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으로 하는 일
(1. 22. 2023.)

창세기 18:12

 

‘자본주의 웃음’이라는 말이 있다. 돈 벌기 위해 억지로 웃는다는 말이다. 겉을 위해 속을 숨기는 시대다. 그래서 속은 관리하지 않는다. 마음껏 욕하고, 다른 생각 해도 된다. 속은 나만 볼 수 있으니까.

 

하나님은 속을 보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자녀를 낳을 것이라고 약속 해주셨다. 너무 늙은 사라는 그 말이 너무 웃겨서 ‘속으로’ 웃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세기 18:12) 분명 속으로 했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한테 이르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13) 사라가 속으로 웃은 것을 하나님은 어떻게 아셨을까? 하나님은 속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한다. 겉과 동시에 속으로 하는 일이 있다. 하나님은 그 속을 보신다.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악한 생각을 벗어나려 하는 것, 순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는 속의 싸움에 함께하신다. 겉의 일이 풀리지 않고 있다면, 속을 점검해보라. 하나님은 내가 속으로 하고 있는 그 일도 함께 보고 계시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은 무덤에 가셨다. 예수님의 속마음이 보인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요한복음 11:33)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 신뢰는 능력만 봐도 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한다. 우리를 죄에서 살리려는 마음도 함께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속에서부터 나를 위해 일하셨다.

 

나는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속으로 하는 일부터 시작하라. 늘 주님 의지하고, 속으로 기도하고, 속으로 이웃을 사랑하려 발버둥쳐보라. 속으로 하는 일에 집중했는데, 겉의 문제까지 길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1] 현대 사회에서 겉과 속이 분리되는 가식과 이중적인 모습 속에 지쳤던 경험이 있습니까? 반대로, 나의 속마음이 가장 이중적이 되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나누어봅시다.

 

[2-3] 창세기 18장 12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의 약속에 사라는 속으로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3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떻게 사라가 속으로 웃는 것을 아셨습니까?

 

[4-5]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능력 이외에 무엇입니까? 그분의 진실된 마음 앞에서, 내가 속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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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가 아닌 자유
(1. 15. 2023.)

빌립보서 3:8-9

 

이 땅에 있는 것이 ‘전부’인 사람을 만나면 공포스럽다. 승진과 매출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 밑에서 일하는데 내 실적이 부실하다면? 죽을 맛이다. 연애가 전부인 사람과 사귀다가 헤어지면? 갑자기 데이트폭력을 행사하거나 잠수를 탄다. 자녀가 전부인 사람의 아이를 보육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 선생님은 그날로 끝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 땅의 것이 전부가 되지 않는 자유를 누린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립보서 3:8-9) 이제 잃어버려도 괜찮다.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전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와 동행하는 것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되었다. 예전엔 뜻대로 안 되면 뒤집어 졌었는데, 원하는 상황대로 펼쳐지지 않더라도 점점 그 안에서 평안을 찾고 새로운 일을 기대하는 소망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것이 너의 전부다”라고 다그치는 문화의 목소리를 거절하라. 자녀는 결코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자녀는 나를 실망시킬 것이다. 그래도 괜찮아야 한다. 돈은 결코 내 인생을 전부 책임지지 않는다. 돈은 내 인생을 평생 질질 끌고 다닐 것이다. 그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영원히 사랑해줄 수 없다. 그 사랑을 잃어도, 난 영원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다. 옛날엔 전부였던 것을 잃어가고 있는데 괜찮아진다면, 주님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진짜 전부를 잃어버릴 뻔했다. 하나님이 우리의 전부이시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 대신 전부를 잃어버리셨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가복음 15:34)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삶엔 다시 소망이 생긴다. 다 잃은 것 같아 보여도, 결코 하나님은 잃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만 계시다면, 이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을 잃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새로운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이 담대함 속에, 이 땅의 것이 전부가 아니게 되는 자유를 누리라. 주변의 온갖 실수와 돌발 상황을 넉넉히 품어내고, 최악 속에서도 긍정하는 즐거움이 찾아올 것이다.

 

[1] 이 땅의 특정한 것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특징이 있었고, 왜 대하기 어려웠습니까?

 

[2-3] 빌립보서 3장 8-9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은 이 땅의 것이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옛날엔 나의 전부였는데, 점점 괜찮아지는 삶의 요소가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4-5] 내 인생의 전부는 누구이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언제나 내 전부가 사라지지 않음을 믿고, 이 땅에서 실망과 손실 속에 담대함과 평안을 찾아야 할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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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헷갈림, 안보임
(1. 8. 2023.)

마태복음 12:38-39

 

신앙생활 하면서 제일 답답한 것? 안보이고, 헷갈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 확실히 나타나신다면, 무언가 기적을 일으키신다면, 내가 믿어볼 수 있겠다. 안 보이니 문제다. 하나님을 믿고 나서도 문제다. 이 결정이 맞는가 저 결정이 맞는가? 확실히 알려주시면 좋겠는데 헷갈린다. 헷갈리고, 안보여서 신앙생활이 힘들다.

 

왜 헷갈리고 보이지 않게 하시는가? 그래야 하나님을 더 인격적으로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기적을 보여 달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거절하셨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태복음 12:38-39) 보여주면 인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신뢰할 수는 없다. 보여주면 납득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랑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뜻은 존재의 증명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이다. 하나님의 뜻이 헷갈리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기회다. 헷갈려 봐야 내 마음이 부패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 뜻이 가려짐을 경험해야 경건을 사모하게 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믿음으로 결정해야 그의 함께하심에 대한 평생의 담대함이 생긴다.

 

내 삶에 허락하시는 보이지 않고, 헷갈리는 상황은 절대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되는 운명을, 내 대신 예수님이 가져가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가복음 15:34) 그분이 아버지를 보지 못하셨으니, 나는 다시 아버지를 볼 수 있다. 분명 이 과정을 통해, 나는 하나님과 가까워질 것이다.

 

헷갈릴 때 열심히 발버둥치라. 보이지 않을 때 믿음을 활용하라. 나를 버리심이 아니다. 나를 그분께로 가까이 이끄심이다.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그분이 보이고, 마침내 그분을 사랑하게 될 때, 인생은 무적이다.

 

[1]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헷갈려서 고뇌했던 지난날 혹은 최근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12장 38-39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왜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말을 거절하셨습니까? 기적(혹은 응답)을 경험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지는 않았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15장 34절을 읽어봅시다. 죄인 된 내가 인생의 마지막에 경험해야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것을 가져가셨다는 것을 믿을 때, 내 삶에 헷갈리고 보이지 않는 경험 속에서 무엇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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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의 영광”
(12. 31. 2022.)

디모데전서 4:16

 

새로운 일이 없으면 재미가 없다. 성취가 없으니 보람도 없다. 개선되고, 나아지고, 성장하는 것이없어서 인생이 지루하다. 인생의 즐거움을 ‘전진’에 두었기 때문이다. 한해를 돌아보니, 오히려 정체되거나 후진한 모습이 많다. 내년에는 과연 ‘앞으로’ 갈 수 있을까?

 

삶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중 하나는, 가치 있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성경은 반복이 영광임을 말한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디모데전서 4:16) 올 한 해를 돌아보는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어떤 새로운 일을 했는가?”라고 묻지 말라. “그 일을 얼마나 반복하고 있느냐?”라고 물으라.

 

한사람교회가 개척한지 8년 차에 접어들었다. 1-2년 차 때는 내년엔 새로운 일을 더 할 줄 알았다. 8년째 똑같다. 심방하고, 설교준비 하고, 기도하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영광은 새로운 일에 있지 않다. 그걸 8년 했다는 것이 영광인 것이다. 내년엔 새로운 일을 안 해도 영광이 더욱 커질 것이다. 반복에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학교 선생님이 무슨 새로운 일을 하겠는가? 매번 바뀌는 아이들을 수십년 간 그 자리에서 가르친다면, 그 자체로 영광 아니겠는가? 우리 시대는 반복의 영광, 그 자리의 영광을 너무 쉽게 여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3일 동안 죽음의 자리에 계셨다. 죽음 속에서 무슨 새로운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다. 하나님이 살리실 때까지 계속 그 자리에 계셨다. 가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인인 나를 살리는 일을 가치 있게 여기셨다. 가치 있는 그 자리에 머무르자, 죽음의 그 자리가 영광의 자리가 되었다. 부활의 새로운 일이 생겼다.

 

내 인생의 반복은 우연이 아니다. 무능도 아니다. 하나님이 그 자리에 있게 하시는 곳에서, 그 자리의 영광을 구하라. 반복의 영광을 구하라. 나는 반복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행하실 것이다.

 

[1] 한 해를 돌아봅시다. 특별히 달라지지 않고 새롭지 않은 일상 때문에 마음이 어두워졌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디모데전서 4장 16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엇을 권면합니까? 반복에 영광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5]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자리가 영광스러웠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반복하는 일들을 가치 있게 여기고 하나님을 기대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 봅시다.

 

“일의 이중목적
(1. 1. 2023.)

골로새서 3:23-24

 

요즘 사람들은 왜 일하나? ‘다른 것을 하려고’ 일한다. 열심히 일해서 받은 성과로 ‘여행 가려고’ 일한다. 번 돈으로 열심히 저축해서 ‘집 사려고’ 일한다. 모두가 같은 일을 하지만, 모두가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다. 사장이 되어 보거나 부하 직원을 거느려 보라. 마음이 다른 일로 가득 찬 모습이 다 눈에 보여서 얼마나 답답한지 모른다.

 

그리스도인들은 일의 이중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다. 일을 통해 다른 목적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맡은 그 일 자체도 동시에 목적이 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로새서 3:23-24) 그것을 잘 할 이유, 그것을 끝까지 해낼 이유가 있다. 이 일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일이자, 하나님 앞에서 수행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아빠가 밤새 초등학교 아들 줄넘기 연습을 진지하게 시킨다. 아빠는 똥배가 나왔고 운동도 싫어한다. 그런데도 왜 그 일을 열심히 하는가? 아들과 관련된 일이라서 그렇다. 관계 때문에 일 자체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하나님 때문에 내가 맡은 일은 중요한 일이고, 잘 해내야 할 일이다.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월급만 나오면 된다는 생각을 버리라. 손님이 와도 신경 안 쓰는 알바생, 정규직이라고 성과는 생각도 안 하는 직원, 수수료가 적다고 대충 처리하는 거래들. 내가 맡았다면, 일 자체가 잘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 물건 많이 팔아 보라! 그 거래 무조건 성사되게 해보라! 세상은 그 자체를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달려드는 사람을 찾고 있다.

 

우리 위해 어려운 일 맡으신 분이 있다.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나중에 편하게 통치하실 일만 생각하시지 않았다. 죽는 일을 잘 해보려 하셨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8) 그 일 잘하셔서, 우리에게 영생이 왔다. 나의 인생도 동일하게 풀릴 것이다. 내 인생의 미래는 ‘그 일’ 속에 있다.

 

다른 일 좀 그만 알아보고, 그 일부터 잘하려고 해보라. 다른 것을 하려고 일하는 순간 내 인생은 막힐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 일을 해내려 할 때, 내 인생은 바로 그 방식으로 풀릴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진 일의 이중목적이다.

 

[1] 요즘 주변에 일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며 그 일이 아닌 다른 것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까? 나누어봅시다.

 

[2-3] 골로새서 3장 23절을 읽어봅시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일해야 합니까? 일의 종류와 나의적성에 관계없이 일단 맡은 그 일을 잘하고, 열심히 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4-5] 빌립보서 2장 8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일’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내 인생도 같은 방식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으며, 내가 하나님 앞에서 좀 더 열정적으로 감당해야 할 ‘지금 그 일’은 무엇인지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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