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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안보이면 정상
(9. 4. 2022.)

로마서 8:24-25

 

사람은 보이는 것으로 예측한다. “인구가 줄어드니 지방은 더 힘들어지겠군” 예측이다. “돈을 이렇게 푸는데 인플레이션이 오겠군” 예측이다. “내 자녀가 이렇게 공부를 안 하니 힘들게 살겠군” 예측이다. 사람은 아무리 똑똑해도, 현재 보이는 것에 기반해 예측할 뿐이다.

 

신자는 예측으로 살지 않고, 소망으로 산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로마서 8:24) 보이는 미래는 예측일 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진짜 소망이다. 소망이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주신 미래의 확신이다. 진짜 소망을 구별하는 법이 있다. 하나님 말씀 빼고, 현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5) 그러므로, 절대 안보이는 일을 소망하고 있다면, 정상이다.

 

예측으로 살지 말고 소망으로 살라. 내 자녀에게 소망을 품으라. 우리나라에 소망을 품으라. 내 교회에 소망을 품으라. 소망은 지금 절대 안보여야 한다. 말도 안되는 일이어야 한다. 헛소리라고 욕을 먹어야 한다. 내 부모가 천국에 갈 것이다!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이 회사를 통해 선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절대 안보이는 곳에서 소망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인간의 미래가 절대 안보이는 곳이 있다. 죽음이다. 예수님이 소망가지고 죽음으로 들어가셨다. 그게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서도 소망을 품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내 대신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 능력이 현재 내 삶에도 임하고 있음을 확신하는가? 그분의 능력이 있기에 오늘의 소망은 결코 허상이 아니다. 예수님 만나야, 보이는 대로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말도 안되는 꿈과 사모함이 생겼는가? 지금 절대 그 모습이 안보이면, 정상이다. 말도 안 된다면, 정상이다. 소망은 원래 그런 것이다. 예측의 길을 버리고, 소망의 길을 걸으라. 소망의 사람을 기대한다.

 

[1] 최근에 보이는 몇 가지 일들을 통해서 가정이나 회사, 사회에서 예측되는 일들이 있습니까? 나누어봅시다.

 

[2] 로마서 8장 24-25절을 읽어봅시다.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예측과 달리 소망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3-5] 우리가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내가 소망을 품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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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경건
(8. 28. 2022.)

시편 42:5

 

“지금 기분 나쁘니까 말 시키지마” 너의 말과 나의 기분 중에 내 기분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기분이 더 위에 있다. 감정이 제일 중요하다. 그것을 정의주의, 혹은 주정주의(emotivism)라고 한다. 어려운 말 필요 없다. 감정이 내 최고의 권위가 되면, 그건 신앙생활이 아니다.

 

성경은 내 감정을 객관적으로 보게 만든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편 42:5) 내 속에서 낙심과 불안이 솟아난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통제하지 못하게 “내 영혼아” 말을 건다. 내 기분이 좋기 때문에, 내가 많이 화가 났기 때문에 모든 행동이 용납되는 것은 신자들의 삶의 태도가 아니다. 감정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

 

내가 화가 났다고 해서 상대에게 욕설을 내뱉는 것이 허용될 수 없다. 감정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선 것이다. 내 기분이 별로니까 예배에 집중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교회에 와서도 내 기분을 예배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내가 우울하니까 네가 이해 해야지”라는 말만 하고 있다면 상대방의 인생을 내 감정에 종속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감정의 경건까지 가야 한다.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아무리 기분이 안 좋아도 하나님의 뜻대로 실행해야 한다.

 

예수님의 삶에 감정의 폭풍이 찾아왔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되었으니”(마가복음 14:34) 그러나 그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찾으셨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그분은 감정을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신 분이셨다. 그 감정의 순종으로, 십자가의 구원이 이루어졌다. 내 인생도 마찬가지다. 감정대로 하면 이길 것 같지만, 십자가의 능력은 사라진다. 감정을 굴복시켜야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경험할 수 있다.

 

감정보다 더 높은 권위가 있다. 그것이 하나님이다. 감정의 경건을 추구하라. 내 감정을, 그 어떤 상황이 와도 하나님 아래에 두는 것, 그것이 감정의 경건이다.

 

[1] 나와 주변 사람들의 생활 패턴과 삶의 결정들이 오로지 자신의 ‘감정(기분 나쁨, 좋음, 싫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때가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시편 42편 5절을 읽어봅시다. 성경은 신자 안에 있는 여러 감정을 어떻게 통제합니까? 잘 살다가도 특정한 환경, 특정한 순간 내 감정이 내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여 후회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4-5] 마가복음 14장 34절을 읽어봅시다. 감정적으로 깊은 절망의 순간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최고의 권위는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감정적으로 넘어지기 쉬운 순간에 하나님 앞에 순복하려면 나의 생각과 말투, 행동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구체적인 상황들을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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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 = 포기
(8. 21. 2022.)

갈라디아서 6:9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고, 더 좋은 일을 하고 싶다. 기도? 다이어트? 봉사활동? 어학공부? 실제로 시도하면 대부분 금방 포기한다. 열정으로 시작했지만, 금방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피곤해지면 사람은 그 자리를 피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피곤하면 = 포기한다.

 

성경은 선행을 포기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장 9절)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피곤해지면 안된다는 말로 바꾸라. 좋은 일에 열매를 거두고 싶다면, 피곤하지 않게 나를 관리해보라.

 

영어강사 이시원이 이렇게 말했다. “하루에 영어단어를 두 개만 외우라” 많이 외우다가 피곤해지느니, 하루에 두 개가 훨씬 빠르다는 것이다. 지난 주 부산 사역팀이 해운대 바다가 보이는 최고급 숙소에 묵었다. 어떤 형제가 “내 신혼여행 때 방보다 좋다”고 말했다. 의미 없는 사치인가? 아니다. 피곤해지지 않으려 그렇게 한 것이다. 사역하다가 피곤해지면 ‘다음 사역’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피곤해지지 않게 기도하라. 너무 피곤해지지 않게 예배하라. 너무 피곤해지지 않게 공부하라. 그래야 다음 기도, 다음 예배, 다음 헌신이 가능하다.

 

다 던져야 할 때를 기다리라. 예수님이 피로를 관리하셨다. “예수께서 고물에서 베개를 배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마가복음 4:38)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는데, 예수님은 잠만 주무셨다. 그런데 마지막 십자가 직전에 상황이 바뀐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태복음 26:40) 피로를 관리하시던 예수님이, 육체적인 한계점까지 몰아붙이셨다. 피로를 관리하며 십자가 앞에 섰을때, 포기하지 않고 온 몸을 던져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인생이 의외로 장기전이다. 한 번 하지 말고, 백 번 천 번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려면 피곤해지면 안된다. 피곤하게 살지 말고, 어떻게든 재미있게, 버틸 수 있게, 계속할 수 있게, 쉽게 할 수 있게 만들어보라.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열매를 맺는 방식이다.

 

[1] 열정가지고 시작했다가, 쉽게 피곤해져서 포기했던 삶의 도전들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갈라디아서 6장 9절을 읽어봅시다. 선의 열매를 거두기 위한 조건은 무엇입니까? 현대사회에서 포기의 동의어는 무엇입니까? 내 삶에서 중요한 영역이지만 너무 쉽게 피곤해지며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영역들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4-5] 마가복음 4장 38절과 마태복음 26장 4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의 태도는 어떻게 달라지셨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장기적인 열매를 위해 바뀌어야 할 삶의 태도들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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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가 주는 만남
(8. 14. 2022.)

호세아 2:7

 

원하는 대로 이루지 못한 것, 목표한 대로 성취하지 못한 것은 현대사회에서 부끄러운 일이다. 그 사람과 결혼하려 했으나 잘 안됐다. 열심히 사업을 시도했지만 의도와는 상황이 다르다. 인스타그램에는 모두 성공한 인생만 나온다. 성공한 사람만 글을 포스팅할 권리가 있다. 물리적인 할렘(Harlem)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실패자들은 이제 사회적인(social) 할렘에 산다.

 

실패자는 하나님을 만난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남자를 찾아다니는 여인에 비유한다. 하나님이 일부러 만남 성사를 막으신다.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호세아 2:7) 기존 남편 하나님과의 삶이 행복임을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실패가 주는 만남이다.

 

나는 어디서 하나님을 만나는가? 내가 추구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서 만난다. 처음에는 좀 더 노력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군가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6절) 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길이 막힌 곳은 언제나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다. 실패는 이 땅에서 쓸모가 없다. 실패는 하나님 앞에서만 쓸모가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회적 고립을 경험하셨다.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요한복음 11:53) 그는 하나님 뜻대로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십자가에 죽으셨다. 우리 뜻대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과 고립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실패 때문에 사회적으로 뒤쳐지고 고립된다고 느낄 때마다, 그 상황을 재정의하라. 하나님은 나를 만나기 위해 그 상황을 허락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실패는 극복을 통해서 풀리는 것이 아니다. 만나야 풀린다. 하나님을 외면한 채 극복하려고 하지 말고, 그 분 만나려고 하라. 실패 이후에 새 길이 열릴 것이다.

 

[1] 현대 사회에는 일정한 성취에 실패하면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게 내가 그것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호세아 2장 7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남자를 찾아다니는 여인을 어떻게 다루십니까? 성경은 사람이 성취에 실패하는 순간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습니까? 인생의 여러 실패의 순간에 ‘극복’이 아니라 ‘만남’을 경험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예수님은 이 땅에서 무엇을 경험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현재의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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