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중(輕重)의 기준
(3. 19. 2023.)

사무엘하 12:9

 

사람에게 욕을 하는 것과 사람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것은 죄질이 다르다. 죄에는 분명 경중(輕重)이 있다. 그런데 교회에 오면 하나님 앞에서 다 죽을 죄인이라고 한다. 내가 저 흉악한 사람보다는 좀 나은 사람 아닌가?

 

죄의 심각성은 행위의 경중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그 명령을 주신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서 결정된다. 행위가 심각한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무시했다는 것이 심각한 것이다. 나는 나쁜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반대한 것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며 범죄하자 나단 선지자가 “남사스럽게 어떻게 남의 여자를 그렇게 탐했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행위가 왜 심각한 것인지 이렇게 지적한다.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사무엘하 12:9) 에덴 동산에서 인류 최초의 악은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었다. 열매를 먹는 것이 뭐가 그렇게 나쁜 것인가? 이제 이해가 된다.

 

나의 죄의 심각함을 행위의 경중에서 찾지 말라. 그러면 분명 자기 의에 빠진다. 저 사람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더 잘 봐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 사람보다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 자체가 엄청난 죄성을 나타낸다. 죄에 대한 기준마저 내가 세우겠다는 자기 중심성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뜻과 다른 부분에서 그분의 말을 업신여기는 데에 너무 능숙한 자가 아닌가? 나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에서 어느 누구와 다를바 없는 동일한 죄인이다. 이 자기중심성을 보지 못하면, 나의 죄인됨을 인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 죄의 무게는 뒤집힌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죄를 능가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반대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자신을 반대한 자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셨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태도는 이제 바뀐다. 누가 봐도 처참한 삶을 살아갈 때에도, 주님이 내게 은혜 주실 것임을 믿을 수 있다. 누가 봐도 괜찮은 삶을 살아갈 때에도, 주님의 은혜를 능가할 선행이 없음을 알고 여전히 겸손할 수 있다.

 

죄의 경중을 따지며 나의 우월함을 내세우고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내 반역의 무게를 먼저 마주하라. 그리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은혜의 무게 앞에 엎드리라. 죄의 경중에 대한 기준이 바뀔 때, 비로소 자기 의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1] 내가 주변에서 그래도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주변 사람들을 비하하거나 무시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어떤 기준이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사무엘하 12장 9절을 읽어봅시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 나단 선지자의 지적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죄란 무엇입니까? 내가 특별히 내 마음대로 쉽게 무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4-5] 내가 세상적인 기준에서 심각한 죄를 저질렀을 때, 소망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세상적으로 괜찮을 때, 여전히 겸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와 타인의 죄를 바라보는 기준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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