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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 이상한 것
(11. 6. 2022.)

요한복음 15:5

 

열정, 꿈, 계획으로 살아갔던 때가 있다. 그리고 그대로 되기도 한다. 꿈을 이루는 사람들을 보며 내 노력부족을 자책했다. 요즘 누가 그런 말 하면 코웃음을 친다. 인생이 내 맘대로 되나? 그게 이상한 것이다.

 

예수님을 떠나면 신자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you can do nothing.)”(요한복음 15:5)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살고 있는데, 무언가 평안하게 잘 가고 있다면 이상한 것이다. 처음 산 주식에서 상한가를 맞고 자기가 투자를 잘 한단다. 이 사람은 투자로 잘 될 사람인가? 곧 골로 갈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 인생에 가장 위험한 곳은, 하나님 없이도 적절히 잘 돌아간다고 느껴지는 곳이다.

 

되면 이상한 것이다. 잘 되다가 이제 좀 잘 안되는 곳이 있는가? 바로 그곳이 하나님 만나는 곳이다. 더 낮아져서 정말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고백해야 한다. 내 뜻대로 하나도 안 된다고 고백해야 한다. 될 리가 없다. 하나님이 은혜 안 주시는데 열매가 맺힐 리 없다. 기도도 안 하는데 잘 풀릴 리가 없다. 어설프게 하나님을 떠나 유지하고 있는 모든 영역에서 엎드리라. 소개팅 많이 하다 보면 좋은 사람 만날 거라고? 적절히 돈 벌면 안정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되는 것이 없다고 고백할 때까지 주님이 낮추실 것이다. 그게 열매 맺는 길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될 수가 없는 상태가 죽음이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었다. 그 십자가의 자리에 내 대신 예수님께서 달리셨다. 아무것도 안 되는 곳에서 부활이 되게 만드셨다. 이것을 믿으면 죽음 이후에 천국에 감을 확신하는가? 그럼 오늘의 삶도 믿어야 한다. 왜 나만 안되게 만드시는가? 저주가 아니다. 노력 부족도 아니다. 관계 부족이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능력만으로 되게 만드실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잘 안 풀리기 시작하는 곳에 집중하라.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고백이 나올 때까지 낮아지라. 강해지려고 하지 말고 낮아지려고 하라. 그곳에 은혜가 부어지고, 그곳에서 새 길이 열릴 것이다. 열매는 주님께 붙어있을 때만 가능하다.

 

[1] 지난 날의 내 부푼 꿈과 원대한 계획들이 있었다면 추억해봅시다. 나의 그 꿈은 어떻게 구겨지고 무산되었습니까?

 

[2-3] 요한복음 15장 5절을 읽어봅시다. 성경은 예수님을 떠난 신자의 상태를 어떻게 묘사합니까? 요즘 잘 된다고 착각하며 하나님과 연결시키지 않고 있는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모든 사람이 맞이해야 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는 무엇입니까? 그 곳에서 예수님이 ‘되게 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 능력을 믿고, 내게 주시는 무능의 상황 속에 하나님 앞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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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의 죄
(10. 30. 2022.)

마태복음 6:33

 

똑같은 일도 순서가 달라지면 망신이 된다. 회사에서 걸어간다. 걷는 건 죄가 아니다. 그런데 내가 회장님보다 앞서 걸으면 결례이다. 지하철을 기다린다. 내리고 타야 좋다. 먼저 타겠다고 밀어붙이면 서로 불쾌하다. 행동만 보면 안된다. 순서가 더 중요하다.

 

주님은 신자들에게 순서를 말씀하신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 행동만이 명령이 아니라 순서도 명령이다. 삶의 실제적 변화와, 더 많은 성장을 원하는가? 새로운 행동을 하려고 하지 말고 순서를 바꾸어 보라.

 

무턱대고 일하기 전에 상사에게 먼저 보고하고 조언을 구하라. 같은 일을 했는데도 상사의 태도가 달라진다. 아침에 일을 시작하기 전에 오늘 무슨 일을 할 예정인지 상대에게 먼저 알리라. 전화 하기 전에 통화 가능하시냐고 먼저 문자를 남겨보라. 먼저 한 일 때문에 모든 기쁨과 성과가 따라온다. 경건생활도 마찬가지다. 다 놀고 예배 드리러 올 수 없다. 예배부터 먼저 시작하는 것이다. 일하다가 기도할 수 없다. 먼저 기도하고 시작해야 한다. 쓸 돈 다 쓰고 헌금이 되는가? 십일조부터 먼저 떼는 것이다. 먼저하면 승리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먼저 사랑하신 분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한일서 4:19)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그분은 앞서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은혜가 아니다. 내가 사랑하기도 전에 그분이 먼저 나를 사랑하신 것이 은혜다. 순서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느낀다.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내가 구원을 얻었다. 내 삶의 행동도 이제 자명하다. 우리도 주님의 것을 먼저 함으로, 순서로 영광 돌려야 한다.

 

모든 일을 하고 있지만, 아무 열매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 순서의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것을 먼저 하라. 중요한 것을 앞서 하라. 순서만 바꿔도 기적이 일어난다.

 

[1] 일상에서 질서와 순서가 있는데 상대가 그것을 지키지 않아 화가 났거나 내가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마태복음 6장 33절을 읽어봅시다. 행동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순서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일들 중에서 순서를 고려하지 않고 행했던 것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4-5] 요한일서 4장 19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이 다른 사랑보다 위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도 주님을 따라 주님을 먼저, 앞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할 삶의 순서를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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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제는 없다
(10. 23. 2022.)

빌립보서 4:2-3

 

어디를 가나 ‘경쟁’이 있다. 저 사람이 나보다 더 잘하면 안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견제’한다. 주변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도와주지 않는다. 내가 도움 줄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모른 척한다. 그리고 잘못한 것이 보이면 득달 같이 달려든다. 가족끼리 견제하는 것 보았는가? 견제는 미움의 고상한 말일 뿐이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견제가 없다. 빌립보 교회 사람들이 서로 다양한 일을 열심히 하다보니 서먹서먹해졌다. 바울은 서로 견제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 저 여인들을 돕고 …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립보서 4:2-3) 좀 서먹해졌다고, 친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기본 태도를 ‘견제’에 두지 말고, ‘도우라’고 말한다. 하나님 사람들의 삶의 기본 태도는 협력과 도움이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도 왜 직장과 사회에서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가? ‘견제’라는 기본 태도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기본 태도가 비판, 견제, 뒷담화이다. 그 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그냥 휩쓸려서 동조한다. 아니다. 별 일 없으면 도와야 한다. 별 일 없으면 지지하고 격려해야 한다. 세상은 내게 우호적이고, 나를 지지해줄 사람을 찾아 갈급해하고 있다. 하나님이 나를 왜 그곳에 보내셨을까? 왜 그 사람 만나게 하셨을까? 주변 사람들 일이 잘 되게 만들어보라. 적극적으로 도우라. 그게 신자들의 사명이다.

 

무능하고 더러운 사람을 왜 도와야 하는가? 죄인을 도우신 분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나는 어떻게 구원받았나? 견제하지 않으시고 도우신 예수님 때문에 살았다. 죄인임을 인정하는가? 예수님이 나를 견제하지 않고 사랑하고 계심도 믿는가? 그렇다면 당신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견제는 세상의 방식이다.

 

왜 요즘 나를 돕는 자가 아무도 없을까? 맨날 견제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하신 예수님 닮아 돕는 일에 뛰어들라. 마음을 밝게 가지라. 내게 주신 사람들을 향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협력하라. 머지않아 모두가 나를 돕겠다고 달려들 것이다.

 

[1] 세상의 기본 태도는 ‘견제’ 입니다. 서로 견제하고 미워하는 모습을 보고 지치고 힘들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빌립보서 4장 2-3절을 읽어봅시다. 서로 서먹했던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은 무엇입니까?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신자들의 기본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4-5] 로마서 5장 8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죄인을 대하신 기본 태도는 무엇입니까? 나는 어떤 방식으로 구원받았습니까? 나도 예수님 닮아 주변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특별히 생각나는 집단이나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해봅시다.

 

“무능예찬
(10. 16. 2022.)

고린도전서 1:27

 

행복이 능력에 비례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그 사람 왜 행복한지 가만히 보라. 능력이 있으니까 여기저기서 인정도 받고, 돈도 벌고, 기회도 생긴다. 무능하면 그 모든 것이 너무 힘들다. 그래서 무능한자는 사회에서 도태된다. 무능하면 불행하다. 그리스도인은 내 행복이 능력에 상당부분 기반하고 있음을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능한 자를 좋아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린도전서 1:27) 능력 좋은 사람은 다 거부하신 다는 말이 아니다. 능력이 있는 바람에 자신의 일을 하느라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방해가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바빠 보이는 사람을 싫어하신다. 차라리 무능한 자 데리고 자신의 일을 하기 원하신다. 단순한 절대적 능력이 무능하다는 말이 아니다. 관계 안에서 자신의 능력을 하나님께만 드리는 자를 찾으신다.

 

외국계 패션회사에 입사하고, 준수한 외모를 가진 ‘박위’라는 형제가 클럽에서 술 마시다가 떨어져 전신마비를 당한다. 누군가 24시간 간병을 해야 했다. 가족이 간병인을 고용하려 했을 때, 3살 차이나는 대학 졸업반 남동생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 형을 간병인에게 맡기고 싶지 않아요.” 바로 휴학하고 형 간병에 뛰어든다. 형이 잘나갈 때는 그 동생은 형보다 무능한 사람이었다. 형이 무능해지자, 동생은 무능은 오히려 위대해진다. 왜 위대한가? 관계 속에서 상대가 원하는 바에 기꺼이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무능은 절대적 능력부족이 아니다. 무능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세상의 관심사를 내려놓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능력을 소유한 분이셨다. 그러나 무능과 연약함으로 쓰임 받으셨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무능은 절대적 능력부족이 아니라고 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음을 향해 가셨다. 그래서 그의 무능은 위대하다. 그의 죽으심 때문에 나는 죽음 앞에서도, 심판 앞에서도 능력 있게 설 수 있다.

 

요즘 세상에서 좀 잘 나가는가? 인정 좀 받는가? 하나님이 볼 때 제일 불쾌한 사람일 수 있다. 바쁘다고 하나님한테 관심을 끄다니? 하나님은 그래서 당신을 그렇게 두시고 무능한 자를 찾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콜 앞에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간병인을 기대한다.

 

[1] 이 시대는 능력이 없으면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여러모로 내가 능력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익과 불익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고린도전서 1장 27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자를 사용하십니까? 성경적인 무능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무능한 자는 언제 위대해집니까?

 

[4-5] 예수님이 가장 위대하게 쓰임받으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내가 요즘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헌신 해야겠다고 느끼는 일이 있습니까? 혹은 회피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까?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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