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없는 삶
(3. 30. 2025.)

빌립보서 1:20

 

세상 바라보면 한없이 내 삶이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능력자들 앞의 초라한 무능, 젊은이들 앞에 힘없는 늙어감, 부유함 앞의 연약한 가난… 아무도 나에게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말없이 다가오는 인생의 부끄러움이 우리를 더 비참하게 만든다.

 

예수님을 믿은 후 내 삶의 처지는 절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전하다가 옥에 갇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잘나가는 주변 사역자와 비교해서 부끄러워할 법한데, 다른 고백을 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립보서 1:20) 예수님 만나고 바울의 삶의 목표가 달라졌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해지는 것이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부끄럽지 않다. 그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높이는 것이 유일한 목표이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예수님을 높일 수 있는 일만 생각하라. 예수님 만난 후 내 삶은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병든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병상에서도 예수님 뜻대로 행할 수 있다. 말씀과 기도로 매일을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 안에 위대한 일이다. 직업이 없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나의 인도자 되신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과정이기에 무직의 상태에서도 예수님을 높일 수 있다. 내 삶의 진짜 문제는 세상 앞에 내 자신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가려주시는 예수님이 없는 것이다.

 

뻔히 세상의 부끄러움이 있는데, 어떻게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내 마지막 부끄러움을 가려주시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브리서 2:11) 인생에 가장 큰 부끄러움은 천국 문 앞에서 예수님이 날 모른다고 말씀하시는 순간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나를 형제로 불러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분이 나의 오늘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는가? 내 부끄러운 죄악을 모두 가려주신 예수님 사랑이 너무 크기에, 오늘 나의 모든 삶은 예수님을 존귀하게 높이는 것만이 목표가 된다.

 

오늘의 처지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라. 주 안에서 당신의 처지를 절대 부끄러워해선 안된다고 서로 권면하라. 날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 예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오늘을 살자. 진정 행복한 삶이다.

 

[1] 세상을 바라볼 때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요즘 나는 어느 부분에서 그런 것을 느낍니까?

 

[2-3] 빌립보서 1장 20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의 현재 상황은 어떠합니까? 그 상황에서 어떤 고백을 합니까? 요즘 내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부분이 있다면, 내 삶의 궁극적인 목표와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드는 걸까요? 생각해 봅시다.

 

[4-5] 히브리서 2장 11절을 읽어봅시다. 사람이 마지막으로 부끄러워지는 순간은 어느 때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어떻게 대해주셨습니까? 오늘의 삶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존귀하게 하기 위해 삶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문은 여기에
(3. 23. 2025.)

요한복음 10:7,9

 

인생은 문으로 들어가는 싸움이다. 입시의 문, 취업의 문, 성공의 문… 인생에 불행과 불안을 느끼는 영역이 있다면, 문을 찾지 못하겠다는 마음 때문이다. 다음으로 가는 문이 있다는 확신만 생기면, 사람은 소망을 회복한다.

 

예수님은 내 삶의 모든 상황에 문이 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I am the gate.)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한복음 10:7,9) 문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예수님을 의지하면 들어가고 나올 수 있고, 먹을 풀(=꼴)도 얻을 수 있다. 막혀 있는 상황이 있는가? 순간 순간 예수님을 나의 문으로 모셔야 한다.

 

추상적인 말이기에 구체적으로 적용해보겠다. 삶에 문이 없다고 느낄 때마다, 예수님을 의지하여 그 순간 주시는 생각과 인도하심에 집중하면, '예수님만이 이유가 되시는 결과'가 나타난다는 말이다. 갈등의 상황에 뭐라고 말해야 하지? 순간 예수님 의지하라. 문이 열린다. 어떤 결정 해야하지? 어디로 가야하지? 예수님 의지하라. 모두 가는 길이 아닌 다른 문이 열린다.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예수님 의지한다.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 문이 닫힌 것인가? 아니다. 견고한 심령과 알 수 없는 평안으로 나를 지키시기도 한다. 예수님만이 이유가 되시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직접 문이 되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문으로 삼을 때 언제나 먹을 거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나 대신 죽는 문으로 들어가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히브리서 2:14) 들어가면 죽는 문이라는 것을 이미 아셨다. 알고도 들어가신 그분의 사랑이 내게 흐르고 있음을 믿는가? 예수님 때문에 내 마지막 죽음의 문도 천국 문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오늘도 확신할 수 있다. 세상에 온갖 그럴 듯 해 보이는 문 열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 따라 결정할 때, 내게 생명의 문이 열리리라.

 

인간적인 목표만 가지고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매일 예수님을 문으로 모시고, 하나씩 결정하고 실행해보라. 당신이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곳에서 꼴을 얻으리라. 저쪽으로 간다고 문이 열리는 게 아니다. 문은 예수님 계신 여기에 있다.

 

[1] 삶의 문이 열리지 않아 고생했던, 방황했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요한복음 10장 7절과 9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그 문으로 들어가면 무엇을 얻습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1) 순간적인 생각이나, (2) 거시적인 방향성에 마음을 두지 않고, 세상적인 기준과 목표에만 집중하는 나의 모습이 있다면 돌아봅시다.

 

[4-5] 히브리서 2장 1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내 대신 들어가신 문은 어떤 문입니까? 그분을 믿고 따라가면 내가 들어갈 죽음에 문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예수님만 신뢰하고, 오늘 내 삶의 문이 여기에서 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할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정죄 대신 은혜
(3. 16. 2025.)

로마서 8:1-2

 

예수님 믿은 이후에도 변화가 잘 안 된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제일 안 변한다. 그때 정죄감에 빠진다. ‘정죄(condemnation)’란 ‘유죄판결’이란 뜻이다. 그 행동 때문에 따라오는 형벌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너무 많이 실망하셨을 거야, 하나님이 가만 두지 않으실 거야…’ 다른 사람도 똑같이 바라본다. ‘저렇게 살면서 무슨 신앙인이래?’ 나를 정죄하는 사람은, 상대도 정죄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영원히 나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예수님 안에서는 더 이상 정죄가 없다. 미래에 다시 죄를 지으면? 여전히 정죄가 없다. 영원히 없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실망스러운 모습 때문에 나를 버리시거나, 마음이 바뀌시거나, 형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1) 나를 스스로 정죄하지 말라. 예수님 안에서 내 인생의 남은 모든 순간은 그 행동 이후에 따라오는 은혜만 남아있다. 죄를 짓고도 잘한 일이라고 말하라는 게 아니다. 죄는 죄이다. 뼈아프다. 그러나 아픈 죄의 결과가 펼쳐져도, 그것은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통로가 될 것이다. 낙심 말고 기대함으로 일어서라. (2) 상대방을 정죄하지 말라. 그 죄 때문에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자로 대하지 말라는 말이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상대의 삶에 펼쳐질 하나님의 은혜를 막는가? 당신 생각엔 막혔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 상황을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다. 은혜가 정죄를 이긴다.

 

정죄가 없으니, 마음대로 죄짓고 살면 되는가? 정죄 없는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깨달으면, 죄를 짓기 싫어진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한복음 13:1) 나에게 정죄가 없음은, 예수님이 유죄판결로 죽으셨기 때문이다. 내가 주님 떠나도, 인생 망쳐도 마지막까지 붙드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 내가 의지할 유일한 그분의 사랑을 묵상할수록, 그 사랑의 아름다움 앞에서 나는 점점 죄를 끊고 싶어지는 것이다.

 

내게 남은 인간적인 정죄의 시각을 끝장내라. 하나님은 나를 그렇게 바라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그렇게 바라보시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사랑받는 자임을 묵상하라. 그리고, 그렇게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해보라. 그 사람을 향한 정죄의 시각을 끝장내라. 은혜가 모든 것을 이긴다.

 

[1] 내 자신이나 타인의 변하지 않는 모습 속에서, 정죄감을 느꼈거나, 남을 정죄하는 일에 빠졌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로마서 8장 1-2절을 읽어봅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가 누리는 특권은 무엇입니까? 정죄의 시각 때문에 나와 주변 사람들을 은혜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모습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13장 1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정죄가 없다는 이유로 죄에 계속 남아있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나와 주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다르게 바라보아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매력의 함정
(3. 9. 2025.)

사사기 16:17

 

매력이 있으면 살기 쉽다. 그래서 세상은 불공평하다. 한 회사 인사팀장이 면접 지원자에게 말했다. “장담하는데, 너는 그냥 대충 가도 뽑힐 거야.” 매력은 남보다 나를 우월하게 만드는 힘이다.

 

하나님보다 매력을 의지하면 망한다. 삼손은 머리가 길고 힘이 셌다. 머리 자르면 힘도 빠진다. 하나님이 주신 매력임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매력 앞세우다가 망한다.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사사기 16:17) 남보다 더 가지고, 더 잘하고, 더 우월한 부분이 있는가? 그것이 내 인생을 무너뜨리는 함정이 된다.

 

매력을 철저히 하나님 앞에 절제하라. 매력을 의지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매력을 이렇게 정의해보라. 매력이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덜 필요해지는 것’이다. 돈이 있어서 기도 덜해도 된다. 외모가 되기에 언제나 어필이 가능하다. 젊고 체력이 좋아서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다. 머리가 좋아서 일처리가 빠르다. 바로 그 방식으로 망한다는 뜻이다. 매력을 의지하면 머리가 잘린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매력을 자랑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진다.

 

하나님 앞에 서면 매력의 기준이 바뀐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의인의 매력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나는 하나님 눈에 매력을 끌 수 없었으나, 예수님이 나 대신 자신의 매력을 내게 주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4) 그분이 완전한 사랑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가? 비로소 그 때에 세상의 매력을 의지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

 

매력으로 하나님을 막지 말라. 주신 매력에 갇혀, 하나님의 매력이 드러나지 않는 함정에 빠지지 말라. 당신을 통해 드러내실 하나님의 영광은 지금 그 매력보다 훨씬 크다.

 

[1] 매력 있으면 살기 쉽습니다. 내 매력을 의지하거나, 누군가의 매력이 부러웠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재능, 외모, 키, 재력, 언변 등…)

 

[2-3] 사사기 16장 17절을 읽어봅시다. 삼손의 매력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매력은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지금 하나님이 덜 필요해지고, 나의 매력을 의지하여 일을 감당해 나가는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로마서 3장 10절을 읽어봅시다. 이 땅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에서 매력 있는 존재는 누구입니까? 2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복음 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하나님보다 나의 매력을 앞세우지 않기 위해 삶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