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11031-5-81-22a/s-DwdObtEhnwb?si=1611450283304d858f14da221bb42e49

“피곤하다는 말의 속임수
(10. 31. 2021.)

잠언 14:4

 

사람들은 대화할 때 본능적으로 자신의 수고로움을 이야기한다. “부장님 때문에 정말 죽겠다니까”, “아이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 “사업 때문에 요즘 골치 아파”. 타인의 삶이 피곤하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나와 상대가 누리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

 

상대의 피곤하다는 말에 속지 말라. 피곤은 보람과 결과로부터 파생된 일부분일 뿐이다. 부장님 때문에 힘들지만, 그 회사에서 누리고 그가 얻는 유익은 숨겨져 있다. 아이 때문에 힘들다고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오는 보람은 남들은 절대 모르는 것이다. 피곤과 수고는 인생의 그림자일 뿐이다. 인생은 정면에 있는 보람과 기쁨에 집중해야 한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잠언 14:4) 소가 있으면 더러워지지만, 소의 주인은 절대 그 소를 팔지 않을 것이다. 수고보다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내 마음 속 유혹에도 속지 말라. 남들이 나보고 힘들겠다고, 수고한다고 말할 때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수고는 결코 헛된 것이 없다. 수고를 통한 기쁨과 성취가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힘들다, 피곤하다, 골치아프다, 지친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는가? 수고와 피곤이 인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연민을 벗어나, 하나님이 주신 보람과 즐거움에 집중하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분명히 수고였다. 피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뒷면이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히브리서 12:2) 기쁨이 앞에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신 주님 때문에,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졌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라면 오늘의 내 삶에서도 확신할 수 있다. 수고도 많고, 피곤도 많지만, 앞에 있는 기쁨에만 집중하면, 분명히 십자가와 동일한 승리와 성취가 있을 것이다.

 

피곤과 수고로움에 지배당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내게 주신 일과 형편에 감사와 만족, 기쁨을 표현하라. 그것이 피곤하다는 말에 속지 않는 길이다.

 

[1] 나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형편을 하소연하는 말들을 생각해봅시다. 수고로움과 피곤함에 집중하면 무엇을 보지 못하게 됩니까?

 

[2-3] 잠언 14장 4절을 읽어봅시다. 소의 주인이 소를 키우면서 감수해야 할 수고와 피곤은 무엇입니까? 그래도 소의 주인이 소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5] 예수님의 십자가는 수고였지만, 예수님이 십자가를 참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삶에도 동일한 능력이 임하고 있음을 확신하며, 수고와 피곤보다 감사와 주시는 유익에 집중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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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법 배우기
(10. 24. 2021.)

잠언 18:21

 

현대인들이 육체적인 폭력을 당할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누가 때리지도 않았는데 몸과 마음이 너무 아프고 힘들 때가 있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서 그렇다. 당신은 그 사람의 말 때문에 절망했고, 말 때문에 화간 난 것이다. 반대로 기분도 풀어지고 힘이 날 때도 있다. 당신은 생명을 주는 어떤 말을 들은 것이다. 말에는 분명 힘이 있다.

 

언어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다.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이다. 내가 하는 말에도 능력이 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언 18:21) 혀의 힘 속에 우리 인생의 열매가 있다. 예수님을 믿었는데, 말이 변화되지 않았는가? 사실 아직 거듭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신자가 회심하고 회개해야 한 가지는 바로 말이 변화되는 것이다.

 

나의 말을 점검하라. 상대의 수고를 인정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공로만 드러내고 있는가? 상대를 여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상대를 몰아세우는가? 공통점과 공감에 집중하는가? 아니면 차이와 상하관계를 부각시키는가? 가정, 회사, 개인의 삶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을 ‘객관적’이라는 말로 포장하며 함부로 원망을 내뱉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수기 14:28) 말로 지옥을 불러오지 말라. 그것이 심판이다.

 

욥이 고난당할 때 아내가 마지막으로 유혹한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기 2:9) 말의 타락에 대한 유혹이었다.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에는 육체적인 고통만 있던 것이 아니다.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태복음 27:41-42),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27:44) 십자가는 욕먹는 자리였다. 욕을 듣는 자리였다. 내가 받을 욕, 예수님이 다 받아 주셨다.

 

하나님께 저주의 말을 받아, 영원히 죽을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살아났음을 믿는가? 확신하고 변화되라. (1) 남들이 욕한다고 내 인생 망하지 않을 것이다. (2) 내게 욕하지 않으신 예수님 닮아, 말의 변화를 추구하라. 당신이 살았듯이, 당신의 말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들도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당신의 말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1] 현대인들은 물리적인 폭력이 줄어들었음에도 좌절하고 상처받습니다. 한 주간의 대부분의 일들은 무엇을 통해 이루어집니까? 말을 통해 격려와 좌절, 상처를 경험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잠언 18장 21절을 읽어봅시다. 성경은 무엇에 힘이 있다고 말합니까? 민수기 14장 28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무엇을 듣고 행하시는 분이십니까?

 

[4-5] 마태복음 27장 41-42, 4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당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내게 말의 권세가 있음을 기억하며, 내가 변화되어야 할 언어의 습관을 나누어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11017-3-42-72a/s-AiJRfKMQZWn?si=81fcfaefc45b4c24a71da7bec2c71ee7

“요행을 바라지 않는 것
(10. 17. 2021.)

여호수아 5:12

 

신앙생활을 처음 했을 때는 뜨거움도 있고, 신비한 경험도 한다. “정말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 분명해!” 하지만 요즘은 내가 일하는 것 같다. “일주일 동안 나만 일한 것 같은데, 그 전에 내게 일하셨던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셨던 거야?” 감정도, 성과도, 건강도 도저히 통제가 안 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빠져나올 때 하나님의 10가지 재앙을 경험한다. 홍해를 가른다. 만나와 메추라기가 공급된다. 구름 기둥이 인도한다.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마자 만나가 그친다.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여호수아 5:12) 이제 하늘 그만 쳐다보고 가나안에서 농사 짓는 법을 배워야 한다. 수확하는 법을 배우고, 씨를 심고 기다리는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된 것이다.

 

요행을 바라지 않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만나 이후에는 씨 뿌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여기서부터 진짜 신앙생활이다. 공부하지도 않고 성과를 바라고 있는가? 만나지도 않고 결혼을 바라고 있는가? 관리하지도 않고 건강을 바라고 있는가? 요행을 바라지 말고 치열하게 심으라. 그러면 분명히 소출이 생길 것이다.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12) 그리고나서 이 소출을 “내가 거뒀다”고 말하지 않고, “만나를 주셨던 하나님이 이 소출도 거두게 하셨다”고 고백하라.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혼자 알아서 살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렇지 않다. 신자들의 삶에는 소출이 보장되어 있다.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한복음 19:28) 예수님께서 소출 없는 인생의 마지막을 내 대신 경험하셨다. 물 한 잔 얻을 수 없는 내 인생, 죄인의 최후를 대신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부활의 소출, 영생의 소출을 거두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언제나 소출이 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 4:14) 예수님이 마실 수 있었던 물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만나가 끝났다고 좌절하지 말라. 하나님 없이 혼자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오해하지 말라. 신자들의 열심은 홀로 뛰는 싸움이 아니다. 요행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이 주실 영원한 소출을 기대하는 것, 그것이 신자가 가나안에서 사는 길이다.

 

[1] 겉으로 보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일상이 지속되는 것 같아서 신앙생활의 활력이 떨어진 경험이 있습니까? 신비와 충만함이 사라진 것 같은 나의 신앙생활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여호수아 5장 12절을 읽어봅시다. 출애굽의 온갖 기적 이후에 가나안에서 벌어진 일은 무엇입니까? 가나안에서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4-5] 요한복음 19장 28절을 읽어봅시다. 소출이 없는 것 같은 십자가의 핏방울을 통해 예수님은 무엇을 거두셨습니까? 기적과 신비가 없는 것 같은 삶에, 하나님이 주실 소출을 신뢰하며 요행을 벗어나 성실히 감당해야 할 내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11010-2-21-41a/s-jUU5zBjwopA?si=56785382c850497cabc1cfb49460f4d9

“실망할 때 싫어지는 것
(10. 10. 2021.)

욥기 1:21-22

 

간절히 소원하며 하나님께 기도했던 일들이 있다. 그러나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실망한다. 사람은 실망하면 서운해진다. 화도 난다. “하나님, 왜 제가 이런 일을 겪게 만드시나요?”, “차라리 이 일을 시작하지 말게 하시지 그랬어요!”, “왜 이 기회를 놓치게 하셨죠?” 실망이 계속되다가, 결국 하나님도 싫어진다.

 

욥에게 고난이 찾아온다. 집이 부서지고(19), 재산이 날아가며(16), 자녀가 목숨을 잃는다(19). 원하고 바라던 것이 눈 앞에서 사라지니 실망과 절망이 찾아왔다. 욥은 하나님이 싫지 않았을까?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갈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21) 알몸이 될 때까지 실망이 계속되니, 오히려 나를 여전히 생각하시는 여호와만 바라본다. 욥은 실망의 때에, 하나님이 싫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실망에 변화가 찾아올 때가 있다. 실망스러울 때는 늘 하나님이 싫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가 원하고 바랐던 것이 싫어지기 시작한다. 이 지긋지긋한 탐욕, 이 지긋지긋한 연애, 이 지긋지긋한 사업. 내가 바라고, 내가 집착하던 것이 오히려 내게 기쁨과 만족을 주지 못함을 깨닫는다. 내가 집착하다가 오히려 행복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실망한 그 자리에서, 여전히 나를 인도하시고,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피하고 싶다고 기도하신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마가복음 14:36) 그러나 안 된다는 응답을 받으신 것 같다. 실망의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나의 원함을 싫어하고, 아버지의 원함을 끝까지 붙들었다. 하나님을 싫어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순종이 내게 구원을 가져온 것이다.

 

실망스러운 내 삶에도 구원이 찾아올 것이다. 그것이 언제인지 아는가? 실망할 때 싫어지는 것이 바뀌는 때이다. 응답하지 않으셔서 실망스러운가? 이루어주지 않으셔서 실망스러운가? 그 때에 하나님 싫어하지 말고, 나의 집착과 원함을 싫어해보라. 나의 원함과 나의 계획이 내게 행복을 줄 수 없다. 오직 여기 계신 하나님만이 나의 행복이시다. 그게 느껴지면, 당신은 구원받은 것이다. 당신은 그 때부터 잘 될 것이다. 그 때가 당신의 구원의 때이다.

[1] 삶에서 실망스러운 결과를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을 향한 나의 마음도 함께 요동칩니다. 나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욥기 1장 16-19절을 읽어봅시다. 욥은 어떤 일을 당했습니까? 21-22절을 잃어봅시다. 실망의 때에 욥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16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7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8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19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

 

[4-5] 마가복음 14장 36절을 잃어봅시다. 예수님이 기도 중에 실망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나 끝까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셨습니까? 내 삶의 실망 속에서 내가 변화되어야 할 태도는 무엇인지 나누어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11003-1-11-28a/s-PoZavFoUcQ3?si=248062a59b544db596cee43f87ba3a1c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
(10. 3. 2021.)

열왕기상 18:3-4

 

주변이 변화될 것 같지 않을 때 사람은 한계를 느낀다. 직장 가서 잘해보려고 했다. 온갖 더러움과 추악함이 난무하는 것을 본다. 내가 잘한다고 이 회사가 바뀔까? 회의적이다. 부모님께 잘한다고 평생 살아오신 부모님 성격이 변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수다. 변화에 대한 소망이 없으면, 선(善, good)에 대한 소망도 사라진다.

 

최악의 정권에 살았던 사람이 있다. 아합 왕 밑에서 왕궁의 일을 맡았던 오바댜라는 사람이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를 극악으로 치닫게 만든 악인 중의 악인이었다. 그 밑에서 일했으니 얼마나 한계를 느꼈을까? 아합을 죽일 수도 없고, 우상숭배를 막아낼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시키는 일을 안 할 수도 없다. 오바댜는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이세벨(아합의 아내)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열왕기상 18:4) 선지자 몇 명을 숨겨가며 그들을 살려주었다. 그 안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변화될 것 같지 않은 조직과 가정에 나를 두게 하실 때가 있다. 할 수 없는 것에 한탄하지 말고, 그 안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 하나님이 그 안에 두신 이유가 있다. 다 뒤집으라고 하신 적 없다. 사사건건 반대하고 혁명을 일으키라고 하신 적 없다. 잠잠히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라. 한 사람을 돕고 관심을 가지라. 하나의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라. 한 가지만 개선하라. 하나님이 당신을 그곳으로 보내셨다면,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더 큰 일을 행하신다. 오바댜는 그 안에서 신실하게 서있다가 죽을 줄 알았는데, 엘리야를 만난다. 자신을 소개했더니, 엘리야와 아합의 빅매치가 성사된다. 다 오바댜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한계 상황에 서신다. 하실 수 있는 일이 딱 하나 있었다. 죽는 일이었다. 죽는 일 밖에 할 수 없을 때, 믿음을 가지고 신실하게 죽으셨다. 십자가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죽는 일만 했는데, 영원히 사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우리의 삶에도 그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는가? 그렇다면 한계가 많은 삶을 답답해 하며 함부로 뛰쳐나오지 말라. 그 가정 안에서, 그 직장 안에서, 그 상황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실한 모습이다.

 

 

[1] 세상은 참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정말 답답하고 한계를 느꼈던 경험을 나누어봅시다. (예: 가정, 회사, 부서, 사람…)

 

[2-3] 열왕기상 18장 4절을 읽어봅시다. 아합은 누구이며, 오바댜는 누구였습니까? 오바댜는 아합 밑에서 어떤 한계를 느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댜는 어떤 일을 수행했습니까?

 

[3-4]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실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무슨 결과를 낳았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한계 상황 속에 두셨을 때, (1) 너무 극단적으로 변화를 추구하거나, (2) 모든 것을 너무 쉽게 포기하는 모습이 있지는 않습니까? 한계의 상황 속에서, 내가 신실하게 계속 감당해야 할 일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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