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뒤 또 문제
(1. 30. 2022.)

누가복음 12:19-20

 

문제해결형 인생이 있다. 시기마다 문제를 극복하는 데에만 모든 힘을 쏟는다. 대학 가야한다. 취업해야 한다. 돈 벌어야 한다. 결혼해야 한다. 문제가 잘 풀리면 너무 기뻐한다. 하지만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만사가 불만족이다. 스트레스 폭발이다.

 

문제 해결은 삶에 기쁨을 주지 못한다. 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인생의 문제는 돈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드디어 부를 이루어 기뻐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누가복음 12:19) 문제 해결로 기뻐하던 자의 기쁨은, 바로 사라진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20) 돈 뒤에, 죽음의 문제가 바로 찾아왔다. 앞의 문제 해결은, 뒤의 문제 해결을 보장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내가 너의 생명을 빼앗으면 어쩔래?”라고 협박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인생에는 수 많은 문제가 있으니, 문제 하나를 너무 크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문제 해결은 삶의 목표가 아니다. 스스로 물어보라.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평안한가? 해결 과정 중에서도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있는가? 문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지금의 문제 해결로 너무 큰 기쁨에 취하거나, 해결되지 않는 문제 때문에 너무 좌절하지 말라. 더 큰 문제도 많이 생길 것이지만, 더 크신 하나님도 여전히 함께하신다.

 

그리스도인은 반대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가장 큰 문제의 해결부터 보장받는다. 그것이 죽음과 죄의 문제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것을 먼저 믿은 후에, 다시 내 현재의 문제를 바라본다. 그리고 확신한다. “가장 큰 문제도 해결되었으니, 이 문제도 하나님께서 선하게 해결해 주실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발버둥 치지 말고, 이미 문제를 해결 받은 존재임을 다시 묵상해보라.

 

이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님이, 내 삶의 문제에도 여전히 동행하고 계신다. 오늘을 감사히 받으라. 문제 때문에 오늘의 기쁨, 오늘의 할 일, 오늘의 주신 것을 빼앗기지 말라. 성도는 이렇게 문제를 바라본다.

 

[1] 한가지 문제 때문에 신경이 쓰여 삶의 모든 에너지가 빼앗겼던 경험이 있습니까? 문제 뒤 문제가 없었습니까? 현재의 문제에만 집중하며 스트레스 받았던 내 삶과 주변의 이야기를 나누어봅시다.

 

[2-3] 누가복음 12장 19-20절을 읽어봅시다. 그가 집중했던 인생의 문제 뒤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경제적인 문제에 집중했던 자에게 예수님은 문제 뒤 어떤 문제를 소개하십니까?

 

[4-5] 그리스도인이 현재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은 믿지 않는 자들과 어떻게 다릅니까? 해결하신 주님이 동행하실 것을 믿고, 오늘 주신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할 내 삶의 다짐들을 나누어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20123-2-938-40-mz/s-Aa2blqzDjhg?si=3daf913862504c828c817986703588c7&utm_source=clipboard&utm_medium=text&utm_campaign=social_sharing

“자살 변호 변증
(1. 23. 2022.)

데살로니가후서 1:8-9

 

우리나라엔 자살이 많다. 언제 자살하는가? ‘내 삶에 남은 것이 불행 밖에 없을 때’ 자살한다. 단순한 슬픔 말고 극단적인 슬픔을 생각해보라. 거대한 비리의 책임자로 적발이 되었다. 남은 생은 감옥에 가서 평생을 사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 감옥 가기 전에, 자살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사별이든 이별이든, 사랑하는 사람이 내 삶을 떠났다. 그 사람이 없으면 불행 뿐이다. 살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한 일 아닐까?

 

성경은 내 삶의 나쁜 일 때문에 당하는 결과를 ‘형벌(=불행)’이라고 한다. 사람은 모두 형벌을 가지고 산다. 형벌을 받기 싫어서 자살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삶에는, 결코 형벌이 없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데살로니가후서 1:9) 예수님이 없는 자들에게만, 형벌이 있다.

 

오늘 내 삶에 확신하라. 내게 벌어지는 모든 일은, 내가 저지른 과거의 잘못이나, 내게 벌어진 삶의 문제 때문에 닥치는 형벌(=불행)이 아니다. 현재 그 고난, 실연, 가난, 절망을 통해서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신다. 내게 벌주시는 분이 아니다. 분명히 그 일 때문에 좋아질 것이다. 분명히 그 일 때문에 기쁨이 커질 것이다. 분명히 그 상황 때문에 행복해질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사람의 마지막 형벌은 무엇인가? 영원한 죽음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만 가져가신 것이 아니다. 죽음 이전에 받아야 할 모든 죄의 형벌도 다 가져가셨다. 그것이 십자가의 선물이다. 믿는다면, 오늘 내 삶에 확신하라. 지난 날의 형벌로 내가 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삶의 남은 일은 하나님이 내게 행복을 위해 남겨두신 날들이다.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자살할 만할 것 같다. 나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절대 자살하지 않는다. 남은 인생의 고난도 분명 내게 행복을 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죽이려면 벌써 죽이셨다. 살려 두셨다면, 행복을 위함이다. 열심히 살자. 삶은 행복이다.

 

[1] 남은 인생이 불행 뿐이라고 생각된다면, 굳이 계속 살 필요가 있을까요? 나와 주변에서, 계속 살아간다는 것의 무의미함을 느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데살로니가후서 1장 9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게 벌어지는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무엇을 가져가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삶에 형벌이 남아있습니까?

 

[4-5] 예수님이 영원한 죽음 말고, 십자가에서 또 가져가신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나의 현재를 언제나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현재 내게 주신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나누어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20116-1-127a/s-xKAWittbTlx?si=fa55f5a962304959929dbd7f8bdd9050&utm_source=clipboard&utm_medium=text&utm_campaign=social_sharing

“관계적으로 옳은 것
(1. 16. 2022.)

창세기 2:16-17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옳은 행동, 해서는 안 될 행동을 어느정도 안다. 하지만 인생의 결정은 선악으로 나누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사업을 할까 말까? 어떤 전공을 선택할까? 인생의 대부분 고민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 결정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성경은 삶의 의사결정에 더 수준 높은 차원을 소개한다. 삶에는 ‘관계적으로 옳은 것’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6-17) 선악과를 왜 먹지 말아야 하는가? 선악과가 썩어서? 맛이 없어서? 이유는 하나다. 하나님이 내게 먹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관계적으로 옳은 것이 생긴다.

 

세상적으로는 전혀 죄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하지 말라, 가지 말라 말씀하시는 분야가 있다. 그렇게 행동해야 할 의무도 이유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이 길만 걸으라고 마음 주실 때가 있다. 관계적으로 옳고, 관계적으로 틀린 것이 있다. 신앙인은 이 길을 걸어야 한다. 전공, 이직, 삶의 수준, 사치, 여가생활, 시간활용, 여행, 모든 것에 다 적용된다. 이게 뭐가 죄냐, 굳이 안해도 되는 일 아니냐고 말하지 말라. 면밀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라. 신앙인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주님이 가라 하시는 그 길만을 걸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러 가셨다. 십자가를 피해야 하는가?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 세상에서는 옳고 틀린게 없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 때 물으신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36) 관계 속에서 나의 원함은 죄가 되고, 그의 원함이 선이 된다. 예수님이 관계 속에서 옳은 길을 택하셨기에, 내게도 영생이 주어졌다.

 

자꾸 마음 속에서 “내 맘인데 누가 뭐라 그래!”라는 마음이 올라오거든, 싹을 자르라. 주변 사람들이 “그건 죄가 아니야 편하게 생각해”라고 말하거든, 다시 예수님을 생각하라. 신자는 세상의 옳고 그름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원하시는 길을 걷는 것이 옳은 길이다.

 

[1] 삶 속에는 선악으로만 결정할 수 없는 다양한 고민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고민 속에 결정이 어려웠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창세기 2장 16-17절을 읽어봅시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지 말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신자들에게만 있는 또 다른 의사결정 체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4-5] 마가복음 14장 36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에서 선악을 판단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처럼 나도 골방에서 주님과 고민하며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할 최근의 삶의 이슈들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20109-15-271-3113a/s-XIpdVwzVruE?si=252b596c001f4d10978d8a2a11c5de9d&utm_source=clipboard&utm_medium=text&utm_campaign=social_sharing

“영적 공격으로 보는 눈
(1. 9. 2022.)

베드로전서 5:8-9

 

삶의 일을 해석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하늘이 벌한 것이다”, “사필귀정이다”, “착하게 살더니 복을 받나 보다” 하지만, 삶의 일을 해석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가져야 할 또 하나의 생각이 있다. “이것은 영적 공격이다.” 삶의 문제를 영적 공격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에게 조심하라고 권면한다. 차 조심, 묻지마 공격 조심, 문단속 조심을 말하지 않았다. 영적 공격 조심하라고 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 마귀는 문 닫아도 못 막는다. 내 삶이 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만한 준비가 되는 것 같으면, 여지없이 마귀는 나에게 공격을 퍼붓는다.

 

우리 교회에서 신앙을 회복하려는 사람들에게 많이 벌어지는 일이 있다. 꼭 교회에 오려고 할 때 사고가 난다. 교회 잘 다닐 때쯤 집 안에 큰 일이 터진다. 뿐만 아니다. 기도생활이 충만해질 때 자꾸 예전 죄에 빠지고 싶은 유혹이 든다. 상처가 되는 말을 듣고, 성과가 부진해지기도 하며, 질병이 생길 때도 있다. 반대의 예도 있다. 신앙생활 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여자친구, 남자친구가 생기더니 정신이 나가버린다. 돈이 너무 잘 벌려서 시간이 없어지기도 한다. 모든 일을 억지로 끼워 맞추면 안 되겠지만, 늘 기억하라. 어떤 일 이후에 영적인 충만함, 집중력, 임재가 사라지는 결과를 낳았는가? 그 일은 영적인 공격일 수 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다. 40일 동안 금식해서 너무 배고플 때 공격이 왔다. 하지만 그 시험의 마지막 결과를 이렇게 말한다.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마태복음 4:10) 밥을 먹는게 끝이 아니다. 나쁜 일이 사라지는게 끝이 아니다. 마귀가 떠나야 끝이다. 예수님이 이 시험을 우리를 위해 이기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 삶에는 영원히 마귀가 떠날 것이 보장되었다. 그것이 영생이다. 남은 삶에서도 동일한 능력이 나타나야 한다. 시험이 왔는가? 영적인 공격으로 해석하라. 마귀가 떠나게 만들라. 그리스도인만이 마귀를 볼 수 있는 눈이 있다. 삶에 영적인 공격이 보이는가? 마귀를 떠나게 만들라. 승리할 것이다.

 

 

[1]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삶의 문제를 보통 어떻게 해석합니까?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적으로 그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았던 적이 있습니까?

 

[2] 베드로전서 5장 8절을 읽어봅시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의 삶에 무엇이 찾아옴을 말합니까? 그 대응책으로 무엇을 권면합니까?

 

[3-5] 나와 주변에 영적인 공격이 분명했던 경험을 나누어봅시다.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어떻게 승리했습니까? 최근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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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있는 것
(1. 2. 2022.)

빌립보서 3:13-14

 

사람은 본능적으로 지난 것에 집착한다. ‘껄무새’라는 단어가 있다. “~할 걸”이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한다고 해서 붙인 말이다. 나도 새해에 껄무새가 될 수 있다. 시간은 앞으로 가는데, 생각은 지난 날의 후회와 자책에 묶여 전진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울이 자신의 새로운 계획을 이야기 한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빌립보서 3:13)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 보겠다는 말이다. 자신이 한 일들에 대해서는 돌아보지도 않는다는 다짐이다. 선한 일도, 나쁜 일도 다 상관 없다. 앞에 있는 것만 본다.

 

이 말씀을 새해에 내게 주신 말씀으로 삼으라. 내가 했던 지난 날의 성취 혹은 실패를 잊어버리라. 아직 앞에 있는 것이 많이 남아있다. 앞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지난 날의 이야기를 자꾸 꺼내지 말라. 내가 습관적으로 과거를 말하는 것들을 돌아보라. “나는 집안 경제 상황이 안 좋아서”, “그때 그 사람이 내게 상처되는 말을 하는 바람에”, “그때 기회를 놓친 바람에” 내 안의 껄무새가 다시 팔딱거린다. 내 안의 껄무새를 멀리 날려버리라. 당신 앞에 있는 것이 있다. 앞에 있는 것 잡으러 가야 한다.

 

뒤에 있는 것이 내 삶을 가로막을 것 같을 때마다, 과거를 지우신 예수님 바라보라.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로새서 2:14) 우리에게 불리한 증서는 지워졌다. 불리한 과거는 십자가에 못박혔다. 믿는가? 그렇다. 새해에 당신에게 불리한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일을 감사로 받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해 전력 질주하라.

 

2022년을 앞에 두고, 2021년, 뒤를 돌아보라. 그 뒤에는 딱 하나만 보여야 한다. 십자가만 보여야 한다. 다 사라지고, 은혜로 내 과거를 선으로 바꾸실 예수님만 보여야 한다. 뒤에는 십자가만 두라. 그리고 앞을 향해 전진하라. 새해에 승리할 것이다.

 

[1] 지난 한 해 가장 후회되는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아쉽고 후회되어 자꾸 마음에 드는 생각, 자꾸 내뱉게 되는 말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빌립보서 3장 13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은 사역의 중간에, 어떤 다짐을 새롭게 합니까? 무엇과 무엇을 대조하고 있습니까?

 

[4-5] 골로새서 2장 14절을 읽어봅시다. 우리의 과거를 잊어버리고, 전진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 과거에 십자가만 두고, 새롭게 집중하고, 감사로 전진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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