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컷칼럼30 “남자가 권력을 잡는법
(2. 25. 2015)

 

남자가 성공하기 위한 요소 중 하나가 권력이라고 한다. 권력을 왜 잡고 싶은가? “마음대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대로한다는 말은, 남이 힘들어진다는 말이다. 남이 힘들어진다는 말은, “남이 나를 더 많이 섬겨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권력을 추구할수록 섬김과는 멀어진다. 당신이 권력을 추구한다면, 예수님과는 그만큼 멀어진다. 기독교는 권력의 반대편에 서 있다.

 

크리스천은 모두 세상이 말하는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권력을 종속적인 존재로 본다. 기독교인은 권력을 추구하지 않는다. 섬김을 추구한다. 섬김을 추구하면 적당한 권력이 도구가 된다. 기독교인의 권력은 도구에 불과하다. 기독교는 권력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세속주의와, 권력을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율법주의를 모두 배격한다. 기독교는 도구의 목적에 주목한다. 권력의 목적에 주목한다. 그 목적은 마음대로가 아닌 섬김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성경이 지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권력을 잡았을까? 모두 섬김으로 잡았다. 이스라엘에 엘리라는 제사장이 있었다. 권력자였으나 타락했다. 그 밑에 젊은 제자 사무엘이 있었다. 사무엘은 어떻게 엘리를 누르고 권력을 잡았는가?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았다. 섬김을 잘했을 뿐이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사무엘상 2:18) 사무엘이 하는 일에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은 그의 권력을 인정했다.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3:20) 그는 지금까지 해오던 섬김을 더 잘하라고 권력을 도구로 받은 것뿐이다. 그것이 남자의 권력이다.

 

다윗은 골치 아픈 상사 사울을 모시고 있었다. 창을 던져 자신을 죽이려 한 폭력배였다. 권력을 가진 자가 타락했다. 권력에 위기가 왔다. 다윗은 쿠테타를 하였는가? 그렇지 않다. 다윗은 사울을 끝까지 인정하고 도망 다니면서도 섬김을 위해 살았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권력을 주기 시작했다.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사무엘하 5:11) 갑자기 사람들이 힘을 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때 다윗은 느낀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사무엘하 5:12) 다윗은 한번도 권력을 추구한 적이 없다. 인생을 섬김으로 도배했다. 그러자 권력이 나에게로 왔다.” 남자가 권력을 얻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남자가 권력을 잡는법을 알겠는가? 이 제목 안에 또 다른 함정이 있음을 깨달았는가? 권력을 잡는법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이미 틀린 것이다. 남자의 인생의 목적은 권력이 아니다. 섬김이다. 권력을 잡는 처세술 따위는 없다. 성경은 권력에 주목하는 것 자체부터 지지하지 않는다. 권력이 아닌 섬김에 집중하라. 남자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고 싶다면 젊었을 때부터 이 말을 마음속에 품으라. “권력은 섬김의 도구다.” 결코 썩지 않는 남자의 거룩한 권력을 맛보게 될 것이다.

수컷칼럼29 “좋은 여자 판별식
(2. 18. 2015)

 

연애와 결혼은 다르다. 유혹과 신뢰는 다르다. 잠깐과 평생은 다르다. , 평생에 후회하지 않을 좋은 여자를 어떻게 판별하는가? 주변에서 꾸준히 관찰할 수 있는 세 가지 판별식을 살펴보자.

 

1. 고난을 대하는 자세 : 여자친구와 교제해보라. 그 삶의 고난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가정 불화, 가난, 질병, 진로의 막힘 등 수도 없이 많다. 계속 그 이야기를 하게 하라. 그리고 여자의 말을 잘 들어보라. 고난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거나, 그냥 무시하거나, 고난 때문에 다 무너져버리거나, 고난을 품지 않는 여자는 무조건 피하라.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커플을 성장 시키신다. 고난을 무시한다는 말은, 평생 그 커플은 성장을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여자는 당신을 고난 해결사로만 바라보고 있다. “우리 집 빚 언제 갚아주나, 새 집 인테리어 언제 해주나, 언제 지긋지긋한 부모님의 잔소리로부터 나를 구원해주나!” 남자들은 기억하라. 당신은 그녀의 고난을 해결해줄 수 없다. 고난 속으로 같이 들어가기를 다짐하는 것이 사랑이다. “오빠 혼자 들어갔다 와!” 이런 여자는 피해야 한다.

 

2. 비교를 대하는 자세 : 끼리끼리 모여서 남을 헐뜯는 여자는 무조건 피하라. 평생 비교와 질투를 달고 살 것이다. 만날 때마다 다른 여자 이야기, 다른 남자 이야기를 하는 여자친구와는 빨리 헤어지라. 살아보라. 갈수록 비교대상이 늘어난다. 갈수록 기대치는 높아진다. 친구 아들, 친구 딸, 친구 남편, 친구네 시어머니, 그 모든 비교로 당신을 공격할 것이다. 특별히, 남에게 나를 자랑하는 여자도 피하라. 그것도 또 다른 비교이다. 자랑으로 인정받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비교가 아닌 사랑 자체를 즐기는 여자를 만나라. 비로소 그때에 자유함이 있다.

 

3.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 : 신앙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이다. 남자가 신앙이 좋으면 여자는 무조건 끌려오는가? 착각이다. 여자에게도 나의 하나님이 있어야 한다. 나의 하나님을 이야기할 수 없는 여자는 가짜이다. 여자친구에게 자신만의 하나님 이야기를 말해보게 하라. 신앙은 은밀한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해보게 하라. 언제 금식했고, 언제 기도했고, 언제 응답이 있었는지 들어보라. 시시껄렁한가? 시시껄렁한 여자이다. 하나님은 남자를 통해서 여자를 만나시지 않는다. 당신의 여자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간증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경이 지지하는 여자는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한 가문을 가난에서 구해냈고(), 절박한 위기에서 살 길을 뚫었고(라합), 시대의 인물을 낳았다.(한나) 그 뿐인가? 분노를 용서로 바꾸었고(아비가일), 민족을 구해냈고(에스더), 메시야의 어머니가 되었다.(마리아) 여자를 무시하지 말라. 남자는 어떤 여자를 만나느냐에 인생 전부가 걸려있다. 목숨 걸고 그 여자를 찾으라. 당신의 만남은 지금 너무 쉽다.

 

수컷칼럼28 “자기학대의 탈출구
(2. 11. 2015)

 

남자는 서로 무너지는 이야기를 시작할 때 친밀감을 느낀다. 내면이 통하기 시작한다. 친구의 폰을 빌렸는데 야한 동영상이 발견 됐을 때 깔깔거리며 웃는다. “너도 나처럼 약하구나!” 이것이 위로로 다가온다. 어제 밤새 독서했다는 친구보다는 너무 우울해서 술 마셨다는 친구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너도 나처럼 외롭구나!” 그 친구만큼은 내 안의 우울함을 이해할 것이라 느껴진다.

 

남자는 모두 마음 속에 다른 마음이 있다.” 사실은 완벽하지 않다는 것, 사실은 약하다는 것, 사실은 악하다는 것을 자기도 안다. 자존심 때문에 들키지 않았을 뿐이다. 뉴스에 들킨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의 반응을 보니, 악성 댓글을 달면서 죽으라고 소리친다. 나도 들켰다간 죽겠다 싶다. 그래서 참는다. 숨기기 시작하니까 진심을 나누기 어렵다. 내 주변 사람 모두 착하고 좋은 사람들인 것 같다. 하지만 아무도 진심을 말하는 것 같진 않다. 그렇게 남자는 거짓에 둘러쌓여 질식한다.

 

마조히즘을 아는가? 누군가 나를 학대할 때 쾌감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아픈데, 당하는데 왜 쾌감을 느끼는가? 내 안의 연약함을 숨기며 살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너는 맞아야 한다, 너는 벌 받아야 한다, 너는 당해야 한다며" 다가온다. 사실은 그 말이 내 삶에 더 어울리는 말임을 깨닫는다. 처음으로 나에 대한 진실을 남한테 들은 것이다. 때리는 사람만이 나의 깊은 내면의 못생긴 모습을 이해한다고 느낀다. 그 때 역설적이게도 친밀함과 진실함을 느낀다. 쾌감을 느낀다마조히즘은 사람을 죽음으로 이끈다우울증은 내 스스로 나를 학대하는 마조히즘의 다른 말일 뿐이다. 내 안의 못생긴 모습에 집착할 때 편안함을 느끼는 자학적인 행동이 마조히즘이다마조히즘의 중독은 아주 강력하다거짓이 아닌 사실이기 때문이다

 

남자 안의 못생김을 이미 잘 아시는 한 분이 계시다. 그분이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내 못생긴 면을 남에게 들키기 전부터 이미 나의 모습을 아셨다. 이전엔 고통 당하고, 학대 당하고, 우울증으로 스스로를 학대해야 나에 대한 진실이 통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제 고통 당하지 않아도 진실이 통할 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고통 당하셨기 때문이다난 정말 맞아야 싼 놈인 것을 남자는 모두 잘 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적당히 때려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에게 적당한 고난을 당하게 한다면, 우린 그가 내 죄를 대신 해결했다고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남자의 죄 값을 해결하려면, 살살 때려서는 절대 안 된다. 남자는 예수님을, “죽여야한다.”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을 세게 때릴수록, 우린 시원해진다. 진실을 만난다. 그것이 예수님의 죄사함이다.

 

이제 마조히즘에서 벗어나도 된다. 더 이상 학대 당하며, 스스로를 학대하며 편안함을 느끼는 늪에 빠지지 않아도 된다. 마조히즘과 기독교 모두 진실함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쾌락이 있다. 그러나 남자는 곧 깨닫게 될 것이다. 마조히즘엔 없는 것이 예수 안에는 있다는 것을. 내가 만난 사디스트에겐 사랑이 없었지만, 예수님은 나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예수님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라. 그 쾌감은, 곧 눈물로 바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자기학대의 쾌감을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가 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5-6)

 

수컷칼럼27 “의존적인 남자의 도전정신
(2. 4. 2015)

 

남자의 로망은 독립이다. 내 스스로 벌고, 내 스스로 쓰고, 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남자의 꿈이다. 대학에 진학하거나, 군대를 전역하면 남자는 부모를 떠나고 싶어 한다. 보통 먼저 재정독립부터 시작한다. 상황이 어려워도 내가 벌어보겠다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독립으로 시작했다가 고립이 되는 남자가 있고, 독립으로 시작했다가 넓어지는 남자가 있다. 차이가 무엇인가?

 

남자는 두 부류로 나뉜다. 독립이 "목적"이 되는 남자와, 독립이 "디딤"이 되는 남자다. 누가 더 풍성한 삶을 사는가? 후자가 더 풍성한 삶을 산다. 독립이 목적이 되는 사람은 이렇게 다짐한다. “이 돈으로 한 달 버텨야 한다. 정신차리자!” 그러나 독립이 디딤인 사람은 생각이 다르다. “독립에 실패해도 좋아. 위기가 오면 아빠가 돈 좀 줄거야. 진짜 도전해 볼만한 일을 찾아보자!” 겉으로 볼 땐 전자가 남자다워 보인다. 두번째 남자는 어린애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독립이 목적인 사람은 돈을 아껴쓰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돈만 모으다가 고립된다. "부모님 용돈드려야지..." 라며 어설픈 고민만 한다. 그러나 독립이 디딤인 사람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 목표를 발견하고 갑자기 아끼던 돈을 태운다. 책을 산다. 학원에 간다. 헬스를 간다. 사업을 한다. 가끔 돈이 없어 굶기도 하지만 곧 다른 곳에서 성과가 나오기 시작한다. 영어가 된다. 살이 빠진다. 책이 읽힌다. 언제나 명심해야 하는 것이 이것이다. 독립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독립이 남자의 목적이 되면 썩는다. 남자의 독립은 디딤에 머물러야 한다.

 

두 남자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착각한다. "용기"의 차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믿을 구석이 있느냐"의 차이이다. 두번째 남자를 주목하라."아빠가 돈 좀 줄거야!" 이게 정말 중요하다. 믿을 구석이 있을때부터 남자는 생존이 아닌 꿈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 요즘 남자들은 독립이 목적이 되었다. 커리어가 목적이다. 연봉이 목적이다. 웰빙이 목적이다. 그 모든 것들을 디딤으로 삼아 다음 단계로 갈 생각을 안 한다. 그 모든게 없어지면 내 삶은 끝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다. 그런 삶은 '독립'이라고 부르지 않고 '돈의 노예'라고 부른다.

 

예수 믿는 남자들은 다르다. 대책 없고, 실패도 많이 하지만, 훨씬 많이 시도하고, 훨씬 많이 도전한다. 예수님은 남자를 차원이 다른 독립으로 이끈다. 1)과거에 낭비한 인생 책임 지지 않아도 된다. 2)미래에 완벽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 삶의 무거움을 벗어나도 삶의 길이 열린다는 약속, 난 세상 어느 곳에서도 이보다 대박인 약속을 받아본 적이 없다. 이 믿음에 기반을 둔 남자는 믿을 구석이 있다. 그래서 독립, 생존, 완벽을 목표로 살지 않는다. 해야할 일을 찾는다. 남을 위해 돈을 쓴다. 도전해 볼 만한 일을 찾는다. 예수님은 남자를 다시 뛰게 하신다.

 

믿을 구석이 없는가? 예수님께 오라. 어설프게 독립 흉내내고 있는가? 예수님께 오라. 무식한 독립이 남자다운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믿을 구석을 만들어 놓고 삶을 살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한일서 5:5) 예수님은 남자가 세상과 부딪히게 하신다. 독립, 생존을 넘어 꿈을 향해 도전하게 하신다. 예수님께 의존적인 남자가 되라. 독립을 뛰어넘는 남자가 되라. 기억하라. 보험을 들어야 남자의 운전은 훨씬 과격해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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