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공급되는 힘
(2. 16. 2025.)

잠언 24:16

 

무언가를 계속하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계속 사랑하는 일. 매일 밥하는 일. 매주 피부관리 받으러 가는 일. 매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 계속하는 것은 힘들기에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내 일상에 포기하는 일은 점점 늘어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하시는 분이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언 24:16) 의인과 악인의 차이는 다시 시작함에 있다. 모두가 실수하고, 모두가 포기하지만, 하나님은 의인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13)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 힘이 없다고 가만히 있지 않고, 다시 힘을 주실 것이라고 믿고 시도하고 행동해보라. 너무 미운 가족에게 절대 나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성도가 있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닌 것 같아 내키진 않는 마음을 가지고 연락했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풀어주셨다고 한다. 새 힘을 공급하신 것이다. 힘이 없다고 가만히 있지 말라. 힘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해야 할 일 앞에 다시 서 보라. 힘은 내 안에서 오지 않고 다른 데서 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직전 그 모든 압박감을 감당할 수 없으셨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기도한 후, 다르게 말씀하신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26:46)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공급하시는 힘으로 십자가까지 가셨기에 내게 구원이 주어졌음을 믿는가? 나도 동일한 구원을 경험할 것이다. 내 삶의 여정을 마칠 때까지, 하나님은 끊임없이 내게 필요한 힘을 다시 공급하실 것이다.

 

다시 공급받고 싶은 힘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라. 지혜? 재정? 여유? 사랑? 성실? 인내? 기쁨? 평안?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은 그 힘을 공급하실 수 있는 분이다. 무너졌던 곳에 다시 힘을 공급받을 것을 믿고 나아가라. 이전과 다른 힘을 경험하게 되리라.

 

[1] 계속하는 힘을 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힘에 부쳐 중도에 포기한 삶의 여정들을 나누어 봅시다. (관계, 학습, 기상 등등…)

 

[2-3] 잠언 24장 16절을 읽어봅시다. 의인과 악인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공급하십니까? 내 스스로 내 안에 있는 힘만을 바라보며 선뜻 다시 나서고 있지 못한 내 삶의 영역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26장 46절을 읽어봅시다. 십자가 지시기 직전 예수님이 기도하신 후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힘을 통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안에서 내 삶에도 동일한 일이 일어날 것을 믿고, 다시 공급되는 힘을 사모하며 직면해야 할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사물에 임하는 은혜
(2. 9. 2025.)

창세기 39:5

 

하나님은 어디까지 내 삶에 함께하시는가? ‘전부’ 함께 하신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 삶의 영역들이 있다. 내가 주문하는 메뉴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 내가 고르는 유튜브 영상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가? 내가 주문하는 제품, 내가 매수하는 부동산과 주식에 하나님은 함께하실까?

 

하나님은 사람과 자연 뿐만 아니라 생기가 없는 사물에도 함께하신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을 관리하자, 요셉을 통해 임한 은혜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세기 39:5) 여호와의 복이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쳤다. 모든 소유물이 복된 소유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이 단순한 물건에까지 미친다는 또 다른 근거 구절이 있다.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신명기 28:5)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쓰는 쇼핑백과 밥그릇에까지 임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시키라.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항공기 고른다. 사고를 피한다. 하나님 은혜가 사라지면 불량품 사고, 물건 쉽게 부서지고, 상한 것 먹는다. 내가 어제 상한 것 먹었는데 저주 받았다는 뜻인가? 내 아이패드 고장 났는데 저주하신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저주를 가져가셨기에, 예수님 안에서 경험하는 부정적인 것들마저 내게 유익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물건에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히 유효함을 깨달아야 한다. 온갖 기계적이고 생명 없어 보이는 곳에까지 언제나 은혜를 구하라!

 

순종하는 자에게만 이 은혜가 가능했다. 불순종한 자에게는 저주가 임해야만 했다.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혼란과 책망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하게 하실 것이며”(신명기 28:20) 그러나 예수님이 나 대신 저주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라디아서 3:13) 물건을 통해서도 저주를 받아야 했던 내 인생을 예수님이 구원하셨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오늘 담대히 은혜를 전 영역속에서 사모하라. 내가 보는 영상, 내가 타는 비행기, 내가 사는 물건마저 복이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좁은 곳에 갇혀 있는 은혜에 대한 생각을 풀어놓으라. 은혜가 내 삶 전 영역을 뛰어다니게 하라. 당신이 가는 곳마다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복이 임할 것이다.

 

[1] 여기까지 하나님이 함께 하실까? 라는 의심에 하나님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영역이 있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창세기 39장 5절을 읽어봅시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일을 시작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복이 임한 범위는 어디까지였습니까? 내가 은혜를 구하는 영역이 넓어졌던 계기가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신명기 28장 20절을 읽어봅시다. 원래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는 무엇이었습니까?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읽어봅시다. 우리 삶에 벌어지는 모든 일이 저주가 아님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의지하여 내 삶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구해야 할 영역들을 구체적으로 넓혀서 이야기 해 봅시다.

숨겨진 목표, 사랑
(2. 2. 2025.)

요한일서 4:19-20

 

인생에는 직접 추구하지 않았는데 배워지는 것들이 있다. 눈치. “난 이제 눈치를 배워야지” 다짐하는 사람 없다. 그냥 살다 보면 눈칫밥이 늘어간다. 인내. 특별히 노력 안해도 나이들면 화가 좀 줄어든다. 너그러움, 유머, 사회성… 삶은 직접적인 학습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삶을 통해 궁극적인 하나의 목표, 사랑을 가르치신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한일서 4:19-20)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을 배우지 못한 것은 곧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내가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언제나 내 삶의 숨겨진 목표에는 사랑을 배우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내 관심사만을 기준으로 오늘의 삶의 숨겨진 목표를 부정하지 말라. 간접적으로 무엇을 가르치시고 계신지 민감해지라. 바쁜 상황 속에서, 상대의 자격 없음 속에서, 상황의 열악함 중에서, 누군가를 배려하며 내가 사랑해야 할 상대와 부대끼게 하신다. 커리어, 편안함, 재미, 재정을 기준으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내 삶의 목표가 있다. 하나님이 이 상황 속에 사랑이라는 다른 목표를 함께 진행시키고 계시다면, 내 삶의 오늘은 결코 헛되지 않다.

 

도대체 그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죄인일 때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죄인인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사랑 깨닫고 배우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이다. 그 사랑 받았는가?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아마 내 삶에 다른 죄인을 만나면서 깨닫게 될 것이다.

 

오늘의 삶과, 주어진 상황을 긍정하라. 세상의 다른 기준으로는 실패로 보여도, 분명 가치 있는 여정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내가 배울 수 있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연휴 때 가족이랑 시간을 보내면서 참 답답한 상황 많지 않았는가? 불평 말라. 잘 하고 있다. 하나님의 숨겨진 목표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1] 삶에는 직접 추구한 것이 아닌데 얻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예 – 눈치, 친절, 생존력, 근성…)

 

[2-3] 요한일서 4장 19-20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을 가르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제외하고 내 삶을 내 기준대로 판단하고 있는 모습이 있다면 돌아봅시다.

 

[4-5] 로마서 5장 8절을 읽어봅시다. 나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그 사랑 앞에서 오늘 내 삶의 숨겨진 목표를 발견해봅시다.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계십니까?

성령의 감동
(1. 26. 2025.)

사도행전 16:6-7

 

이론을 안다고 현실을 살 수는 없다. 살아봐야 아는 또 다른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론상 한 달에 얼마씩 모으면 부자 된다. 이론상 하루에 몇 시간 공부하면 서울대 간다. 이론상 아이는 이렇게 키워야 한다. 그렇게 된 사람 아무도 없다. 현실엔 다른 문제들이 있다.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다. 바울이 선교지를 두고 고민할 때 성령이 마음에 감동을 주신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사도행전 16:6-7) 어디에서 말씀을 전하라는 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바울은 알 수 있었다. 성령의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내용을 다 안다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매일의 성령의 감동으로 인도함 받는다.

 

성령의 감동을 경험하고, 이것에 민감해지라. 말씀이 객관적인 인도하심이라면, 성령은 말씀에 기반한 주관적인 인도하심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객관적인 인도하심이지만, ‘지금 부모님께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를 고민하는 것은 주관적 인도하심이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2:12) 일상에 수시로 성령의 임재를 구하라. 말하기, 판단, 방향성, 마음, 통찰 모두 성령님이 주셔야 한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생각과 마음이 맞는지 검증이 어려울 때가 많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말라. 검증이 어렵다고 성령의 감동이 없다고 말하면 안 된다. 분명 성령은 우리에게 감동하셔서 주관적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예수님은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알고 계신 분이셨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끊임없이 인도하심을 구하고 경험하며 사셨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마가복음 1:12)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포함되어 있음을 믿는가? 그분이 성령을 따라 십자가까지 가셔서 내게 영생이 주어졌다. 오늘 나의 구원도 성령의 감동을 따를 때 경험하게 될 것이다.

 

차가운 신앙생활을 벗어나라. 신앙생활은 결코 이론에 머무르지 않는다. 매일의 행동, 순간의 판단 속에 성령의 감동을 사모하라. 성령을 사모하는 자에게 넘치도록 채워 주시리라.

 

[1] 이론을 안다고 삶을 잘 살 수 없습니다. 실제 살아가는 것은 이론과 다르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사도행전 16장 6-7절을 읽어봅시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선교지를 고민할 때 어떤 경험을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어떤 종류가 있습니까? 평소에 성령의 감동을 따라갈 수 있는 내면의 준비가 되어 있는지 돌아봅시다.

 

[4-5] 마가복음 1장 12절을 읽어봅시다. 모든 말씀을 아시는 예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인도함 받으셨습니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내 삶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또 지금 그 인도하심을 구해야 할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성령의 감동을 받기 위해 매일의 일상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겠습니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 19. 2025.)

마태복음 14:15-16

 

더 이상 도움을 받을 수 없을 때 어른이 된다. 불우한 가정의 아이들이 빨리 성숙해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도움 없이 혼자 책임질 때 성장이 시작된다. 이제 내가 내 돈으로 먹고 살아야 할 때, 내 결정에 내가 책임져야 할 때, 내 판단에 가족과 회사의 운명이 달려 있을 때… 책임은 성장을 가져온다.

 

하나님은 책임을 통해 영적으로 나를 성장시키시는 분이다. 오병이어 사건 때,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었다. 제자들은 각자 사람들이 알아서 해결하겠거니 넋놓고 있었다. 예수님이 책임을 지우신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태복음 14:15-16) 그 일을 처리할 사람은 ‘너’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내게 하나님만 의지하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보라는 도전을 주신다. 그것을 피하지 말라. 하나님이 주신 성장의 기회이다. 더 이상 남을 평가하고 남의 도움을 받는 자리에 있지 말고 내가 책임지는 자리로 가보라. 내가 내 진로, 내 결혼, 내 생계, 내 신앙을 책임져야 한다. 내가 가르치고, 내가 평가받고, 내가 책임지는 자리를 피하지 말라. 꼬여버린 인생의 위기를 직접 기도하며 돌파해보라. 탓하지 말고 내가 하나씩 순종하며 길을 열어보라. 영적인 책임감은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일으킨다.

 

십자가란 무엇인가? 영적인 책임감에 대한 약속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죽음을 책임지셨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한복음 18:11) 아버지가 맡기신 책임을 받아들일 때, 영생과 부활의 문이 열렸다.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부담감도 결코 우리를 힘들게 하시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내 삶에 벌어진 모든 문제를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해결해보겠다고 다짐하라. 오직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으로, 나로부터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할 것이다.

 

먹을 것 받아먹으며 살던 시절을 끝내라. 남의 뒷담화나 하며 실실대는 시절을 정리하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책임에 집중하라. 남들과 다르게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거두는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1] 책임과 독립 속에 내가 성장했음을 경험했던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14장 15-16절을 읽어봅시다.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 대한 제자들의 인식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무엇을 명령하십니까?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직접 책임져야 할 상황들을 회피하고 있는 삶의 영역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18장 11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무엇을 책임지셨습니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오늘 내 삶에 주시는 거룩한 책임감은 무엇인지 깨닫고, 내가 기존의 삶을 청산하고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헌신하는 삶
(1. 12. 2025.)

이사야 6:8

 

“네가 하고싶은 것 해, 엄마는 뭘 하든 널 응원할게” 이런 부모 밑에서 방황하는 청소년이 많다. 왜? 사람은 자기가 정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은 하고 싶지만 나중에 싫어지면 어쩌지?’, ‘하고싶은 것이 여러가지인데 이 중에 무엇을 고르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라는 시대의 목소리는, 훨씬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Here am I. Send me!") 하였더니”(이사야 6:8) 하나님 사람들의 인생은 이 부르심에 헌신하기 전과 후로 나뉜다. 주변에서 다들 하고 싶은 것 찾아다닐 때, 절대 조급해 하지 말라. 하나님의 부르심만을 사모하고, 그곳에 헌신해야 한다.

 

올 한해, 원하는 것을 내가 찾으려는 노력보다, 부르심에 헌신하기를 사모하는 기도를 훨씬 더 많이 하라. 조급하게 결정 내리기 보다, 평범한 것을 지속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 어느 순간 느끼게 하신다. ‘아, 하나님이 이 교회에 헌신하라고 하시나보다’, ‘하나님이 이 공부 하라고 하시나보다’, ‘하나님이 이 사람과 가정을 꾸리라고 하시나보다’, ‘하나님이 이 회사에 재능을 쏟으라고 하시나보다’ … 시간이 지날수록 하고싶은 것이 아니라 부르신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래야 훨씬 재밌게 산다. 훨씬 오래 간다.

 

하고 싶은 것에 속지 않으셨던 분이 예수님이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가복음 14:36) 예수님의 삶에 가장 중요했던 것은 ‘아버지의 뜻’이었다. 그 뜻대로 십자가에 헌신할 때 우리에게 구원이 임했다. 내 삶도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뜻에만 헌신할 때, 삶 전체에 구원이 임할 것이다.

 

남은 삶, 헌신할 준비가 되었는가? 그 부르심에 순종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삶 말고, 헌신하는 삶을 살라. 차원이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1] ‘하고 싶은 것’을 고민하며 살아왔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어떤 결정을 내렸었고, 어떤 후회들과 갈등들이 있었습니까?

 

[2-3] 이사야 6장 8절을 읽어봅시다. 이사야의 삶은 어디서부터 변화됩니까? 이사야는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세상적인 움직임을 멈추고 부르심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던 삶의 기간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가복음 14장 36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마지막까지 집중하셨던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복은 무엇입니까? 나는 지금 헌신하고 있는 삶입니까? 하나님이 무엇에 나를 부르셨다고 느끼고 있습니까? 그 부르심 따라 살기 위해 변화되어야 할 삶의 태도들을 나누어 봅시다.

“그대로 간다
(1. 5. 2025.)

요한계시록 22:11

 

결심보다 무서운 것이 관성이다. 2024년에 무엇을 시작하려고 결심했었는가? 살아보니 결심대로 실행하기 어려운 내 고집은 얼마나 더 셌는가? 인간의 고집은 결코 쉽게 변화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나의 변화를 위해 일하시는 분이다.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에 믿지 않는 자들이 나중에 어떻게 살게 되는지 이렇게 묘사한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요한계시록 22:11) 마지막에 어떻게 되는가? 지금 나쁜 것이 그대로 이어진다. 분노, 폭력, 우울, 게으름, 음란이 영원히 심해지고 계속되며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길을 그대로 영원히 계속 가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삶에 영원히 행복하게 남을 것들을 위해 지금 일하고 계신다. 그 변화를 포착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버리는 실패에 빠지지 말라. 오늘 시작한 것을 내년에도 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의 변화의 흐름이 내년에도 가속 될 것이다. 요즘 어떤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가? 무엇에 가속이 붙고 있는가? 그 방향성은 하나님을 향하는가 지옥을 향하는가? C.S. 루이스는 지옥을 이렇게 재치있게 묘사했다. “나의 못된 성질과 시기심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고 합시다. 이것은 점차 진행되는 일이므로 70년이 지난다 한들 눈에 확 뜨일 정도로 심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100만년 동안 계속된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지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예수님이 내가 마주해야 할 마지막 멸망을 대신 경험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마지막 멸망은 예수님이 가져가시고, 생명을 내게 주셨다. 내 인생의 마지막이 변화되었음을 믿는다면, 그 예수님은 오늘도 내 삶에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오늘 내게 겪게 하시는 일들은, 그대로 가다가 멸망할 죄악들을 빨리 버리라는 인도하심이다.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를 변화시키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하실 것이다. 반응하고, 순종하라. 그대로 가면 지옥이다. 변화가 복이다. 훨씬 행복해질 것이다.

 

[1] 2024년 목표는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을 실행했고, 무엇이 변화되었으며, 무엇이 아쉬웠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요한계시록 22장 11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최후의 심판 때에 악인들은 어떤 결과를 마주하게 됩니까? 의인은 어떤 결과를 마주합니까? 그대로 가는 죄악들이 심각성을 나와 주변을 보며 느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어봅시다. 내 인생의 마지막에 내가 원래 마주해야 할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그 믿음 안에서 오늘 내 삶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반응하고 변화되어야 할 부분들은 무엇일지 나누어 봅시다.

“담는 그릇의 긴장
(12. 29. 2024.)

고린도후서 4:7

 

홀로 있을 때 풀어진다. 그러나 무언가 같이 있으면 긴장해야 한다. 쟁반에 커피 컵을 올리는 순간 커피 쏟을까봐 조심히 운반한다. 그렇게 난폭 운전하던 사람이 차에 누구 태우면 안전운전한다. 집 청소를 하려면 집에 누구 초대하면 된다. 누군가 함께하면 긴장하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 삶에 함께 들어와 거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7) 예수님은 우리의 보배시다. 우리는 질그릇에 예수님을 담았다. 귀한 것을 담아 내는 인생임을 인식할 때, 삶의 모든 순간의 행동에 긴장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거하신다는 긴장이 사라진 삶의 영역을 점검하라. 나의 생활에 예수님을 담아내야 한다. 예수님이 함께하신다는 생각이 사라지니 그런 말투가 함부로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공간의 주인 되신다는 긴장감이 사라지니 공간의 주인이 내가 되는 것이다. 누가 시간 마음대로 써도 아무 말도 안하니 시간에 대한 긴장감도 사라진다. 보이는가? 내 삶의 모든 붕괴는, 내 자신이 보배를 담은 그릇이라는 긴장감이 사라진 데서 나온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않으신 분이 계시다. 예수님이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가복음 14:36) 힘들고, 지친 상태이니 긴장 풀릴만한 상황이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삶에 담아내신 긴장감을 잃지 않으셨다. 그 순종 때문에, 죄인인 내 삶에도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게 되었다.

 

건강한 긴장감을 회복하라.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리 내면에 성령님이 충만히 거하시게 하라. 그분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 그분을 인식하는 긴장감이 내 삶을 생명력 있게 회복시킬 것이다. 무엇인가 담겨 있다면, 마땅히 긴장해야 한다.

 

[1] 긴장이 풀렸다가, 무엇인가를 의식하면서 긴장감이 생겼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내 행동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2-3] 고린도후서 4장 7절을 읽어봅시다. 성경은 우리를 무엇으로 묘사합니까? 예수님은 무엇으로 묘사합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긴장감이 있어야 합니까? 그것을 처음 느꼈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가복음 14장 36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끝까지 삶에 담아내셨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분의 긴장감을 통해 내 삶에 주어진 특권은 무엇입니까? 내 삶에 건강한 긴장감을 회복하기 위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각자가 예수님께로
(12. 22. 2024.)

마태복음 2:2

 

같은 목적만 있으면 전국 각지에서 사람이 몰린다. 임영웅 콘서트 장에 가보라. 전국의 권사님들은 거기에 다 있다. 대전에서는 성심당 크리스마스 케이크 산다고 난리다. 부산 티니핑 팝업 스토어에 10만명의 아기, 엄마들이 몰렸다. 사람은 모두 내게 손짓하는 그것에 반응하여, 그곳으로 달려간다.

 

예수님은 내가 반응할 수 있도록 나에게 징조를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이 태어나신다는 징조는 다양했다. (1)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았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마태복음 2:2) (2) 양 치는 목자들은 천사를 보았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누가복음 2:15) 하나님은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시고, 우리를 부르신다.

 

이 땅에 예수님이 태어나신 성탄절이다. (1) 나를 예수님께로 어떻게 이끄셨는지 돌아보는 시간으로 삼으라. 별을 보여주시고, 천사를 보여주시고, 나만을 이끄시는 독특한 이끄심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왔다. (2) 같은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을 격려하라.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 어떻게 나와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는가? 함께 모인 사람들의 다양함을 통해 예수님의 광대하심을 찬양하라. (3) 경배하는 데에 시간을 쓰라. 세상은 아직 별을 보지 못해서 백화점 가고 여행 가는 것이다. 우린 별과 천사를 본 사람들이다. 예배하고, 믿는 성도들과 함께 하는 데에 시간을 쓰라. 같이 찬송 부르라. 그것이 경배의 방법이다.

 

내가 예수님께 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분이 먼저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태복음 1:21) 그분이 나를 부르지 않으셨다면, 나는 그분께 갈 수 없다. 크리스마스에 내가 다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은, 그분이 먼저 나를 부르셨다는 증거이다.

 

나에게만 별을 보여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라. 나에게만 천사를 통해 자신을 알리신 주님을 경배하러 달려가라. 우리 모두 각자가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할 충분한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다.

 

[1] 같은 목적이 있으면 다양한 사람들이 한 곳에 몰립니다. 내가 좋아하는 주제와 관련된 행사에 사람이 몰렸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2장 2절과 누가복음 2장 15절을 읽어봅시다. 동방박사들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양 치는 목자들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나는 무엇을 보고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나를 이끄신 하나님의 징조들을 나누어 봅시다.

 

[3-5] 마태복음 1장 21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할 합당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크리스마스를 가장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나누어 봅시다.

“반응은 하나님께”
(12. 15. 2024.)

출애굽기 7:12-13

 

아티스트에게 제일 힘든 건 악플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한다. 사람은 반응을 먹고 산다는 말이다. 선물했는데 상대의 반응이 너무 밋밋하면 줘놓고도 화가 난다. 우리 교회는 2부 예배보다 1부가 반응이 좋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사람은 반응에 종속되어 산다.

 

하나님은 내가 상대하는 타인의 모든 반응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애굽(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기 위해 모세를 보내신다. 기적을 행했는데도, 바로 왕의 반응이 차갑다. “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출애굽기 7:12-13) 성경은 바로가 완악한 마음을 가졌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다고 말한다. 인생의 중요한 진리를 깨닫는다. 내 행동에 대한 상대의 반응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

 

반응 때문에 주저하거나, 실망하는 모든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라. 저 사람이 나의 고백을 받아줄까? 하나님이 마음을 여시면 되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계속 적대할 때, 그 사람을 직접 상대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엎드리라. 그 사람 마음이 나에게 닫히게 하시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너무 무서워하지 말라.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바람직한 삶의 태도가 아니다. 상대의 반응을 주님께 맡기고 너무 눈치 보지 말아야 한다. 반응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실행해야 한다.

 

예수님의 구원은 사람들 반응 때문에 왔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해서 놓아주려고 했는데, 군중의 반응이 심각했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마태복음 27:23)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어떻게 벌어진 것인가? 군중이 반대하는 반응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반응마저 사용하셔서, 나에게 구원을 주셨다. 믿는가? 그러면 오늘도 믿어야 한다. 예수님 안에서 내가 상대하는 상대의 모든 반응은, 하나님이 나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실 것이다.

 

고백에 거절 당하고, 취업에 탈락하고, 나를 차갑게 대하는 상사의 반응에 너무 휘둘리지 말라. 겸손하게 상대의 반응을 통해 인도하실 하나님을 의지하라. 반응은 하나님께 있다.

 

[1] 사람은 반응을 먹고 삽니다. 상대의 반응에 힘이 나거나, 좌절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출애굽기 7장 12-13절을 읽어봅시다. 기적을 행했을 때, 바로 왕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3절을 읽어봅시다. 바로의 반응은 동시에 누구의 손에 있었습니까? 상대의 반응 때문에 내 삶의 중심이 흔들렸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3절: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4-5] 마태복음 27장 23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은 무엇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습니까? 하나님은 군중의 반응을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내 삶에서 상대의 반응을 나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실 것을 믿으며, 상대의 반응을 하나님께 맡겨야 할 부분들을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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