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하는 마음
(6. 5. 2022.)

시편 107:9

 

상대에 호감이 있어야 만족도 큰 것이다. 범죄도시2를 봤다. 모든 게 좋았다. 마동석이라는 인물을 기대하며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서로 이야기했다. “마동석이 없었다면 같은 내용이었어도 이 영화 재미없다고 했을 거야.” 호감이 없으면, 만족도 힘들다.

 

하나님으로부터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이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편 107편 9절) 마동석이 보고싶고, 마동석이 기대되어야 마동석에게 만족한다. 하나님이 기대되고, 하나님이 좋아야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 만족을 느낄 수 있다. 사모하는 마음 그 자체가 만족이 보장된 마음이다. 내 신앙 생활에 지금 당장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사모하는 마음이다.

 

처음부터 삐딱하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착각을 버리라. “예배 가봐야 또 똑같은 패턴이 반복될 뿐이지 뭐”, “저 목사님이 하는 말 다 예상 되잖아”, “기도해봐야 결국 소용 없을 거야” 내 삶이 별로, 설교도 별로, 교인들도 별로라며 하나님과 관련된 주변 욕은 다 하고 다니지만, 결론은 하나다. 당신은 하나님을 기대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아니다. 오늘 예배에 은혜 주실 것이다. 찬양 중에 어둠이 물러갈 것이다. 기도 중에 응답하실 것이다. 설교 중에 말씀하실 것이다. 정말 사모하고 있는가? 사모하면, 만족 주신다.

 

정말로 기대할 것이 없는 순간이 온다. 그것이 죄인이 맞이하는 죽음의 순간이다. 죄인은 하나님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죄 없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끝까지 하나님을 기대하셨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 23:46) 우리도 예수님 믿으면, 죽음 속에서도 부활을 기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 내 삶에도 기대할 이유가 생긴다. 하나님은 이 자리, 이 순간에서도 내가 만족할 일을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 사라진 행동을 살펴보라. 기도 없음, 예배 지각, 감사 실종! 사모함만 회복해도, 삶은 폭발적으로 변화될 것이다. 사모하는 마음, 세상에서 가장 귀한 마음이다.

 

[1] 상대를 좋아하고 기대하다 보니 평범한 것도 훨씬 만족스럽고 좋게 평가되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시편 107편 9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만족을 주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내가 하나님과 관련된 사모함이 가장 시들어질 때는 언제입니까?

 

[4-5] 신자가 어떠한 상황에도 좋은 일을 기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최근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영역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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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나를 위한 사람
(5. 29. 2022.)

빌립보서 2:3

 

솔직히 저 사람보다는 내가 낫다고 느낄 때가 있다. 성격이나, 실력이나, 외모나 절대적으로 내가 더 나은 부분이 있다. 나의 우월함을 생각할수록, 상대는 낮아 보이기 마련이다. 점점 내 삶에는 타인을 향한 무시와 조롱, 비난이 늘어간다.

 

하나님은 내가 만나는 사람을 나보다 나은 존재로 바라보라고 말씀하신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립보서 2장 3절) 절대적인 수준 차이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저 사람이 ‘나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훨씬 나은 존재라는 말이다. 나의 무엇을 위함인가? 나의 죄를 위함이다. 내 의로움 보다 내 죄가 훨씬 커 보이기 시작할 때, 주변 사람들이 나보다 나아 보인다.

 

분명히 그 사람이 나보다 더 게으르고 느려 터진 것 맞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얄팍한 인내를 보게 하신다. 분명히 그 사람이 나를 함부로 대한 것 맞다. 그러나 그 사람을 통해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얼마나 작은 억울함에 무너지는지 보게 하신다.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나의 어떤 죄와 연약함을 다루고 계신가? 그 사람은 나를 위해서 살아주고 있으니 오히려 고마운 것이다. 내 죄를 받아주는 그 사람이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다.

 

남보다 나은 것으로 살지 않으신 분이 있다. 예수님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2:6-7) 죄 없는 자신이 누려야 할 모든 특권을, 죄인인 내가 누리는게 훨씬 낫다고 생각하셨다. 내게 더 나은 것 주신 예수님 때문에 내가 살았다.

 

수준 낮은 사람들과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교제하고 결혼하면서 나만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사람은 당신을 위한 사람이다. 하나님 안에서 분명 그렇다. 내 죄를 생각해보라. 그대는 진정 나를 위한 사람이다.

 

[1] 주변 사람과 비교해서 절대적으로 내가 우월하고, 실력 차이가 난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생각할수록 나는 상대방을 어떻게 대하게 됩니까?

 

[2-3] 빌립보서 2장 3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내가 만나는 주변 사람을 어떻게 대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내가 그것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까?

 

[4-5] 예수님은 나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내 주변에 붙여 주신 ‘절대적으로 수준 차이 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지금 나의 무슨 죄를 다루고 계시다고 느껴집니까?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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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예측하는 신앙
(5. 22. 2022.)

창세기 45:23-24

 

일이 벌어진 이후에는 아무리 탁월하게 분석해도 늦은 것이다. “그때 샀어야 했어!”, “그때 그렇게 결정하지 말았어야 했어” 탁월한 후속 분석보다 중요한 것은 ‘선행’이다. 먼저 대비하고, 먼저 실행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요셉이 형들에게 버림받은 후, 애굽의 총리가 되어 다시 형들을 만난다. 비싼 물건들을 나누어 주면서 집에 가서 아버지를 모셔오라고 한다. 집으로 떠나려고 할 때 당부한다.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창세기 45:24) 요셉은 미리 예측했다. 형들은 분명 싸울 것이다! 길에서 가다가 물건을 어떻게 나눌지 고민하다가 싸우고, 요셉을 버린게 누구 책임인지 말하다가 싸울 것이다. 서로 싸우면 가정을 하나로 만들려는 모든 회복의 계획이 무용지물이 된다. 그 죄를 미리 예측하고 당부했다. 예측하는 신앙이다.

 

앞으로 일어날 죄를 미리 예측해야 죄를 이긴다. 집에서 서로 피곤하니까 분명 큰소리가 오고 갈 수 있다. 미리 조심해야 한다. 성과가 안 좋으니까 팀에서 서로 남 탓 할 수 있다. 미리 조심해야 한다. 혼자 있을 때 시간 날려버릴 수 있다. 미리 예측하고 계획해야 한다. 내 성격에 교회에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나타나면 분명 한 소리 나올 수 있다. 미리 마음을 넓게 가져야 하고 입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죄를 지을 가능성은 적다. 늘 중2 때 성격이 다시 나온다. 오늘의 죄를 예측하라.

 

예수님을 배반했던 유다가 예수님을 잡으러 왔다. 베드로가 상대편 부하의 귀를 칼로 쳐서 베어버린다. 칼의 유혹이 찾아온 순간이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태복음 26:52) 이 죄가 일어날 것을 예측하셨다. 이 본문 바로 앞에는 그분의 기도가 나온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41) 예수님의 기도는 죄를 예측하는 기도였다.

 

죄를 예측하시고 죄를 피하면서 사명을 이루신 그분 때문에, 내게 구원이 주어졌다. 나의 삶도 동일한 승리가 있을 것이다. 매일 죄를 지은 후에 후회만 하지 말고, 오늘은 한 번 예측해보라. 미리 기도하고, 미리 다르게 살아보라. 새로운 승리가 열릴 것이다.

 

[1] 나와 주변 사람들의 대화들을 생각해봅시다. 이미 지나간 일 가지고 분석하고 후회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미리 예측하고 대비하는 일을 게을리해서 낭패를 봤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창세기 45장 24절을 읽어봅시다. 요셉은 형들이 돌아가면서 무슨 죄를 지을 것을 예측했습니까? 무엇을 당부했습니까? 내가 쉽게 죄에 빠질 것을 예측 해야 할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26장 52절을 읽어봅시다. 41절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죄의 순간을 이기실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나의 경건생활과 관련하여, 죄를 미리 예측하고 이기기 위해 변화되어야 할 나의 모습을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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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 회피 = 게으름
(5. 15. 2022.)

잠언 22:13

 

분명히 열심히 살았는데, 돌아보면 게을렀음을 느낄 때가 있다. 열심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때이다. 그 공부 열심히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사람이랑 사귀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열심이 잘못된 방향을 만나면, 게으른 결과를 낳는다.

 

성경은 위험을 피하는 것을 게으르다고 말한다.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잠언 22:13) 게으른 자는 집에서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열심히 살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사자가 있어서 밖에 나가지 않았다. 새로운 위험을 감수하지 않은 것이다. 위험을 회피하는 사람이 게으른 사람이다.

 

적당히 나이 먹으면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 무서워진다. 새로운 투자, 새로운 만남, 새로운 배움이 두렵다. 그래서 ‘지금 일만’ 열심히 한다. 성경은 그런 당신을 보고 게으르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성실함은, 감당해야 할 새로운 일 속에 있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다. 삶에 새로운 기회를 찾고 있는가? 위험 없이 기회 없다. 새로운 일을 시도하면 각종 위험이 찾아온다. 주변의 비난, 오해, 피곤함, 재정적 손실, 불안함… 기꺼이 이 위험들에 직면하라.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실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성실하신 분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셨다는 말인가? 아니다. 새로운 일 앞에서 위험을 감수하셨다는 말이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한복음 18:11) 어떤 위험이었나? 죽음의 위험이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일이라면, 죽음이라는 위험도 품어내셨다. 그 위험 감수(risk-taking)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진 것이다.

 

내 삶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새로운 구원이 어디에 있는가? ‘위험 감수’에 있다. 위험한 곳 아무데나 가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끄신다는 확신이 있다면, 함께 오는 위험도 품어내야 한다는 말이다.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라. 성실한 사람이 되라. 일찍 일어나서 하던 일만 하는 것이 게으름이다. 기꺼이 새로운 일 속의 위험을 감수하라. 신자는, 언제나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1] 열심히 살았지만, 방향이 틀렸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성실했으나, 오히려 후회가 되었던 지난 삶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잠언 22장 13절을 읽어봅시다. 성경은 게으름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내가 현재 은근히 회피하며 현재에만 안주하고 있는 모습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4-5]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이끄시는 새로운 앞길 속에 염려되는 위험들은 무엇이 있습니까? 어떤 위험을 기꺼이 감당하며 나아가야 할지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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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기질과 마주하기
(5. 8. 2022.)

창세기 26:6-7

 

나는 왜 이런 성격일까? 여러 환경적인 이유를 찾기 전에,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나는 부모의 영향을 받았다. 그것이 좋은 기질이든, 좋지 않은 기질이든, 자세히 뜯어보면 소름끼칠 정도로 영향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관심사, 성격, 말투, 심지어 걸음걸이까지!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이다. 살던 곳에 흉년이 들어 다른 부족의 지역에 살게 되었다. 타지에서는 아내를 빼앗길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옆에 여자는 누구냐고 물으니까 자신의 누나라고 속인다.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창세기 26:7) 비겁한 남자였다. 그런데 이 비겁함이 아버지 아브라함이랑 똑같다!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창세기 20:2) 이삭은 아브라함이 넘어진 곳에서 똑같이 넘어진다.

 

원래 내 성격이 그렇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어쩔 수 없이 부모를 보고 자랐고, 부모의 말투와 행동에 영향을 받았다. 그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 나의 영적인 강점과 약점을 파악할 수 있다. 부모의 습관적인 행동, 말투, 생활습관이 어떤 결과를 낳았었는가? 나도 같은 곳에서 넘어지고, 같은 강점으로 일어설 수 있다. 운명이라는 말이 아니다. 알아야 극복하고, 알아야 활용할 수 있다.

 

예수님이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하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한복음 5:17) 예수님은 성실하게 일하셨다. 그 아버지 닮으셔서 그렇다. 성부 하나님이 일하신다. 예수님은 십자가 올라가서 죽으라는 일까지 성실하게 감당하셨다. 나도 그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나는 새로운 내 아버지의 기질과 마주하게 된다.

 

이제 신자는 육체적 부모의 기질의 강점과 약점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그 모든 기질이 거듭나고 치유되어, 영적인 부모의 기질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부모 기질과 마주하라. 하늘 아버지의 사랑으로 치유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독특하게 드러내는 계기로 삼으라. 나의 부모로부터 받은 기질은 저주가 아니라 선물이 될 것이다.

 

[1] 마음대로 사는 줄 알았는데, 부모 성격과 너무 닮은 내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나와 주변의 부모 닮은 모습을 나누어봅시다.

 

[2-3] 창세기 26장 7절을 읽어봅시다. 이삭은 그랄에서 자신의 아내를 무엇이라고 속입니까? 창세기 20장 2절을 읽어봅시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가 부모로부터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것 같은 삶의 영역은 무엇입니까?

 

[4-5] 영적인 아버지를 만나면 육적인 부모로부터 받은 기질이 치유되고 거듭날 수 있습니다. 나의 기질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극복되고 쓰임받을 수 있을까요? 기질을 통한 저주를 감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근거로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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