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01225-21-7a/s-p8mEnVqNK19

“순종의 탄생
(12. 25. 2020.)

누가복음 1:30-35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을 기념하는 날이다. 예수님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셔서 이 땅에 오셨는가? 사람의 순종을 통해 이 땅에 오셨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임신할 것이라고 말한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누가복음 1장 31절) 남편으로부터 온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를 임신하면 온갖 의심을 받고 인생이 망가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이를 품고, 견디어 예수님은 결국 이 땅에 오셨다. 그 중요한 일, 실패할 수도 있는 일을 한 사람의 순종에 맡기신 것이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은, 곧 마리아의 순종이 탄생한 날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내 삶에도 들어오시기를 원한다. 난 임신이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내 삶에 오시는가? 마찬가지이다. 순종을 탄생시키면 된다. 순종하면, 예수님이 오신다. 순종은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을 아는 모든 올바른 지식은 순종으로부터 태어난다”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게 된다.

 

마리아의 순종으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순종으로 삶을 끝마치셨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장 36절)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순종으로 우리가 죽음에서 거듭나게 되었다. 남은 순종은 우리에게 있다. 내 인생의 남은 삶에 순종이 이루어지는 곳에, 새롭게 하나님의 임재가 탄생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 당신의 삶에도 하나님의 임재가 탄생하기를 소망하라. 예배 드린다고, 성경 읽는다고, 기도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유일한 길이 있다. 순종하는 것이다. 성탄절은 곧 나의 순종이 탄생하는 날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을 시작해보라. 내 삶에도 예수님이 영적으로 찾아오셔서, 순종의 열매가 탄생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1-2] 누가복음 1장 30-31절, 37절을 읽어봅시다. 마리아는 천사의 말에 어떻게 응답합니까? 예수님은 어떤 방법을 통해 이 땅에 오실 수 있었습니까?

 

[3]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칼빈의 말을 읽어봅시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입니까?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갔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4-5]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셨던 마지막 십자가 순종은, 우리 삶의 죽음 이후에 무엇을 탄생시켰습니까?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내 삶에도 새롭게 탄생시켜야 할 순종의 도전들을 생각해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01220-7-4919a/s-UIIAhrWdGok

“계산적인 신앙
(12. 20. 2020.)

누가복음 14:26-30

 

연말 시즌에는 회사마다 성과 평가로 바쁘다. 누가 잘했는지, 못했는지 계산해야 보상이 가능하다. 개인들도 마찬가지다. 내년엔 얼마나 돈을 벌고, 얼마나 쓸지도 계산해야 한다. 미리 계산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제대로 실행할 수 없다.

 

신앙은 계산적인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계산 없이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신앙 아닌가? 아니다. 신앙은 철저히 계산하는 것이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누가복음 14장 28절) 망대를 세울 돈이 있는지 네 계좌를 먼저 확인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의 목적은 ‘계획대로 살라, 계획대로 소비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의 목적은 바로 앞에 나온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26절) 제자가 되려면 비용이 많이 든다는 뜻이다. 제자는 계산적인 것이다.

 

계산이 빠진 신앙은 다 거짓말이다. 계산적으로 살라. 하나님께 순종하다가 시간이 부족해야 한다. 연약한 영혼을 돌보다가 감정 노동에 지쳐 체력이 바닥나야 한다. 기도하느라 잠을 줄여야 한다. 십일조 하고 성탄 구제를 하느라 한 달 생활비가 부족할 때도 있어야 한다. 성경은 도대체 몇 장이나 읽었는가? 부르신 업무와 공부에 충분히 시간을 계산하며 투자하고 있는가? 기독교는 나의 이익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드릴 나의 삶을 계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계산적인 분이시다. 어느 종교도 자신들의 신을 ‘인간의 죄를 대신 계산해 주는 신’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그분은 당신에게 죄의 대가를 직접 계산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대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우리의 죄를 계산하셨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을 계산하게 된다. 받은 것을 계산해보니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것도 너무 많다. 내 손을 빈 손으로 만들어야 다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내 손에 있는 것을 다 내려놓을 계산을 하는 것이다.

 

한 해가 벌써 다 지났다. 당신은 아마 내년에도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자신의 목숨으로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제자로 부르신다. 다른 것을 준비하지 말고, 한 번 솔직히 계산해보라. 내 삶의 시간과 물질, 재능과 편안함은 아직 하나님 앞에서 계산을 피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끝까지 계산적으로 살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1] 한 해 동안 내 삶의 시간과 소비를 계산해 봅시다. 어떤 패턴이 발견되나요? 내년에는 어떻게 소비하거나 시간을 사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까?

 

[2-3] 누가복음 14장 28절을 읽어봅시다. 본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26절도 읽어봅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이 필요합니까?

 

[4-5] 내가 사람 사이에서, 나의 시간이나 이익에 있어서 철저히 계산적인 것과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계산을 회피하는 부분이 있습니까? 철저히 계산하여, 제자됨을 실행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01213-6-4916-18a/s-dPxUJ9JBxcI

“단단한 파도
(12. 13. 2020.)

마태복음 14:25-32

 

예상치 못한 파도가 우리를 뒤덮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전염병, 실직, 집값, 물가 등 어느 것 하나 안정적인 것이 없다. 흔히 인생의 고난을 파도에 비유한다. 파도가 왜 무서운가? 파도에 휩쓸리면 물 속에 빠져 죽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 바다를 항해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신다. 베드로가 자신도 물 위를 걷고 싶다고 용기를 냈다. 바람이 무서워 잠깐 물에 빠지긴 했지만, 초점은 그게 아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기적을 맛보았다. 단단한 파도 위를 걸은 것이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마태복음 14장 29절) 아직 이 기록을 깬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베드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라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 삶에도 동일한 적용이 가능하다. 빠질 것 같은 파도에 흔들릴 때, 주님을 보라. 남들은 빠지기 쉬운 파도라고 말하지만, 나에게는 단단한 바닥이 된다. 조마조마한 생활비, 아슬아슬한 나의 건강, 턱없이 부족한 커리어, 감당 못할 슬픔, 언제나 뒤쳐지는 나이 때문에 고민인가? 물 속에 빠져가는 것 같을 때마다 파도를 이기려 하지 말고 물 위를 걷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라. 하나님은 우리가 육지를 찾지 않고, 파도 위를 걸을 수 있음을 경험하기 원하신다.

 

차라리 바다 말고 내게 평안한 육지를 주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 성경은 우리의 인생 자체를 잠시 떠있는 바다로 묘사한다. “그들의 원수는 바다에 빠졌도다”(시편 78편 53절) 인생 누구나 이 땅에 잠시 살다가, 죽음의 파도에 빠져야 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대신 지심으로, 죽음의 파도를 건너 영생의 육지에 다다르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파도도 결코 저주가 아니다. 주님은 삶의 파도를 사용하셔서 나의 인생이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죽음의 파도 위에 서있음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내 인생의 작은 파도에 결코 빠지지 않도록 평생 나를 붙잡아 주실 것이다.

 

주님이 허락하신 파도 위에서, 육지로 가려고 애쓰지 말라. 주님이 허락하신 파도 위에서, 주님을 다시 바라보라. 죽음의 파도 위에 십자가의 다리를 펼치신 그분이, 내 앞의 파도 위에도 단단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을 여시리라.

 

[1] 인생의 고난을 보통 파도에 비유합니다. 이 파도에 휩쓸려 삶이 무너질 것만 같았던 시기가 있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마태복음 14장 28-32절을 읽어봅시다. 베드로가 물에 빠지긴 했지만,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 파도치는 바다 위에서 베드로가 경험한 일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우리 삶에 파도를 허락하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4-5] 왜 하나님은 육지 대신 파도치는 바다를 허락하십니까? 우리의 인생이 모두 휩쓸리게 될 마지막 파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그 위를 걸을 수 있도록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예수님의 행하심을 믿고, 내게 허락하신 파도 속에서 새롭게 다짐해야 할 신앙의 태도를 나누어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01206-5-4914-15a/s-ZjFnJOPYiv7

“어둠도 창조, 환난도 창조
(12. 6. 2020.)

이사야 45:7

 

환난의 한복판을 살다 보면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참 허망할 때가 있다. 코로나는 도대체 어디서 내 집 문 앞까지 왔는가? 왜 우리 가족은 이런 아픔을 겪는 것인가? 집 살 돈 없는 내 인생이 웬 말인가? 고난이 점점 사람의 통제를 벗어날 때, 삶은 원인과 결과로만 이루어지지 않음을 겸손히 인정하게 된다.

 

성경은 인간이 겪는 환난의 근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간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이사야 45장 7절) 인간의 활동 배후에서 하나님은 선한 일 뿐 아니라 어둠과 환난도 창조하신다. 하나님을 벗어난 우연한 어둠과 환난은 없다. 그래서 어둠과 환난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풀린다.

 

내가 경험하는 어둠을 인간적으로 해결하려는 모든 시도를 이제 그만두라. 적당히 치료제가 나오면 코로나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적당히 돈을 벌면 집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당히 실연을 견디면 새롭게 만남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환난을 창조하신 분이 환난을 끝내실 수 있기에, 환난과 어둠 속에서는 숨겨진 신자 각 개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더 이상 우연으로 치부하며 버티지 말라. 그 질병은 특정한 행동과 생각을 하나님이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일 수 있다. 그 늦어짐은 하나님이 새로운 길을 여시기 위한 인도하심일 수 있다. 그 불합격은 하나님이 기도의 자리로 나를 초정하시는 부르심일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면, 환난의 창조주 되심도 함께 인정하라.

 

환난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과연 선하신가?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에게도 한가지 환난을 창조하셨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이다. 자신의 아들이 환난을 통과하게 하셨다. 그 환난의 끝에 우리의 구원과 영생이 있었다. 그러므로 알 수 있다. 십자가의 환난이 내게 선한 일이 되었음을 믿는다면, 내 삶에 주시는 미시적, 거시적 모든 환난도 내 삶을 선하게 이끄시는 과정이란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환난 속에 방황하지 말고, 창조주를 찾으라. 그리고 그분이 창조하신 환난과 어둠이 우리를 회개로 이끌고, 다시 회복시킬 도구임도 믿으라. 하나님을 다시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 이것이 환난을 벗어나는 유일한 치료제이다.

 

[1] 원인과 결과로 설명되지 않는 삶의 환난 속에서 허망함과 답답함을 느꼈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4] 이사야 45장 7절을 읽어봅시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무엇을 창조하는 존재로 묘사하십니까? 인간적인 방법으로 내게 닥친 환난을 해결하거나 해석하려고 했던 모습과, 그 한계들을 나누어 봅시다.

 

[5-6]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환난이 궁극적으로 선한 것임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향해 창조하신 환난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내가 겪는 환난 속에 다시 하나님을 인정하기 위해 생각과 행동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01129-4-4913a/s-KlgPmwW0hNv

“견딤의 무용성
(11. 29. 2020.)

고린도후서 7:10

 

불합격, 실연, 비난, 질병 등 어려운 일을 당하면 처음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지나면 무뎌진다. 슬프지도 않다.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오늘을 견디며 근근이 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성경은 그냥 잘 견디는 것을 긍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린도후서 7장 10절) 삶의 근심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근심을 견디기만 하는 세상 근심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근심이 있다. 삶은 단순히 견뎌내는 것이 아니다. 견딤 속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한다.

 

잘 버티고는 있지만, 혹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본 것 아닌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버티고는 있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들어본 적 없는 것 아닌가? 오랜 기간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깊은 계획이 이해되는 순간이 있었는가? 단순한 견딤은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야 나의 견딤에 의미가 생긴다.

 

예수님은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 잘 견디셨다. 그러나 잘 견뎌내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아셨다. 그래서 이렇게 물으신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가복음 15장 34절) 견딤 속에 하나님의 뜻을 물으셨다. 예수님의 견딤 속에는, 나를 사랑하여 구원하길 원하셨던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견뎌봐야 소용없다. 견딤 속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한다. 십자가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때, 나도 확신할 수 있다. 삶에 견뎌야 할 고난이 올 때마다 단순히 견디며 지나가려고 하지 않겠다. 뜻을 찾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리라. 그 때에, 견디는 모든 과정이 내게 무용한 것이 아니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생에 어둠을 잘 견디고 있다고 냉소 짓지 말라. 하나님의 뜻이 없는 견딤은 무용(無用)하다.

 

[1] 어려움을 많이 겪다 보니 맷집이 강해지면서, 점점 기쁨도 눈물도 없이, 근근이 버티고 있는 나의 삶을 나누어 봅시다. 어느새 견디는 것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내 모습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2-3] 고린도후서 7장 10절을 읽어봅시다. 삶의 근심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견디는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과정이 빠져 있는 삶의 영역을 나누어 봅시다. 견딤 속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새로운 것을 깨닫거나 변화되었던 경험도 나누어 봅시다.

 

[4-5] 마가복음 15장 3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잘 견디셨지만, 견디는 것을 목표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물으셨습니까? 견뎌내는 내 삶 속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삶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한 기도제목들을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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