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공급되는 힘
(2. 16. 2025.)

잠언 24:16

 

무언가를 계속하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계속 사랑하는 일. 매일 밥하는 일. 매주 피부관리 받으러 가는 일. 매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 계속하는 것은 힘들기에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내 일상에 포기하는 일은 점점 늘어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하시는 분이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언 24:16) 의인과 악인의 차이는 다시 시작함에 있다. 모두가 실수하고, 모두가 포기하지만, 하나님은 의인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13)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 힘이 없다고 가만히 있지 않고, 다시 힘을 주실 것이라고 믿고 시도하고 행동해보라. 너무 미운 가족에게 절대 나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성도가 있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닌 것 같아 내키진 않는 마음을 가지고 연락했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풀어주셨다고 한다. 새 힘을 공급하신 것이다. 힘이 없다고 가만히 있지 말라. 힘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해야 할 일 앞에 다시 서 보라. 힘은 내 안에서 오지 않고 다른 데서 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직전 그 모든 압박감을 감당할 수 없으셨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기도한 후, 다르게 말씀하신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26:46)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공급하시는 힘으로 십자가까지 가셨기에 내게 구원이 주어졌음을 믿는가? 나도 동일한 구원을 경험할 것이다. 내 삶의 여정을 마칠 때까지, 하나님은 끊임없이 내게 필요한 힘을 다시 공급하실 것이다.

 

다시 공급받고 싶은 힘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라. 지혜? 재정? 여유? 사랑? 성실? 인내? 기쁨? 평안?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은 그 힘을 공급하실 수 있는 분이다. 무너졌던 곳에 다시 힘을 공급받을 것을 믿고 나아가라. 이전과 다른 힘을 경험하게 되리라.

 

[1] 계속하는 힘을 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힘에 부쳐 중도에 포기한 삶의 여정들을 나누어 봅시다. (관계, 학습, 기상 등등…)

 

[2-3] 잠언 24장 16절을 읽어봅시다. 의인과 악인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공급하십니까? 내 스스로 내 안에 있는 힘만을 바라보며 선뜻 다시 나서고 있지 못한 내 삶의 영역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26장 46절을 읽어봅시다. 십자가 지시기 직전 예수님이 기도하신 후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힘을 통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안에서 내 삶에도 동일한 일이 일어날 것을 믿고, 다시 공급되는 힘을 사모하며 직면해야 할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사물에 임하는 은혜
(2. 9. 2025.)

창세기 39:5

 

하나님은 어디까지 내 삶에 함께하시는가? ‘전부’ 함께 하신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 삶의 영역들이 있다. 내가 주문하는 메뉴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 내가 고르는 유튜브 영상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가? 내가 주문하는 제품, 내가 매수하는 부동산과 주식에 하나님은 함께하실까?

 

하나님은 사람과 자연 뿐만 아니라 생기가 없는 사물에도 함께하신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을 관리하자, 요셉을 통해 임한 은혜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세기 39:5) 여호와의 복이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쳤다. 모든 소유물이 복된 소유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이 단순한 물건에까지 미친다는 또 다른 근거 구절이 있다.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신명기 28:5)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쓰는 쇼핑백과 밥그릇에까지 임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시키라.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항공기 고른다. 사고를 피한다. 하나님 은혜가 사라지면 불량품 사고, 물건 쉽게 부서지고, 상한 것 먹는다. 내가 어제 상한 것 먹었는데 저주 받았다는 뜻인가? 내 아이패드 고장 났는데 저주하신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저주를 가져가셨기에, 예수님 안에서 경험하는 부정적인 것들마저 내게 유익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물건에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히 유효함을 깨달아야 한다. 온갖 기계적이고 생명 없어 보이는 곳에까지 언제나 은혜를 구하라!

 

순종하는 자에게만 이 은혜가 가능했다. 불순종한 자에게는 저주가 임해야만 했다.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혼란과 책망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하게 하실 것이며”(신명기 28:20) 그러나 예수님이 나 대신 저주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라디아서 3:13) 물건을 통해서도 저주를 받아야 했던 내 인생을 예수님이 구원하셨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오늘 담대히 은혜를 전 영역속에서 사모하라. 내가 보는 영상, 내가 타는 비행기, 내가 사는 물건마저 복이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좁은 곳에 갇혀 있는 은혜에 대한 생각을 풀어놓으라. 은혜가 내 삶 전 영역을 뛰어다니게 하라. 당신이 가는 곳마다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복이 임할 것이다.

 

[1] 여기까지 하나님이 함께 하실까? 라는 의심에 하나님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영역이 있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창세기 39장 5절을 읽어봅시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일을 시작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복이 임한 범위는 어디까지였습니까? 내가 은혜를 구하는 영역이 넓어졌던 계기가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신명기 28장 20절을 읽어봅시다. 원래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는 무엇이었습니까?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읽어봅시다. 우리 삶에 벌어지는 모든 일이 저주가 아님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의지하여 내 삶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구해야 할 영역들을 구체적으로 넓혀서 이야기 해 봅시다.

숨겨진 목표, 사랑
(2. 2. 2025.)

요한일서 4:19-20

 

인생에는 직접 추구하지 않았는데 배워지는 것들이 있다. 눈치. “난 이제 눈치를 배워야지” 다짐하는 사람 없다. 그냥 살다 보면 눈칫밥이 늘어간다. 인내. 특별히 노력 안해도 나이들면 화가 좀 줄어든다. 너그러움, 유머, 사회성… 삶은 직접적인 학습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삶을 통해 궁극적인 하나의 목표, 사랑을 가르치신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한일서 4:19-20)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을 배우지 못한 것은 곧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내가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언제나 내 삶의 숨겨진 목표에는 사랑을 배우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내 관심사만을 기준으로 오늘의 삶의 숨겨진 목표를 부정하지 말라. 간접적으로 무엇을 가르치시고 계신지 민감해지라. 바쁜 상황 속에서, 상대의 자격 없음 속에서, 상황의 열악함 중에서, 누군가를 배려하며 내가 사랑해야 할 상대와 부대끼게 하신다. 커리어, 편안함, 재미, 재정을 기준으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내 삶의 목표가 있다. 하나님이 이 상황 속에 사랑이라는 다른 목표를 함께 진행시키고 계시다면, 내 삶의 오늘은 결코 헛되지 않다.

 

도대체 그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죄인일 때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죄인인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사랑 깨닫고 배우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이다. 그 사랑 받았는가?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아마 내 삶에 다른 죄인을 만나면서 깨닫게 될 것이다.

 

오늘의 삶과, 주어진 상황을 긍정하라. 세상의 다른 기준으로는 실패로 보여도, 분명 가치 있는 여정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내가 배울 수 있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연휴 때 가족이랑 시간을 보내면서 참 답답한 상황 많지 않았는가? 불평 말라. 잘 하고 있다. 하나님의 숨겨진 목표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1] 삶에는 직접 추구한 것이 아닌데 얻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예 – 눈치, 친절, 생존력, 근성…)

 

[2-3] 요한일서 4장 19-20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을 가르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제외하고 내 삶을 내 기준대로 판단하고 있는 모습이 있다면 돌아봅시다.

 

[4-5] 로마서 5장 8절을 읽어봅시다. 나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그 사랑 앞에서 오늘 내 삶의 숨겨진 목표를 발견해봅시다.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계십니까?

성령의 감동
(1. 26. 2025.)

사도행전 16:6-7

 

이론을 안다고 현실을 살 수는 없다. 살아봐야 아는 또 다른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론상 한 달에 얼마씩 모으면 부자 된다. 이론상 하루에 몇 시간 공부하면 서울대 간다. 이론상 아이는 이렇게 키워야 한다. 그렇게 된 사람 아무도 없다. 현실엔 다른 문제들이 있다.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다. 바울이 선교지를 두고 고민할 때 성령이 마음에 감동을 주신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사도행전 16:6-7) 어디에서 말씀을 전하라는 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바울은 알 수 있었다. 성령의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내용을 다 안다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매일의 성령의 감동으로 인도함 받는다.

 

성령의 감동을 경험하고, 이것에 민감해지라. 말씀이 객관적인 인도하심이라면, 성령은 말씀에 기반한 주관적인 인도하심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객관적인 인도하심이지만, ‘지금 부모님께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를 고민하는 것은 주관적 인도하심이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2:12) 일상에 수시로 성령의 임재를 구하라. 말하기, 판단, 방향성, 마음, 통찰 모두 성령님이 주셔야 한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생각과 마음이 맞는지 검증이 어려울 때가 많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말라. 검증이 어렵다고 성령의 감동이 없다고 말하면 안 된다. 분명 성령은 우리에게 감동하셔서 주관적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예수님은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알고 계신 분이셨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끊임없이 인도하심을 구하고 경험하며 사셨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마가복음 1:12)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포함되어 있음을 믿는가? 그분이 성령을 따라 십자가까지 가셔서 내게 영생이 주어졌다. 오늘 나의 구원도 성령의 감동을 따를 때 경험하게 될 것이다.

 

차가운 신앙생활을 벗어나라. 신앙생활은 결코 이론에 머무르지 않는다. 매일의 행동, 순간의 판단 속에 성령의 감동을 사모하라. 성령을 사모하는 자에게 넘치도록 채워 주시리라.

 

[1] 이론을 안다고 삶을 잘 살 수 없습니다. 실제 살아가는 것은 이론과 다르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사도행전 16장 6-7절을 읽어봅시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선교지를 고민할 때 어떤 경험을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어떤 종류가 있습니까? 평소에 성령의 감동을 따라갈 수 있는 내면의 준비가 되어 있는지 돌아봅시다.

 

[4-5] 마가복음 1장 12절을 읽어봅시다. 모든 말씀을 아시는 예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인도함 받으셨습니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내 삶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또 지금 그 인도하심을 구해야 할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성령의 감동을 받기 위해 매일의 일상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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