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법
(2. 19. 2023.)

갈라디아서 6:2

 

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생각을 권선징악이라고 한다. 신학적으로는 ‘행위의 법’이라고 한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 법의 엄격한 집행자는 하나님이고, 그 대상자가 나라면 어떤가? 그때부터 나는 하나님이 두려워지고, 삶이 불안해진다.

 

예수님이 내 모든 죄와 허물을 대신 가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믿으면 형벌도 없고, 심판도 없다. 이것을 ‘믿음의 법(복음)’이라고 한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로마서 3:27) 그러면 대답해보라. 신자는 이제 다시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는가? 다시 죄를 지어도 나를 사랑하시는데, 편한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여기서부터 사람이 헷갈린다.

 

신자에겐 그리스도의 법이 남아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라디아서 6:2) 행위의 법과 그리스도의 법의 차이는 무엇인가? 계명의 내용은 모두 똑같다. 하지만 그 동기가 다르다. 행위의 법은 지켜야만 복을 받고(약속) 어기면 저주받는(위협) 법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은 행위의 법 속에 숨어 있던 ‘약속’과 ‘위협’이 사라진다. 그리스도의 법은 저주와 두려움이 동기가 아니다. 사랑이 동기다.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얻는 길로써 주어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무서운 집행자가 아니라,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보인다. 그분이 주신, 그리스도의 법은 내 삶을 풍성하게 하는 길이 됨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 분명 고난과 징계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날 죄에서 돌이키고 연단시키시기 위해 주시는 것이다.

 

복을 잃을까봐, 두려워서 순종하는 사람을 율법주의자라고 한다. 예수님이 다 하셨으니, 아무 것도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께 사랑받는다고 말하는 사람을 반율법주의자라고 한다. 둘 다 똑같다. 두려움이 사라지면 순종도 안 해도 된다는 말은, 아직도 나는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돈을 예로 들겠다. 헌금을 하면 돈이 줄어든다. 율법주의는 이렇게 말한다. “헌금해야, 하나님이 네 삶을 채워 주실 거야”, "헌금 안하면, 하나님이 널 치실 거야" 하긴 하는데, 얼마나 해야 할지, 언제 채워주실지 두려움과 부족함, 아까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반율법주의는 이렇게 말한다. “할 필요 없어. 헌금한다고 너를 사랑하시는게 아니야.” 헌금을 안 하지만, 돈에 대한 두려움과 부족함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돈이 없는게 아니었다. 그분이 날 사랑하신다는 확신과 믿음이 없는 것이다.

 

유일한 자유는 그리스도의 법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영생을 위해 모든 것을 주셨음을 믿고, 그 진리를 음미하는 것이다. 그가 결코 나를 버리지 않고, 부족함을 좌시하지 않으실 것이다. 십자가 사건이 나에게 확신으로 다가올 때, 염려하지 않는다. 부족한데 담대하고, 없었는데 채워진다. 행위의 법에서 벗어나는 길은 믿음의 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의 법을 받아들인 자가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율법(그리스도의 법)은 남아있다.

 

[1]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지키지 않는 것 같을 때 하나님이 내 삶에 복을 앗아가시거나, 심판하실 것 같아서 생겼던 두려움이 있습니까? 나누어봅시다.

 

[2-3] 로마서 3장 27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행위의 법을 가져가시고 내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 2절을 읽어봅시다. 복음을 받아들였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율법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5] 율법주의자와 반율법주의자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두려움 속에 순종하면서(율법주의), 혹은 ‘순종하지 않으면서’(반율법주의) 예수님의 풍성함을 삶에서 누리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그의 풍성하심을 믿는다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겠습니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