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한 소문
(6. 25. 2023.)

시편 112:7

 

사람은 평생 소문 때문에 괴롭다. 그런 전공으론 취업 안 된다고 한다. 그 병 걸리면 인생 힘들다고 한다. 회사가 어렵다고 한다. 그 나이는 늦었다고 한다. 들을수록 내가 작아진다. 다 소문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시편 112:7) 소문에 빠진 것이 있다. 하나님이다. 소문은 상황만 말한다. 내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이 빠져있다. 소문 따라 가면 늘 상황에 휘둘린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뢰하면 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소문 따라 마음을 정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정하라.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확신만 있다면, 어떤 소문에도 담대할 수 있다. 상황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이 정해주신 길이 있는가? 그것만 있으면 그냥 하던 거 해도 된다. 굳이 다른 길 찾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전까지, 소문 따라 움직이지 말라. 패배의 첩경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흉한 소문에도 담대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좋은 소식 때문이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누가복음 2:10) 죄인을 구하러 오신 예수님이 내 삶의 구주가 되신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죽는다는 소문을, 자신이 직접 죽으심으로 잠잠케 하셨다. 믿는가? 날 위해 죽으신 그분이, 오늘 당면한 이 소문 앞에서도 나를 지키실 것이다.

 

흉한 소문이 한 번 들릴 때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소식을 100번 외치라. 그 어떤 소문도 하나님의 날 향한 선하신 계획을 막을 수 없다. 복음은 소문을 이긴다.

 

[1]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소문에 시달리며 삽니다. 소문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던 순간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시편 112편 7절을 읽어봅시다. 신자들의 삶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안에서 확신이 없는 내 삶의 흔들리는 영역을 나누어봅시다.

 

[4-5] 누가복음 2장 10절을 읽어봅시다. 내 인생에 가장 기쁜 소식은 무엇입니까? 소문 속에서 다시 복음을 붙들고 담대히 서야 할 삶의 결단들을 나누어봅시다.

“홍해에서 거역
(6. 18. 2023.)

시편 106:7

 

멋지고 기막힌 반전들은 바닥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대포알 심프’라는 그림책이 있다. 심프는 주인에게 버림받은 개다. 떠돌다가 서커스단에서 일하는 어릿광대를 만난다. 그도 공연을 못해 쫓겨날 처지다. 심프는 자신을 보살펴준 광대를 돕기로 결심한다. 서커스에서 대포에 들어간다. 대포알처럼 몸을 웅크려 공중으로 날아가서 굴렁쇠를 통과한다. 대포알이 검은 개였음을 알게 되자 관객들은 환호한다. 바닥이었던 개와 광대의 역전이다.

 

역전은 늘 아름답지만, 역전 전에는 바닥의 거역이 함께 있음을 명심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다. 기막힌 역전의 상황에서 거역한다.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시편 106:7) 홍해는 기적의 장소 아닌가? 아니다. 그곳은 거역의 장소였다! 홍해는 온갖 욕설과 원망, 분노와 불신이 가득한 곳이었다. 홍해는 결코 아름답지 않다. 하나님 빼면 그곳은 사방이 막힌 거역의 장소가 된다.

 

내 삶의 홍해는 어디인가? 하나님은 밑바닥의 역전을 준비하시지만, 나는 그곳에서 지금 거역하고 있지는 않은가? (1)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내가 원망하고 불평하고 거역하는 바로 그곳에서, 주님은 분명 새 일을 준비하고 계심을 확신해야 한다. (2) 경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은 가장 큰 일을 계획하시는 곳인데, 난 그걸 모르고 계속 원망하며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내 삶의 홍해는 거역과 역전이 동시에 공존하는 곳이다.

 

거역했다고 다 물에 빠져 죽었는가? 거역했는데 역전되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8)”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였다. 그러나 거역한 그곳에서 나를 구원하셨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거역했다. 거역한 그 사건이 내게 홍해가 아닌 죽음이 갈라지고 부활이 열리는 사건이 되었다.

 

십자가 사건을 믿는다면, 오늘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버리고 싶은 바로 내 삶의 그 영역에서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실 것이다. 아무리 거역했어도 주님은 그곳에서 나에게 구원을 베푸실 것이다. 아들을 죽여 나를 살리신 그분 앞에, 더 이상 거역은 없다. 이제 홍해는 거역이 사라지고, 역전만 경험하는 곳이 될 뿐이다.

 

[1] 내 인생이 가장 밑바닥이었던 경험을 소개해봅시다. 그 바닥에서 어떻게 벗어나게 되었습니까? 역전의 경험을 나누어봅시다.

 

[2-3] 시편 106편 7절을 읽어봅시다. 홍해는 긍정적으로 어떤 곳입니까? 그러나 홍해는 부정적으로 어떤 곳이었습니까? 내 삶에 하나님이 가장 크게 일하시는 곳에서 내가 범할 수 있는 거역의 위험은 무엇인지 나누어봅시다.

 

[4-5] 시편 106편 8절을 읽어봅시다.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을 죽인 거역이 우리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습니까? 거역할만한 곳에서, 내가 십자가 사건을 믿으며 다시 그분의 역전을 기대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봅시다.

“틀어진 계획
(6. 11. 2023.)

잠언 16:9

 

사람은 계획이 틀어질 때 실망한다. 그 사람과 결혼할 줄 알았는데 헤어지자고 한다. 이쯤이면 승진해야 하는데 통보가 없다. 병에 걸려 이렇게 오래 누워있을 줄은 몰랐다. 차라리 계획 없이 살자! 틀어지는 계획들에 지치면 다 그렇게 된다.

 

계획의 틀어짐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사람의 계획보다 더 큰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계획이 무산되었을 때 일반 사람들은 플랜 B를 떠올린다. 최선의 계획에는 실패했지만,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을 찾는다. 아니다. 신자는 인생을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틀어진 지금 상황을 최선으로 본다. 계획을 틀어버리신 하나님의 계획이 나음을 믿기 때문이다.

 

내 삶에 결코 틀어져서는 안 되는 계획이 있는가? 그것을 우상이라고 한다. 우상을 어떻게 버리는가? 틀어져도 괜찮은 세계에 들어가면 된다.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세계이다. 절대 계획이 틀어져서는 안 된다고 고집부리고 분노하는 모습을 내려놓으라. 반대로, 이미 망했다고 되는대로 사는 안일함도 회개하라. 내 계획이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지금의 형편은 맘에 들지 않아 열정이 사라진 것 아닌가? 만약 지금이 최선이라면, 여기서 하실 일을 기대하며 열심을 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과 충돌을 경험하신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36) 예수님은 ‘사는 것’을 원하셨다. 아버지는 ‘죽는 것’을 계획하셨다. 아들 예수님이 죽는 계획이, 죄인인 내가 사는 계획이 되었다. 우리가 이것을 믿을 때 삶에 확신이 회복된다. 아들까지 내어 주시며 내가 죽는 계획을 틀어버리신 분이시라면, 지금 이 상황도 분명 살게 되는 최선의 계획임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틀어져도 된다. 틀어지는 게 낫다. 틀어지는 게 최선이다. 내 계획을 버리고,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들어가라. 최선임을 믿는다면, 열심도 내보라. 더 나은 길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1] 어떻게 계획했고, 어떻게 틀어졌습니까? 호기롭게 세웠던 계획들이 처참하게 무너졌던 지난 기억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잠언 16장 9절을 읽어봅시다. 사람의 계획은 누구의 계획 속에 있습니까? 틀어진 상태는 차선입니까, 최선입니까? 내 계획이 틀어져버린 이후에 혹시 열정이 사라진 삶의 모습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4-5] 마가복음 14장 36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의 원함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의 계획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결과 내게 무엇이 주어졌습니까? 예수님의 일하심을 근거로 내 인생의 현재 상태를 어떻게 다르게 바라보아야 할지 나누어봅시다.

“집안싸움
(6. 4. 2023.)

마태복음 10:36-37

 

사람은 진공 상태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집안’에서 태어났다. 살아왔던 역사가 있다는 말이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생활습관, 말투, 몸짓까지 그냥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을 알고 싶은가? 그 사람이 살아온 집안이 어땠는지 먼저 알아보라.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면, 집안을 우상으로 삼으면 안 된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태복음 11:36-37) 예수님보다 다른 가족들을 더 사랑하면 우상이 된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적용해보라. 집안에서 배운 그 스타일이 오늘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결정을 해야 하는데, 내가 살아왔던 방식대로 타인의 의견을 함부로 정죄하고 무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린고비 집안에서 자란 남편이 있었다. 아내가 돈 쓰는 모든 게 다 꼴사납게 보였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셔서, 지금 이 순간 돈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정죄부터 한다. 집안에서 배운 생각이 예수님과 원수가 된 것이다. 학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집안에서 자랐다. 아무리 사람을 만나도 학력이 나쁘니까 무시하게 된다. 예수님이 주인이 된 것이 아니라 집안이 내 삶을 가로막는 원수가 된 것이다. 심지어 청결도 우상이다. 정리가 더러우면 그 놈도 더럽게 보인다. 이거 우상이다. 지금 당신, 내가 살아온 집안의 스타일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 객관화시켜 나의 집안으로부터 오는 ‘자기 의’를 돌아봐야 한다.

 

집안싸움에서 승리하신 분이 있다. 예수님이다. 예수님 집안엔 죄도 없고, 무질서도 없고, 무능도 없었다. 내 삶을 보니 정죄할 것 투성이셨다. 예수님은 어떻게 나와의 집안 싸움에서 승리하셨나?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심으로 승리하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더 사랑하셨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누가복음 23:46)

 

예수님이 승리하신 방식대로 집안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바란다.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지금 이순간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관계의 행동을 다시 정립해 나가라. 집안 싸움이 그치고, 나와 너 모두 승리하는 관계의 기쁨이 열릴 것이다.

 

[1] 나의 지금 이 모습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나의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온 나의 집안의 특징을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10장 36-37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자신의 원수로 무엇을 지목하고 계십니까? 내가 살아온 집안의 방식이 쉽게 자기 의가 되어 남을 정죄하는 모습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예수님의 집안(삼위일체)의 특징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분의 의로움이 의롭지 않은 나를 대하신 방식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과 원수 된 나의 자기 의를 내려놓고, 내가 만나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악이 만들어지는 곳
(5. 28. 2023.)

시편 37:8

 

모든 큰 일은 별 것 아닌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처음부터 컸던 것은 없다. 한사람교회의 시작은 한 고등학생의 전도(김현수 목사)였다. 누군가와 크게 싸웠던 날을 기억하는가? 싸운 이유를 들어보면 처음엔 너무 사소하다. 큰 것은 결과일 뿐이다. 이 세상에 모든 작은 것에는 우주가 담겨 있다.

 

큰 악이 만들어지는 길이 있다. 화내고 불평하며 사는 것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시편 37:8) 내 삶에 나쁜 일은 밖에서 오는게 아니라,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분을 내는 곳에서 악이 만들어 진다. 불평하는 곳에서 악이 만들어진다. 회사에서 큰 악을 보고 싶은가? 계속 분을 내라. 악이 몰려올 것이다. 가정에서 계속 불평해보라. 거대한 악이 만들어질 것이다.

 

작은 화를 방치하지 말라. 큰 소리로 화를 내는 것, 중얼거리며 불평하는 것을 내버려두지 말라. 순간적인 일이니까 그러려니 한다. 심지어 내 스타일과 성격이라는 말로 얼버무린다.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 앞에서 큰 범죄이다. 가는 곳마다 악을 불러오는 시한폭탄이다. 마음속에 화가 있는 사람은 교회에서 결코 직분자로 세우면 안 된다. 화와 불평이 있는 직장은 언제나 위험 덩어리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악을 대적하는 자로 부름 받았다. 내가 가는 곳에서 화냄과 불평을 죽이라.

 

화는 억지로 참아지지 않는다. 화내지 않으신 분을 만나야 변한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3) 나는 하나님의 화를 받아야만 할 존재였다. 진노의 자녀인 나를 향한 형벌을, 자신의 자녀에게 쏟으셨다. 그것이 예수님의 속죄이다. 예수님께 구원받았음을 믿는가? 그럼 하나님은 나에게 ‘화내지 않으시는 분’임도 믿는가? 그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달아지는가? 나에게 화내지 않으신 은혜를 안다면, 나도 결코 함부로 화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쉽게 화내지 않는 것’이다. 거창한 구호를 외치지 말고, 철저하게 이것부터 변화되라. 화와 불평은 그리스도인이 철저히 깨부숴야 할 악이다.

 

[1] 모든 큰 것에는 작은 시작이 있습니다. 작은 것이 엄청나게 커졌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특히, 작은 화가 큰 다툼으로 번졌던 기억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시편 37편 8절을 읽어봅시다. 내 삶에 악이 만들어지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악은 밖에 있습니까 내 안에 있습니까? 내 삶에서 악이 만들어지기 가장 취약한 순간, 취약한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4-5] 화가 쉽게 참아집니까? 에베소서 2장 3절을 읽어봅시다. 분내는 성격은 무엇을 깨달을 때 변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입니까? 그 은혜를 충만하게 회복하며, 내 삶에서도 화와 불평을 죽이기 위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봅시다.

“불만의 복음
(5. 21. 2023.)

전도서 3:11

 

사람만 ‘더 나아질 수 있는 상황’을 꿈꾼다. 원숭이는 자신의 피부가 나쁘다고 불만 없다. 그냥 산다. 다람쥐는 부모 다람쥐가 도토리를 적게 가져왔다고 부모 원망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것 먹는다. 사람만 다르다. 내 피부가 더 좋아질 수 있지 않을까? 왜 내 부모는 매번 이런 식일까? 왜 내게만 이런 상황이 벌어질까? 불만을 가지는 건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왜 사람만 불만을 갖는가? ‘바라던 이상’이 실재함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 3:11) 나의 불만은 곧 ‘에덴을 향한 갈망’이다. 사람은 원래 고난과 죽음이 없는 곳에 살도록 창조 되었다. 본능적으로 이 땅은 내가 살기에 충분하지 않은 곳이라는 생각이 있다. 불만이 있다면, 나는 사실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삶에 불만이 있는가? 끊이지 않는 불평이 있는가? 해결만 하려고 하지 말라. 그것만 해결된다고 불만이 끊어지는 게 아니다. 해결 되도 다시 불만이 생기는 걸 이미 알고 있지 않나? 한번 하나님 찾아보라. 어떠한 불만족도 결국 만족으로 바꾸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부터 회복하라. 그 신뢰가 회복될 때, 현재의 삶에 대한 인내와 감사도 같이 회복될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의 모든 불만을 짊어지셨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 이 땅의 부끄러운 오늘을 참으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들어가셨다. 내가 예수님 믿으면, 나도 이 삶을 누릴 수 있다. 이제 불만족스러운 모든 오늘은 예수님과 함께할 때, 영광의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오늘의 불만은 해결로 가라앉지 앉는다. 확신으로 가라앉는다. 천국에 대한 확신, 구원에 대한 확신, 회복에 대한 확신을 붙들라. 삶이 더 어려워져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1] 사람만 ‘불만’을 갖습니다. 나와 내 주변에서 들려오는 오늘의 불만을 나누어봅시다.

 

[2-3] 전도서 3장 11절을 읽어봅시다. 사람이 불만을 갖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삶의 불만 속에서 해결만 찾다가 지쳤던 경험이 있습니까? 불만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생각과 변화가 있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히브리서 12장 2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이 땅의 불만을 해결하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무엇이 보장되어 있습니까? 그 확신을 붙들고, 오늘의 불만스러운 내 삶을 어떻게 새롭게 바라보아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다 버리기 vs. 다 쓰기”
(5. 14. 2023.)

사도행전 20:24

 

미니멀리즘(minimalism)이 유행이다. 집안 곳곳에 쌓여 있는 물건을 치워버리고 싶다. 쓰지도 않는 것을 들고 있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안 쓰는 물건을 없애면 이상하게 기쁘다. 반면, 다 써도 기쁘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물건을 끝까지 다 사용했을 때 쾌감이 일어난다고 했다. 샴푸를 끝까지 다 썼다. 치약을 끝까지 다 썼다. 왠지 보람되지 않나? 다 비워지고 없어지는 기쁨이 분명 있다.

 

신자의 삶은 버리는 삶이 아니다. 다 쓰는 삶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삶에서 누리는 최고의 영광은 ‘완전한 헌신’이다. 다 드려지는 것이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 내 인생의 모든 재능, 물질, 시간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 인간은 최고의 뿌듯함과 의미를 얻는다. 이 시대의 미니멀리즘은 내 인생의 자원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영적인 갈망이다.

 

조지 휫필드의 유명한 이야기가 딱 맞다. “나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 없어지기를 원한다.(I would rather wear out than rust out.)” 녹슬어지면 버려야 한다. 그 전에 닳아 없어져버려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현재의 기회에 최선을 다해보라. 젊었을 때 팀모임 하며 헌신할 기회가 금방 사라진다. 마음껏 예배드릴 시간이 맨날 오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나중에 하다가 도대체 물질을 언제 이웃에게 나눌 것인가? 부서 바뀌면 그 사람 전도할 기회는 끝이다. 남기지 말고 다 써버려라. 신자의 삶은 미니멀리즘이 아니다. 헌신의 맥시멀리즘(maximalism)이다.

 

가장 크게 헌신하여, 가장 작아지신 분이 있다. 예수님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디도서 2:14) 자신의 인생을 다 쓰셔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작아지는 듯했지만, 가장 커지는 일이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립보서 2:9) 나도 예수님 믿으면, 그분 위해 모두 드려도, 영생까지 커질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다 드릴 대상을 찾지 못해 가진 것을 버리는 인생 살지 말라. 주신 모든 것을 주님께 다 드리는 인생, 다 쓰는 인생 살라. 다 써서 슬플 줄 알았는데, 하늘의 기쁨이 몰려올 것이다.

 

[1] 무엇인가를 다 버리면서 시원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무언가를 끝까지 다 쓰면서 보람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사도행전 20장 24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쓰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가장 큰 기쁨은 무엇입니까? 내가 ‘몸을 사리고’있다가 기회와 기쁨을 놓쳤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예수님이 나의 인생을 살리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분이 자신의 생명을 다 쓰셨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나의 인생도 예수님의 능력을 확신하며 그분 앞에 내 인생의 지금 이 순간이 어떻게 쓰여질 수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인생 최악의 낭비
(5. 7. 2023.)

베드로전서 4:7-8

 

왜 과거를 후회하는가? 지나고 나야 그 순간에 더 가치 있었던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서울 사는 어른들을 만나보라. 맨날 자기도 과거에 강남 땅 살 기회가 있었다고 후회하신다. 유재석은 자신의 멍때렸던 10년이 가장 후회된다고 고백한다. 과거에 낭비한 것은, 현재가 되어서야 보인다.

 

성경은 만물의 마지막이 올 때, 모두가 후회할 한 가지를 소개한다. 사랑하지 못한 것이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베드로전서 4:7-8) 정신 못 차리면, 서로 미워하고 무관심하다가 인생 다 지나간다는 것이다. 그 순간, 그 시절 만났던 그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지 못한 것이 인생 최악의 낭비이다.

 

개편된 팀 모임 첫 시간이다.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온갖 시험에 유의하라. “참 특이하게 생긴 분이네 / 이번엔 리더가 저번보다 별로야 /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말이 많아? / 말투가 기분 나쁘네 / 관심 없는 주제라 들을 필요 없어 / 너무 나대는거 아니야?” 내가 존재함으로, 그 사람의 연약함이 덮어지고 있는가? 당신은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을 할수록, 그 사람의 부족한점이 드러나고 있는가? 당신은 자기의에 빠져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충분히 사랑하며 살지 못했던 시기, 충분히 사랑해주지 못했던 대상은 누구인가? 오늘 그 실수를 다시 범하지 말라. 당신은 오늘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자신의 인생을 하나도 낭비하지 않으셨다.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한복음 13:1) 사랑하다가 죽으셨다. 낭비인 줄 알았다. 사랑하다가 죽어서 모든 죄인을 살리시고, 자신도 부활하셨다. 사랑만 있다면, 더 이상 인생에 낭비는 없다.

 

나중에 후회할 일 만들지 말라. 쓸데없이 미워하며 편가르고 오늘을 즐거워하지 못했던 것이 그분 앞에 뼈아픈 후회가 될 것이다.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만나기 어려운 지금 내게 주신 사람들을 뜨겁게 사랑하라. 그것이 낭비 없는 삶의 출발이다.

 

[1] 지나고 나서 내 인생에 가장 후회되고, 낭비였다고 생각했던 내 삶의 시기가 있습니까? 나누어봅시다.

 

[2-3] 베드로전서 4장 7-8절을 읽어봅시다. 만물의 마지막에 사람이 가장 후회하게 되는 일은 무엇입니까? 사랑 없이 살며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내 모습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가정, 교회, 직장 등)

 

[4-5] 요한복음 13장 1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인생을 낭비하지 않으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 결과 우리에게는 어떤 유익이 주어졌습니까? 결코 낭비되지 않을 것을 믿고, 열심히 사랑을 심어야 할 내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넓어지는 신앙
(4. 30. 2023.)

이사야 58:7-8

 

여기저기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로 가득 찬 지난 날이 있었다. 살다보니 내 인생 생존도 어렵겠다 싶다. 내 관심 주제가 아닌 것에 시간, 물질, 관심을 쏟는 것은 이제 나에겐 사치가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복이 있다. 주변을 돌아보면, 내 문제가 풀린다는 것이다.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이사야 58:7-8) 나의 인생의 문제가 풀리는 방식이 있다. 바로 어려운 이웃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넓어지지 않는다면 바른 신앙이 아니다. 예수님 처음 믿을 때보다, 지금 더 다양한 사람과 대화하고 친분을 유지하게 되었는가? 교회의 더 많은 영역에 헌신하고 있는가? 생각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도와 보았는가? 숨겨진 아픔이 있는 사람을 챙겨보았는가? 내 돈과 내 시간은 더 그쪽으로 향하고 있는가? 오늘 내 삶에 빛과 치유와 공의가 임하게 되는 약속이 여기에 있다. 아무리 어려워도 신앙이 좁아지지 않는 것이다.

 

죄 없으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마태복음 9:10) 나는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나님이 죄인인 나에게까지 넓어지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메시지가 보이는가? 넓어지면 죽지 않고 살 것이다!

 

내 영혼의 운명이 그렇게 살았음을 믿는다면, 남은 인생도 그렇게 살라. 죽을 것 같을 때, 문제의 해결책이 도무지 보이지 않을 때, 혹시 좁아지고 있지 않나 돌아보라. 한 번도 안 해본 헌신을 시작하라. 중단했던 헌금을 재개하라. 외면하고 차단했던 영혼을 다시 돌보라! 인생에 빛이 임할 것이다.

 

[1] 삶의 치열함과 바쁨 때문에 내게 주신 주변을 향한 관심과 사랑이 식어진 나의 모습을 나누어봅시다.

 

[2-3] 이사야 58장 7-8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약속은 무엇입니까? 그 특징은 무엇입니까? 말씀의 비추어 현재 내 삶의 방향을 나누어봅시다.

 

[4-5] 내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좁아지려고 할 때, 무엇을 근거로 다시 이 삶을 확신해야 합니까? 변화되어야 할 내 삶의 모습들, 넓어져야 할 내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봅시다.

“원하는 대로
(4. 23. 2023.)

시편 27:4

 

하나님이 좋은 것을 막으신다는 생각이 있다. 가난할 때 돈을 구하는 것이 죄인가? 병이 낫길 바라는 것도 죄인가? 평범한 요구가 응답되지 않는 것을 느끼며, 좋은 것을 막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하나님은 사람이 원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다. 사람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둘 중 하나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원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편 27:4) 하나님을 원하는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결국 당신은 하나님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필요 없는가? 좋다. 모든 과정을 통해 결국 당신은 하나님을 잃게 될 것이다.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이것이 하나님 약속이다. 이것이 무서운 말이다. 하나님을 원하면, 하나님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원하면, 하나님이 아닌 것을 받을 것이다. 멋진 배우자와 결혼하고 싶었다. 하나님은 필요 없다. 교회만 다녀주면 된다. 정말 그렇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없어질 것이다. 학군따라 교육시키고, 이사가고, 유학가며 자녀의 학업만 챙겼다. 교회는 늘 뒷전이었다. 자녀는 정말 하나님이 뒷전이 될 것이다. 돈을 원해보라. 돈이 오고, 하나님이 갈 것이다. 당신이 생업에서, 가정에서, 사업에서, 자녀교육에서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원하는 것을 주신다.

 

우린 모두 하나님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마음이 변하는 순간이 온다. 하나님이 비천한 나를 원하셨음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죄인일 때 그분은 나를 원하셔서 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나를 원하셔서 아들까지 주신 분이라면, 나는 어떤 순간에도 그분만 바랄 때 행복이 보장됨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억지로 지옥에 보내시지 않는다. C.S. 루이스의 ‘천국과 지옥의 이혼’의 문장을 기억하라. “하지만 버스를 못 타는 불쌍한 유령들은 어떻게 합니까?” “타고 싶어하는 사람은 다 타게 되어 있으니 걱정 말게.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어. 하나님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는 인간들과, 하나님의 입에서 끝내 ‘그래, 네 뜻대로 되게 해 주마’라는 말을 듣고야 마는 인간들. 지옥에 있는 자들은 전부 자기가 선택해서 거기에 있게 된 걸세.”

 

[1]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막으신다는 느낌에 답답했던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봅시다.

 

[2-3] 시편 27편 4절을 읽어봅시다. 다윗이 원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내 삶의 모든 경험을 통해 어떤 선택을 마주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4-5] 하나님을 원하지 않았던 내가, 그분을 원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왜 그분은 믿을 만한 분이십니까? 오늘 내가 그분을 진정 원한다면 변화되어야 할 행동이나 삶의 결정을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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