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일 줄 아는 사람
(2. 25. 2024.)

베드로전서 4:8

 

영향력의 시대이다. 이제 큰 기업의 광고보다 인플루언서 한 명이 물건을 홍보하는 힘이 더 크다. 작은 사건 하나가 미디어를 타면 사회 전체의 마녀사냥감이 된다. 세상은 모든 일을 키우는 데 능하다.

 

하나님은 신자를 ‘줄일 수 있는 사람’으로 부르신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베드로전서 4:8)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의 여러가지 갈등과 분노를 줄이는 역할을 해야 한다. 나를 거쳐가면 화가 줄어들고, 염려가 줄어들고, 갈등이 줄어들고, 문제가 줄어들어야 한다.

 

축소의 영향력을 추구하라. 증폭시키는 영향력만을 추구하지 말라.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보라. (1) 나는 요즘 회사나 가정에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듣고, 무슨 말을 전달하고 있는가? (2) 나를 거쳐가면 상대와 내 안에 부정적인 것들이 커지는가 줄어드는가? 일을 키워서 해결하려는 사람은 초보이다. 하나도 드러나지 않는데 일을 해결하는 사람은 고수이다. 가장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줄일 줄 아는 분이셨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로새서 2:14) 우리의 죄를 단톡방에 올리지 않으셨다. 사내게시판에 폭로하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자신의 몸에 쏟으심으로 ‘줄이셨다.’

 

줄이고 줄여 내 죄를 완전히 지워 버리신 그분 앞에서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죄를 없애신 예수님의 권세가 내 삶에도 흐른다. 나를 만나는 사람과 문제 앞에서 그 모든 부정적인 것들은 줄어들 것이다. 그 지혜로 행하라. 세상을 조용히 섬기는 자가 될 것이다.

 

[1] 요즘 작은 문제들이 크게 확산되는 모습들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까? 삶에서 경험했던 영향력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베드로전서 4장 8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십니까? 내 삶의 여러 영역들 속에서 나를 통해서 문제가 커지거나 작아졌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골로새서 2장 1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내 삶에도 여전히 예수님의 권세가 흐름을 믿습니까? 그 분의 방식대로 내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나누어 봅시다.

“속으로 말하는 죄
(2. 18. 2024.)

누가복음 3:8

 

사람은 연륜이 생길수록 사람들의 속마음이 읽힌다. ‘저 알바생은 분명 대충 하고 돈이나 많이 벌고 싶어 하겠지?’, ‘이 일을 시켜서 속으로 엄청 욕하고 있겠지?’ 속마음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사람의 스트레스 해소 창구가 된다.

 

하나님은 속마음을 알고 판단하시는 분이다. 세례 요한의 첫 사역은,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춰내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누가복음 3:8) 유대인들은 속으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우월하다는 자기 의에 빠져 있었다. 속마음이 바뀌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다.

 

속으로 말하는 죄를 살피라. 겉으로 참고 웃는 것은 매너 있는 지성인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속을 정결케 하는 것은 신자가 해야 할 일이다. 웃어주지만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다. 겸손한 척하지만 속으로 자랑하며 우월감에 만족하는 것은 마귀가 준 것이다. 내 속으로 말하는 죄를 인지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신자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된다.

 

어떻게 내 속마음이 바뀌는가? 속마음으로부터 나를 사랑하신 분을 만나면 바뀐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복음 18:35)” 나는 결코 마음으로부터 그 사람이 용서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마음으로부터 나를 미워하지 않으심을 보여주셨다. 당신은 십자가를 볼 때마다 확신해야 한다. 보잘 것 없고, 잘한 것 없는 내 인생을, 주님은 미워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깨끗한 마음이 보이는가? 마음으로부터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는가? 속이 깨끗하신 그 분 만날 때 비로소 내 인생도 변화의 갈망이 생긴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진다. 마음으로부터 깨끗하고 싶다는 갈망이 생긴다. 내가 만나는 상대에게 매너만 선물하지 말고, 깨끗한 속마음도 선물하라. 그것이 이 시대가 찾는 깨끗함이다.

 

[1] 살아갈수록 상대의 속이 훤히 보이고, 내 속을 감추며 겉을 포장하는 지혜도 늘어만 갑니다. 상대의 더러운 속이 뻔히 보였거나, 내 안에 더러움과 악을 감추며 겉을 포장했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누가복음 3장 8절을 읽어봅시다.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하며 처음 지적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기준을 핑계로 내 속마음을 정당화하는 부분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18장 3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 속마음은 언제 변할 수 있습니까? 그분의 진실된 마음을 경험하거나 느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나도 이 땅에서 속이 깨끗한 자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선악을 뛰어넘는 인도하심
(2. 11. 2024.)

창세기 31:24

 

세상의 세계관은 단편적이다. 앞으로 가면 좋다. 뒤로 가면 나쁘다. 위로 가면 좋다. 떨어지면 나쁘다. 선악도 마찬가지다. 선한 것은 좋은 것이다. 악한 것은 나쁜 것이다. 그래서 내 삶에 생기는 모든 부정적인 일들은 내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하나님의 세계관은 입체적이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도망쳤다. 라반 입장에선 나쁜 일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반이 야곱을 바라봐야 할 새로운 관점을 주신다.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창세기 31:24) 순간적인 선악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야곱과 라반 사이의 관계를 직접 다루고 계시다는 확신을 주신 것이다.

 

선악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라. 그 상사가 잘못한 것 맞다. 그 자녀가 잘못 나가고 있는 것 맞다. 선악을 기준으로 보면 다 나빠 보인다. 그러나 야곱과 라반의 인생은 선악을 뛰어넘어 하나님 앞에 붙들려 있었다. 오늘도 내가 다 통제할 수 없는 모든 선악의 상황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내 삶에 펼쳐진 갈등과 방황, 온갖 부정적인 일들 속에서 하나님이 입체적으로 행하실 일들이 분명 있다. 선악 간에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할 수 있는 그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만 선하시면 된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주신 악한 일을 선악 간에 판단하지 않으신 분이 계시다. 예수님이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태복음 27:46) 선악의 관점으로는 억울한 죽음일 뿐이다. 그러나 묵묵히 십자가를 지신 그분의 삶에 선악을 뛰어넘는 인도하심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죄인이었던 나의 구원이다. 그 구원을 보장받은 존재임을 믿는가? 나머지 삶도 선악을 넘어선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명절이다. 가족과 친지들의 온갖 군상이 다 보여 답답한 때이기도 하다. 선악 간에 함부로 말하면서 우리 가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하지 말라. 당신도 악인이었는데 구원받았음을 언제나 기억하라. 입체적인 세계로 들어오라. 분명히 내 삶의 모든 여정에 선악을 뛰어넘어 유익을 주실 것이다.

 

[1] 세상의 시각은 단편적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삶을 바라보는 단순한 시각에 허무함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내가 자꾸 내 삶을 단편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삶의 영역은 어디입니까?

 

[2-3] 창세기 31장 24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라반에게 야곱에 대해 어떤 새로운 관점을 주셨습니까? 단순히 나쁘게만 볼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체적인 일하심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27장 46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단편적으로, 그리고 입체적으로 해석해봅시다. 그의 죽음은 나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습니까? 그 구원을 믿으며, 오늘의 나의 삶과, 가족 친지들, 그리고 주변의 일들을 어떻게 새롭게 바라보아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성경을 보는 단 하나의 관점
(2. 4. 2024.)

요한복음 5:39

 

성경을 읽을 때마다 헷갈린다. 여기서는 축복, 저기서는 저주다. 여기서는 번영, 저기서는 멸망이다. 말씀을 통해 위로 받으며 확신을 얻다가도, 이 말씀을 도대체 어떻게 내 삶의 빛으로 삼아야 할지 헷갈린다.

 

성경은 오직 예수님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읽을 때에만 이해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한복음 5:39) 예수님이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의 모든 구절을 예수님과 연결시켜 읽을 때에 내 삶에 유익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두 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1) 저주를 읽어도 소망이다. 나는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였으나, 예수님이 내 모든 저주를 받으셨다. 저주를 읽을수록 나의 무력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 심각한 저주를 나 대신 감당하신 예수님이 계시니, 나는 오늘 하루 벌어진 이 모든 상황이 내게 저주가 되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을 ‘당하신 순종’이라고 한다. (2) 약속을 읽어도 의심하지 않는다. 약속만 읽으면, 그 약속이 실행되기 위해서 내가 충분히 잘 살고 있는지 늘 불안하다. 그러나 나는 충분치 않아도, 이 모든 여정 속에 약속하신 복이 내 삶에 모두 펼쳐질 것을 믿는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 모든 율법에 순종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행하신 순종’이라고 한다.

 

내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가져가지고, 그 분이 누리셔야 할 모든 복을 내게 주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한복음 19:30) 다 이루셨음을 믿어야, 오늘 내 삶에 펼쳐진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다. 고난도 저주가 아니요, 잘됨도 내 공로 아니다. 오직 그분이 내 삶에 다 이루실 계획만 신뢰하며 담대할 수 있다.

 

예수님 빼고 성경을 읽다가, 좋은 곳만 발췌하고 나쁜 곳은 덮어두지 말라. 다 읽어도 된다. 예수님 때문에 모두 은혜로 읽을 수 있다. 이것이 성경을 보는 단 하나의 관점이다.

 

[1] 성경을 집중해서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 축복과 저주가 교차되어 헷갈리거나, 내가 원하는 구절만을 찾아 붙들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요한복음 5장 39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하고 계십니까? 행하신 순종과 당하신 순종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삶의 해석을 어떻게 변화시킵니까?

 

[4-5] 요한복음 19장 3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그 시선 속에서 성경을 읽으며 새롭게 깨달았던 점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내 삶의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도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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