와 해야 할 일이 있다. 주신 세월에 맞게 행할 때, 내 인생은 분명 주님 주신 열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이유 없이 여유부리지 말고, 쓸데없이 조급해지지도 말라. 날을 계수하는 지혜를 구하라. 분명 내년에 많은 열매를 거둘 것이다.

 

[1] 세월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을 느끼며 당황하곤 합니다. 언제 그것을 가장 크게 느낍니까? 시간이 지나며 급격히 변화되는 나의 삶의 모습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시편 90편 12절을 읽어봅시다. 성경은 무엇이 지혜라고 말합니까? 그 반대는 무엇입니까? 시간의 관점으로 현재 내 인생을 생각해 봅시다. 미련함과 죄악을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겠습니까?

 

[4-5] 요한복음 2장 4절과 마가복음 14장 41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었습니까? 그분의 구원을 믿고, 내가 지금 주어진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행할 수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주변의 지혜도 구해 봅시다.

 

“감춰진 구원
(12. 24. 2023.)

마태복음 1:21

 

그게 기회인 줄 몰랐던 순간들이 있다. 자녀가 옆에 있을 때가 행복이었지. 부모님이 옆에 계실 때가 행복이었지. 직장 다닐 수 있다는 것이 감사였지… 지나보면, 그 순간, 그 사람이 기회였고, 나의 행복이었다.

 

하나님은 감추어진 구원을 주시는 분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태복음 1:21) 어느 누가 젖을 주고 돌보아야 할 아기를 구원자라고 믿었겠는가? 그러나 구원은 그렇게 왔다. 아기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는 사람이라면, 삶에서 또 한가지를 더 믿어야 한다. 나의 삶의 구원도 내 삶에 감춰진 형태로 올 것이다. 구원은 세상이 멸시하는 약함, 수치, 가난, 질병, 열등함 속에 숨어 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요소는 이미 내 삶에 감추어져 있다. 내가 모를 뿐이다. 아기 예수님 처럼, 내 삶에 감춰진 구원을 찾으라. 방황하는 자녀, 잔소리 하는 부모, 집 나간 남편, 재산 날린 아내, 호통치는 상사, 말썽 피우는 알바생! 읽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것들이지만, 원래 구원은 그런 것이다. 감춰져 있고, 나만 모를 뿐이다. 지나고 나면 보인 적이 있지 않은가?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내 고집 꺾으시고, 주님만 의지케 하시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셨다. 구원은 여전히 내 삶에 감춰져 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셨다. 동시에 예수님은 감춰진 구원을 찾아내신 분이다. 예수님 삶의 구원은 어디에 감추어져 있었는가? 죽음이었다.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브리서 2:9)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죽음 속에 감추어 두셨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를 구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랬더니 숨겨진 부활이라는 구원이 튀어나왔다.

 

예수님 때문에 내 죽음은 이제 영생으로 바뀌었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매일의 모든 삶도 확신해야 한다. 주님은 ‘내게 구원이 되지 않는 것을 주실 수 없는 분’이다. 다시 말하면, 내게 주신 모든 것이 내 삶에 구원이 될 것이다. 그 시선 가지고, 주어진 삶 다시 바라보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일을 통해, 난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크리스마스의 믿음이다.

 

[1] 그때가 기회였습니다. 지나가봐야 압니다. 한 해 동안 참 행복했고, 감사했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느껴졌던 순간들을 나누어 봅시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라고 즐기지를 못했던 것일까요?

 

[2-3] 마태복음 1장 21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그것은 어떤 뜻입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신 환경들이 감춰진 구원으로 느껴졌던 순간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히브리서 2장 9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삶에서 감춰진 구원으로 받아들이신 사건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분을 믿을 때 내 삶의 모든 환경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주신 삶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죽어도 살겠고
(12. 17. 2023.)

요한복음 11:25

 

다 막혔을 때까지 가보는 경험이 중요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 슬픔에 인생 끝날 것 같지만, 또 어떻게 살아진다. 돈이 없어서 이제 끝나는 줄 알았다. 어떻게 또 살 길이 생긴다. 불합격, 이별, 실패, 탈락… 인생의 여러가지 끝을 경험하면서, 사람은 점점 살아내고 견디는 힘이 세진다.

 

하나님은 끝나는 곳에서 은혜를 주시는 분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한복음 11:25) ‘죽음을 피하겠고’가 아니라 ‘죽어도 살겠고’이다. 예수님을 믿어도 똑같이 죽는다.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끝나는 곳에 은혜가 임하여, 죽음이 부활의 시작이 된다. 이것이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 예수님 믿는다고 어려운 일이 안 생기는 것이 아니다. 똑같이 생긴다. 더 많이 생기기도 한다. 상관없다. 여러 번 끝나도 좋다. 끝나는 곳에 은혜가 임하는지가 중요하다.

 

하나님이 끝장나게 하시는 내 삶의 모든 지점을 감사와 은혜로 받아들이라. 어려운 일을 피하게 하셔도 감사하지만, 어려운 일 한복판에 있어도 감사해야 한다. 죽어도 살 수 있는 예수님의 권세가 내 삶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끝장 난 곳에 은혜가 임한다. 이미 극복한 예전에 끝장난 일들을 돌아보라. 그렇게 절망할 일이었는가? 좀 더 열심히 살아볼 걸 후회되지 않는가? 끝장난 상황에서도 성실히 살아내야 한다. 하나님이 내 삶의 끝장난 곳에서 이미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끝장나는 순간까지 성실하게 삶을 감당하셨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한복음 19:28) 시편 69편 21절에 ‘목마르다’는 말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끝까지 일하셨다. 죽을 때까지 순종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살게 되었다.

 

그 예수님 믿는다면, 나도 같은 능력을 체험할 것이다. 내게 허락하신 모든 끝은, 은혜 주시기 위함이다. 그것을 믿고 이 땅에서 끝난 것 같은 곳에서 여전히 성실과 소망으로 살기를 원한다. 끝나는 곳에서 은혜를 주시는 그분을 기대하는 것, 그것이 성도의 삶이다.

 

[1] 그 당시는 다 막혔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또 살아졌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끝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삶의 길이 열렸습니까?

 

[2-3] 요한복음 11장 2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에 주시는 선물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아닙니까? 끝났다고 생각한 곳에서 삶의 열정과 소망마저 잃어버린 내 삶의 모습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19장 28절을 읽어봅시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마지막에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모든 ‘끝나는 곳’에서 가져야 할 나의 태도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놓아지는 은혜
(12. 10. 2023.)

누가복음 19:5,10

 

지금까지 무엇을 붙잡고 살았는가? 사람은 붙들 것 없이는 살 수 없다. 아이들은 엄마 손 붙잡는다. 엄마 손 뗀다고 끝이 아니다. 연인 붙잡는다. 돈 붙잡는다. 자녀 붙잡는다. 가장 중요하다 싶은 것은 도저히 놓아지질 않는다.

 

하나님은 붙잡고 있던 것들을 놓게 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나서 집에 들어가겠다고 하신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누가복음 19:5) 예수님이 들어간 후, 그 집에서는 예수님이 나오시지 않았다. 다른 것이 나왔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10) 예수님이 들어가자, 삭개오가 붙들고 있던 돈이 나왔다. 삭개오는 돈이 놓아지는 은혜를 경험한 것이다.

 

나의 삶에 예수님을 모실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예수님 외에 붙들던 다른 것들이 놓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 없이는 죽을 것 같고, 그게 안되면 망할 것 같던 모든 것들이 놓아진다. 가장 열심히 붙들고 있던 것들이 놓아진다면, 내가 지금 예수님을 제대로 붙들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반대로 말해야 한다. ‘예수님이 나를’ 완전히 붙들고 계신 것이다. 그분이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확신만 있으면, 그제서야 땅에 있는 것들을 놓을 수 있다.

 

절대 놓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목숨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에 자신의 생명마저 놓으셨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누가복음 23:46) 어떻게 놓으셨는가? 자신이 붙들린 ‘아버지의 손’을 보았기 때문이다. 왜 놓으셨는가? 나의 생명을 붙드시려고 놓으셨다. 그분의 생명을 포기한 순종 때문에 내 삶에 영생이 임했다.

 

예수님 믿는 내 삶도 그렇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붙들림 받아서 영생 얻음을 믿는가? 죽을 것 같은 오늘의 상황도, 예수님이 붙드심을 믿고 놓으라. 놓아지는 은혜를 경험할 때부터 새로운 구원의 길이 열린다.

 

[1] 무엇을 붙들며 살았습니까? 특정한 시기에 내 삶에 유일하게 붙들었던 그 ‘무엇’을 나누어 봅시다.

 

[2-3] 누가복음 19장 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어디로 들어가셨습니까? 10절을 읽어봅시다. 삭개오의 삶에서 나온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모실 때 우리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나타납니까?

 

[4-5] 누가복음 23장 46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어떻게 자신의 생명을 내려 놓으실 수 있었습니까? 그분의 생명 때문에 이루어진 일은 무엇입니까? 나를 붙드심을 믿고 오늘 예수님 대신 붙들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후회없음 vs. 기회없음
(12. 3. 2023.)

시편 32:6

 

영화배우 김혜수가 청룡영화제 MC 자리에서 은퇴하며 이렇게 말했다. “일이든 어떤 관계든, 떠나보낼 때는 미련을 두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 시간들에 대해서는 후회 없이 충실했다고 자부한다.” 멋있어 보여도 슬프다. 김혜수를 다시 볼 기회도 없어진다는 말이니까. 후회 없다는 말은 슬픈 말이다. 지금의 행복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다는 말이라서 그렇다. 다시 공부할 기회, 일 할 기회, 젊음으로 돌아갈 기회, 다시 건강을 누릴 기회는 오지 않는다. 아무리 후회 없다 말해도, 사람은 기회가 점점 없어져서 슬프다.

 

하나님 안에서는 삶의 모든 순간이 새로운 기회가 된다. 사람은 후회 없는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다. 사람은 늘 새로운 기회를 찾는 존재이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편 32:6) 아무리 후회 없이 살아도 인생은 기회가 없어져갈 뿐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인생의 순간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새로운 일들을 만날 기회가 된다.

 

나는 인생에 후회 없고 미련 없다며 안주하지 말라.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오늘 내게 주신 삶을 기회로 보는 시각이다. 지난 삶이 어떠했든 상관없다. 후회가 없든, 후회가 많든,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기회이다. 오늘 내 삶은 어떤 기회인가? 하나님은 내게 늘 기회주시는 분이다. 백수도 기회이고, 취업도 기회이다. 바쁨도 기회이고, 아픔도 기회이다. 평안도 기회이고, 전쟁도 기회이다. 하나님이 계시면, 기회의 시각이 열린다.

 

모든 것이 기회라는 말장난 아닌가? 그렇지 않다. 죽음도 기회로 만들어 주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히브리서 2:14) 예수님 믿으면, 내 인생의 죽음도 천국의 기회가 된다. 믿는가? 그 믿음으로 죽음과 같은 내 인생도 다시 자신감 있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만 함께 계시다면, 후회 타령 하지 말고 여기서도 기회 찾아야 한다. 죽음 속에서도 하실 일이 있음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생은 무엇인가? ‘영원히 살 기회’이다. 영원한 기회를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 ‘후회 없다’는 교만한 말 하지 말라. 앞으로의 기회 없으면 절망이다. ‘후회된다’는 낙심의 말도 하지 말라. 언제나 새로운 기회 주시는 주님 계시기 때문이다. 오늘이 새로운 기회다. 기회를 구하고 열심히 살자.

 

[1] 후회 없이 삶을 쏟았던 순간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무엇에 삶을 던졌었습니까? 후회 하지 않게 삶을 살아도, 인생에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2-3] 시편 32편 6절을 읽어봅시다.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순간은 어떤 기회가 될 수 있습니까? 오늘을 기회로 보지 못하고 후회의 관점(후회없음: 교만과 안주 / 후회함: 좌절)에 빠져 있는 내 모습을 나누어봅시다.

 

[4-5] 히브리서 2장 1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무엇을 기회로 삼으셨습니까?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언제나 내게 기회 있음을 알고, 오늘 내 삶의 형편을 기회의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새로 기도할 마음
(11. 26. 2023.)

역대상 17:25

 

삶이 복잡해지면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될지 모를 때가 많다. 다른 진로를 알아볼까? 사업을 위해 다른 공부를 시작해야 하나? 가정을 살펴야 하나? 몸을 챙겨야 하나? 간절히 변화를 원하지만, 너무 복잡하고 할 것이 많아서 한가지 변화도 만들어 내기도 힘든 것이 우리 일상이다.

 

하나님은 변화를 위해 새로 기도할 마음을 주시는 분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마음이 복잡했다. 선지자를 통해 다윗이 아닌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지을 것이라고 정리 시켜 주신다. 복잡했던 다윗의 마음이 변했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종을 위하여 왕조를 세우실 것을 이미 듣게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주 앞에서 이 기도로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역대상 17:25) 새롭게 기도할 제목을 정리해 주셨다. 그리고 그 기도한대로 실행된다.

 

복잡한 삶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변화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 말씀을 통해 새롭게 기도할 마음을 받아야 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때 예배 드리고 말씀 들으라. 성도들과 교제하라. 그런다고 뭐가 되는가? 된다. 새로운 기도제목이 떠오른다. 새로 기도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도하라고 시키시는 일이, 하나님이 하실 일과 관련되어 있다. 목사도 일이 많다. 그래서 이것저것 기도하면 자꾸 하나님이 기도제목을 정리 시켜 주신다. “영광을 보게 하옵소서!”, “예배를 통한 부흥을 보게 하옵소서!” 새로 기도할 마음이 생길 때,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의 변화가 시작된다.

 

십자가 직전 예수님 주변 상황은 혼란함 그 자체였다. 하나님이 새로 기도할 마음 주셨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가복음 14:36) 이 기도가 시작된 뒤로 예수님은 멈추지 않고 십자가로 달려가셨다. 우리를 살리신 십자가 구원은, 하나님이 새로 주신 기도제목의 성취였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면, 기도의 방향부터 다시 잡으라. 어떻게 기도하기를 바라시는가? 어떻게 기도가 바뀌기를 원하시는가? 새로 기도할 마음이, 곧 하나님이 내게 품으신 마음이다.

 

[1] 변화는 어렵습니다. 무엇 하나 시도해보겠다고 생각만한지 며칠째인지, 삶의 복잡함 속에 파묻힌 요즘의 일상을 나누어 봅시다.

 

[2-3] 역대상 17장 25절을 읽어봅시다. 다윗이 원래 품었던 생각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 새롭게 주신 마음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때 다윗의 마음에 생긴 변화는 무엇입니까?

 

[4-5] 마가복음 14장 36절을 읽어봅시다. 십자가 직전에 예수님은 어떻게 새롭게 기도하시기 시작했습니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내 삶의 변화를 위해 오늘 새롭게 사모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요즘 새롭게 품게 된 기도제목이나 기도 방향의 변화가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거두신 이도 여호와
(11. 19. 2023.)

욥기 1:21

 

추수감사절이다. 추수한 것을 감사해야 하는데, 추수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거둔 것보다 심은 것이 많고, 벌어들인 것보다 잃은 것이 많은 듯하다. 감사하고자 해도, 감사할 수 있는 추수의 영역이 줄어만 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기도 하지만(give), 거두시기도 하는 분이다(take). 욥이 모든 고난을 당한 후에 하나님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기 1:21) 주신 것만이 아니라, 거두신 사건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찬송 받으셔야 한다.

 

거두어 가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라. 하나님이 젊음 주셔서 잠시 젊음 누렸다. 늙었다고 위축될 것이 아니라, 젊음을 거두어 가실 때 주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 주님이 돈 주셨다가 거두신다. 권위 주셨다가 거두신다. 인기, 시간, 좋은 평판, 건강 주셨다가 거두신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다. 잠깐 누리게 하신 것도 충분히 감사해야 한다. 그분이 어떤 계획이 있으실지 알지 못하지만, 미래를 예측하기 전에 거두시기까지 주셨던 하나님께 충분히 찬송해야 한다.

 

사람의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은 어떻게 다가오시는가? 거두시는 분으로 다가오신다. 무엇을 거두시는가? 생명을 거두신다. 하나님은 생명을 내게 주셨고, 마지막에는 주셨던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 그러나 그 거두어 가시는 생명을 영생으로 바꾸신 분이 예수님이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누가복음 23:46) 생명을 거두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내 생명 대신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의탁하셨다.

 

그 분을 믿을 때 확신할 수 있다. 내 삶에 거두어 가시는 것은 결코 저주나 불행이 아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거두어 가시는 생명도 영생이 된다. 그렇다면 오늘 거두어 가시는 일도 감사할 수 있다. 이 일을 통해 내 삶에 더 좋은 생명 주실 것이다. 추수감사절이다. 거두어 가신 일에 전심 다해 감사하라. 이것이 신앙이다.

 

[1] 추수감사절입니다. 한해 동안 감사할 제목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그 중에, 주신 것이 아니라 거두어 가셨기에 감사가 아니라 염려와 불평, 불만족이 생기는 부분은 어디입니까?

 

[2-3] 욥기 1장 21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나는 왜 마치 하나님이 내 것을 빼앗아 가신 것처럼 느끼는 것일까요?

 

[4-5] 누가복음 23장 46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인생의 마지막에 무엇을 거두시는 분이십니까? 나 대신 예수님의 생명을 거두셔서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왜 나는 오늘 거두어 가시는 일도 감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거두어 가신 일을 재해석해봅시다.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11. 12. 2023.)

마가복음 16:6

 

나는 인생에 미련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조금만 나이 들어보니 아쉬운 것 투성이다. 너나 나나 모두 피터팬들이다. 잘나갔던 시절, 기회 많던 시절이 그립다. 돌아갈 수 없음이 괴로움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삶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전진할 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무덤에서 모두 슬퍼하고 있을 때, 흰 옷을 입은 청년이 말한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마가복음 16:6) 무덤에서 슬퍼할 필요가 없다. 그는 이미 무덤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무덤을 지나 더 나은 곳, 더 유익한 곳, 미래의 계획을 위해 이동하시는 분이다.

 

아쉬움과 절망이 있는 순간이 있다면, 슬픔에 머무르지 말고 담대히 앞으로 나아가라.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젊음이 지났음을 아쉬워하지 말라. 시간 많고 돈 많고 건강했을 때를 아쉬워 말라.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거기에 있지 않다. 계속 앞으로 가라. 거기서 슬퍼하는 것보다 더 나은 영광이 앞에 있다. 바쁘고, 아프고, 병들고, 힘든 시간이 찾아왔는가? 그 시간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의 영광과 회복은 오늘 이 자리에서 펼쳐진다.

 

D.L. 무디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신문에서 내가 죽었다는 부고를 볼 것입니다. 절대 믿지 마십시오. 그 순간 저는 지금보다 더 살아 있을 것입니다. 더 높은 곳에서.”(Some day you will read in the papers that D. L. Moody is dead. Don’t you believe a word of it! At that moment I shall be more alive than I am now.)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은 무덤에 있지 않다. 이미 거기에 없다. 부활을 믿으면, 인생의 모든 절망과 아쉬움은 언제나 전진이 된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을 때, 무덤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임을 믿는가? 그 믿음 있다면 오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인생의 모든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미 여기 계시지 않고 앞에 계신 그분 따라 가라. 장차 주실 영광이 지난 모든 미련을 치유할 것이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마가복음 16:7)

 

[1] 세월이 지나면서 지난 시절 내가 누리거나 가지고 있었던 좋은 형편들이 사라지는 아쉬움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젊음, 외모, 여유, 실력, 돈, 환경 등)

 

[2-3] 마가복음 16장 6절을 읽어봅시다. 청년(천사)은 무덤 앞에 선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내가 미련 속에 계속 머무르게 되는 내 인생의 무덤은 무엇입니까?

 

[4-5] 마가복음 16장 7절을 읽어봅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미 어디로 가셨습니까?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내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부활의 확신을 믿으며, 무덤을 떠나 주님과 함께 오늘을 살아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 봅시다.

 

“수단적 은혜 활용하기
(11. 5. 2023.)

열왕기상 19:7-8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 하지만 좋은 도구를 마다하지도 않는다. 장인들 만나보라. 다 비싼 도구 쓴다. 프로가 쓰는 악기들을 보았는가? 수억 원은 우스울 정도다. 자전거, 카메라 마니아들에게 가격 좀 물어보라. 집안 기둥이 뽑힌다. 사람은 잘하고 싶은 곳에서 언제나 좋은 수단을 찾는다.

 

하나님은 수단적 은혜를 주시는 분이다. 엘리야가 주변의 핍박으로 몸과 마음이 눌렸다. 하나님은 먹을 것을 주신다.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신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열왕기상 19:7-8) 하나님의 산까지 갈 수 있었던 이유는 음식물의 힘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내게 계획하신 일을 감당할 힘을 주신다. 실제적인 수단, 실제적인 방법을 주신다는 말이다.

 

힘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는, 지금 어떤 수단적 은혜를 주시는지 찾아야 한다. 밥 사먹을 돈을 주셨다. 그러면 밥을 좀 먹어야 기운이 난다. 먹지도 않고 우울하다 힘이 없다 말하지 말라. 운동할 시간 주셨다. 주신 수단 활용하지 않고 몸이 안 좋다고 하면 안 된다. 결혼할 사람 만날 수 있다. 귀찮다고 하지 말고 돈 좀 쓰고 시간 좀 내서 듀오 가입하라. 학원 좀 다니면 금방 성적 올릴 수 있다. 가만히 있지 말라. 내게 주신 수단적 은혜를 활용하는 것이 신앙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일을 어떻게 성취하셨는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에베소서 2:14)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으시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래야 사람의 몸인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수단 삼아, 하늘의 뜻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는다면, 내게 주신 수단적 은혜를 거부하지 말라. 사람의 몸으로 구원의 방법 만드신 주님이시다. 내게도 하나님 뜻 이룰 수단 주실 것이다. 주어진 수단을 지혜롭게 활용해 보라. 훨씬 건강하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삶의 길이 여기에 있다.

 

[1] 좋은 결과를 위해서 좋은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도구적인 요소들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열왕기상 19장 7-8절을 읽어봅시다. 지친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주신 수단적 은혜는 무엇이었습니까?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적절한 수단적 은혜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내 삶의 모습을 나누어 봅시다.

 

[4-5] 에베소서 2장 1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도구는 무엇이었습니까? 앞으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내가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수단적 은혜가 무엇일지 나누어 봅시다.

“큰 용사의 나병
(10. 29. 2023.)

열왕기하 5:1

 

한 사람의 인생은 입체적이다. 여기서 아무리 쳐다봐도 저기서 일어나는 일을 모른다. 너무 잘 나가는 연예인의 너무 슬픈 자녀 이야기가 있다. 질투 나게 돈 많은 사람이 고칠 수 없는 병을 달고 살기도 한다. 이런 격언이 이제 이해 된다.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당신이 전혀 모르는 삶의 전투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언제나, 모두에게, 친절하게 대하세요.”(Everyone you meet is fighting a battle you know nothing about. Be kind. Always.)

 

하나님은 남에게 보이지 않는 내 인생을 아시는 분이다. 나아만 장군은 큰 용사였으나 나병환자였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열왕기하 5:1) 남들은 절대로 이해 못할 내 인생의 허망함과 답답함을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은 나아만의 큰 용사됨만 보지 않으셨다. 보지 못하는 질병의 고통을 이해하고 계신 분이다.

 

나와 이웃에 대해 두 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1) 나의 일부만 이해하며 인정해주는 세상에 속지 말고, 주님께로 돌아오라. 주님이 그 부분을 모르고 계신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만의 숨겨져 있는 문제들을 주님이 아시고 치유하기를 원하신다. (2) 사람을 너무 단편적으로 판단하지 말라. 나이, 재력, 업무능력, 외모, 정치성향, 종교만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큰 용사의 뒤에 있는 나병을 보는 눈이 생겨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세상을 섬길 준비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모두가 보지 못할 때 우리 인생의 마지막을 미리 보셨다. 죽음이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내 인생에 보이지 않는 가장 큰 어려움인 죽음도 미리 아시며, 미리 몸을 던져 막으신 분임을 믿는가? 오늘의 내 인생 그늘도 주님이 알지 못하실 리가 없다. 주님이 숨겨진 그 부분도 알고 도우실 것이다.

 

그 주님 만났다면, 나도 남은 인생 그렇게 살아야 한다. 좀 친절해지라. 큰 용사라고 부러워하지 말고 그 사람의 나병까지 보고 이해하는 사람이 되라. 그게 예수님 닮은 삶이다.

 

[1] 한 사람의 인생은 결코 단편적으로 판단할 수 없음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까? 한 인생 속에 담겨진 대조되는 상황들이 보았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열왕기하 5장 1절을 읽어봅시다. 나아만 장군의 삶은 어떤 대조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이해하시는 분이십니까? (1) 나를 전부 아시는 주님임을 경험했거나, (2) 다른 사람을 더 겸손하게, 깊게 이해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로마서 5장 8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 인생에 무엇을 보고 계셨습니까?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내 모든 숨겨진 연약함을 아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닮아 내 삶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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