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 예의
(11. 27. 2022.)

창세기 1:27

 

다양한 개성의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만큼 존중할 줄 알았는데, 반대로 적대와 혐오가 늘어만 간다.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여자를 무시한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못 본체 하고, 가난한 자는 가진자를 혐오한다. 회사에서 싫어하면 말도 걸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입장이 다르면 다 죽어야 될 사람들이다. 기본적 예의? 그런 건 없다.

 

사람의 기본적 예의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정할 때 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보인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그 무엇이 사람 속에 모두 들어있다.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사람의 공통된 목적이다. 아무리 외모와 의견, 살아온 세월이 달라도,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임을 인정할 때 기본적인 예의가 가능해진다.

 

그리스도인은 끝까지 기본적 예의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험한 말을 쏟아내고 욕을 하면 안 된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존대하고, 그래도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입장이 다른 사람에 대한 난폭함, 무시, 욕설, 조롱, 폭력을 정당화 하는 영역이 있는가? 나는 나의 주장을 자기의로 삼는 죄에 빠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입장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보여주셨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태복음 9:13) 우리는 의견 정도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달랐던 죄인이었다. 의인이신 그분은 죄인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죄인과 함께 식사하셨다. 의견은 달랐지만, 나의 구원을 위해 일하셨다. 죄인인 나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시고, 나를 사랑하신 그분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언제나 기본적인 예의를 유지할 의무가 생긴다.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그 어떤 순간에도, 끝까지 상대에게 기본적 예의를 지키라. 상대가 무시해도 인사하라. 하대해도 존대하라. 무시해도 존중하라. 기본적 예의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섬기는 길이다.

 

[1] 내 주변에서 기본적 예의가 모두 사라지며 분열됨을 목격했던 적이 있습니까? 의견이 다르면 상대를 무시하고 편을 가르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나는 누구를 제일 싫어하고, 무엇을 향한 비난이 제일 많은가요?

 

[2-3] 창세기 1장 27절을 읽어봅시다. 사람에게 기본적 예의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즘 사람들에게서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한 예의가 점점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5] 마태복음 9장 13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과 의견이 다른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내가 끝까지 예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상대나 상황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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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된 즐거움
(11. 20. 2022.)

시편 50:23

 

아무 일도 아닌데, 그것이 엄청난 보람과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 내가 현재 행하고 있는 일에 감사를 표현하며 즐겨줄 때 그렇다. 남보다 더 나을 때만, 더 탁월할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즐거워하면 최고의 기쁨이 온다. “이 일을 늘 감당해줘서 정말로 고마워”, “나랑 살아주는 것 자체로 내겐 복이야”, “그렇게 행동하기 쉽지 않은데 정말 대단하세요.” 늘 하던 일인데, 표현만 해줘도 분위기가 바뀐다.

 

C. S. 루이스는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 교회에서 찬양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잘 믿기만 하면 되지 왜 굳이? 나중에는 이렇게 고백한다. “즐기는 것을 찬양하는 것이 좋다. 찬양은 즐거움을 표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해 주기 때문이다. … 즐거움은 표현되기 전까지는 완성되지 못한다. … (무엇이든) 온전히 찬양하면, 가슴이 터질 정도의 감사를 시나 음악, 그림으로 온전히 끌어내면 … 그 대상은 온전히 인정을 받고 우리의 기쁨은 완벽한 수준에 이른 셈이다.” 찬양은 표현된 즐거움이다. 표현하면 상대와 내가 모두 살아난다.

 

표현된 즐거움을 회복하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편 50:23) 더 나아질 때까지 상황을 보고만 있지 말라. 당연히 여기면서 침묵하지 말라. 그래서 즐거움이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상황도 하나님의 은혜다. 올 해, 부어 주신 즐거움을 표현하라. 크게 찬양하라. 헌금하라. 헌신하라. 사람에게도 표현하라. 내 곁에 있어줘서 늘 고맙다고, 당신 참 매력 있다고 말하라. 비싼 밥을 사라. 선물하라. 즐거움은 표현되면서 완성된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성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태복음 3:17)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 잘 아는데 굳이? 그 관계는 표현된 즐거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십자가 고난도 감당하셨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 23:46)

 

추수감사절이다. 현재의 문제를 극복하려고 돌진하지 말고, 먼저 나를 향해 표현하시는 그의 사랑을 받으라. 먼저 그분께 감사와 기쁨을 표현하라. 쓸데 없는 일인 줄 알았는데, 감사 이후 오히려 삶의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이 나타날 것이다.

 

[1] 늘 하던 일에 대해서 내가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현하거나, 내가 그 표현을 들을 때 새 힘과 위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험을 나누어봅시다.

 

[2-3] 시편 50편 23절을 읽어봅시다. 신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무엇입니까? 내게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거나, 감당하기 벅찬 상황 때문에 감사의 표현에 인색해진 내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4-5]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에게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셨습니까? 지금 하나님을 향한, 사람을 향한 ‘표현된 즐거움’을 생각해봅시다. 무엇이 감사하고, 누구에게 고맙습니까?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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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의 함정
(11. 13. 2022.)

요한복음 12:3

 

삶은 관리와의 싸움이다. 건강관리, 시간관리, 재정관리. 심지어 ‘두피’도 관리를 받고, ‘비데’도 관리를 받는다. 요즘 관리 못하는 사람은 인생을 못 산 사람처럼 느껴진다. 내 뱃살이 왜 부끄러울까? ‘관리해야 한다’는 시대의 사고방식을 나도 수용하고 있어서 그렇다.

 

관리는 인생의 목표가 아니다. 마리아는 자산관리를 잘 하는 여자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자 자산을 다 부어버린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한복음 12:3) 여자는 관리를 잘하는 여자였다. 그런데 예수님 만나고 인생에 더 높은 목표를 깨닫는다. 관리하는 이유는, 드려지기 위함, 헌신하기 위함이다.

 

인생의 최종 목표는 내 주인 되신 주님께 내 삶이 드려지는 것이다. 잘 관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때가 있다. 열심히 관리하라. 그러나 관리가 깨어질 때 저항하거나 머뭇거리지 말라. 관리는 최종 목표가 아니다. 헌신이 최종 목표다. 내 재능, 내 돈, 내 나이, 내 성격… 내가 관리한 모든 것을 쏟아부을 대상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헌신의 대상에 나를 내어드리라. 헌신할 대상이 없는 인생은 불행하다. 이효리가 이렇게 고백한다. “뭔가를 위해 내가 없어지는 그런 경험을 너무 해보고 싶었다” 이효리는 헌신의 기쁨을 찾고 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인생을 사신 분이다. 완벽한 관리자셨다. 그런데 관리의 마지막은 헌신이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8) 예수님은 헌신이 가장 큰 기쁨인 것을 아셨다. 그 기쁨의 크기는 죽음의 고통보다 더 큰 것이었다. 예수님을 통해 영생을 얻었음을 믿는가? 그러면 주님이 주실 기쁨도 믿어야 한다. 그 기쁨은 관리가 아니라 헌신에서 온다.

 

관리만 하지 말고 헌신을 준비하라. 설교자 조지 휫필드의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녹슬어 없어지기 보다는 닳아서 없어지기를 원한다” 관리의 시대에 울리는 경종이다. 녹슬기 전에 닳아버리라. 참된 기쁨이 여기에 있다.

 

[1] 관리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내 주변에서 경험하거나 압박을 받는 ‘관리’의 대상은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잘하거나 못하는 관리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요한복음 12장 3절을 읽어봅시다. 마리아는 어떤 자산을 소유한 여자였습니까? 이 여자는 자신이 관리하던 자산을 어떻게 사용하였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인생의 최종 목표는 무엇입니까?

 

[4-5] 예수님은 어떤 관리자셨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인생을 누구에게 헌신하셨습니까? 내가 아름답게 드려지기를 바라는 헌신과 관련한 꿈을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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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 이상한 것
(11. 6. 2022.)

요한복음 15:5

 

열정, 꿈, 계획으로 살아갔던 때가 있다. 그리고 그대로 되기도 한다. 꿈을 이루는 사람들을 보며 내 노력부족을 자책했다. 요즘 누가 그런 말 하면 코웃음을 친다. 인생이 내 맘대로 되나? 그게 이상한 것이다.

 

예수님을 떠나면 신자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you can do nothing.)”(요한복음 15:5)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살고 있는데, 무언가 평안하게 잘 가고 있다면 이상한 것이다. 처음 산 주식에서 상한가를 맞고 자기가 투자를 잘 한단다. 이 사람은 투자로 잘 될 사람인가? 곧 골로 갈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 인생에 가장 위험한 곳은, 하나님 없이도 적절히 잘 돌아간다고 느껴지는 곳이다.

 

되면 이상한 것이다. 잘 되다가 이제 좀 잘 안되는 곳이 있는가? 바로 그곳이 하나님 만나는 곳이다. 더 낮아져서 정말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고백해야 한다. 내 뜻대로 하나도 안 된다고 고백해야 한다. 될 리가 없다. 하나님이 은혜 안 주시는데 열매가 맺힐 리 없다. 기도도 안 하는데 잘 풀릴 리가 없다. 어설프게 하나님을 떠나 유지하고 있는 모든 영역에서 엎드리라. 소개팅 많이 하다 보면 좋은 사람 만날 거라고? 적절히 돈 벌면 안정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되는 것이 없다고 고백할 때까지 주님이 낮추실 것이다. 그게 열매 맺는 길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될 수가 없는 상태가 죽음이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었다. 그 십자가의 자리에 내 대신 예수님께서 달리셨다. 아무것도 안 되는 곳에서 부활이 되게 만드셨다. 이것을 믿으면 죽음 이후에 천국에 감을 확신하는가? 그럼 오늘의 삶도 믿어야 한다. 왜 나만 안되게 만드시는가? 저주가 아니다. 노력 부족도 아니다. 관계 부족이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능력만으로 되게 만드실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잘 안 풀리기 시작하는 곳에 집중하라.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고백이 나올 때까지 낮아지라. 강해지려고 하지 말고 낮아지려고 하라. 그곳에 은혜가 부어지고, 그곳에서 새 길이 열릴 것이다. 열매는 주님께 붙어있을 때만 가능하다.

 

[1] 지난 날의 내 부푼 꿈과 원대한 계획들이 있었다면 추억해봅시다. 나의 그 꿈은 어떻게 구겨지고 무산되었습니까?

 

[2-3] 요한복음 15장 5절을 읽어봅시다. 성경은 예수님을 떠난 신자의 상태를 어떻게 묘사합니까? 요즘 잘 된다고 착각하며 하나님과 연결시키지 않고 있는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모든 사람이 맞이해야 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는 무엇입니까? 그 곳에서 예수님이 ‘되게 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 능력을 믿고, 내게 주시는 무능의 상황 속에 하나님 앞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21030-6-51-21a/s-ZSkeQ1xp8Am?si=bca29d80365c41ee9304196dd2131dae&utm_source=clipboard&utm_medium=text&utm_campaign=social_sharing

“순서의 죄
(10. 30. 2022.)

마태복음 6:33

 

똑같은 일도 순서가 달라지면 망신이 된다. 회사에서 걸어간다. 걷는 건 죄가 아니다. 그런데 내가 회장님보다 앞서 걸으면 결례이다. 지하철을 기다린다. 내리고 타야 좋다. 먼저 타겠다고 밀어붙이면 서로 불쾌하다. 행동만 보면 안된다. 순서가 더 중요하다.

 

주님은 신자들에게 순서를 말씀하신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 행동만이 명령이 아니라 순서도 명령이다. 삶의 실제적 변화와, 더 많은 성장을 원하는가? 새로운 행동을 하려고 하지 말고 순서를 바꾸어 보라.

 

무턱대고 일하기 전에 상사에게 먼저 보고하고 조언을 구하라. 같은 일을 했는데도 상사의 태도가 달라진다. 아침에 일을 시작하기 전에 오늘 무슨 일을 할 예정인지 상대에게 먼저 알리라. 전화 하기 전에 통화 가능하시냐고 먼저 문자를 남겨보라. 먼저 한 일 때문에 모든 기쁨과 성과가 따라온다. 경건생활도 마찬가지다. 다 놀고 예배 드리러 올 수 없다. 예배부터 먼저 시작하는 것이다. 일하다가 기도할 수 없다. 먼저 기도하고 시작해야 한다. 쓸 돈 다 쓰고 헌금이 되는가? 십일조부터 먼저 떼는 것이다. 먼저하면 승리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먼저 사랑하신 분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한일서 4:19)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그분은 앞서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은혜가 아니다. 내가 사랑하기도 전에 그분이 먼저 나를 사랑하신 것이 은혜다. 순서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느낀다.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내가 구원을 얻었다. 내 삶의 행동도 이제 자명하다. 우리도 주님의 것을 먼저 함으로, 순서로 영광 돌려야 한다.

 

모든 일을 하고 있지만, 아무 열매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 순서의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것을 먼저 하라. 중요한 것을 앞서 하라. 순서만 바꿔도 기적이 일어난다.

 

[1] 일상에서 질서와 순서가 있는데 상대가 그것을 지키지 않아 화가 났거나 내가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마태복음 6장 33절을 읽어봅시다. 행동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순서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일들 중에서 순서를 고려하지 않고 행했던 것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4-5] 요한일서 4장 19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이 다른 사랑보다 위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도 주님을 따라 주님을 먼저, 앞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할 삶의 순서를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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