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01122-3-498-11a/s-1TYehLi8JcW

“한 번에 된 임신
(11. 22. 2020.)

창세기 38:18

 

인생에는 우연처럼 보이는 일이 많다. 그러나 아주 작고, 세부적인 일들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 간발의 차로 지각을 면한 일, 하필 그 교수님을 만나 취직 자리를 얻게 된 일, 아슬아슬하게 합격하거나 불합격 한 일, 우연한 소개로 내 배우자를 만나게 된 일 모두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 있다.

 

야곱의 아들 유다가 아내를 잃고 성매매를 한다. 돈을 줘야 하는데 지갑을 가져오지 않아 담보물을 맡긴다.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창세기 38:18) 나중에 도장과 지팡이를 받아오면서 돈을 건네면 하룻밤이 깔끔하게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일이 틀어진다.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한번에) 임신하였더라”(38:18) 나는 저 여자와 잔 적이 없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말이 도장을 흔들자, 모든 것이 들통난다.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25)

 

사소한 일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신뢰하라. 임신이 안 되는 것도, 늦어지는 것도 하나님 섭리 안에 있다. 임신이 한 번에 되는 것도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 있다. 한 주석가가 이렇게 해설한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가 사건을 지배하여 다말을 임신하게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여러 섬세한 표시 중 하나다.” 모든 벌어진 상황에 교만하지도 말고, 분노하거나 좌절하지도 말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순종할 때, 그것이 유익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때, 하마터면 무죄가 되실 뻔했다. 빌라도는 개인적으로 예수가 죄가 없다고 생각했다. 빌라도가 민중에게 묻는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마태복음 27:17) 빌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빌라도의 결정 하나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벌어졌다.

 

악한 결정이었으나,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였기에, 예수님이 억울하신 것 같아도, 섭리 속에 내게 구원이 주어졌다. 나도 확신할 수 있다. 한 끝 차이, 약간의 억울함, 사소한 아쉬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리라. 십자가로 나를 구원하신 그분이, 우연처럼 보이는 삶의 사소한 일을 통해서도 나의 삶을 유익으로 이끄시리라. 한 번에 된 임신은 우연이 아니었다. 당신의 삶도 그렇다.

 

[1] 인생에 우연처럼 보이는 사소한 일(만남, 합격, 불합격, 진로선택 등)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확연히 뒤바꾸어 놓습니다. 내 삶에도 그러한 일들이 있었다면 나누어봅시다.

 

[2-3] 창세기 38장 18절을 읽어봅시다. 유다가 성매매할 돈이 없어서 했던 일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하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발각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유다의 죄는 어떻게 발각됩니까?

 

[4-5] 마태복음 27장 17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 중요한 결정이 누구 손에 달려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빌라도의 그 결정을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내 삶에서도 사소한 일들도 하나님의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다시 소망 중에 전진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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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뒹굴기
(11. 15. 2020.)

이사야 29:15-16

 

신앙의 침체는 밖으로 나가면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삶의 모든 계획이 주님 안에 있었다. 그러나 실수도 하고, 죄도 지으면서, 신앙 밖으로 나가는 삶의 영역이 생긴다. 문제는 그때 생긴다. 이제 그 영역은 하나님 밖에서 따로 고민한다.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하나님이 외면하실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죄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을 숨기는 것이다.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이사야 29:15) 숨길 수 없는데, 숨길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산다. 내 마음대로 행하는 영역이 있는가? 하나님이 벌 주실까봐 외면하고 침묵하는 영역이 있는가? 밖에서 놀지 말라. 신앙은 안에서 뒹구는 것이다. 고민과 죄, 중독과 유혹마저도 하나님 안에서 고민할 때 구원이 있다.

 

나를 만드신 분께 나를 맡기라.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16) 창조하셨기에, 고장났어도 고쳐 주실 수 있다. 주인이시기에, 넘어졌어도 일으켜주실 수 있다. 하나님 밖에 있던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안으로 끌고 들어오라. 주님 앞에 숨김 없이 털어놓을 때, 은혜가 시작된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 밖으로 내몰고 싶은 삶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이 십자가였다. 스스로 슬쩍 피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앞에 숨김 없이 아뢰신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하나님께 숨기지 않아서 손해보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십자가는 부활과 함께 나에게 구원을 주었다. 우리의 삶도 확신할 수 있다. 예수님 안에 있으니, 예수님께 숨김 없이 아뢴 모든 문제는, 결코 손해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손해 중에도 이익을 꿈꾸는가? 역전하고 싶은가? 구덩이와 절망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스스로 망친 문제를 하나님 밖에서 스스로 처리하려고 하지 말고, 안으로 가지고 오라. 하나님 안에서 뒹굴라. 그 사랑 안에, 그 은혜 안에 여전히 내 삶의 해답이 있다.

 

[1] 삶의 불순종과 나태함이 깊어지면서, 하나님과 관련 없는 영역이 되어버린 내 삶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예: 여가시간 활용, 재정 사용, 만남, 진학, 건강관리, 잠, 언행 등)

 

[2-3] 이사야 29장 15절을 읽어봅시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주 빠지는 죄는 무엇입니까? 16절을 읽어봅시다. 범죄하고 무너진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5] 예수님께서는 삶에 닥친 부담감을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망하는 것 같았으나,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 안으로 다시 끌고 들어와 고민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01108-1-491-4a/s-ZZGsW94JoQU

“일의 진행을 내려놓기
(11. 8. 2020.)

마태복음 16:21-23

 

내 삶의 기쁨을 빼앗기는 단순한 공식이 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심각한 표정을 하고, 카톡 프로필을 바꾸고, 괜히 주변에 냉소적이 되며, 불평이 늘어만 가는 내 삶을 생각해 보라. 이유는 결국 하나다.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 삶의 한 영역이 내 마음을 꽉 누르고 있는 것이다.

 

신앙이란 내려놓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내려 놓는가? ‘일의 진행’을 내려놓는 것이다. 삶이 원하는 방식대로 풀리지 않음에도,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신뢰하는 것이 기쁨의 시작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기대하던 미래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분노한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rebuke, 꾸짖다)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태복음 16:22) 일의 진행을 내려놓지 못하니, 예수님께 화를 내게 된다.

 

기초적인 삶의 태도를 점검하라.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기쁨을 빼앗기고, 우울하고, 화가 나고, 절망한다면 아직 삶을 주님께 내려놓지 못한 것이다. 작은 일부터 큰 일까지 확실하게 내려 놓으라. 택배가 늦었다고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직장이 원하는 연봉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불성실한 것은 죄이다. 바쁘다고 불평, 외롭다고 우울, 가난하다고 슬픔에 머물겠는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모든 일의 진행을 내려놓고 주인을 섬기는 삶을 다시 시작하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이 있었다. 십자가를 피하는 삶이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마가복음 14:36) 그러나 일의 진행을 주님께 내려 놓는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6) 아버지 하나님 앞에 일의 진행을 내려놓으신 예수님의 순종 때문에,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는 용서받고, 우리는 죽음 이후에도 삶이 진행되는 영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남은 삶도 확신하라. 당신이 예수 안에 있다면, 일의 진행도 주님께 있다.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더 기도하라.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삶의 작고 큰 문제 속에 일의 진행을 주께 맡길 때, 냉소와 절망은 사라지고 평안과 기쁨을 다시 마주하게 될 것이다.

 

[1] 가끔 주변에 친한 사람들을 보면 딱 봐도 뭔가 마음을 누르는 듯한 표정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 무엇 때문입니까? 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삶의 문제 때문에 삶의 기쁨과 평안을 빼앗겼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16장 22절을 읽어 봅시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생각과 다른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내려 놓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일의 진행을 맡기지 못하여 습관적인 분노나 불안이 지속되는 삶의 영역이 있습니까?

 

[4-5] 마가복음 14장 36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원하지 않는 일의 진행을 받아들이실 때 어떻게 고백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때문에, 우리의 삶에 보장된 일의 진행은 무엇입니까? 일의 진행을 주님께 맡긴다면, 내가 고민하던 삶의 영역에서 변화되어야 할 태도와 마음가짐을 나누어 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01101-13-36-18a/s-hK6LtII1dL2

“피와 살을 갈아 넣는 삶
(11. 5. 2020.)

고린도전서 11:23-26

 

탁월한 실력, 인정받는 생활, 사랑받는 삶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기쁨과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삶의 모든 영역에 나의 피와 살을 갈아 넣어야 함을 알게 된다. 시간을 갈아 넣어야 급여가 나온다. 미친듯이 공부해야 간신히 합격한다. 한 번 말고 계속 잘해야 인정을 받는다. 어디를 가든, 난 인정받고 싶은 곳에서 피와 살을 갈아 넣어야 한다. 그래서 삶은 고단하다.

 

주변의 요구와 나의 한계에 지쳐갈 때쯤 삶의 방향을 돌아보게 된다. 세상의 인정과 사랑은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것, 어디를 가나 누군가에게 나의 피와 살을 먼저 내어주어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 내 삶이 영원히 가치 있으려면, 영원히 남는 것에 내 삶을 내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내 피와 살이 영원하려면, 삶은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피와 살을 요구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자신의 피와 살로 우리의 것을 대신하셨기 때문이다.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린도전서 11:24) 나의 살 대신, 하나님 앞에 순종한 예수님의 몸이 내게 떼어져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다.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11:25) 내 인생을 책임지고 증명해야 할 내 피 대신 예수님이 흘리신 피 때문에 하나님은 내 삶을 영원히 가치 있게 여기신다.

 

주변의 요구와, 세상이 나를 향한 기대가 높아져만 가서 지쳤는가? 나에게 피와 살을 요구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께 나오라. 그분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실 때 새로운 확신이 생긴다. 이 땅에서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나의 피와 살을 내어주지 않아도 내 삶은 가치 있다. 무언가 이루고 확보하기 전에 내 삶은 이미 온전한 계획 속에 있다. 그 사랑 속에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며, 내 삶을 주께만 드리리라.

 

실력으로 인정받기 위해 일하지 말고,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행하기 위해 일하라. 사랑받기 위해 사람을 만나지 말고, 내게 주신 그분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 만나라. 나의 돈, 나의 시간, 나의 삶이 사라지고 없어질 것에 쓰였다는 것만큼 처참한 후회가 없다. 피와 살을 갈아 넣고 후회하지 말라. 이미 피와 살을 내어 주신 분이, 내 앞에 계시다.

 

[1] 열심히 살면 재미만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내 시간과 존재를 가져다 부어야만 존속이 가능한 삶의 현실을 깨달았을 때가 있습니까? 어떤 방식으로 인정과 성과를 내며 살았습니까?

 

[2-3] 우리의 존재가 영원하려면, 내 삶은 누구에게 드려져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1장 24절, 2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먼저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4-5] 내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받은 존재라면, 내 삶의 나머지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내 스스로 인정받으려는 삶을 넘어, 하나님 안에서 내게 주신 일과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https://soundcloud.com/hansaram-church/20201025-12-31-5a/s-B6fzUezrcZA

“형상에 갇히지 않으시는 하나님
(10. 25. 2020.)

출애굽기 20:4-5

 

가치를 드러내는 모든 곳에는 형상이 있다. 애플의 로고를 보라. 로고 자체가 주는 힘이 있다. 유럽 축구 구단들의 엠블럼 자체로 영광이 느껴진다. 벤츠나 포르쉐, 루이비통 로고가 소리 없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가 있다. 사람이 만든 좋은 것은 형상을 통해 전달된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다.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그러나 형상은 본 적이 없다.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no form) 너희는 깊이 삼가라”(신명기 4:15) 하나님은 정해진 패턴(form)이나 이미지에 갇히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걸핏하면 하나님을 ‘소’로 표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형상을 금하신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애굽기 20장 4-5절) 영적인 현실감은 가시적인 것으로 생기지 않는다. 내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으려 가시적인 명품의 이미지를 소비하지 말라. 가지고 다니는 모든 미신적인 물품이 있다면 버리라. 예수님에 관하여 인간적으로 상상하게 만드는 이미지도 버리라. 보이는 이미지에는 하나님이 없다.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형상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 예수님이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골로새서 1:15)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인이 가진 유일한 형상이다. 예수님을 묵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보이지 않는 형상과 그 임재를 경험한다. 영적인 현실감, 영적인 임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온다.

 

당신의 인생을 형상에 가두지 말라. 가시적인 형상을 추구하지 말라. 하나님을 내가 생각하는 형상에 가두지도 말라. 하나님은 형상에 갇히시지 않는다.

 

[1] 내가 좋아하는 로고나 엠블럼이 있다면 소개해봅시다. 그 로고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가치는 무엇입니까? 나는 왜 그것을 추구하고, 소비하고, 소유하고 싶어합니까?

 

[2-3] 신명기 4장 15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특징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20장 4-5절도 읽어봅시다. 가시적인 이미지를 사용하면 인간이 빠지는 함정은 무엇입니까? ‘보이는 것’에 종속되었던 나의 삶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4-5] 골로새서 1장 15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형상은 누구입니까? 가시적인 것이 없어도 영적으로 충만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무엇을 통해서 그것을 느꼈습니까? 형상이 없이도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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