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의 신앙
(11. 17. 2024.)

마태복음 10:16

 

교회 잘 다니는 사람의 특징, 순수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세상에서 저렇게 때묻지 않고 살 수 있을지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교회 오빠는 욕을 모른다. 교회 오빠는 술을 모른다. 교회 권사님은 농땡이를 모른다. 세상이 아무리 교회 욕해도, 우리는 교회 안에서 진실함을 만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순수함을 지키는 것은 반쪽의 순종이라고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에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태복음 10:16) 하나님은 순결함과 동시에 지혜로움을 명하셨다. 지혜롭다는 것은 상황판단이 빠르다, 이해와 통찰이 넘친다는 뜻이다. 하나님 사람들의 순수함은 무식함과 우둔함으로 연결되어서는 안된다. 순결함을 지키면서도, 내 삶에 펼쳐진 상황과 변화들 속에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

 

반쪽의 순종에 머물고 있는 삶의 영역들을 회개하라. 순결의 영역에만 머물고 있기에 전진이 없는 것이다. 지혜의 영역까지 나아가야 한다. 기도를 더 할 것이 아니라 말투를 고쳐야 한다.(커뮤니케이션) 무식하게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라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지식) 몸이 부서져 가는 것을 느끼면 관리해야 한다.(운동) 다 쓰기만 하면 거지 된다는 것을 빨리 깨닫고 저축해야 한다.(경제) 사람들이 날 싫어한다고 하지 말고 외모와 옷차림을 고쳐야 한다.(첫인상) 밑사람 욕하지 말고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리더십) “저 분은 참 순수하고 진실하신 분이야”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의 반쪽짜리 칭찬이다.

 

예수님은 순수하셨다. 그러나 지혜롭게 구원을 이루셨다.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마태복음 26:45) 순결하게 기도하셨다. 그러나 그 기도를 멈추시고 정확한 때에 십자가로 전진하셨다. 예수님의 구원 속에는 순결함과 지혜로움이 같이 있음이 보이는가? 예수님 믿는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뱀 같이 지혜로워지는 것은 나의 구원을 앞당긴다.

 

교회의 이상형이 바뀌어야 한다. 뱀을 찾으면, 꽃뱀 만나서 망한다. 비둘기만 찾으면, 순수하게 망한다. 신앙의 목표를 다시 세우라. 순결함과 지혜로움을 동시에 겸비하라. 뱀과 비둘기가 같이 보여야 한다. 그것이 신앙의 매력이다.

 

[1] 세상과 다르게 교회 안에서 경험했던 특별한 순수함과 환대, 진실함들이 있습니까? 기억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10장 16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명하십니까? 신앙 생활 중에 우리가 반쪽의 순종에 머물고 있다고 느껴지는 삶의 모습은 없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26장 4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의 구원에 보였던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나도 그분을 믿고 영생을 얻었다면, 오늘의 삶도 신앙의 균형을 위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멈추지 말고 걸어가라
(11. 10. 2024.)

예레미야 51:50

 

질서의 인생은 쉽다. 인생의 고난은 무질서부터이다. 차근차근 공부해서 중간 기말 시험 보는 것은 질서이다. 대학 다 떨어지고 어디 갈지 모를 때는 무질서이다. 회사에서 월급 받는 것은 질서다. 갑자기 회사 나와 굶기 시작하면 무질서이다. 인생이 질서정연하다는 생각은 착각 중 착각이다.

 

신자들은 혼돈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고 계속 걸어가야 한다. 하나님이 바벨론에 가라고 해서 갔다. 근데 바벨론도 망한다. 여기서 끝인가 싶었는데, 멈추지 말라고 하신다. “칼을 피한 자들이여 멈추지 말고 걸어가라 먼 곳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예레미야 51:50) 혼돈과 무질서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정교한 계획이 무산된 것이 아니다. 혼란 속에도 여호와를 생각하고, 예루살렘을 마음에 두는 중심을 회복해야 한다.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 혼돈 속에도 하나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말라. 거짓된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계기로 삼으라. 나는 주님의 공급이 필요한 사람이지, 이 연봉에 생존이 걸린 사람이 아니다. 계속 걸어가라. 나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지, 안정된 직장과 학교 때문에 안전한 사람이 아니다. 계속 걸어가라. 하나님이 내가 할 일을 정하시는 것이지, 일이 없다고, 혹은 일에 너무 치인다고 무너질 필요 없다. 계속 걸어가라. 내 삶의 질서는 하나님 뿐이다.

 

삶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마지막 대적이 있다. 죽음이다. 예수님은 나를 대신하여 죽음도 영생으로 바꾸셨다. 그래서 내 삶의 가장 큰 혼돈은, 가장 큰 질서로 바뀐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5) 예수님 믿는 사람이라면, 오늘도 그렇게 볼 수 있다. 이 모든 혼돈은 결코 인생의 끝이 아니다. 애굽에서 나왔듯이, 바벨론에서도 나왔듯이, 여기서도 인도함 받을 것이다.

 

울면서 가더라도, 가면서 울어라. 영어강사 문단열의 말이다. 울더라도 계속 걸어가야 한다. 너무 혼란스러워도 일단 앞으로 가보라. 계속 걸으라. 멈추지 않고 걸을 때, 새로운 주님의 인도하심을 만날 것이다.

 

[1] 삶이 질서정연하다는 착각이 깨질 때가 있습니다. 언제 그것을 경험하였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예레미야 51장 50절을 읽어봅시다. 바벨론이 무너지는 것을 보는 포로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요즘 내가 생각하던 삶의 질서가 깨져서 중심을 잃어버리는 나의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3장 15절을 읽어봅시다. 인생의 가장 큰 무질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나 대신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그 정체성 안에서 오늘의 혼돈 속에 내가 어떻게 삶의 태도를 변화시켜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매너의 자기 의
(11. 3. 2024.)

로마서 2:1

 

관계도 실력이다. 놀이터에서 어떤 아이가 옆에 있던 친구를 때렸다. 맞은 친구 엄마는 너무 화나서 때린 아이를 째려보며 속으로 그 아이 엄마를 욕했다. 함께 있던 지혜로운 남편이 아이에게 말했다. “친해지고 싶구나? 그럴 땐 때리지 말고 먼저 인사하면 되는 거야” 못 배운 아이에겐 때리는 것이 친밀함의 표시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성격과 매너도 자기 의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신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로마서 2:1) 나는 화를 잘 내지 않는다. 그런데 함부로 화를 내는 사람에게는 가장 화가 난다. 화 안 낸다며? 이것이 자기 의다. 나는 매너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매너가 좋지 않은 사람만 보면 가장 욕이 나온다. 내가 가장 잘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상대방을 정죄하는 도구가 된다.

 

성품의 우월함을 가지고 상대를 정죄하지 말라. 상대가 돈이 없다고 무시하고, 못 배웠다고 무시하는 것과 똑같은 죄이다. 입이 좀 거친 사람들을 부드럽게 품어내야 한다. 무조건 편가르려는 사람에게 끝까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배려하지 못하고, 무질서하거나 산만한 사람들을 끝까지 질서 있게 기다려줘야 한다. 내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성품이 상대를 무시하지 않게 하라.

 

예수님은 성품의 완성이셨다. 우리를 성품으로 비난하지 않으셨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베드로전서 2:23) 맞대어 나에게 욕하지 않으신 예수님 때문에 내가 구원을 얻었다. 오늘 내가 나의 부족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사랑받고 있음을 믿는가? 신자로서 나도 그렇게 행해야 한다. 내 성품은 내가 이룬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은혜로 배우게 하신 것이다. 나도 거저 받은 것인데, 그것으로 남을 정죄할 수 없다.

 

내가 좀 더 매너 있고 고상하고 잘 안다고 우월한 척 좀 하지 마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신앙의 핵심이다. 매너의 자기 의를 벗어나라. 그게 진짜 하나님 나라의 매너다.

 

[1] 관계도 배워야 하는 것임을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학창시절, 직장에서, 부모로부터, 매너와 관련된 실수, 깨달음, 에피소드 등을 나누어 봅시다.

 

[2-3] 로마서 2장 1절을 읽어봅시다. 사람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은 무엇입니까? 그 죄를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부분과, 그것이 상대를 정죄하는 방향으로 흘렀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베드로전서 2장 23절을 읽어봅시다. 욕하는 자 앞에서 예수님이 대응하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분의 사랑을 통해 내가 얻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은혜로 얻은 구원 앞에서, 나도 신자로서 성품의 우월함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어둠을 깨닫는 법
(10. 27. 2024.)

요한복음 8:12

 

어렸을 때 집에 엄마가 오더니 말한다. “왜 이렇게 어두워? 불 좀 키고 있지!” 난 몰랐는데, 밖에서 들어온 엄마는 어두운 걸 안다. 북향 집 어두운 것은 남향 집 만나봐야 안다. 더 나이 들어야 젊을 때 행동이 미련했음을 안다. 사람은 스스로 어두움 속에 있는지 잘 모른다. 어두움을 깨닫는 유일한 길은 다른 빛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 8:12) 예수님을 만나면 삶에 빛이 임한다. 예전엔 어둡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구체적인 가르침이 없어도, 빛은 삶 전영역의 어두움을 들춰내기 시작한다.

 

세부적인 답변부터 찾지 말고, 매일 빛 가운데 거하는 싸움을 하라. 이 행동이 옳은지, 이 방식대로 일하는 것이 맞는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지 묻는 것은 순서가 아니다. 내 자신이 어둠 가운데 있으면 옳은 답도 옳게 보이질 않는다. 예배와 기도로, 묵상과 경건생활로 빛 가운데 나를 내놓으라. 그럴 때 어둠으로 보이지 않았던 많은 문제들도 드러나며, 내 시각 전체가 교정되기 시작한다. 보잘 것 없게 보였던 상황이 감사로 다시 보이며, 문제로 보였던 사람이 기회로 보이기도 하고, 괜찮은 상황이라 생각했던 내 삶이 영적인 위기로 보이기도 한다. 빛을 만나야 어둠이 물러간다.

 

내 삶의 어둠은 무조건 물러간다. 빛 되신 예수님이 내 삶의 가장 어두운 곳, 죽음으로 나 대신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베드로전서 1:21) 빛이 비치니 죽음도 물러갔는데, 내 삶의 어둠도 물러가지 않을 리가 없다.

 

내 생각 안에서만 갇혀 내 삶이 괜찮은지 고민하지 말라. 구체적인 생각을 멈추고 먼저 빛 가운데 나오는 연습을 하라. 나도 모르게 적응되어 있던 어둠은 물러가고, 예수님이 비추시는 빛이 삶 전체를 감쌀 것이다.

 

[1] 밝은 것 보기 전엔 어두운지 잘 모릅니다. 특정한 공간이나 분위기 속에서 밝고 어두움이 대조 되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자기보다 어린 사람들을 보며 '어려서 아직 깨닫지 못하는구나' 느꼈던 경험도 나누어 봅시다.

 

[2-3] 요한복음 8장 12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을 따를 때 약속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빛에 내 자신을 노출시키며 삶의 여러가지 상황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베드로전서 1장 21절을 읽어봅시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어둠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내 삶의 영생을 확신하며, 오늘도 빛 가운데 거하기 위해 내 삶의 습관들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지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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