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기적
(4. 4. 2021.)

마태복음 8:1-3

 

성경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이 나온다. 병든 자가 예수님을 만나 낫게 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나도 특별한 체험, 특별한 경험으로 충만할 때가 있다. 이러한 기적만 계속되면 신앙생활을 못 할 이유가 없다. 기적이 지속되지 않는 것이 나를 지치게 한다.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치셨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태복음 8:3) 문제는 그 다음이다. 기적 이후에 나병환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그가 다시 다른 병에 걸려서 죽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기적이 없는 나머지 삶에서는 그가 어떻게 살았을까? 병에 걸려도, 죽어도, 다시 살리실 주님을 믿음으로 살았을 것이다. 기적 이후,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남기신다.

 

왜 믿음이 중요한가? 마지막 기적은 믿음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요한계시록 14:12) 마지막 부활은 믿음으로 가능하다. 우리에게 기적을 주시기 위해 먼저 주시는 징표가 믿음이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기적은 믿음에 초점이 있다. 믿어야 부활의 기적까지 경험하기 때문이다. 기적은 멈추어진 것이 아니다. 최종적으로 경험할 부활의 기적을 위해 하나님은 믿음을 보증으로 내게 주신다.

 

믿어야 구원 받는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베드로전서 1:9) 나는 죄인이다. 나는 죽으면 영벌을 받는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 나는 그 분의 자녀이다. 그 분을 믿으면 나는 영생을 누린다. 삶의 기적을 지나가면서, 기적은 사라지지만 더욱 이 고백이 확실해지는가? 기적은 흐릿해지지만, 믿음은 선명해지는가? 당신에게는 최종의 기적, 부활도 예비되어 있다.

 

기적이 선물이 아니다. 믿음이 선물이다. 병 낫는 것이 기적이 아니다. 내가 예수를 믿게 되는 그 자체가 기적이다. 우리가 어쩌다가 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게 되었을까?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었을까? 당신 같이 고집 센 사람이 말이다. 당신은 정녕 기적의 사람이다.

 

[1] 하나님이 개입하셨음을 부인할 수 없는 신비한 체험을 했던 순간들을 나누어봅시다. 또, 기적이 없이 평범한 삶이 지속되면서 진부함을 느끼는 시기는 언제였습니까?

 

[2] 마태복음 8장 3절을 읽어봅시다. 나병환자는 병이 낫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 순간을 제외한 나머지 삶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주님이 나병환자에게 남기셨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3-5] 요한계시록 14장 12절을 읽어봅시다. 베드로전서 1장 9절도 읽어봅시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이 경험하는 마지막 기적은 무엇입니까? 그 기적은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믿음이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삶의 소소한 기적 속에, 나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졌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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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자의 본능
(3. 28. 2021.)

고린도전서 4:7

 

사람은 절대 자기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기적인 사람이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줄 때가 있다. 너무 좋은 것을 받았을 때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생일 선물이 있는가? 가장 어려울 때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을 떠올려보라. 생일만 되면, 명절만 되면 그 사람 챙기느라 바쁘다. 누가 시켜서 그런게 아니다. 그건 받은 자의 본능이다.

 

신앙생활 할 때 가장 마음에 부담이 되는 것이 헌금이다. 전도도 하고, 죄도 끊고, 예배도 잘 드릴 수 있겠다. 십일조만 없어도 신앙생활에 자신 있다. 교회에서 돈을 가지고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마음이 참 부담스럽다. 본능적인 일을 억지로 하려고 하니까 힘든 것이다. 받은 자의 본능이 없으니, 오히려 교회에서 헌금하라고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누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지 지적한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린도전서 4:7) 받은 사람이 안 받았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받았다는 것만 인정해보라. 그것은 기쁨이고, 감사이고, 자발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주셨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로마서 8:32)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주실 것도 약속 되어있다. 이미 받았음을 확신하는가? 앞으로도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받을 것임을 확신하는가? 받은 자의 본능대로 행하라, 그것은 삶을 전부 주께 드리는 것이다.

 

헌금에 머무르지 말라. 십일조에 머무르지 말라. 전부 받았다면, 전부 내어드리는 것이다. 내게 내어 준 그 사람에게만 나의 것을 주고 싶은 마음, 그것이 받은 자의 마음이다. 우리의 삶은 오직 주님께만 드려져야 한다. 받은 자의 영광이 여기에 있다.

 

[1] 무엇인가를 받았던 기억 중에 가장 감격스럽고 큰 힘이 되었던 순간을 나누어봅시다. 본능적으로 내가 받은 자임을 깨달았을 때, 나의 행동은 어떻게 변화됩니까?

 

[2-3]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드림’의 문제에 있어서 주저할 때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을 읽어봅시다. 우리는 무엇을 받았습니까? 성경은 누가 착각하고 있다고 말합니까?

 

[4-5] 로마서 8장 32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누구를 내어주셨습니까? 그것을 근거로 평생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미 받은 자로서, 감사와 드림을 회복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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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결과는 씨앗
(3. 21. 2021.)

골로새서 1:24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 나의 죄 때문에 받아야 할 모든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지셨다. 여기서 질문이다. 예수님이 나 대신 죽으셨는데, 내가 이 땅에서 잘못된 선택을 해서 펼쳐진 결과는 왜 그대로인가? 나쁜 짓을 하면 대가를 치르고, 악을 행하면 불행해진다. 내가 잘못한 일이니, 남은 내 인생엔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것 아닐까?

 

바울이 사람 죽이고, 박해하고, 교만하게 살았다. 다 자기가 잘못한 일이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믿었지만, 사람들이 바울을 싫어하고, 많은 괴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내가 예전에 지은 죄가 많아서, 나를 사랑하시긴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벌 주시나봐”라고 해석하지 않는다. 내가 받는 고난을 다르게 해석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24) 내가 받는 괴로움은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 가는 고난으로 해석한다.

 

지난날의 죄악에 눌려있는가? 앞으로의 인생이 죄의 결과를 뒷처리 할 뿐인 것 같아서 후회되는가?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라. 예수님이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면, 내 삶의 모든 죄의 결과는 씨앗이 된다. 죄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과 주변 삶의 회복과 완성을 위한 거룩한 고난이 된다.

 

죄의 결과는 무조건 씨앗이다. 예수님이 말도 안되는 재판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사람들의 죄악이 십자가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죄의 결과는 승리의 씨앗이 되었다. “통치자와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2:15) 죄의 결과는 십자가였고, 십자가는 나의 구원의 씨앗이 되었다.

 

오늘의 삶도 확신하라. 예전에 지은 죄, 지난 주에 지은 죄, 어제 지은 죄, 지금 방금 지은 죄, 앞으로 지을 죄도 주님이 대신 형벌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죄의 결과를 맞이할 때마다 소망으로 반응하라. 괴로운 결과이지만, 그 결과를 주님은 역전과 회복의 씨앗으로 사용하실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 능력이다.

 

[1]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내가 받아야 할 형벌을 받으셨음을 믿습니까? 그것을 믿는데도 불구하고 내 삶에는 지난날의 잘못된 선택이나 죄악의 결과가 그대로 펼쳐질 때가 있습니다. 죄의 결과라고 보이는 내 삶의 요소들을 나누어봅시다. (방황, 가난, 게으름, 중독 등)

 

[2-3] 골로새서 1장 24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삶에 고난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그 고난을 자신의 죄와 연결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무엇과 연결시키고 있습니까?

 

[4-5] 골로새서 2장 1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의 삶에 죄의 결과로 벌어진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내 삶에 어떤 씨앗이 되었습니까? 내 삶에서 죄의 결과로 해석 하던 것을, 승리의 씨앗으로 다시 바라봐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10314-5-51-31a/s-wimaxza1Cnl

“넘치는 것부터
(3. 14. 2021.)

고린도후서 9:8

 

하나님은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신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고린도후서 9:8) 그러나 현실은 부족한 것 투성이다. 말씀이 사실이라면,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지금 넘치는 것을 찾으라. 넘치는 것부터 쓰라. 그곳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넘치는 은혜는 언제나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이 있다. “이는 너희로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8절) 착한 일을 넘치게 하는 것, 그것이 은혜를 주시는 목적이다. 내가 하나님의 착한 일을 사모한다면, 그 일에 부족한 것을 모두 채우실 것이다.

 

돈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시간은 넘쳐난다. 그래서 게으르게 내 마음대로 산다. 그게 틀린 것이다. 시간을 통해 착한 일을 넘치게 해보라. 내 삶의 필요가 끊임없이 채워질 것이다. 나는 일처리가 빠르다. 그래서 시간이 여유롭다. 다른 사람 원망하지 말고, 주변의 일에 뛰어들라. 가정과 교회의 착한 일을 적극적으로 감당하라.

 

예수님은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셨다. 그런데 삶은 모든 것이 부족해 보였다. 머리 둘 곳이 없었고(“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마태복음 8:20), 고민 때문에 마음의 여유도 없으셨다.(“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마태복음 26:38) 그러나 언제나 넘치는 것부터 하셨다. 우리를 향한 넘치는 사랑이 있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한복음 13:1) 충분하지 않은 환경 속에도, 삶에 은혜가 넘치고 있음을 믿었다. 지금 넘치고 있는 사랑을 따라 십자가로 가셨을 때, 우리에게 넘치는 구원이 주어졌다.

 

언제나 내 삶에는 은혜가 넘치고 있다. 이것을 반복해서 말하라. 중얼거리며 믿으라. 지금 넘치고 있는 것을 찾으라. 재능, 시간, 돈, 아이디어… 뭐든지 좋다. 넘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착한 일을 시작하라. 은혜가 있는 자에게 부족함은 없다.

 

[1] 고린도후서 9장 8절을 읽어봅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이 말씀과 달리 현실에서는 많은 부족함을 느낍니다. 최근 부족과 결핍을 느꼈던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하나님의 은혜에는 언제나 목적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8절의 하반절을 읽어봅시다. 넘치는 은혜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내가 현재 넘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습니까?(시간, 돈, 재능 등) 넘치는 것을 자의적으로 활용했던 나의 죄악됨을 탐색해봅시다.

 

[4-5] 예수님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부족함 속에 넘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넘치는 것부터 하나님께 드렸을 때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내 삶에 넘치는 은혜가 흐르고 있음을 다시 확신해야 합니다. 특별히 내 삶의 구체적인 영역에서 삶의 태도를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요?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10307-4-41-37a/s-TOuqKArqFOn

“바람에 날아가는 말
(3. 7. 2021.)

욥기 6:25-26

 

삶이 힘들면, 주변에서 사실과 다른 감정적인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내 인생은 망했어!”, “차라리 부모가 없어져버렸으면 좋겠어!”, “넌 내 마음을 몰라!”, “하나님은 절대 날 사랑하시지 않아!” 옆에 있으면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도 부정적으로 변하고 화가 난다. 듣다가 지쳐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끔 훈수를 둔다. “너 말 함부로 하지마!”, “어떻게 말을 그런식으로 하니!”, “너 그러다가 말대로 된다!”

 

욥이 고난을 받으면서 그랬다. 너무 힘들어서 투덜거린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이 너의 행동과 언어에 문제가 있다고 고쳐준다. 그랬더니 그만 좀 하라고 외친다.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욥기 6:25) 책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왜? 바람에 날아가는 말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26절)

 

바람에 날아가는 말이 있다.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말이 있다. 상처와, 감정의 북받침과, 압박감 속에 바람 속에 날려보내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에 열매가 있음을 믿는다. 언어 생활에 철저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말의 옳고 그름을 따지며 정죄하는 것은 잘못이다. 바람에 날아가는 말은, 그냥 그렇게 말하도록 두라.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닐 때가 있다. 고통을 감당하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내뱉는 말은, 흘려가게 내버려 둬야 회복이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심한 압박감과 마주하셨다. 그래서 바람에 날아가는 말을 하신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마가복음 14:36) 하나님이 하늘에서 “어떻게 너는 내게 준 사명 앞에서 그런식으로 말할 수 있니?”라고 대답하지 않으셨다. 바람에 날아가는 말 뒤에는 언제나 진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 진심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말로 인한 죄책감, 말로 인한 정죄를 모두 벗어나라. 상대를 정죄하지도 말고, 나를 자책하지도 말라.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나오는 상대의 말을 품어주라. 들어주라. 꾸짖을 생각만 하지 말고 한 번 더 들어주라. 그 사람이 자신의 진심을 따라 알아서 회복하게 될 것이다.

 

[1] 감정이 격해지면서 심한 말로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받아 분노하게 될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했던 가장 심한 말, 내가 가장 상처가 되었던 심한 말의 기억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욥기 6장 25절을 읽어봅시다. 욥이 고통 속에 중얼거리자 욥의 친구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26절을 읽어봅시다. 욥은 자신의 말이 무엇이라고 소개합니까?

 

[4-5] 예수님께서 바람에 날아가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저항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진심은 무엇이었습니까?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언어를, 예수님의 사랑이 붙들고 계심을 믿습니까? 그 사랑에 힘입어 내가 품기로 다짐해야 할 상대의 언어 생활을 나누어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10228-3-31-30a/s-4xuYbZUAQT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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