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년 동안 함께하심
(6. 29. 2025.)

시편 50:23

 

누군가에게 잘해주고 싶었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감사를 표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선의를 베푼 것인데 감사를 모를 때, 돕고 싶었던 그 사람은 가장 싫은 사람으로 바뀐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감사이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편 50:23) 감사는 예배이자, 하나님을 인정하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다. 잘 보여야 할 사람 쫓아다니며 온갖 선물과 축의금을 보낼수록,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6월의 마지막 주일이다. 반년이 지났다. 마땅히 감사해야 할 일을 생각해보고, 한해 동안 나와 우리 가정에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돌아보라. 잊어버리고 있었던, 상대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고 의도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감사를 회복하는 길이다. (1) 하나님께 감사하라. 감사로 제사 드리라고 했다. 제사는 예배다. 나만이 아는 감사를 예배의 헌신과 헌금으로 표현하라. 내가 사람에게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그 금액과 빈도가 큰지 점검하라. 감사헌금은 일상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일들에 쏟는 시간보다, 더 많이 예배 드리라. 그것이 감사의 표현이다. (2) 사람에게 감사를 표현하라. 당연히 감사한 것을 서로가 안다. 그 평범한 것에 감사를 인식하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전달하라. 상대방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다.

 

예수님이 감사하셨던 순간이 있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마태복음 26:27) 잔을 들고 감사하셨다.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사건 앞에서 감사하신 것이다. 당면한 죽음 앞에 감사하셨던 예수님의 감사 고백 때문에, 내 삶에 영생이 주어졌음을 믿는가? 현재 당면한 일들도 그 피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기에, 오늘 내 삶이 어떠하든지 무조건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전반기가 지나고 하반기를 맞이하기 전에, 모든 원망과 감사치 못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라. 마땅히 그분을 인정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반기를 맞이하라. 반 년 동안 내 삶에 여전히 함께하신 분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1] 감사를 모르는 사람을 보며 좋았던 기분이 완전히 나빠졌던 경험이 있습니까? 반대로 감사의 표현을 받아 기뻤던 경험이 있습니까? 감사를 통해 주고받았던 기쁨과 실망감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시편 50편 23절을 읽어봅시다. 여호와께 제사드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내 삶에 하나님과 사람에게 합당히 감사를 표현하는 습관이 되어있는지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26장 27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잔을 들고 고백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 잔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잔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오늘 어려운 내 삶 속에서도 내가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반 년 동안 가장 감사했던 일들을 나누고, 표현해봅시다.

최전방 기도(frontline prayer)”
(6. 22. 2025.)

마태복음 6:33

 

기도를 하다 보면 하는 말이 돌고 돈다. 직장, 사업, 가족, 돈, 자녀, 가끔 교회… 어느 순간 기도는 주문으로 바뀌고 흥미를 잃는다. 어느 순간 기도는 내 삶을 ‘유지(maintenance)’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삶의 지평이 더 확장되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이 구절의 앞 뒤에는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유지하는 기도(maintenance prayer)’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돌파를 명하신다.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다른 일들을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실행해야 한다. 그것을 ‘최전방 기도(frontline prayer)’라고 한다.

 

단순한 삶의 필요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을 구하는 기도를 시작하라. 유지하는 기도의 예는 이런 것들이다. “오늘 하루 사고 안나고 안다치게 해주세요”, “사업과 주식 대박나게 해주세요”, “빨리 취업이 되게 해주세요” 필요를 직접 구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8) 최전방 기도는 이런 것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면서 쓰임 받기 원합니다 그에 맞게 내 삶을 열어 주소서”, “우리 가정이 여기서 멈추지 않길 원합니다 가정을 세우신 목적을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헌신하게 하소서”,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하실 일들을 드러내시기를 원합니다 이 교회에서 나에게도 역할을 주소서”, “온전히 죄를 벗어나는 회개의 역사가 있게 하소서”, “나를 통해 영혼이 전도되게 하시고 가정과 직장이 변화되게 하소서” 오늘 당신의 기도제목은 어떠한가? 넓은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고 해변을 맴돌진 않는가?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셨는가?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11) 자신의 필요를 좇지 않으신 그분의 기도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좋은 영생이 주어졌음을 믿는가? 오늘 나도 그 기도의 권세를 사용해야 한다. 필요를 좇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적극적으로 최전방에 참전하라.

 

삶이 위축될 때, 기도가 같이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십자가라는 위축되는 사건을 기도로 돌파하신 예수님의 권세가 내게 있으니, 내 삶과 가정도 그 방식으로 풀려나갈 것을 믿으라. 시궁창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담대히 기도하라. 지금은 기도할 때이다.

 

[1] 요즘 나의 기도생활을 돌아봅시다. 돌고 도는 기도생활 속에 영적인 감각이 무뎌졌다고 느꼈던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6장 33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기도를 명하십니까? 마태복음 6장 8절을 읽어봅시다. 우리의 필요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나는 어떤 세상의 필요와 염려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는지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17장 11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결과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졌습니까? 내 삶도 예수님의 권세를 힘입어, 어떤 방식으로 기도의 방향이 바뀌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집안의 자기 의
(6. 15. 2025.)

마가복음 3:34-35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는 것은 ‘집안 이야기’다. “우리 아빠는 목사님이야” 온 유치원 엄마들이 내 정체를 다 안다. “아직 부모님이 예수님을 안믿으세요”, “친척이 사업에서 크게 실패해서요”, “자녀가 좀 문제가 있어요” 집안에 대한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일상의 대화를 지배한다.

 

하나님은 가족을 통해서 오는 의로움과 정죄를 깨뜨리시는 분이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불렀을 때 이렇게 말씀하신다.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가복음 3:34-35)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는, 가족 때문에 오는 자랑, 가족 때문에 오는 절망이 더 이상 없다는 말이다.

 

두 방향으로 적용해보라. (1)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의 가족을 통해 오는 저주를 끊으셨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집안에 일어나는 일들, 집안의 수준, 가족들의 무식함, 질병, 부끄러움 때문에 절망하지 말라. 하나님이 이 가정을 통해 일하실 새 일이 있음을 믿고 그 안에서 충성하라. 특별히 상대를 상대 집안의 수준으로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라. (2) 예수님이 순종하심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집안이 되어 내게 그 복이 올 것을 믿는가? 함부로 집안 자랑 하지 말라. 예수님을 높이지 않는 집안은 아무리 잘나도 우상숭배 집안이다. 하나님이 우리 가족에 주신 은혜를, 가족이 이룬 의로움으로 변질되지 않게 하라.

 

예수님이 자기 집안에 새로운 사람을 들이셨다. 그것이 우리의 신분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2) 그리고 나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브리서 11:16) 이것이 거저 받은 은혜임을 믿는가? 이것을 믿는다면 오늘의 삶도 변해야 한다. 더 이상 나는 집안을 근거로 하여 내 삶과 타인을 의롭게 여기거나 정죄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콩가루 집안이라도 늘 담대하고 감사하라. 명문 가문 출신이라도 늘 겸손하고 평범해지라. 신자라면 집안의 자기 의가 깨져야 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아, 집안의 저주와 상처를 넉넉히 이겨내고, 집안으로부터 오는 우월함을 깨뜨리라. 이것이 신자에게 주신 자유의 길이다.

 

[1] 집안 이야기를 할 때마다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기억나는 경험들과 대화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마가복음 3장 34-3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가족들이 자신을 찾을 때 무엇이라 대답하셨습니까?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내 삶과 타인의 삶에 대하여 집안을 근거로 한 정죄와, 우월함에 빠져있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4-5] 요한복음 1장 12절을 읽어봅시다. 이제 나는 누구의 가족입니까? 히브리서 11장 16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집안의 자기 의를 버리고, 절망과 교만 모두를 벗어나 내가 어떻게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죽은 것을 뒤로하기
(6. 8. 2025.)

마가복음 16:2-3

 

사람마다 자기 인생의 무덤이 있다. 헤어나오지 못하고 집착한다. 아쉽게 떨어진 시험, 옛날에 헤어졌던 남자친구, 손절하지 못하고 있는 주식 종목. 실패했다, 지나갔다, 잃었다고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이 힘드니 무덤을 맴돈다.

 

하나님은 이미 죽은 것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이 죽으셨다. 예수님께 향품을 바르려고 여자 셋이 무덤으로 간다. 어차피 안 되는 일이었다. 무덤이 큰 돌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마가복음 16:2-3) 하나님이 여자들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셨다. 첫번째, “돌은 내가 굴린다!” –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4) 두번째, “너는 다른 곳에 신경 써라!” –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6-7)

 

내 삶의 죽은 자리에서 벗어나라. 첫 번째, 돌은 내가 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굴리신다. 이렇게 적용해보라.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삶의 문제에 매몰되어 있지 말라. 이제 와서 학력 못 바꾼다. 취업이 안되는 업황인 걸 어쩌겠나? 변화되지 않는 부모와 자녀 계속 따라다니지 말라. 돌을 굴리는 역사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신경 끄고 자유하라. 두 번째, 지금 집중해야 할 다른 주제에 몰입하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신다. 오히려 내게 새로 주신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 지금 내게 원하시는 위치, 원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거기서 주님의 일하심을 새로 볼 것이다.

 

예수님이 법원에서 증언하셨다. 그런데 돌이 굴러가지 않는다.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누가복음 22:67,70) 아무리 내가 그리스도라고 말해도 움직이지 않는 돌을 굳이 굴리려고 하지 않으셨다. 죽음까지 밀리셨다. 그러나 살아나셨다. 예수님이 나 대신 죽음까지 밀리셨기 때문에, 나도 내 인생에 마지막 움직이지 않는 돌, 죽음에서 구원받을 것을 믿는가?

 

오늘의 구원도 그렇게 올 것이다. 내 삶의 큰 돌을 너무 애써 옮기려고 하지 말라. 죽은 것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가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일하심을 새롭게 만날 것이다.

 

[1] 내가 벗어나지 못했던 삶의 무덤은 무엇이었습니까? 왜 헤어나오기 어려웠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마가복음 16장 2-3절을 읽어봅시다. 여자들이 무덤에 왜 갔습니까? 가봐야 소용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4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나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었습니까? 내가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하는데, 계속 내려놓지 못하는 삶의 주제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누가복음 22장 67절과 7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말해도 믿지 않자 어떻게 하십니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내 삶의 무덤을 주님께 맡기고, 새롭게 집중하고 변화되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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