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소망이 생기는 날
(7. 3. 2022.)

시편 39:5-7

 

신앙은 추상적이다. 반면 내 삶의 현실은 구체적이다. 요즘 친구들에게 전도하면 이렇게 묻는단다. “교회 가면 주식 투자하는 법 알려주나요?” 나의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생각에 신앙은 재미없게 느껴진다.

 

현실적인 것은 결국 소망을 주지 못한다. 다윗이 열심히 산 다음에 몇 가지를 깨닫는다. (1) 인생이 짧다.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2) 내 존재감이 쉽게 사라진다.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3) 돈 벌다가 쓰지도 못하고 죽는다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간다고 해서 인생의 보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나의 현실 자체가 부조리이다. 현실적으로 살아갈수록, 현실에는 소망 없음을 느낀다.

 

현실의 허상을 깨달을 때, 추상적이었던 신앙이 현실로 내려온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편 39:7) 현실 속에서 신앙만이 진짜 소망임을 깨닫는다. 신자들은 ‘현실적’이 되라는 말에 속으면 안된다. 현실적으로 살아도 곧 절망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으로부터 오는 소망으로, 절망의 현실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현실적이 되라고 소리쳤다.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마가복음 15:30) 인류 구원 같은 소리 하지 말고 현실적으로 삶을 살아가라는 말이다. 내려간다고 소망이 생기나? 십자가 밑의 현실은 악의 구렁텅이였다. 오히려 소망 가지고 십자가에 있을 때, 죄인은 구원받고, 부활은 곧 현실이 되었다.

 

현실적이 되라는 말에 유혹받지 말라. “기도 그만 하고 여행이나 다녀라!”, “돈도 못 벌면서 교회나 다니고 있냐!”, “결혼도 못했으면서 무슨 팀모임이냐!” 그들은 모두 현실의 문제가 닥쳤을 때, 소망 없이 죽을 것이다. 현실이 열악해도 하늘의 소망을 붙들라. 그 사람이 산다.

 

[1] 신앙은 추상적이며,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현실에 닥친 문제 앞에 신앙을 소홀하게 생각했던 나와 주변의 이야기가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시편 39편 5-6절을 읽어봅시다. 다윗은 치열한 현실 속에 왜 절망했습니까? 39편 7절을 읽어봅시다. 현실 속에서 다윗은 다시 어떻게 신앙을 회복합니까?

 

[3-5] 마가복음 15장 3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어려운 현실 속에 어떤 결정을 하셨습니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현실의 한계를 깨닫고, 그 속에서 다시 신앙의 소망이 살아났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내가 오늘의 현실에만 파묻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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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때문에 생긴 일
(6. 26. 2022.)

사도행전 4:13-14

 

사람은 본능적으로 주변에서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안다. 무엇이 부족한지도 안다. 저 사람이 나 예쁘다고 생각 안 하는구나. 상사가 나 성과 못 낸다고 싫어하는구나. 나를 늙었다고 여기는구나. 상대의 생각이 다 읽혀지니까, 상대의 원함을 맞춰줄 수 없는 나의 무력감은 심해진다.

 

신자는 세상에서 요구하는 자격이 없어도 승리할 수 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식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uneducated) 범인으로 알았다가”(사도행전 4:13) 못 배운 사람이라 사회에서 인정 못 받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특별한 성과가 나게 하셨다. 3장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켰다.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14) 무식한 사람이라고 무시하지 못했다. 예수님 때문에 생긴 특별한 일이 그들의 낮은 스펙을 보호해준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승리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예수님 때문에 생긴 일’로 나를 살려 주신다는 말이다. 스펙은 없었지만 앉은뱅이 일으킨 것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완전히 인정받았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의 능력이 부족한 곳에서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일 해보라. 스펙으로는 완전히 무시당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특별한 일들이 생긴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한다. 나를 필요로 한다. 나랑 일하자고 한다. 돌아보면 별 거 없다. 예수님이 비난할 말이 없게 나를 보호해주신 것이다.

 

세상적인 능력이 부족한 곳에서 예수님이 보호해주실 것을 어떻게 확신하는가? 그분이 바로 나 대신 비난과 조롱을 받으신 분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태복음 20:19) 나는 죽은 이후 하나님 앞에서 마귀의 조롱을 당할 존재였다. 죄를 지은 더러운 존재라고 조롱 당할 나 대신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조롱 당하시며 나를 보호하신 것이다.

 

나는 이제 조롱의 한 복판에 선 오늘의 내 인생 속에서도 확신할 수 있다. 죽음 앞에 선 나를 보호하신 주님이, 능력 없고 무력한 내 삶의 한복판에서도 함께하실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면, 예수님이 특별하게 나를 보호하시는 일들이 생길 것이다. 그 이름을 의지하라. 그것이 보호받는 길이다.

 

[1] 크리스천이 되어도, 세상적인 무능과 주변의 평가는 여전히 좋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삶의 현실적인 무능 속에서 신앙의 무가치함을 느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사도행전 4장 13절을 읽어봅시다.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사도행전 3장 6절을 읽어봅시다. 그들의 삶이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자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여전히 스펙은 없었지만, 베드로와 요한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어떻게 달라졌습니까?(14절)

 

[4-5] 예수님께서 세상의 요구에 맞춰주지 못하는 나를 보호하실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내 삶의 연약한 부분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며 행해야 할 일을 나누어봅시다. 그 분을 의지했을 때 나를 보호하시는 특별한 일이 생겼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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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은 우리 편
(6. 19. 2022.)

데살로니가전서 5:2-3

 

갑작스러운 일은 우리 삶을 힘들게 한다. 인생의 시련은 도둑같이 다가온다. 갑자기 코로나라니? 갑자기 전쟁이라니? 갑자기 인플레이션이라니? 잘나가는 사람 한 번 만나보라. 걱정이 없을 것 같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염려하긴 마찬가지다. 우린 도둑맞는 인생을 두려워한다.

 

성경은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도둑처럼 오신다고 했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데살로니가전서 5:2-3) 하나님을 떠나 이 땅에서 평안과 안전을 찾고 있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도둑이다. 예수님이 날짜를 다 알려주고 리마인드 해주고 오시면 우리에겐 소망이 없다. 꼭 도둑으로 오셔야 한다. 악인들에겐 예수님이 나쁜 놈이다. 예수님은 도둑처럼 오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도둑이라면, 신자들의 삶에는 여전히 소망이 있다. 현재의 삶에서도 예수님이 도둑 같이 일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어려움이 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예수님이 일하실 것이다. 전혀 답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 예수님이 말도 안되는 새 일을 행하실 것이다. 신자들에게는 도둑이 우리 편이다. 예수님이 우리 편이다. 도둑이 오기만 한다면, 우리 인생은 다시 역전할 수 있다.

 

사람이 인생 전체를 도둑맞는 날이 온다. 그것이 죽음이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은 인생을 통째로 마귀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먼저 오셔서, 먼저 도둑 잡으러 가셨다. 그것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은혜이다. 이제 내 인생을 앗아가는 도둑은 영원히 사라졌다. 그것을 믿으면 도둑 맞은 것 같은 내 인생의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신뢰할 수 있다. 내 인생을 앗아가는 도둑은 사라지고, 예수님이 내 삶에 계시기에, 이 상황은 예수님께서 선한 일을 계획하시고, 역전시키시는 도구로 사용될 것이다.

 

죽음이라는 도둑을 잡으신 예수님을 찬양하라. 진짜 도둑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대하라. 왜 언제 오시는지 알려주시지 않냐고 불평하지 말라. 알려주면 나쁜 놈들을 못 잡으니까! 마동석은 언제나 갑자기 들이닥친다. 도둑이여 오시옵소서! 아멘 주여 오시옵소서!

 

[1] 현재 상태는 평안하더라도, 늘 갑작스럽게 벌어졌던(혹은 벌어질) 일 때문에 마음 졸였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을 읽어봅시다.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2절)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일어납니까?(3절)

 

[3-5] 예수님이 먼저 오셔서, 우리 인생에 무슨 일을 행하셨습니까? 도둑 같이 오시는 예수님을 믿고, 현재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일하심을 신뢰해야 할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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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성취의 분리
(6. 12. 2022.)

요한복음 15:12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잘 해줬더니 기어오른다. 믿어줬는데 뒤통수 친다. 무슨 말인가? 사랑하면, 상대는 그 사랑을 악용하기 때문에 나의 성취가 어려워진다는 말이다. 원하는 성취를 위해서는, 사랑해서는 안 된다. 이 땅에서는 사랑과 성취가 분리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사랑을 통한 성취’를 계획하고 계신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15:12) 하나님 나라의 성취는 사랑과 함께 온다. 사랑해야 성취한다. 사랑하는 길이 성취하는 길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먼저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이 내게 명하신 사랑은, 나의 성취를 앗아가는 길이 아니다.

 

회사를 미워하면서, 회사를 통해 성취할 수 없다. 대형 마트 직원들이 회사가 악랄하다며 파업과 시위를 벌였다. 경영이 어려워서 한국 사업 철수 결정을 내렸다. 그랬더니 회사가 망해선 안 된다며 다시 시위를 벌였다. 미워할수록 나도 어려워진다. 사랑하며 성취해야 한다. 말이 안 통하는 부모와 배우자, 자녀를 미워하며 가정을 세워 나갈 수 없다.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 그곳에 성취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랑하면 분명히 성취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가? 맞다. 바로 그 공백 속의 무능을 예수님이 채우신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로새서 2:15) 성취만을 좇는 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사랑하셨다. 성취하지 못하는듯 했으나,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능력이 임했다. 사랑 속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한다. 그래서 성취가 보장되어 있다.

 

더 많은 성취를 원한다면, 더 지혜롭게,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 처음에는 모든 성취를 포기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에,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며 성취하는 성도를 기대한다.

 

[1] 주변 사람들에게 잘해줬더니, 오히려 이용당하고 나의 성취가 어려워진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요한복음 15장 12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신자들에게 주신 계명은 무엇입니까? 성취와 관련하여 우리가 버려야 할 이 땅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4-5] 사랑하면 실제로 성취와 멀어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붙들어야 할 능력은 무엇입니까? 내 삶에서, 더 사랑하면서 성취를 기대해야 할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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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하는 마음
(6. 5. 2022.)

시편 107:9

 

상대에 호감이 있어야 만족도 큰 것이다. 범죄도시2를 봤다. 모든 게 좋았다. 마동석이라는 인물을 기대하며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서로 이야기했다. “마동석이 없었다면 같은 내용이었어도 이 영화 재미없다고 했을 거야.” 호감이 없으면, 만족도 힘들다.

 

하나님으로부터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이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편 107편 9절) 마동석이 보고싶고, 마동석이 기대되어야 마동석에게 만족한다. 하나님이 기대되고, 하나님이 좋아야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 만족을 느낄 수 있다. 사모하는 마음 그 자체가 만족이 보장된 마음이다. 내 신앙 생활에 지금 당장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사모하는 마음이다.

 

처음부터 삐딱하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착각을 버리라. “예배 가봐야 또 똑같은 패턴이 반복될 뿐이지 뭐”, “저 목사님이 하는 말 다 예상 되잖아”, “기도해봐야 결국 소용 없을 거야” 내 삶이 별로, 설교도 별로, 교인들도 별로라며 하나님과 관련된 주변 욕은 다 하고 다니지만, 결론은 하나다. 당신은 하나님을 기대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아니다. 오늘 예배에 은혜 주실 것이다. 찬양 중에 어둠이 물러갈 것이다. 기도 중에 응답하실 것이다. 설교 중에 말씀하실 것이다. 정말 사모하고 있는가? 사모하면, 만족 주신다.

 

정말로 기대할 것이 없는 순간이 온다. 그것이 죄인이 맞이하는 죽음의 순간이다. 죄인은 하나님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죄 없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끝까지 하나님을 기대하셨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 23:46) 우리도 예수님 믿으면, 죽음 속에서도 부활을 기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 내 삶에도 기대할 이유가 생긴다. 하나님은 이 자리, 이 순간에서도 내가 만족할 일을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 사라진 행동을 살펴보라. 기도 없음, 예배 지각, 감사 실종! 사모함만 회복해도, 삶은 폭발적으로 변화될 것이다. 사모하는 마음, 세상에서 가장 귀한 마음이다.

 

[1] 상대를 좋아하고 기대하다 보니 평범한 것도 훨씬 만족스럽고 좋게 평가되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시편 107편 9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만족을 주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내가 하나님과 관련된 사모함이 가장 시들어질 때는 언제입니까?

 

[4-5] 신자가 어떠한 상황에도 좋은 일을 기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최근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영역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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