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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제목을 나눈다는 것
(8. 22. 2021.)

데살로니가후서 3:1-2

 

나와 친하지 않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연약한 것을 나누기 어렵다. 호구조사를 하다가, 날씨 이야기 하다가, 업무 이야기 하고 끝이다. 사적인 영역을 더욱 감추는 시대이기에, 누군가의 속 깊은 고민과 삶의 근황을 듣기는 요원하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서로 만나게 된 믿음의 동역자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뜻이다. 팀 모임, 헌금, 성찬, 동일한 말씀을 듣고 나누는 모든 것이 성도의 교제다. 그 중 핵심적인 것은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일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이루신다.

 

바울은 초보 성도들을 가르치는 자였는데, 초보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한다.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데살로니가후서 3:1) 가르치는 사람이 무슨 기도 부탁인가? 이것이 기도의 신비다. 기도는 기도 하는자, 기도 받는 자의 능력과 신분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분이 정하신 방식에 순종하여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제목을 나누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겸손의 표징이다. 세상에서는 이런 일들을 정말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만이 할 수 있는,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일이다.

 

예수님이 성도와의 교제 중에 가장 크게 실망하신 일이 있다.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태복음 26:40) 베드로는 졸았지만, 예수님은 졸지 않으셨다. 그 기도의 능력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여전히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예수님을 신뢰할 때, 나도 주변을 위해 기도하며, 기도제목을 나누는 일을 소홀히 생각할 수 없다.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어렵고 거시적인 이야기는 그만두라. 겸손하게 모임에 참석하여 다른 사람의 기도제목을 들으라. 그리고 내 기도제목을 말해보라. 그리고 진실로 기도해보라. 이 초보적인 순종이 없이는, 성도의 교제도 없고, 당신의 기도응답도 없다. 사생활을 운운하는 세상의 문화를 버리고, 기도제목을 나누는 일에 참여하라. 기도제목을 나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세상에 없는 위대한 일이다.

 

[1] 요즘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표면적이고 겉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성도와의 교제와 일반 사람들과의 이야기에서 다른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2-3] 데살로니가후서 3장 1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이 가르치는 자임에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부탁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기도 제목을 나누는 일은 누구를 신뢰하는 일입니까?

 

[4-5] 마태복음 26장 40절을 읽어봅시다. 제자들은 못했고, 예수님은 끝까지 감당하신 성도의 중요한 동역은 무엇입니까? 내가 세상의 문화에 휩쓸려 기도제목 나누기를 꺼려하고 무시했던 적은 없습니까? 내가 다시 종종 기도제목을 묻고 함께 기도해야 할 사람이 생각난다면 나누어봅시다. 나의 기도제목도 함께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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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웃고 함께 울고
(8. 15. 2021.)

로마서 12:15

 

내가 하나님으로 충만한지 간단히 확인하는 법이 있다. 주변이 잘 되면 좋아하는 것이다. 누가 결혼을 한다. 친구가 돈을 많이 번다고 한다. 축하해야 한다. 내 주변에 잘하는 사람, 잘되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도 잘 될 가능성이 많다. 반면 주변이 안 될 때 안도감이 들고 회복되는가?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잘 안되는 사람들 뿐인가? 사실 내가 비교와 시기, 질투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생활지침 중의 하나는 ‘함께’ 하는 것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주는 것은 오히려 쉽다. 그런데 즐겁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같이 웃어 주기 어려울 때가 많다. 나에게 올 복이 저 사람에게 갔다는 자기 의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받아야 할 삶의 수준을 내 스스로 정하고 주변과 비교한다. 그러니 남에게 더 부어 주시는 하나님께 화가 난다. 하나님께 화가 나면, 잘 되는 사람을 향한 나의 미소도 사라진다.

 

내가 주님과 함께 있음을 기억할 때 문제가 해결된다. 내가 지금 질병에 처했지만,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가난하지만, 주와 함께 이 상황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저 사람의 상황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는 나의 지금 상황이 내게 최고의 복이다. 그러면 상대의 상황 변화에 내 삶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는다. 울어주지 못할 이유도, 즐거워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내가 홀로 마주해야 할 죽음 앞에 주님이 나와 함께하셨다. 그것이 십자가의 약속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20) 죽음 앞에서도 나를 생각하신 그분이, 이 상황에서 나를 떠나실 리가 없다. 그래서 남들만 잘되고, 남들만 잘 풀리고, 나만 홀로 남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확신할 수 있다. 주님이 함께 계시다면,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주변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에 나서라. 꽁하게 빠져 있지 말고, 먼저 연락하고 축하하라. 그의 좋은 소식에 함께 하려고 시도하라. 그들과 함께하는 중에, 당신에게 생각지도 못한 도움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1] 주변이 잘 되었다는 소식, 잘 안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마음에 위로를 얻거나, 불편해졌던 적이 있습니까? 주변 사람들의 좋은 소식에 함께 기뻐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로마서 12장 15절을 읽어봅시다.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생활지침 중의 하나는 무엇입니까? 내가 다른 사람들의 즐거운 감정에 함께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을까요?

 

[4-5] 마태복음 28장 20절을 읽어봅시다. 우리의 삶에 예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함께하심을 기억하며,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주변 사람을 향한 나의 태도를 나누어 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10808-9-91-15a/s-iG2QLGWKl05

“중요해지는 한 사람
(8. 8. 2021.)

사도행전 18:9-11

 

코로나 이후 사람들의 관계가 변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 앞에서만 마스크를 벗는다. 내가 원하는 사람과만 밥을 먹는다. 신뢰의 벽은 높아지고, 관계의 확장은 제한된다. 알던 사람, 친했던 사람들끼리 더 친해지는 것이다. 당연히 전도도 어려워진다.

 

반대로, 내가 만나던 사람들은 더욱 중요해진다. 고린도에서 바울이 전도하는데 반대가 너무 심했다. 손 털고 다른 데로 가려고 할 때 주님이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사도행전 18:9-10) 바울이 만나는 그 사람들 중에 아직 구원받을 영혼이 있다는 말이다. 바울은 떠나려다가 그곳에 계속 머물기로 한다. “일 년 육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11)

 

이제는 한 사람이 중요하다. 내가 계속 만나던 한 사람을 전도할 계획을 세우라. 많은 사람을 만나지는 못하지만, 내가 만나던 사람은 코로나 상황 속에 계속 만날 수밖에 없다. 상대가 나를 싫어할 것이라 단정짓지 말라. 코로나 때문에 새롭게 만날 사람도 행사도 없어서, 상대방도 나를 쉽게 버리지 못한다. 고린도를 떠나려는 바울을 붙잡고 하나님은 원래 머물던 그곳에서 많은 영혼을 건지셨다. 나의 삶도 마찬가지다. 내가 늘 가는 그곳, 내가 늘 만나는 그 사람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부르신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아냐고 묻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한복음 1:48)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봤던 그 친구를 기억하시고 부르셨다. 십자가에서 그분이 나라는 한 사람을 기억하고 계셨기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나도 어느 순간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다.

 

기억나는 한 사람에게 다가가라. 다가가도 버릴 수 없는 코로나 시기를 활용하라. 모두가 심심하고 외로운 이 때가 전도할 기회이다. 새로운 사람은 만나기 싫어해도, 당신은 만나 줄 것이다.

 

[1] 코로나 때문에 관계 속에서 내 삶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요즘 꺼리게 되는 사람, 그래도계속 만나게 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2-3] 사도행전 18장 9-10절을 읽어봅시다. 고린도를 떠나려는 바울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11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은 그 이후 어떻게 사역합니까?

 

[4-5] 요한복음 1장 48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미 알고 만나는 사람 중에 찾아가 전도하고 신앙을 권면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소개해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10801-8-81-24a/s-cSJLApqbmru

“주인에게 잡힌 주인
(8. 1. 2021.)

사도행전 16:16-18

 

술 중독자에게 유명한 말이 있다. 내가 술을 먹고, 술이 술을 먹고, 술이 나를 먹는다. 내가 주체적으로 만족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내가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나를 통제하는 것이다.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그것 없이는 기쁨도 없고, 만족도 없고,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당신의 하나님이 된 것이다.

 

바울이 전도하다가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난다.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사도행전 16:16) 바울이 귀신을 쫓아냈는데, 화내는 사람이 따로 있다. 그 주인들이다.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19) 귀신들린 여종이 없이는 수익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삶. 그것이 주인의 삶이었다. 역설이 보이는가? 주인(owner)이 여종(slave)을 부리는게 아니었다. 사실 그 주인들이 수익의 노예였던 것이다. 여종의 주인들은 자신들의 주인인 사탄에게 잡혀 있었다.

 

내가 주인이라고 착각하며 살지 말라. 내가 돈을 벌고, 내가 쾌락을 좇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 같지만, 당신은 이미 노예일 수 있다. 내가 바라는 그것이 실패하고, 없어진다고 생각해보라. 외롭고, 공허하며, 염려되고, 걱정된다면 이미 그것은 당신의 삶을 쥐고 흔들고 있는 것이다. 돈인가? 쾌락인가? 사람인가? 승진인가? 사업인가? 잘 안되게 하시는 그 상황은 사실 내가 귀신에게서 벗어나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일지 모른다.

 

사람은 내가 주인이라고 착각하며 죽음 앞까지 간다. 자신의 삶의 진짜 주인, 죽음에 잡아 먹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셨다. 죽음이 예수님을 삼켰지만, 예수님은 먹히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셨기 때문이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4) 우리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 어떤 어려움 속에도 귀신에 잡히지 않고 다시 구원받을 수 있다.

 

주인이라고 행세하다가 주인에게 잡히지 말라.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는 종이라고 고백하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누가복음 17:10) 예수님의 종인 것 같지만,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낙심하지 않고 모든 일을 다스리며 살아가고 있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1] 즐길 뿐, 관심이 갈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삶의 전부가 되어 내 삶을 주도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에 빠져 있고, 무엇을 염려하고, 무엇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까? 나누어봅시다.

 

[2-3] 사도행전 16장 16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은 누구 안에 있던 귀신을 쫓아냈습니까? 19절을 읽어봅시다. 귀신을 쫓아내자 화를 낸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5]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실 때, 삶의 모든 염려와 나쁜 일도 생명으로 인도함 받을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린도후서 5장 4절을 근거로 대답해봅시다. 나의 나쁜 상황이 생명에 삼켜져 있음을 확신하며 전진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봅시다.

“더 높은 성취
(7. 25. 2021.)

이사야 55:8-9

 

삶의 방향과 속도는, 그 사람이 가려는 목적지에 따라 달라진다. 부산에서 서울을 가야한다. 이미 도착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반대로 이제 출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서두른다. 나의 목표가 내 삶의 열심을 결정짓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를 따라 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분명히 나랑 생각이 다르시기 때문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이사야 55:8)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성취했다고, 막 살면 안 된다. 하나님은 내 삶을 향해 더 높은 성취를 계획하고 계시다.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도 되지 않는다고, 함부로 포기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생각은 언제나 나와 다르다.

 

나의 목표를 근거로 생기는 조급함과 여유를 버리라. 시간이 없다, 기회가 없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는가? 더 높은 성취를 계획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조급하게 처리하지 말고, 지금 원하시는 일을 다시 분별해야 한다. 걱정 없이 여유 부리고 있는가? 그것은 불순종이다. 내 삶은 나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취까지 가야 한다.

 

군대가 예수님을 잡으러 왔다. 베드로가 칼을 뽑아 이제 여기서 확실하게 끝내자고 한다. 예수님이 더 높은 성취를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한복음 18:11) 예수님은 자신이 원하는 선에서 삶을 정리하지 않으셨다. 십자가까지 성취하신 그분의 순종이, 우리 삶에 가장 큰 성취, 구원을 이루었다.

 

자꾸 나의 목표에 따라 속도를 조절하고 움직이지 말라. 무슨 일이든,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 앞에서 한결같이 성실하되, 한결같이 평안을 유지하라. 한결같이 깨어서 기회를 찾되, 한결같이 주신 자리에 감사하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더 높은 성취가 내게 찾아올 것이다.

 

[1] 각자의 삶의 목표의 따라 삶의 패턴, 속도가 모두 달라집니다. 나의 목표에 따라 달라졌던 내 삶의 모습을 나누어봅시다.

 

[2-3] 이사야 55장 8절을 읽어봅시다. 우리의 생각과 다른 것은 누구의 생각입니까? 내 삶의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의 태도를 져버리는 내 모습을 돌아봅시다.

 

[4-5] 요한복음 18장 11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군대 앞에서 칼을 참으셨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더 높은 성취를 기대하며, 나의 목표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태도를 유지해야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10718-6-61-71a/s-fpZh09sPa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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