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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 먹히는 구원
(12. 4. 2022.)

요나 1:17

 

살다 보면 사람의 힘이 아닌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인생이 안 풀려도 이렇게 안 풀릴 수 있나? 어떻게 내가 이런 상황을 맞이할 수 있나? 남들은 잘 되는데 왜 나만 이러나? 문제를 풀려다가 문득 생각이 난다. ‘혹시 하나님이 나를 쫓아오고 계신 것은 아닐까?’

 

하나님은 잡아 먹어서 구원하시는 분이다. 요나는 하나님만 빼고 살고 싶었다. 세상에 잡아 먹힌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잡아 먹힌 사람을 어떻게 다시 자신에게로 돌이키시는가? 잡아 먹으신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요나 1:17) 요나는 벌을 받은 것인가? 아니다. 바다에 빠져도 죽고, 배에 남아있어도 죽었다. 그 배는 다시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가는 배였기 때문이다. 요나가 살아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잡아 먹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잡아 먹으러 오실 때가 있다. 먹히라. 그게 구원이다. 웬만한 상황에서는 고집이 꺾이지 않는 나를 주님은 너무 잘 아신다. 세상에 먹힌 나를 찾아 오셔서 바다에 던지신다. 그것이 탈출이다. 질병, 가난, 실연, 상처, 무능력에 처하게 하신다.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물고기 뱃속이 구원이다. 하나님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고 원망하지 말라. 지나보면 세상에서 탈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보인다.

 

배에 타고있던 나머지 사공들이 있었다. 가장 편한 사람들 아닐까? 그들은 그 풍랑은 피했지만, 인생의 풍랑을 피하지 못한다. 그것이 죽음이다. 죽음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 있다. 죽음에 잡아 먹혔다가 살아나신 예수님 믿는 것이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누가복음 9:22) 나 대신 삼일 동안 죽음의 물고기 뱃속에 계시다가 부활하셨다. 죽음에 먹힐 뻔한 나를 구원하셨다. 그러면 지금 먹히게 하실 때도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구원이 될 것이다.

 

남들은 편안한데 나만 잡아 먹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배에 남아있으려 하지 말고, 그냥 먹혀보라. 바닥에서 다시 주님만 신뢰해보라. 진짜 나를 잡아먹는 마귀보다 훨씬 나은 분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

 

 

[1] 분명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내 삶에 이러저러한 일들이 생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경험한 적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요나서 1장 17절을 읽어봅시다. 요나는 무슨 일을 당했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배에 남아 있었다면 어떤 결과가 펼쳐졌을까요?

 

[4-5] 모든 사람이 맞이해야 할 인생의 마지막 풍랑은 무엇입니까? 대신 당하신 분은 누구이십니까? 가장 큰 풍랑에서 나를 구원하신 분을 믿을 때, 그분이 내게 주시는 풍랑의 해석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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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 예의
(11. 27. 2022.)

창세기 1:27

 

다양한 개성의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만큼 존중할 줄 알았는데, 반대로 적대와 혐오가 늘어만 간다.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여자를 무시한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못 본체 하고, 가난한 자는 가진자를 혐오한다. 회사에서 싫어하면 말도 걸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입장이 다르면 다 죽어야 될 사람들이다. 기본적 예의? 그런 건 없다.

 

사람의 기본적 예의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정할 때 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보인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그 무엇이 사람 속에 모두 들어있다.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사람의 공통된 목적이다. 아무리 외모와 의견, 살아온 세월이 달라도,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임을 인정할 때 기본적인 예의가 가능해진다.

 

그리스도인은 끝까지 기본적 예의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험한 말을 쏟아내고 욕을 하면 안 된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존대하고, 그래도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입장이 다른 사람에 대한 난폭함, 무시, 욕설, 조롱, 폭력을 정당화 하는 영역이 있는가? 나는 나의 주장을 자기의로 삼는 죄에 빠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입장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보여주셨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태복음 9:13) 우리는 의견 정도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달랐던 죄인이었다. 의인이신 그분은 죄인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죄인과 함께 식사하셨다. 의견은 달랐지만, 나의 구원을 위해 일하셨다. 죄인인 나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시고, 나를 사랑하신 그분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언제나 기본적인 예의를 유지할 의무가 생긴다.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그 어떤 순간에도, 끝까지 상대에게 기본적 예의를 지키라. 상대가 무시해도 인사하라. 하대해도 존대하라. 무시해도 존중하라. 기본적 예의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섬기는 길이다.

 

[1] 내 주변에서 기본적 예의가 모두 사라지며 분열됨을 목격했던 적이 있습니까? 의견이 다르면 상대를 무시하고 편을 가르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나는 누구를 제일 싫어하고, 무엇을 향한 비난이 제일 많은가요?

 

[2-3] 창세기 1장 27절을 읽어봅시다. 사람에게 기본적 예의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즘 사람들에게서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한 예의가 점점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5] 마태복음 9장 13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과 의견이 다른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내가 끝까지 예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상대나 상황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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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된 즐거움
(11. 20. 2022.)

시편 50:23

 

아무 일도 아닌데, 그것이 엄청난 보람과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 내가 현재 행하고 있는 일에 감사를 표현하며 즐겨줄 때 그렇다. 남보다 더 나을 때만, 더 탁월할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즐거워하면 최고의 기쁨이 온다. “이 일을 늘 감당해줘서 정말로 고마워”, “나랑 살아주는 것 자체로 내겐 복이야”, “그렇게 행동하기 쉽지 않은데 정말 대단하세요.” 늘 하던 일인데, 표현만 해줘도 분위기가 바뀐다.

 

C. S. 루이스는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 교회에서 찬양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잘 믿기만 하면 되지 왜 굳이? 나중에는 이렇게 고백한다. “즐기는 것을 찬양하는 것이 좋다. 찬양은 즐거움을 표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해 주기 때문이다. … 즐거움은 표현되기 전까지는 완성되지 못한다. … (무엇이든) 온전히 찬양하면, 가슴이 터질 정도의 감사를 시나 음악, 그림으로 온전히 끌어내면 … 그 대상은 온전히 인정을 받고 우리의 기쁨은 완벽한 수준에 이른 셈이다.” 찬양은 표현된 즐거움이다. 표현하면 상대와 내가 모두 살아난다.

 

표현된 즐거움을 회복하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편 50:23) 더 나아질 때까지 상황을 보고만 있지 말라. 당연히 여기면서 침묵하지 말라. 그래서 즐거움이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상황도 하나님의 은혜다. 올 해, 부어 주신 즐거움을 표현하라. 크게 찬양하라. 헌금하라. 헌신하라. 사람에게도 표현하라. 내 곁에 있어줘서 늘 고맙다고, 당신 참 매력 있다고 말하라. 비싼 밥을 사라. 선물하라. 즐거움은 표현되면서 완성된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성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태복음 3:17)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 잘 아는데 굳이? 그 관계는 표현된 즐거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십자가 고난도 감당하셨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 23:46)

 

추수감사절이다. 현재의 문제를 극복하려고 돌진하지 말고, 먼저 나를 향해 표현하시는 그의 사랑을 받으라. 먼저 그분께 감사와 기쁨을 표현하라. 쓸데 없는 일인 줄 알았는데, 감사 이후 오히려 삶의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이 나타날 것이다.

 

[1] 늘 하던 일에 대해서 내가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현하거나, 내가 그 표현을 들을 때 새 힘과 위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험을 나누어봅시다.

 

[2-3] 시편 50편 23절을 읽어봅시다. 신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무엇입니까? 내게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거나, 감당하기 벅찬 상황 때문에 감사의 표현에 인색해진 내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4-5]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에게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셨습니까? 지금 하나님을 향한, 사람을 향한 ‘표현된 즐거움’을 생각해봅시다. 무엇이 감사하고, 누구에게 고맙습니까?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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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의 함정
(11. 13. 2022.)

요한복음 12:3

 

삶은 관리와의 싸움이다. 건강관리, 시간관리, 재정관리. 심지어 ‘두피’도 관리를 받고, ‘비데’도 관리를 받는다. 요즘 관리 못하는 사람은 인생을 못 산 사람처럼 느껴진다. 내 뱃살이 왜 부끄러울까? ‘관리해야 한다’는 시대의 사고방식을 나도 수용하고 있어서 그렇다.

 

관리는 인생의 목표가 아니다. 마리아는 자산관리를 잘 하는 여자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자 자산을 다 부어버린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한복음 12:3) 여자는 관리를 잘하는 여자였다. 그런데 예수님 만나고 인생에 더 높은 목표를 깨닫는다. 관리하는 이유는, 드려지기 위함, 헌신하기 위함이다.

 

인생의 최종 목표는 내 주인 되신 주님께 내 삶이 드려지는 것이다. 잘 관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때가 있다. 열심히 관리하라. 그러나 관리가 깨어질 때 저항하거나 머뭇거리지 말라. 관리는 최종 목표가 아니다. 헌신이 최종 목표다. 내 재능, 내 돈, 내 나이, 내 성격… 내가 관리한 모든 것을 쏟아부을 대상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헌신의 대상에 나를 내어드리라. 헌신할 대상이 없는 인생은 불행하다. 이효리가 이렇게 고백한다. “뭔가를 위해 내가 없어지는 그런 경험을 너무 해보고 싶었다” 이효리는 헌신의 기쁨을 찾고 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인생을 사신 분이다. 완벽한 관리자셨다. 그런데 관리의 마지막은 헌신이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8) 예수님은 헌신이 가장 큰 기쁨인 것을 아셨다. 그 기쁨의 크기는 죽음의 고통보다 더 큰 것이었다. 예수님을 통해 영생을 얻었음을 믿는가? 그러면 주님이 주실 기쁨도 믿어야 한다. 그 기쁨은 관리가 아니라 헌신에서 온다.

 

관리만 하지 말고 헌신을 준비하라. 설교자 조지 휫필드의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녹슬어 없어지기 보다는 닳아서 없어지기를 원한다” 관리의 시대에 울리는 경종이다. 녹슬기 전에 닳아버리라. 참된 기쁨이 여기에 있다.

 

[1] 관리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내 주변에서 경험하거나 압박을 받는 ‘관리’의 대상은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잘하거나 못하는 관리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요한복음 12장 3절을 읽어봅시다. 마리아는 어떤 자산을 소유한 여자였습니까? 이 여자는 자신이 관리하던 자산을 어떻게 사용하였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인생의 최종 목표는 무엇입니까?

 

[4-5] 예수님은 어떤 관리자셨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인생을 누구에게 헌신하셨습니까? 내가 아름답게 드려지기를 바라는 헌신과 관련한 꿈을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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