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된 불행
(10. 6. 2024.)

로마서 12:3

 

예전엔 알 수 없었던 것들이 모두 공개되어 있다. 친구가 어디 가서 뭐하고 놀았는지 몰랐다. 이제 인스타 보면 다 나온다. 전 세계 사건 사고가 실시간 뉴스로 뜬다. 부자가 어떻게 사는지도 너무 자세히 나오고, 병들고 가난한 자들의 생활도 낱낱이 보인다. 내가 접하는 정보의 범위가 훨씬 넓어진 시대에 산다.

 

하나님은 생각의 범위를 통제하라고 명하시는 분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로마서 12:3) 정보, 소식, 소문의 인풋이 너무 많으니, 온갖 불안과 염려, 시기와 질투도 함께 증가한다. 기도는 없고 생각만 많으니, 내가 정한 길의 확신은 없고 유망한 길들만 너무 많이 보인다. 예전엔 몰라서 불행했다. 이제는 공개된 불행의 시대로 바뀌었다.

 

너무 많은 정보가 주는 생각을 통제하라. 조너선 하이트는 『불안세대』라는 책에서 세상은 훨씬 더 안전 해졌지만, 두려움을 조장하는 뉴스가 발달하니 요즘 부모들이 아이들을 훨씬 과잉보호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굳이 몰라도 될 것을,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남이 어디 여행 가는지, 어떻게 사는지, 댓글에서 뭐라고 하는지를 물어보고 찾아보면서 점점 방황하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적용해보라. 그 정보를 접하고, 그 생각을 할수록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에 대한 확신, 감사, 평안이 사라져간다면, 그 생각은 아무리 지적이고 멋있어 보여도 멈추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기가 가장 높아졌을 때, 결코 생각이 흔들리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태복음 16:23)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셨다. 그분은 나의 구원을 생각하셨다. 자신이 십자가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흔들리지 않으셨던 예수님 때문에, 내게 영생의 구원이 주어졌다.

 

그렇다면 오늘 내 인생도 마땅히 그렇게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안다고 행복한 게 아니다. 공개된 불행에서 벗어나라. 하나님이 허용하신 생각의 범위 밖의 것들을 정리하라. 다 모르는 것 같지만, 훨씬 재밌고 행복한 인생이 될 것이다.

 

[1] 모든 정보가 공개된 시대입니다. 예전과 다르게 많은 것들이 공개되어 삶에 새로움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예 – 제품 비교, 연봉 비교, 자녀 교육, 여행 유튜브, 사업보고서 등…)

 

[2-3] 로마서 12장 3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통제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너무나 많은 인풋 때문에 삶에 감사가 사라지고 오히려 혼란과 염려가 늘어났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16장 23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끝까지 흔들리지 않으셨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 생각의 견고함은 무엇을 이루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범위를 넘어선 나의 생각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눈물을 담는 시간
(9. 29. 2024.)

시편 56:8

 

아기는 울면서 태어난다. 가장 무력하니까 그렇다. 무력의 끝에는 눈물이 있다. 연약할 땐 울어야 하는데, 세상에서는 울지 말고 강해지라 한다. 그래서 강해졌는가? 모두 눈물을 참고 있을 뿐, 훨씬 고난 앞에 약해졌다.

 

하나님은 사람의 눈물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편 56:8) 부모 앞에서 울 수 있는 자녀가 훨씬 건강하고 강해진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 앞에서 울게 하신다. 마귀는 내 눈을 가려 울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고 속인다. 나의 비참한 영적 상황을 숨기는 것이다. 내 비참함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눈물이 회복된다. 눈물을 담는 시간 자체가 우리에게 치유의 시간, 승리의 시간, 회복의 시간이다.

 

울 때까지 기도해보라. 눈물로 찬양해보라. 울 때까지 예배해보라. 눈물에 힘이 있다. 이것은 이론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너무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그냥 눈물을 담는 시간으로 들어가라. 회심하고, 회복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공통적인 일이 있다. 예배당에 들어오자 마자 눈물이 난다. 예배 드리다가 갑자기 눈물이 한없이 흐른다. 오늘 마음도 메마르고, 사랑도 없고, 인생에 재미도 없고, 열정도 사라지지 않았는가? 근본 원인은 하나다. 눈물이 사라져서 그렇다. 나와 주변의 모든 처지를 두고 울라. 눈물 자체를 달라고 기도하라. 이상하게 눈물이 회복되면, 모든 응답과 회복이 뒤따라 찾아온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에 어떠셨을까?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마가복음 14:32-33) 예수님이 십자가 앞에서 우셨다. 기도하며 울었더니, 뒤집어졌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42) 예수님의 구원은 눈물을 통과한 구원이었다.

 

예수님의 눈물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음을 믿는가? 나도 이 고난 앞에 그렇게 구원받을 것이다. 도대체 이 상황에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가? 울어야 한다. 울어야 산다. 눈물을 담는 시간으로 들어가라. 승리의 문이 열릴 것이다.

 

[1] 사회 생활을 하면서 사람의 눈물은 수치스러움이 되었습니다. 언제 많이 울었습니까? 언제 많이 눈물이 사라졌습니까? 언제 울고 싶은데 참았습니까?

 

[2-3] 시편 56편 8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사람이 점점 울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눈물을 통해 변화가 나타났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가복음 14장 32-33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에 무엇을 경험하셨습니까? 42절을 읽어봅시다. 그 이후에 무엇이 찾아왔습니까? 삶의 눈물의 회복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며 어떻게 삶이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요즘 어떤 기도제목에 가장 많은 눈물이 납니까?

“뭐라고 말해도 그건 불평
(9. 22. 2024.)

시편 37:8

 

말은 그 사람 평생의 습관이다. 재밌는 사람은 계속 재밌고, 우울한 사람은 계속 우울하다. 감사하는 사람은 불평을 입에 대지 않고, 불평하는 사람은 감사를 표현할 줄을 모른다. 사람은 말로 영향을 주고받다 보니, 부정적인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결정한다. ‘이 사람 말 계속 들어주기 너무 힘들다. 가까이하면 안되겠구나.’

 

하나님은 ‘불평’과 ‘원망’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치명적인 죄로 보신다. 불평이란 무엇인가? ‘상황’이마음에 들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시편 37:8) 원망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야고보서 5:9) 어떤 상황에도 불평해선 안되고, 원망해선 안된다. 이걸 너무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절대로 금하시는 명령인데, 사람은 다 그런 거라고 핑계 댄다.

 

원망과 불평이 아닌 척하지만, 뭐라고 말해도 원망이고 불평인 부분들을 회개하라. “이런 망할 놈의 회사, 망할 놈의 나라, 망해버릴 대표, 망할 놈의 입시제도!” 그냥 화나서 한 이야기라고? 이것이 바로 원치 않는 모든 상황을 불평으로 해결하는 나의 죄악된 언어습관이다. 옆사람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말하는가? “아 진짜 부모 잘못 만나서 이게 뭐냐고!”, “아내가 그 정도 밖에 못 해주는 게 마음에 안 들어.”, “내 자식이지만 정말 걔 때문에 내가 미쳐버리겠어”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한 것 뿐이라고 포장하지 말라. 성경은 그걸 원망이라고 한다.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차지 않아 못마땅함을 밖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원망과 불평을 어떻게 안 할 수 있는가? 원망과 불평 할 상황에 다른 방법으로 승리하신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 왜 의인이 십자가를 지나?(상황) 예수님은 불평하지 않으셨다. 왜 죄인을 위해 내가 죽어야 하나?(원망) 예수님은 원망하지 않으셨다. 구원은, 원망과 불평으로 오지 않았다.

 

당신은 예수님을 구주로 모셨는가? 그렇다면 구원받았는가? 맞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처한 상황에도 구원이 임할 것을 믿는가? 분명 그럴 것이다. 구원이 원망과 불평으로 오지 않았음도 믿는가? 맞다. 그러니 원망과 불평하지 말라. 당신도 예수님의 구원을 경험할 것이다.

 

[1] 언어는 중요한 삶의 태도 중에 하나입니다. 대화 속에서 큰 힘을 얻고 친밀해지고 싶었던 경험이나, 대화를 그만 듣고 싶고 피하고 싶었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시편 37편 8절과 야고보서 5장 9절을 읽어봅시다. (1) 불평이란 무엇입니까? (2) 원망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그냥 있는대로 말할 뿐이라고 포장하며 죄를 짓는 언행의 범죄를 나누어 봅시다.

 

[4-5] 히브리서 12장 2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까? 나도 오늘 이 상황에서 구원이 임할 것임을 믿는다면, 당장 버려야 할 삶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1) 상황에 대해서 (2) 사람에 대해서 내가 죄악을 버리고 삶의 태도와 언행을 어떻게 새롭게 할지 나누어 봅시다.

“적게 받은 자의 죄
(9. 15. 2024.)

마태복음 25:24-25

 

주인이 사라지면 권리만 남는다. 스승이 있던 시절 제자는 권리를 말하지 않았다. 권리는 스승으로부터 오는 것이니까. 자녀는 부모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다. 부모로부터 권리가 주어질 뿐이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시대이다. 인생의 주인이 사라졌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모두가 내 권리만 찾는다. 나도 부자 될 권리, 나도 편안할 권리, 나도 힘든 일 안 할 권리, 나도 놀 권리. 인생의 주인이 사라지니, 남보다 내 삶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남이 내 인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나님은 내가 처한 모든 형편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다. 주인이 그 재능에 맞게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었다. 가장 적게 받은 자가 죄를 짓는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태복음 25:24-25) 왜 내게 한 달란트를 주을까? 내가 판단할 권리가 없다. 그 자체가 화가 난다면, 내 인생의 주인이 없어지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다는 증거이다.

 

내가 현재 처한 형편에 감사하지 못하고, 계속 화가나는 부분을 회개하라.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해야 하는지는 주인이 판단하시는 일이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why) 질문 자체가 틀렸다. 그건 주인이 생각하실 일이다. “나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how) 이것이 주인이 있는 사람의 질문이다. 더 실천적으로 적용해보겠다. 각 영역의 주인을 인정하라. 자녀라면 성인이 되기 전에 부모에게 함부로 토 달지 말라. 가정에선 부모가 주인이다. 부모와 잘 지낼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아르바이트생인 주제에 사장의 결정에 뚱한 표정 짓지 말라. 적어도 그 회사에선 그 사장이 주인이다. 어떻게 주인 마음에 들지를 고민해야 맞다. 교수와 선생님의 강의 앞에서는 그 방향을 일단 따르려고 하라. 그 수업 시간에는 그 교수님이 주인이다. 회사가 싫다고? 회사는 나를 좋아하는지를 묻는 것이 맞지 않을까? 각 영역의 주인과 윗사람을 인정하는 것이 적게 받은 자가 순종해야 할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를 가나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지 않고 주인을 인정한다. 왜? 자격 없는 자로서 주인에게 구원 받았음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하나님 앞에 가진 것 없는 내가 영생을 거저 얻었음을 알기에, 이 땅에 적게 받은 상황을 나는 결코 불평할 수 없다.

 

모두가 자기 삶의 주인이라고 하니, 회사와 학교와 조직이 도저히 운영될 수가 없는 시대이다. 시대는 적게 받은 자의 온전한 순종을 찾고 있다. 어디 가서 제발 주인 좀 인정하라. 주어진 것 감사히 받고 일해보라. 아마 훨씬 빨리 주인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1] 나에게 권리가 없음을 인정하며 살다가, 모든 게 내 권리라고 생각될 때 시대는 어떻게 바뀌게 되었습니까? 모두가 권리만 주장하며 자신의 형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대의 변화를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25장 24-25절을 읽어봅시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을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지은 죄는 무엇입니까? 내 삶에 가장 불평이 많아지고,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삶의 영역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로마서 5장 8절을 읽어봅시다. 신자가 인생의 주인에게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내 영적인 정체성을 회복할 때, 그것을 믿을 때, 오늘 적게 받은 상황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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