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종류의 기도
(3. 10. 2024.)

마가복음 9:28-29

 

같은 영역에 있으나, 다른 수준이라고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선릉역 앞 ‘명품수선집’. 양복 수선은 무조건 여기 가야 한다. 강화도 놀러갈 땐 ‘화목 칼국수’. 육수가 정말 끝내준다. 교회 커피 원두는 ‘챔프 커피 알리블렌딩’. 영역은 같다. 그러나 수준이 다르다. 우린 그걸 능력이라고 한다.

 

신자들의 삶에는 수준이 다른 기도를 통해 나오는 삶의 능력이 있다.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한 귀신을 예수님이 쫓아내자, 제자들이 묻는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마가복음 9:28) 예수님은 다른 종류의 기도를 소개하신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29) 제자들은 그 전에도 기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다른 능력을 보여주는, 다른 종류의 기도가 있다는 말이다.

 

삶의 더 위대한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을 때, 다른 종류의 기도를 시작하라. 샤워를 하며 지내지만, 목욕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삶의 중요하고 무거운 문제들을 두고 고민할 때, 결단해야 할 때, 돌파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맹하게 앉아있지 말고 다른 종류의 기도를 계획해보라. (1) 기도의 기간을 정해야 한다. 1주, 2주, 한달 등 먼저 기간을 정하라. (2) 정해진 기도 시간을 사수해야 한다.(매일 밤 10시, 매일 새벽 6시 등) (3) 기도의 양을 정하라. (30분, 1시간 등) 좀 냉정하게 말해보자. 당신이 그 문제가 기도가 필요하지 않다고 계속 생각한다면, 그건 계속 늦어지거나 계속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평범하게 기도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결과도 평범할 것이다. 완전한 변화와 역전을 바란다면, 비범하게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구원사역을 이루신 마지막 방법은 기도였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누가복음 22:44) 십자가의 무거운 사역 뒤에는 가장 무거운 기도가 있었다. 기도의 구원이 내 삶에 임했음을 믿는가? 오늘 내 삶도 기도의 구원이 임할 것임을 기대해야 한다.

 

특별한 기도기간을 정해보지 않았다면, 아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른 종류의 기도를 시도하라. 다른 종류의 능력이 삶에 임할 것이다.

 

[1] 같은 영역에 있지만, 다른 수준이라고 느껴져 감탄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경험했던 일상의 다른 수준의 것들(맛, 음악, 실력, 재능, 인격 등…)을 소개해 봅시다.

 

[2-3] 마가복음 9:28-29을 읽어봅시다. 제자들은 무엇을 물어봤습니까? 그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새로운 능력을 경험하게 하시기 위해 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과거에 정해진 기도시간을 통해 새로운 삶의 장이 열렸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누가복음 22장 44절을 읽어봅시다. 십자가의 구원사역은 마지막에 무엇을 통해 이루어졌습니까? 내 인생에 하나님이 다른 종류의 기도로 부르신다고 느껴지는 기도제목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새로운 기도의 계획들도 한번 세워봅시다.

“새로운 재료의 출현
(3. 3. 2024.)

히브리서 13:8

 

오래 사귀면 결혼하기 쉽지 않다. 왜?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사람에게 실망할만한 새로운 재료들이 출현하기 때문에 그렇다. 잠깐 만난 사람은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영원히 얼굴 볼 사람들은 계속 사랑하기 어렵다.

 

하나님은 나를 영원토록 동일하게 사랑하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브리서 13:8) 내가 어렸을 때도, 성장했을 때에도 그렇다. 내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도, 너무나 크게 무너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실망시킬만한 내 삶에 새로운 재료가 출현했을 때에도, 그분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내 삶의 재료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감’시키지 않는다.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점을 미움의 재료로 삼지 말라. 새로운 재료는 내가 더 사랑해야 할 근거가 될 뿐이다. 다정해서 좋아했던 사람이었는데 생각보다 매정한 면이 있음을 발견했는가? 잘 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자녀가 방황을 심하게 하는가? 꼼꼼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구멍이 많은가? 내가 알게 된 상대방에 대한 새로운 재료는 자칫 잘못하면 매 순간 미움과 정죄의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자신이 하나님임을 끊임없이 드러내셨다. 어느정도 해줬으면 받아들여야 하는데, 죽이겠다고 덤빈다. 더 극단적인 적대감이 출현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응하셨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한복음 13:1)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나의 마지막 날에도 동일한 사랑으로 그분이 나를 받아주실 것을 믿는가?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동일한 사랑 받았다면,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상대에게 실망할만한 새로운 재료를 발견했을 때, 눈빛 바뀌지 말라. 실망감 비추지 말라. 어떻게 하면 더 사랑할지, 동일하게 품을 수 있을지 고민해보라. 상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당신도 원래 그런 사람 아니었는가? 예수님이 나를 품으셨다. 나에게 사랑하라고 주신 사람, 나도 끝까지 사랑해야 한다. 새로운 재료는, 사랑의 재료이다.

 

[1] 오래 만난 사람에게는 실망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멀고 애매한 관계에서는 오히려 친밀함과 즐거움을 느끼고, 오래되고 더 깊어지며 실망감 때문에 마음이 어려웠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히브리서 13장 8절을 읽어 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타인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재료들이 쉽게 미움의 재료로 사용될 수 있는 순간들을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13장 1절을 읽어봅시다. 마지막 극단의 적대감을 표출한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나를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나도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어떻게 조심하고, 어떻게 지혜롭게 대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줄일 줄 아는 사람
(2. 25. 2024.)

베드로전서 4:8

 

영향력의 시대이다. 이제 큰 기업의 광고보다 인플루언서 한 명이 물건을 홍보하는 힘이 더 크다. 작은 사건 하나가 미디어를 타면 사회 전체의 마녀사냥감이 된다. 세상은 모든 일을 키우는 데 능하다.

 

하나님은 신자를 ‘줄일 수 있는 사람’으로 부르신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베드로전서 4:8)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의 여러가지 갈등과 분노를 줄이는 역할을 해야 한다. 나를 거쳐가면 화가 줄어들고, 염려가 줄어들고, 갈등이 줄어들고, 문제가 줄어들어야 한다.

 

축소의 영향력을 추구하라. 증폭시키는 영향력만을 추구하지 말라.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보라. (1) 나는 요즘 회사나 가정에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듣고, 무슨 말을 전달하고 있는가? (2) 나를 거쳐가면 상대와 내 안에 부정적인 것들이 커지는가 줄어드는가? 일을 키워서 해결하려는 사람은 초보이다. 하나도 드러나지 않는데 일을 해결하는 사람은 고수이다. 가장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줄일 줄 아는 분이셨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로새서 2:14) 우리의 죄를 단톡방에 올리지 않으셨다. 사내게시판에 폭로하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자신의 몸에 쏟으심으로 ‘줄이셨다.’

 

줄이고 줄여 내 죄를 완전히 지워 버리신 그분 앞에서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죄를 없애신 예수님의 권세가 내 삶에도 흐른다. 나를 만나는 사람과 문제 앞에서 그 모든 부정적인 것들은 줄어들 것이다. 그 지혜로 행하라. 세상을 조용히 섬기는 자가 될 것이다.

 

[1] 요즘 작은 문제들이 크게 확산되는 모습들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까? 삶에서 경험했던 영향력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베드로전서 4장 8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십니까? 내 삶의 여러 영역들 속에서 나를 통해서 문제가 커지거나 작아졌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골로새서 2장 1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내 삶에도 여전히 예수님의 권세가 흐름을 믿습니까? 그 분의 방식대로 내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나누어 봅시다.

“속으로 말하는 죄
(2. 18. 2024.)

누가복음 3:8

 

사람은 연륜이 생길수록 사람들의 속마음이 읽힌다. ‘저 알바생은 분명 대충 하고 돈이나 많이 벌고 싶어 하겠지?’, ‘이 일을 시켜서 속으로 엄청 욕하고 있겠지?’ 속마음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사람의 스트레스 해소 창구가 된다.

 

하나님은 속마음을 알고 판단하시는 분이다. 세례 요한의 첫 사역은,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춰내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누가복음 3:8) 유대인들은 속으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우월하다는 자기 의에 빠져 있었다. 속마음이 바뀌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다.

 

속으로 말하는 죄를 살피라. 겉으로 참고 웃는 것은 매너 있는 지성인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속을 정결케 하는 것은 신자가 해야 할 일이다. 웃어주지만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다. 겸손한 척하지만 속으로 자랑하며 우월감에 만족하는 것은 마귀가 준 것이다. 내 속으로 말하는 죄를 인지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신자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된다.

 

어떻게 내 속마음이 바뀌는가? 속마음으로부터 나를 사랑하신 분을 만나면 바뀐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복음 18:35)” 나는 결코 마음으로부터 그 사람이 용서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마음으로부터 나를 미워하지 않으심을 보여주셨다. 당신은 십자가를 볼 때마다 확신해야 한다. 보잘 것 없고, 잘한 것 없는 내 인생을, 주님은 미워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깨끗한 마음이 보이는가? 마음으로부터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는가? 속이 깨끗하신 그 분 만날 때 비로소 내 인생도 변화의 갈망이 생긴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진다. 마음으로부터 깨끗하고 싶다는 갈망이 생긴다. 내가 만나는 상대에게 매너만 선물하지 말고, 깨끗한 속마음도 선물하라. 그것이 이 시대가 찾는 깨끗함이다.

 

[1] 살아갈수록 상대의 속이 훤히 보이고, 내 속을 감추며 겉을 포장하는 지혜도 늘어만 갑니다. 상대의 더러운 속이 뻔히 보였거나, 내 안에 더러움과 악을 감추며 겉을 포장했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누가복음 3장 8절을 읽어봅시다.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하며 처음 지적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기준을 핑계로 내 속마음을 정당화하는 부분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18장 3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 속마음은 언제 변할 수 있습니까? 그분의 진실된 마음을 경험하거나 느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나도 이 땅에서 속이 깨끗한 자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선악을 뛰어넘는 인도하심
(2. 11. 2024.)

창세기 31:24

 

세상의 세계관은 단편적이다. 앞으로 가면 좋다. 뒤로 가면 나쁘다. 위로 가면 좋다. 떨어지면 나쁘다. 선악도 마찬가지다. 선한 것은 좋은 것이다. 악한 것은 나쁜 것이다. 그래서 내 삶에 생기는 모든 부정적인 일들은 내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하나님의 세계관은 입체적이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도망쳤다. 라반 입장에선 나쁜 일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반이 야곱을 바라봐야 할 새로운 관점을 주신다.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창세기 31:24) 순간적인 선악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야곱과 라반 사이의 관계를 직접 다루고 계시다는 확신을 주신 것이다.

 

선악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라. 그 상사가 잘못한 것 맞다. 그 자녀가 잘못 나가고 있는 것 맞다. 선악을 기준으로 보면 다 나빠 보인다. 그러나 야곱과 라반의 인생은 선악을 뛰어넘어 하나님 앞에 붙들려 있었다. 오늘도 내가 다 통제할 수 없는 모든 선악의 상황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내 삶에 펼쳐진 갈등과 방황, 온갖 부정적인 일들 속에서 하나님이 입체적으로 행하실 일들이 분명 있다. 선악 간에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할 수 있는 그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만 선하시면 된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주신 악한 일을 선악 간에 판단하지 않으신 분이 계시다. 예수님이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태복음 27:46) 선악의 관점으로는 억울한 죽음일 뿐이다. 그러나 묵묵히 십자가를 지신 그분의 삶에 선악을 뛰어넘는 인도하심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죄인이었던 나의 구원이다. 그 구원을 보장받은 존재임을 믿는가? 나머지 삶도 선악을 넘어선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명절이다. 가족과 친지들의 온갖 군상이 다 보여 답답한 때이기도 하다. 선악 간에 함부로 말하면서 우리 가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하지 말라. 당신도 악인이었는데 구원받았음을 언제나 기억하라. 입체적인 세계로 들어오라. 분명히 내 삶의 모든 여정에 선악을 뛰어넘어 유익을 주실 것이다.

 

[1] 세상의 시각은 단편적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삶을 바라보는 단순한 시각에 허무함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내가 자꾸 내 삶을 단편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삶의 영역은 어디입니까?

 

[2-3] 창세기 31장 24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라반에게 야곱에 대해 어떤 새로운 관점을 주셨습니까? 단순히 나쁘게만 볼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체적인 일하심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27장 46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단편적으로, 그리고 입체적으로 해석해봅시다. 그의 죽음은 나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습니까? 그 구원을 믿으며, 오늘의 나의 삶과, 가족 친지들, 그리고 주변의 일들을 어떻게 새롭게 바라보아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성경을 보는 단 하나의 관점
(2. 4. 2024.)

요한복음 5:39

 

성경을 읽을 때마다 헷갈린다. 여기서는 축복, 저기서는 저주다. 여기서는 번영, 저기서는 멸망이다. 말씀을 통해 위로 받으며 확신을 얻다가도, 이 말씀을 도대체 어떻게 내 삶의 빛으로 삼아야 할지 헷갈린다.

 

성경은 오직 예수님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읽을 때에만 이해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한복음 5:39) 예수님이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의 모든 구절을 예수님과 연결시켜 읽을 때에 내 삶에 유익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두 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1) 저주를 읽어도 소망이다. 나는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였으나, 예수님이 내 모든 저주를 받으셨다. 저주를 읽을수록 나의 무력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 심각한 저주를 나 대신 감당하신 예수님이 계시니, 나는 오늘 하루 벌어진 이 모든 상황이 내게 저주가 되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을 ‘당하신 순종’이라고 한다. (2) 약속을 읽어도 의심하지 않는다. 약속만 읽으면, 그 약속이 실행되기 위해서 내가 충분히 잘 살고 있는지 늘 불안하다. 그러나 나는 충분치 않아도, 이 모든 여정 속에 약속하신 복이 내 삶에 모두 펼쳐질 것을 믿는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 모든 율법에 순종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행하신 순종’이라고 한다.

 

내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가져가지고, 그 분이 누리셔야 할 모든 복을 내게 주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한복음 19:30) 다 이루셨음을 믿어야, 오늘 내 삶에 펼쳐진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다. 고난도 저주가 아니요, 잘됨도 내 공로 아니다. 오직 그분이 내 삶에 다 이루실 계획만 신뢰하며 담대할 수 있다.

 

예수님 빼고 성경을 읽다가, 좋은 곳만 발췌하고 나쁜 곳은 덮어두지 말라. 다 읽어도 된다. 예수님 때문에 모두 은혜로 읽을 수 있다. 이것이 성경을 보는 단 하나의 관점이다.

 

[1] 성경을 집중해서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 축복과 저주가 교차되어 헷갈리거나, 내가 원하는 구절만을 찾아 붙들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요한복음 5장 39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하고 계십니까? 행하신 순종과 당하신 순종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삶의 해석을 어떻게 변화시킵니까?

 

[4-5] 요한복음 19장 3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그 시선 속에서 성경을 읽으며 새롭게 깨달았던 점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내 삶의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도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개선의 저주
(1. 28. 2024.)

마태복음 12:43-45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열악했던 삶이 개선될 때이다. 위기가 왔으나 건지시고, 병들었으나 고치시고, 백수였으나 돈 벌게 하신 개선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왔다. 잘 되게만 해주신다면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

 

하나님 없는 삶의 개선은 저주이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태복음 13:43,45) 예수님은 내 삶을 망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 주셨다. 그러나 그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오히려 삶은 더 강한 악의 세력에 사로잡힌다.

 

개선되는 내 삶과 하나님은 비례하고 있는지 점검하라. 개선의 저주란 하나님을 찾게 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더 많이 생긴 만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시간을 쏟고 있는가? 삶이 더 견고해진 것에 비례하여, 기도시간도 충분히 늘어나고 있는가? 살려주신 만큼, 하나님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고 있는가? 개선에 취하면, 더 이상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반대로 표현도 가능하다. 하나님이 개선되지 않고 머무르게 하신 자리는, 더 하나님을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나를 훈련시키시는 과정이다.

 

죄인이 받아야 할 심판은 무엇인가? ‘개선되지 않는 저주’이다. 그것이 죽음이다. 죽으면 끝이다. 죽음은 좋아질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죽음을 영생으로 개선하셨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한복음 6:40) 이제 내 삶은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개선이 보장되어 있음을 믿는가? 오늘의 삶도 확신해야 한다. 내 삶에 모든 ‘좋아지는 것’은 하나님께만 있다. 더 좋아지려면, 주님만 사랑해야 한다.

 

현재의 개선에 안주하는 미련함을 버리라. 죽음도 개선하신 분이, 내 삶을 더 좋게 개선하실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두려운 경고로만 받지 말고, 초대와 사랑으로 받아들여 보라. 더 좋아지고 싶지 않은가? 끝까지 하나님께만 매달리라. 그것이 개선의 저주를 피하는 길이다.

 

[1] 지나보면 하나님이 예전보다 형편을 훨씬 개선시켜 주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확실히 개선되었던 내 삶의 변화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13장 43절과 45절을 읽어봅시다. 귀신이 쫓겨나간 사람 안에는 무엇이 없었습니까? 그러자 무엇이 들어왔습니까? 내 삶이 현재 개선의 저주에 빠져 있는 상황은 없는지 살펴봅시다.

 

[4-5] 요한복음 6장 4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나 대신 죽음을 통해 받으신 저주는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님 믿을 때 영원히 보장되는 약속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개선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을 기대하기 위해 변화되어야 할 내 삶의 생각과 태도를 나누어 봅시다.

 

“마르지 않는 샘
(1. 21. 2024.)

이사야 58:11

 

세상의 먹거리에는 끝이 있다. 삼성전자 스마트폰 사업부 친구가 엄청난 성과급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갤럭시가 뜰 때였다. 지금은 추억이다. 어렸을 때 피씨방 사장님들은 벤츠를 타고 다녔다. 지금은 물이 다 빠졌다. 이디야 커피를 운영했던 사장님께 요즘은 메가커피가 대세이지 않냐고 물었더니, 메가커피도 끝났다고 한다. 이제는 컴포즈라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주시는 분이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이사야 58:11) 세상의 유행을 따라가면 성장과 쇠퇴에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 의지하면, 유행과 상관없이 그분이 언제나 내 인생을 먹이고 입히신다.

 

하나님이 내 삶에 끊어지지 않는 샘물이심을 확신하라. (1) 유행도 지나고, 쇠퇴하는 영역에서 변화를 준비해야 할 때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이 물을 대어 주시기에, 새로운 공급처를 주시고, 시기에 맞는 새로운 인생을 열어 나를 먹이실 것이다. (2) 물 들어온 곳에서 일하고 있다면 주의하라. 물을 대어주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겸손하게 유행을 따르지 않고 주님 끝까지 따라가야 한다. (3) 물 빠진 영역에서 계속 일해야 한다면 위축되지 말라. 감당할 새로운 능력을 대어 주셔서, 같은 상황이지만 다른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여전히 공급해 주실 것이다.

 

물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과 끊어지는 것을 나 대신 경험하신 분이 있다. 예수님이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한복음 19:28) 마르지 않는 샘 되신 하나님과 끊어져야 할 심판을 나 대신 예수님이 당하셨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은 영원히 내 삶에 생명의 물을 공급하실 것도 함께 믿어야 한다.

 

평생에 나를 이끄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물 들어오고 물 빠지는 시대 가운데 위축되거나 교만해지지 말라. 내 인생에 마르지 않는 샘은 오직 한 분, 하나님 뿐이시다.

 

[1] 돈도 잘 벌리고 잘 되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니 물이 빠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내가 경험했던 시대의 변화가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이사야 58장 11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가 처한 상황을 살펴보고 지금 나의 믿음을 점검해 봅시다.

 

[4-5] 요한복음 19장 28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나 대신 경험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내 인생에 영원히 주어진 약속은 무엇입니까? 마르지 않는 샘 되신 하나님을 믿으며, 내 삶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좋은 것과 충돌하는 경험
(1. 14. 2024.)

마태복음 10:37

 

나쁜 일만 피하면서 살면 인생 잘 살 줄 알았다. 살아 보면 깨닫는다. 삶에서는 좋은 것끼리 충돌한다는 것을! 일도 하고 싶지만, 아이도 돌보고 싶다. 결혼도 하고 싶지만, 혼자 살고 싶을 때도 있다. 돈도 벌고 싶지만, 놀러만 다니고 싶기도 하다. 하나를 하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좋은 것을 포기하는 경험을 해야 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태복음 10:37) 좋은 걸 다 그만두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좋은 것을 예수님보다 앞세워서는 결코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좋은 것은 언제나 하나님 아래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가로막는 나의 좋은 것과 직면하라. 자녀가 너무 귀하지만, 그 자녀는 하나님 아래에서 움직여야 한다. 연애와 결혼이 너무 좋지만, 하나님을 무시하고 진행하면 그것이 우상이다. 돈이 너무 귀해서 하나님 앞에 헌금도 못하고 커리어를 좇는다면, 그 돈이 하나님을 막는 원수이다. 내 스케쥴과 일상이 너무 귀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수 없다면, 그 일상 전부가 하나님과 충돌하는 것이다.

 

왜 좋은 것을 막으시는가? 하나님이 좋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야고보서 1:17) 하나님을 놓치지 않도록, 예수님은 나 대신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심판을 당하셨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가복음 15:34)

 

예수님은 내게 가장 좋은 하나님을 주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가? 하나 더 믿어야 한다. 예수님 뜻대로 삶의 모든 것을 정렬하면, 나는 결코 좋은 것을 놓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 사실 믿고 새해에는 좋은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는 경험을 해보라. 시간을 내려놓으라. 돈을 내려놓으라. 자녀를 내려놓으라. 나쁜 것과 싸우지 말고 좋은 것과 싸워보라. 새해의 내가 해야 할 가장 큰 싸움이다.

 

[1] 삶의 좋은 것들이 서로 충돌합니다. 좋은 것끼리 비교하며 인생의 미래를 고민하는 내 모습이 있다면(있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10장 37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나열된 것들은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좋은 것을 하나님보다 앞세워 후회하거나 삶의 질서가 파괴 되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야고보서 1장 17절을 읽어봅시다. 좋은 것은 어디로부터 옵니까? 마가복음 15장 3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무엇을 잃는 심판을 대신 당하셨습니까? 예수님이 가장 좋은 것 주시는 분임을 믿고, 올 한해 치열하게 싸워 하나님 앞에 복종시켜야 할 나의 좋은 것이 무엇일지 나누어 봅시다.

 

“판단의 말 사용하기
(1. 7. 2024.)

요한복음 1:47

 

남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내 인생 사는 시대이다. “네가 뭘 안다고 나보고 훈수를 둬?”, “남 일에 신경 끄시고 본인 일이나 보세요.” 욕 먹을까 두렵다. 그러다 보니 남을 판단하는 이야기가 점점 조심스럽다. 속으로만 생각한다. 내 인생이나 잘 해야지!

 

예수님은 판단의 말을 지혜롭게 사용하신 분이다. 나다나엘을 처음 만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한복음 1:47) 야곱은 속이는 사람이었다. 하나님 만나고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다. 너도 그런 사람이라는 판단을 긍정적으로 표현해주신 것이다. 그 사람의 삶에 있는 긍정적인 것을 꺼내어 일부러 표현하셨다.

 

그 사람을 향한 긍정적인 판단을 일부러 표현하라. 상대를 정죄하는 판단은 경계해야 하지만(롬 2:1) 그렇다고 상대를 긍정적으로 판단해주는 격려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잘 했을 때, 그냥 넘어가지 말고 꼭 잘 한 것 같다고 표현해주라. 장점과 매력이 보일 때, 넌 그게 참 장점인 것 같다고 꼭 짚고 넘어가라. 고마운 일을 해줬을 때, 수고했을 때, 그것 때문에 고마웠다고, 참 수고했다고 분명하게 전달하라. 긍정적인 판단의 말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괜히 좋은 말 하는 것은 말장난 아닌가?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상대에 대한 긍정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그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린도후서 1:20)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No(아니오)’ 당하셨기에, 우리의 삶의 소망은 언제나 예수님 안에서 ‘예(Yes)’가 된다.

 

내 주변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말라. 이번 대화에는 어떤 긍정적인 판단을 집어넣을 수 있을지 늘 고민하라. 갑자기 상대가 눈이 커지고 몸을 가까이하며 당신의 말을 듣고 싶어 할 것이다. 나를 좋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현대인들은 다들 그렇게 좋은 판단에 목말라 있다. 예수님이 나를 주의 자녀라 판단해 주셨으니, 나도 예수님 따라 이 땅에서 그렇게 살면 된다. 당신 주변에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할 것이다.

 

[1] 남에게 판단의 한 마디 해주고 싶은데 참았던 경험이나, 판단의 한 마디 들어서 기분이 좋고/나빴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2-3] 요한복음 1장 47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처음 만났을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것은 어떤 의미였습니까? 내가 상대를 긍정적으로 판단해주는 사명을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4-5] 고린도후서 1장 20절을 읽어봅시다. 왜 우리는 상대방의 삶에 대해 긍정해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지나쳤던 사람들을 향해 어떤 판단의 말을 해줄 수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오늘 모임에서 한 사람을 정해, 내가 긍정적인 판단의 말(칭찬, 감사, 강점 말해주기 등)을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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