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기
(6. 30. 2024.)

잠언 4:23

 

집은 언제 청소하는가? 손님이 올 때이다. 혼자 있다면 더러워도 상관없다. 누군가를 모셔야 한다면 치워야 한다. 정돈되지 않은 초대는 그 자체로 무례함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거하시면서 생명을 공급하시는 분이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신다. 그것을 ‘성령의 내주하심’(indwelling of the Holy Spirit)이라고 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신다. 모든 삶의 순간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경험하려면 마음을 관리해야 한다.

 

성령님이 충만하게 일하시지 못하게 막는 마음상태를 관리하라.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분을 모실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내가 보고 듣고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임재를 가로막고 있지는 않는가? 하루 종일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생각을 품고 있지는 않은가? 매 순간 하나님을 의식하며 그분의 임재를 바라고 기대하는 기도를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는가? 예배나 경건생활이 끝나면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바로 지워지고 관심을 끄지는 않는가?

 

예수님의 삶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역이었다.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사도행전 10:38) 예수님은 성령님이 함께하실 수 없는 나 같은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믿는가? 그 분을 믿으면 나도 그분 만이 누리실 수 있었던 것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나도 예수님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간구할 때, 주님이 내 안에 충만히 거하셔서 그분의 생명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도대체 일상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한다면, 먼저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는 일부터 시작하라. 마음을 관리하기 위해 모든 언행과 생각에 주의하라. 막혀 있었던 성령의 능력이 우리 마음 속에서 터져 나와 온 인격을 사로잡을 것이다.

 

[1] 요즘 내 집, 혹은 방 상태는 어떻습니까? 언제 청소합니까? 집안 정리와 관련한 나의 습관이나 에피소드가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잠언 4장 23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무엇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까? 마음으로부터 무엇이 나오게 됩니까? 성령의 내주하심이란 무엇입니까? 성령님이 충분히 내 마음 속에서 일하실 수 없게 막는 나의 일상의 삶의 패턴들을 나누어 봅시다.

 

[4-5] 사도행전 10장 38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서는 어떤 일들이 나타났습니까? 내가 그분이 경험하신 일을 동일하게 경험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령님을 사모하며 일상을 어떻게 관리해 나갈지 나누어 봅시다. 주님을 사모했을 때 하나님이 마음 속에서 일하심을 경험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전도의 기회 만들기
(6. 23. 2024.)

디모데후서 4:2

 

일단 기회를 잡아야 일이 진행된다. 왜 장사는 목이 중요한가? 사람이 많이 지나다녀야 팔릴 기회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왜 만남의 횟수를 늘려야 하는가? 많이 만나봐야 내 사람 만날 확률도 높아지니까. 일이 되려면, 기회부터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전도의 기회를 통해서 일하시는 분이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디모데후서 4:2)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라는 말은 ‘시즌일 때’(in season)나, ‘비시즌일 때’(out of season) 모두 그렇게 하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자라면, 형편과 상황에 관계없이 나의 일상이 전도의 기회로 만들어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나의 일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구체적으로 찾으라. (1) 직접 말씀을 전할 기회: 따로 만나 복음을 전하기, 나의 간증하기, 함께 기도해주기, 기독교에 관해 변증하기 등. (2) 간접적으로 말씀을 전할 기회: 신앙서적 선물하기, 기도하고 밥 먹기, 설교 링크 보내기, 교회에 초대하기 등. 상대의 반응과 거절에 실망하지 말고 늘 기회를 만드는 것이 신자의 사명이다. 결국 그 사람을 전도하지 못한 것은 불순종이 아니다. 그러나 전도의 기회를 만들지 않고 있는 것은 불순종이다.

 

상대가 관심도 없는데 내가 왜 전도를 해야 하는가? 그게 바로 내가 받은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한일서 4:19) 하나님께 관심 없을 때 그분은 내게 자신의 아들을 보내주셨다. 아들이 싫어 거부했을 때, 그분은 아들을 십자가에 죽여 나에게 영생 주셨다. 죄인인 내게 구원의 기회를 주신 분이 나의 주님이시다. 나도 그 사랑받아 전도의 기회를 만들 때, 주님이 이 기회를 통해 일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수능 공부를 알려준다고 불러놓고, 자꾸 교회 오라는 선배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선 고등학생이 김현수 목사가 되었다. 기회는 그렇게 기적이 되는 것이다. 일단 기회를 만들고, 나머지는 주님께 맡기라. 주님이 당신을 통해 새로운 영혼들을 부르실 것이다.

 

 

[1] 삶은 기회를 만드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좋은 기회를 만나 삶의 변화를 경험했던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디모데후서 4장 2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내가 전도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 시도했던 방법들은 무엇이 있습니까? 전도의 불순종이란 무엇입니까?

 

[4-5] 요한일서 4장 19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해 여전히 내가 전도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새롭게 시도해볼 수 있는 전도의 기회에는 무엇이 있는지 나누어 봅시다. 내가 전도하고 싶은 사람도 소개해 봅시다.

“포기하며 전진하기
(6. 16. 2024.)

빌립보서 3:8

 

아쉬운 것들, 놓친 것들 투성이다. 꼼꼼히 살면 모든 것을 챙길 수 있을 거라 자부했지만, 결국 몇 가지는 놓고 가야 한다. 성적을 외면하며 계속 좋은 대학을 바랄 순 없다. 자기계발을 다 하면서 육아를 할 순 없다. 결혼을 원하면서 자유도 챙길 순 없다.

 

하나님은 포기하는 과정을 통해 주님을 닮게 하신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으려면 포기해야 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립보서 3:8) 그리스도를 얻으려면 이 땅의 무언가를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 속에서 포기는 결코 실패가 아니라, 주님이 계획하신 삶의 일부이다.

 

의도적으로 포기하도록 몰고가시는 삶의 영역이 있는지 돌아보라.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나를 전진시키시는 지점이다. 자존심 내려 놔야 회사 계속 다닐 수 있다. 계획적인 삶을 포기해야 무질서 속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발견한다. 내 실력, 내 외모, 내 상황이 이 정도라는 것을 철저히 인정해야 오늘의 삶을 누리기 시작할 수 있다. 뭐가 좀 안 풀리고 있다면, 지금 하나님이 포기하라는 것을 계속 붙들고 있어서 그렇다.

 

다 버리셨으나, 영원으로 전진하신 분이 예수님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한복음 10:15) 예수님 없을 때 삶의 포기는 실패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 대신 죽으심으로, 죽음을 영원을 향한 전진으로 바꾸어 주셨다. 믿는가?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서 내 삶의 모든 포기는 이제 전진으로 바뀐다. 이제 내 삶의 포기는 예수님 안에서 결코 실패일 수 없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삶에 종종 이런 느낌이 와야 한다. ‘지금은 이것을 포기하라고 하시나보다.’ 전진을 위한 주님의 음성이다. 모든 것을 붙잡고 있으려 하지 말고, 포기하며 하나님이 행하실 새로운 일을 기대해보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포기는 전진이 된다.

 

[1] 삶에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시기마다, 무엇을 포기 했었습니까? 무엇을 포기하지 못해 고민이 많았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빌립보서 3장 8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은 예수님을 얻기 위해 무엇을 결단합니까? 우리의 삶에 다시 해석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현재 내 삶에 하나님이 포기로 몰고가시는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10장 1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무엇을 포기하셨습니까? 그 때,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뜻하시는 포기를 결단할 때 경험하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인생에 포기를 통해 전진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오늘 포기를 결단해야 하는 삶의 영역들도 나누어 봅시다.

“닮아간다는 목표
(6. 9. 2024.)

로마서 8:29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명확히 보일 때도 있지만, 굳이 여기서 무엇을 하시려는지 알 수 없을 때도 많다. 이 반복된 업무 속에서 도대체 하고 계신 일이 있을까? 매일의 단조로운 일상 속에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닮게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8:29) 내 프레임에만 갇히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보이지 않는다.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계획 중의 하나는 나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 닮게 하시려는 것이다.

 

닮아간다는 관점에서 내 삶을 어떻게 이끌고 계신지 살펴보라. *창조: 무언가 학습하고 숙련되어 내가 직접 새로운 업무를 수행하고 창조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 닮게 하시려는 계획 중의 하나다. *성품: 예전보다 인내하고, 예전보다 부드러워지며, 상대를 품어내고, 언제나 기쁨을 유지하는 능력이 커져간다면 하나님 닮아가는 과정이다. *생활방식: 삶에 질서와 기준이 생기며, 악을 멀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삶의 열매가 맺히는 구조를 찾아간다면 하나님 닮아가는 것이다. 닮아감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일들이 꽤 많다.

 

예수님은 하나씩 배우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브리서 5:8) 차근차근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내 삶에 구원이 임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부름 받았다면, 우리도 똑같이 그렇게 이끄실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을 통해 분명 주님 닮게 하실 것이다.

 

내가 세운 목표들에 가려져 있는, 닮아간다는 목표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시고, 이 목표야 말로 인생에 영원히 남는 가치 있는 일이다.

 

[1] 주님이 하고 계신 일이 무엇인지 쉽게 알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명확히 보였던 때와, 그렇지 않았던 때를 대조하여 나누어 봅시다.

 

[2-3] 로마서 8장 29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닮아간다는 목표를 생각했을 때 분명 몇 년 전보다 나아지고 변화된 내 인생의 모습에는 무엇이 있는지 나누어 봅시다.

 

[4-5] 히브리서 5장 8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방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을 닮아간다는 관점에서, 나는 오늘 주님이 무엇을 배우게 하고 계시다고 느껴집니까? 나누어 봅시다.

“지키시는 이
(6. 2. 2024.)

시편 121:5-6

 

내가 노력해도 지킬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기분 좋은 마음. 분명히 기쁘고 평안했는데, 갑자기 우울해진다. 분명 내 안에 있는 내 소유의 감정인데, 내가 지킬 수가 없다. *건강. 운동 열심히 했는데도 이상한 병이 끊임없이 찾아온다. *사람.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하는 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내 삶을 내가 지킬 수 있다는 건 착각이다.

 

하나님은 내 삶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The Lord is your keeper.)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시편 121:5-6) 지금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보존’의 섭리라고 한다. 지키셔야 유지할 수 있다. 지키셔야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지키려고 애쓰지 말고, 지키시는 분을 의지하라. 기쁜 감정을 유지하려고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과 친밀해지면 감정이 지켜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 잡으러 다닌다고 될 일이 아니다. 하나님 뜻에만 순종할 때 관계가 지켜지게 되는 것이다. 돈, 마음, 자원, 사람, 건강 모두 하나님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켜지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지키시는 이는 하나님 뿐이기 때문이다.

 

나를 분명히 지키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나 대신 (1) 버려지시고, (2) 지켜지신 예수님 때문이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브리서 5:7) 죄인인 나는 하나님 앞에 버림받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 대신 버려지셨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는다. 동시에 의인인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지킴 받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예수님이 나 대신 순종하셔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 나를 지키신다.

 

죽음에서도 나를 지키실 것을 약속하신 예수님의 권세를 힘입어 살라. 내가 지키려고 하는 모든 것은 빼앗길 것이다. 지키시는 분을 의지하는 모든 것은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내 삶을 지키시는 이는 하나님 뿐이다.

 

[1] 내 인생의 작은 것조차 내 마음대로 지킬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예 – 마음, 건강, 사람 등) 요즘 내가 내 인생을 지킬 수 없다고 느꼈던 것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시편 121편 5-6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내가 직접 내 삶을 지키기 위해 애쓰며 지쳐 있는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히브리서 5장 7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왜 나를 버리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왜 나를 지키십니까?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이 지키실 것을 확신하며 그분을 의지해야 할 삶의 주제들을 나누어 봅시다.

“지지자 vs. 지시자
(5. 26. 2024.)

요한일서 2:6

 

유튜브를 통해 많은 유명인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속속들이 다 나온다. 내가 그들을 평가하고, 구독과 좋아요를 누르고, 지지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이 내게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결코 그들은 내게 지시할 수 없다.

 

예수님은 나에게 절대적 권위로 지시하시는 분이시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한일서 2:6)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 예수님을 좋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구원을 줄 수 없다. 예수님의 구원을 얻으려면 그분이 내 인생을 향해 지시하는 분이심도 함께 인정해야 한다. 하란 대로 해야 한다. 하신 대로 따라 해야 한다. 그분의 지시를 받지 않는데, 구원받았다고 할 수 없다.

 

신앙의 모든 초점을 순종에 맞추라. 예수님을 평가하는 일에서 내려오라. 교회 평가, 사람 평가, 설교 평가하는 일은 부수적인 일이다. 오늘 나는 여전히 지시를 받고 있는가? 하라고 하신 대로, 지시대로 무조건 수행하고 있는가? 왼 뺨을 치면 오른 뺨을 내밀고 있는가?(마 5:39) 분을 죽이고 노를 버리고 있는가?(시 37:8) 음심이 가득하며(벧후 2:14), 놀기만 좋아하고 있지는 않은가?(벧후 2:13) 하나님의 말씀을 에세이 읽듯이 읽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나는 유명인과 지지자 관계가 아니다. 지시자와 수행자의 관계이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지시를 끝까지 수행하셨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한복음 18:11) 아버지의 명령을 평가하지 않으신 예수님 때문에 나에게 절대적인 구원이 주어졌음을 믿는가? 예수님 안에서 그 지시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 내 인생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나를 평가자로 띄워주는 세상의 장난에 속지 말라. 남이 행한 일들을 보며 좋아요나 누르고 비난 댓글이나 달면서 대단한 평론가라도 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라. 그가 행하시는 대로 나도 행하는 것이 제자의 본분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다.

 

[1] 이 시대는 내 인생을 평가하는 자리에 머무르게 만듭니다. 최근 내가 유튜브나 언론을 보면서 평가하는 일은 무엇이 있었는지(좋아요 누르기, 댓글 달기, 속으로 비난하기) 나누어 봅시다.

 

[2-3] 요한일서 2장 6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특별히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을 외면하거나 둔감해진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18장 11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명령에 반응하신 방식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분의 지시가 강요가 아니라 내 삶의 확신과 즐거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평가자로서의 정체성을 벗어나서, 지시받은 대로 순종하기 위해 애써야 할 내 삶의 다짐들을 나누어 봅시다.

 

“점술 무효
(5. 19. 2024.)

민수기 23:23

 

삶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쯤 매번 고개를 드는 생각이 점술과 미신이다. 올해 운세가 이러한데 정말 그렇게 흘러가는듯하여 두렵다. 이사마저 손 없는 날 가야 악귀가 없다고 한다. 지난 날 내가 아는 사람에 내 삶에 퍼부었던 나쁜 말과 저주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다. 미래가 궁금하고 결정이 복잡해질 때마다 운세는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영원히 지키시는 분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고 사주를 받은 발람은 억지로 저주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저주를 막으셨기 때문이다. “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냐 하리로다”(민수기 23:23)  하나님을 믿는다면, 자신감을 가지고 더 이상 운세와 미신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일이다.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출애굽기 22:18)

 

점술의 가장 큰 저주는 따로 있다. ‘나쁜 일을 나쁜 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나쁜 일이 벌어지면 내 삶은 망한다. 그래서 돈을 주고 조상을 달래서 나쁜 일을 피해야 한다. 좋은 일을 빨리 오게 하기 위해 신에게 정성을 바쳐야 한다. 사라진 것이 무엇인가? ‘나쁜 일이 와도 된다는 자신감’이다. 하나님 안에 거하면, 내 삶에 벌어지는 ‘모든 일’이 ‘좋은 일’로 바뀐다. 그 확신이 생길 때에 비로소 삶에 생기는 모든 일을 평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 확신이 어떻게 생기는가? 내 삶에 쏟아져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신 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3) 하나님과 끊어져 내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셨음을 믿는가? 그분이 받으셔야 할 모든 순종의 보상을 내게 대신 주셨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해보라. 당신의 삶의 앞길에는 저주가 단 한가지라도 남아있는가?

 

내 삶에 모든 요소가 더 이상 내 삶에 저주가 될 수 없음을 확신하라.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운세와 점술을 찾아다니는 더러운 일을 그만두라. 나 대신 저주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삶의 모든 요소를 선한 일로 확신하고 의연하게 받아들이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점술이 무효다.

 

[1] 내가 한참 점술과 운세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혹시 사람으로부터 들었던 저주와 비난이 내게 올무가 된 적은 없습니까? 나와 주변의 점술과 관련된 우상 숭배를 나누어 봅시다.

 

[2-3] 민수기 23장 23절을 읽어봅시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요구와 반대로 어떻게 예언하였습니까? 출애굽기 22장 18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금하시는 행위는 무엇입니까? 점술의 가장 큰 저주는 무엇입니까? 신앙을 갖고도 내 삶에 벌어지는 일 속의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쉽게 신뢰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 대신 당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내 삶에는 저주가 남아있습니까? 삶에서 생기는 모든 일을 어떻게 새롭게 바라보아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광대하심, 세밀하심
(5. 12. 2024.)

느헤미야 9:32

 

두려움은 큰 것에서 온다. 큰 돈을 갚아야 한다. 큰 무대에 서야 한다. 높은 분들 앞에서 발표한다. 두렵다. 지겨움은 작은 것에서 온다. 이 업무를 한다고 내 인생 바뀌지 않는다. 이 돈 모아봐야 갈 길이 멀다. 이런 일을 해봐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지겹다.

 

하나님은 가장 광대하신 분이시자, 가장 세밀하신 분이시다. 느헤미야가 바벨론 포로귀환 후 성벽을 재건할 때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조상들과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왕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옵소서”(느헤미야 9:32) 큰 것의 두려움은 광대하신 하나님 만나야 이길 수 있다. 작은 것의 지겨움은 세밀하신 하나님 만나야 감당할 수 있다.

 

내 인생에 크고 작은 것을 하나님과 연결시켜보라. 내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큰 문제는 무엇인가? 소리지르고 배포를 크게 갖는다고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크신 하나님 앞에서 떨어본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 광대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가장 큰 분 앞에서 나의 죄인됨을 깨닫고 용서받음을 경험하면, 세상의 큰 것들과 마주해도 죽지 않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작은 일들에 대한 태도도 변화되어야 한다. 내 인생에 사소한 것에 감사하거나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세밀한 마음과 행동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그렇다. 가장 작은 부분도 알고 계신 분을 만날 때, 내가 행하는 작은 일들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가장 크신 하나님이, 가장 보잘 것 없게 되셨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8) 예수님의 가장 낮은 모습이셨던 십자가의 죽음이, 나의 가장 큰 문제인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였음을 믿는가? 그 때에야 비로소 내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를 바라보는 모든 해석이 거듭나게 된다. 모든 큰 일들은 하나님보다 작다. 모든 작은 일들은 하나님이 계시기에 중요하다.

 

내 인생에 크고 작은 문제를 내 기준으로 평가하여 두려워하거나, 내치려 하지 말라. 광대하신 하나님과 마주하라. 세밀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라. 크고 작은 문제가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1] 큰 것은 두렵습니다. 작은 것은 지겹습니다. 내가 경험한 ‘큰 두려움’들, 내가 경험한 ‘작은 지겨움’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느헤미야 9장 32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환란을 어떻게 여기십니까? 하나님 없이 해석하려고 했던 내 인생의 크고 작은 일들을 생각해 봅시다.

 

[4-5] 빌립보서 2장 8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경험하신 가장 비천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 사건을 통해 성취된 가장 큰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세밀하심을 경험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그분의 성품을 따라 오늘의 크고 작은 일을 어떻게 다르게 바라보아야 할지도 나누어 봅시다.

“다른 계절 적응하기
(5. 5. 2024.)

전도서 3:1-2

 

내가 속한 시절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지혜가 생긴다. 겨울에 씨를 뿌리면 미련한 것이다. 한참 공부해야 할 때를 놓치면 후회를 낳는다. 사람 만나야 할 때 공부 더하면 안 된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지 말고, 내가 속한 시기가 어느 때인 것 같은지 물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시기마다 다른 계절을 허락하시는 분이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전도서 3:1-2) 모든 열심이 선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계절을 고려하지 않은 열심은 독이 된다. 시기의 변화를 이해해야 우리의 삶에 지속적인 승리가 가능하다.

 

일상에 중요한 적용은 이것이다. 계절에 적응하는 것을 불행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바뀐 계절에 적응하고 있지 못한 내 자신을 돌아보라. 나이가 이제 많이 들었는데 아직도 주변을 향한 수군거림과 편가르기를 하면 어떻게 하나? 주님 앞에 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부동산 걱정하면 어떻게 하나? 대학교 때 놀던 것처럼 30대 때에도 놀면 어떻게 하나? 가정과 아이가 생겼는데 친구 관계를 똑같이 유지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몸이 부서지는 것이 보이는데 어떻게 운동 안하고 버틸 생각을 하나? 하나님이 삶의 계절을 변화시키실 때 그 파도를 즐겨보라. 분명 더 큰 유익이 있다.

 

예수님이 결혼식에 초대받아 가셨다. 포도주가 떨어지자 말씀하신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한복음 2:4) 아직 결혼식을 즐기시겠다는 말이다. 자신이 마실 십자가의 잔을 바라보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직 살 때였다. 죽을 때가 오자, 단번에 다른 계절에 적응하신다.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26:45-46) 죽음의 계절에 적응하신 예수님 때문에, 나에게는 영원의 계절이 약속되어 있다.

 

주님이 내 대신 죽음의 계절을 감당하셨으니, 이렇게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계절이 선하다. 정말 그렇다. 다른 계절이 왔다고 아쉬워 하지 말고, 옛날 생각 말고, 다른 계절을 살아낼 준비를 하라. 그것이 지혜다.

 

[1] 열심은 적절한 계절을 만나야 합니다. 내가 속한 시절의 변화를 체감하는 최근의 이야기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전도서 3장 1-2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는 무엇이 존재합니까? 내가 요즘 바뀐 계절에 대해 무감각하거나, 회피하거나, 민감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있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2장 4절과 마태복음 26장 45-46절을 대조해 봅시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삶의 계절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순종하셨습니까? 죽음도 영생으로 바꾸신 약속 앞에서, 오늘 바뀌는 나의 계절을 어떻게 감사하며 적응할 수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온갖 좋은 것
(4. 28. 2024.)

야고보서 1:17

 

살아갈 재미가 없어지는 때가 있다. 더 좋은 것을 기대할 일이 없을 때이다. 바빠질 일만 남았다. 연봉 떨어질 일만 남았다. 돈 나갈 일만 남았다. 건강 나빠질 일만 남았다. 앞으로 더 좋을 것이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기뻐하나? 기대감이 사라지면 삶을 지속할 에너지를 잃는다.

 

하나님은 아직도 내 삶에 좋은 일을 남겨두신 분이다. “온갖 좋은 은사(Every good)와 온전한 선물(perfect gift)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is from above.)”(야고보서 1:17) 그 분 안에는 아직도 좋은 것(good)이 있다. 그분 안에 아직도 완전한 것(perfect)이 남아있다. 좋고 완전함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내 삶을 내 마음대로 예측하며 좌절하는 삶을 청산해야 한다. 하나님은 여전히 내 삶에 좋고 완벽한 것이 올 것임을 약속하고 계시다.

 

그러므로, 상황과 관계없이 더 좋고 더 완전한 선물을 사모하라. 이 직장을 통해 너무나 좋고 완전한 선물을 내게 주실 것을 끝까지 믿어야 한다. 이 갈등과 가난과 고통을 통해서도 여전히 완전하고 좋은 것은 약속되어 있음을 믿어야 한다. 사이즈도 커져야 한다. 단순히 이 급여 받고, 이 직장만 다니다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나는 교회와 사람들과 경험들을 통해 분명 내 인생, 내 신앙, 내 사업의 영역은 더 커지고,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질 것이다.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죽음의 자리에 오셔서 여전히 좋고 완전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게 하셨다. 그것이 영생이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5) 신앙은 인생의 마지막에 좋은 것이 있음을 믿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에 좋을 뿐 아니라, 오늘의 여정도, 좋고 완벽한 것을 향한 여정으로 보는 것이다.

 

여전히 가정과 자녀와 진로와 미래에 대해 긍정하라. 여전히 좋은 것이 남아있음을 확신하라. 빛들의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온갖 좋은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온다.

 

[1] 점점 좋아질 때는 살맛이 나다가, 나빠질 일 밖에 보이지 않아 삶의 기대감이 사라졌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야고보서 1장 17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무엇을 주시는 분입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지 못하고 상황을 예측하며 기대감을 잃어가는 것 자체가 죄가 될 수 있습니다. 회개해야 할 부분들을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3장 1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나 대신 죽으심을 통해 죽음의 자리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게 하셨습니까? 오늘 분명 더 좋고 완벽한 것이 올 것을 믿으며 변화되어야 할 내 삶의 태도를 나누어 봅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