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는 죽고, 그 사람은 살고
(2. 5. 2023.)

마가복음 5:7-8

 

혹자는 삶을 ‘지뢰밭’이라고 했다. 밟으면 터지는 위험 투성이라는 것이다. 내가 누리는 현재의 모든 것은 보호하심에 감싸져 있다. 주님이 보호를 거두시면, 우리의 인생은 지뢰를 피할 수 없다.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그 속의 귀신이 벌벌 떤다.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마가복음 5:7-8) 귀신은 돼지에게 들어가겠다고 한다. 귀신이 돼지에게 들어가자마자 돼지 떼가 다 죽는다.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12-13) 귀신은 돼지를 몰사시킬 정도로 강력하고 잔인한 세력이었다. 이상하다. 돼지는 죽고, 그 사람은 살았다. 왜 그 사람만 왜 살았는가? 하나님이 그 사람 속의 귀신을 제어하셨기 때문이다.

 

삶에 숨겨져 있는 죄악과 더러움을 하찮게 여기지 말라. 그것들은 폭탄들이다. 하나님이 내 안에서 보호의 손을 놓으시면, 나도 돼지 떼처럼 죄악에 몰사 당할 인생이다. 이렇게 살아도 별 일 없이 편안하다고 안주하지 말라. 괜찮은 것이 아니라 막아 주시는 것이다. 바다로 돌진하는 돼지 떼를 보면서, 죄악으로 달려가는 세상을 보면서 욕하지 말고 긴장해야 한다. 저 세력이 지금 바로 내 인생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보호가 사라지는 순간이 온다. 죽음이다. 하나님을 떠나 죽은 인생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우리의 인생을 영원히 보호하시기 위한 방법이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셔서,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셨다. 우리는 이 땅에서 왜 사는가? 그의 보호하심을 믿고 받아들여 죽음 이후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함이다.

 

돼지 떼처럼 몰사하는 이 땅의 현실이 보이는가? 이 세상 사는 모든 사람이 모두가 죽는다. 하나님의 일시적 보호가 끝나기 전에, 영원한 보호의 세계로 들어오라. 이것이 예수님의 초청이다.

 

[1] 지나고 보니 삶을 살면서 특별히 하나님이 내 인생을 보호해주셨다고 느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마가복음 5:7-8과 12-13을 읽어봅시다. 귀신은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어떻게 반응합니까? 돼지 떼로 들어간 귀신은 돼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왜 돼지는 죽고, 그 사람은 살았을까요?

 

[4-5] 돼지 떼는 이 세상이 맞이한 운명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보호를 받는 유일한 길은 무엇입니까? 내가 죄악을 가볍게 여기는 삶의 모습이 있다면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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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선택
(1. 29. 2023.)

마태복음 21:28-31

 

잘 살아왔어도 미래가 불안한 이유는? 지금까지 했던 선택보다, 다음 선택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BJ존버라는 비트코인 투자자가 있다. 30억을 벌었다. 인생 최고의 선택을 한 사람 아닌가? 하락장에 거의 다 날리고 손절 후 은퇴했다. 가장 중요한 선택은 옛날의 탁월한 선택이 아니다. 오늘, 지금 하는 새로운 선택이다.

 

다음 선택이 훨씬 중요하다. 두 아들이 있었다. 아빠가 포도원에서 일하라고 시켰다. 첫째 아들은 가겠다고 하다가 안 갔다. 둘째 아들은 안 가겠다고 버티다가 갔다. 마지막 선택, 다음 선택을 잘한 둘째 아들만 인정 받았다.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태복음 21:31) 기존의 선택은 의미 없다는 말이다. 오늘, 지금 하는 다음 선택이 내 미래를 결정한다.

 

세리와 창녀 같은 내 인생이 일어서는 길이 있다. 다음 선택을 잘하는 것이다. 후회되고 버린 것 같은 지난 날이 있다. 순종 안하고 버티던 모습이 있다. 상관없다. 올해, 오늘, 지금 잘 하는 선택으로 다 뒤집을 수 있다. 잘 살아왔던 축에 속한다면 긴장하라. 오늘의 그 교만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난 어떻게 구원받는가? 오늘의 선택, 마지막 선택, 다음 선택으로 구원 받는다. 그래서 올해는 중요하다. 이번주가 중요하다. 오늘이 중요하다. 다 뒤집을 기회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다 뒤집을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께 있다. 죄만 짓던 강도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다 뒤집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예수님이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3:43) 의인이신 분이,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나 대신 뒤집히셨다. 난 죄인이지만, 예수님 믿으면, 인생 전체가 다시 뒤집힐 수 있다.

 

후회하지 말고 남은 인생의 선택을 주님께 드리자. 예전 이야기 그만하고 오늘 최고의 선택으로 영광 돌리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예수님의 권세가 내 삶에 펼쳐질 것이다.

 

[1] 선택을 아무리 잘 해도, 다음 선택에 따라 더 크게 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음 선택의 중요성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마태복음 22장 31절을 읽어봅시다. 두 아들의 선택의 차이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누구를 인정하셨습니까? 내 인생 이전 선택 중에 가장 중요했거나, 가장 후회스러웠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보다 중요한 선택은 무엇입니까?

 

[4-5] 누가복음 23장 43절을 읽어봅시다. 왜 강도는 운명이 뒤집힐 수 있었습니까? 오늘의 선택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권세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후회를 뒤로하고, 새롭게 순종해야 할 나의 다음 선택을 나누어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30122-17-141-1513a/s-obv7qEGhj4f?si=5c72030b51634b048b921294d9012b54&utm_source=clipboard&utm_medium=text&utm_campaign=social_sharing

“속으로 하는 일
(1. 22. 2023.)

창세기 18:12

 

‘자본주의 웃음’이라는 말이 있다. 돈 벌기 위해 억지로 웃는다는 말이다. 겉을 위해 속을 숨기는 시대다. 그래서 속은 관리하지 않는다. 마음껏 욕하고, 다른 생각 해도 된다. 속은 나만 볼 수 있으니까.

 

하나님은 속을 보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자녀를 낳을 것이라고 약속 해주셨다. 너무 늙은 사라는 그 말이 너무 웃겨서 ‘속으로’ 웃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세기 18:12) 분명 속으로 했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한테 이르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13) 사라가 속으로 웃은 것을 하나님은 어떻게 아셨을까? 하나님은 속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한다. 겉과 동시에 속으로 하는 일이 있다. 하나님은 그 속을 보신다.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악한 생각을 벗어나려 하는 것, 순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는 속의 싸움에 함께하신다. 겉의 일이 풀리지 않고 있다면, 속을 점검해보라. 하나님은 내가 속으로 하고 있는 그 일도 함께 보고 계시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은 무덤에 가셨다. 예수님의 속마음이 보인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요한복음 11:33)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 신뢰는 능력만 봐도 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한다. 우리를 죄에서 살리려는 마음도 함께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속에서부터 나를 위해 일하셨다.

 

나는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속으로 하는 일부터 시작하라. 늘 주님 의지하고, 속으로 기도하고, 속으로 이웃을 사랑하려 발버둥쳐보라. 속으로 하는 일에 집중했는데, 겉의 문제까지 길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1] 현대 사회에서 겉과 속이 분리되는 가식과 이중적인 모습 속에 지쳤던 경험이 있습니까? 반대로, 나의 속마음이 가장 이중적이 되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나누어봅시다.

 

[2-3] 창세기 18장 12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의 약속에 사라는 속으로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3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떻게 사라가 속으로 웃는 것을 아셨습니까?

 

[4-5]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능력 이외에 무엇입니까? 그분의 진실된 마음 앞에서, 내가 속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나누어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30115-16-131-14a/s-KBxuyVkpFlY?si=d6f504fd063c4513a8fe8eaf78190359&utm_source=clipboard&utm_medium=text&utm_campaign=social_sharing

“전부가 아닌 자유
(1. 15. 2023.)

빌립보서 3:8-9

 

이 땅에 있는 것이 ‘전부’인 사람을 만나면 공포스럽다. 승진과 매출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 밑에서 일하는데 내 실적이 부실하다면? 죽을 맛이다. 연애가 전부인 사람과 사귀다가 헤어지면? 갑자기 데이트폭력을 행사하거나 잠수를 탄다. 자녀가 전부인 사람의 아이를 보육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 선생님은 그날로 끝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 땅의 것이 전부가 되지 않는 자유를 누린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립보서 3:8-9) 이제 잃어버려도 괜찮다.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전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와 동행하는 것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되었다. 예전엔 뜻대로 안 되면 뒤집어 졌었는데, 원하는 상황대로 펼쳐지지 않더라도 점점 그 안에서 평안을 찾고 새로운 일을 기대하는 소망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것이 너의 전부다”라고 다그치는 문화의 목소리를 거절하라. 자녀는 결코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자녀는 나를 실망시킬 것이다. 그래도 괜찮아야 한다. 돈은 결코 내 인생을 전부 책임지지 않는다. 돈은 내 인생을 평생 질질 끌고 다닐 것이다. 그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영원히 사랑해줄 수 없다. 그 사랑을 잃어도, 난 영원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다. 옛날엔 전부였던 것을 잃어가고 있는데 괜찮아진다면, 주님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진짜 전부를 잃어버릴 뻔했다. 하나님이 우리의 전부이시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 대신 전부를 잃어버리셨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가복음 15:34)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삶엔 다시 소망이 생긴다. 다 잃은 것 같아 보여도, 결코 하나님은 잃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만 계시다면, 이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을 잃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새로운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이 담대함 속에, 이 땅의 것이 전부가 아니게 되는 자유를 누리라. 주변의 온갖 실수와 돌발 상황을 넉넉히 품어내고, 최악 속에서도 긍정하는 즐거움이 찾아올 것이다.

 

[1] 이 땅의 특정한 것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특징이 있었고, 왜 대하기 어려웠습니까?

 

[2-3] 빌립보서 3장 8-9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은 이 땅의 것이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옛날엔 나의 전부였는데, 점점 괜찮아지는 삶의 요소가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4-5] 내 인생의 전부는 누구이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언제나 내 전부가 사라지지 않음을 믿고, 이 땅에서 실망과 손실 속에 담대함과 평안을 찾아야 할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30108-15-123-21a/s-AkLR7lxFEKy?si=566a913c62ae4536a8b9f2c96f3762ab&utm_source=clipboard&utm_medium=text&utm_campaign=social_sharing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30106-710-17a/s-9xCcoi11p4a?si=ba9141278c0a4a619903bbc4010f0218&utm_source=clipboard&utm_medium=text&utm_campaign=social_sharing

“헷갈림, 안보임
(1. 8. 2023.)

마태복음 12:38-39

 

신앙생활 하면서 제일 답답한 것? 안보이고, 헷갈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 확실히 나타나신다면, 무언가 기적을 일으키신다면, 내가 믿어볼 수 있겠다. 안 보이니 문제다. 하나님을 믿고 나서도 문제다. 이 결정이 맞는가 저 결정이 맞는가? 확실히 알려주시면 좋겠는데 헷갈린다. 헷갈리고, 안보여서 신앙생활이 힘들다.

 

왜 헷갈리고 보이지 않게 하시는가? 그래야 하나님을 더 인격적으로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기적을 보여 달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거절하셨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태복음 12:38-39) 보여주면 인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신뢰할 수는 없다. 보여주면 납득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랑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뜻은 존재의 증명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이다. 하나님의 뜻이 헷갈리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기회다. 헷갈려 봐야 내 마음이 부패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 뜻이 가려짐을 경험해야 경건을 사모하게 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믿음으로 결정해야 그의 함께하심에 대한 평생의 담대함이 생긴다.

 

내 삶에 허락하시는 보이지 않고, 헷갈리는 상황은 절대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되는 운명을, 내 대신 예수님이 가져가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가복음 15:34) 그분이 아버지를 보지 못하셨으니, 나는 다시 아버지를 볼 수 있다. 분명 이 과정을 통해, 나는 하나님과 가까워질 것이다.

 

헷갈릴 때 열심히 발버둥치라. 보이지 않을 때 믿음을 활용하라. 나를 버리심이 아니다. 나를 그분께로 가까이 이끄심이다.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그분이 보이고, 마침내 그분을 사랑하게 될 때, 인생은 무적이다.

 

[1]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헷갈려서 고뇌했던 지난날 혹은 최근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12장 38-39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왜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말을 거절하셨습니까? 기적(혹은 응답)을 경험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지는 않았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15장 34절을 읽어봅시다. 죄인 된 내가 인생의 마지막에 경험해야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것을 가져가셨다는 것을 믿을 때, 내 삶에 헷갈리고 보이지 않는 경험 속에서 무엇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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