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컷칼럼10 “남자가 동역자를 만드는 법
(10. 8. 2014)

 

여자는 어떻게 서로 친해지는가? 비밀을 통해 친해진다. “아무한테도 말 하지마, 그 남자가 내 친구를 버리고 도망갔대!” “어머! 나쁜 놈!” 비밀을 아는 둘은 가장 친한 친구가 된다.

 

비밀의 위력은 남자에게도 적용된다. 그러나 남자의 비밀은 여자와 다르다. 여자의 비밀은 관계 중심적, 감정 중심적이다. 그러나 남자의 비밀은 정보 중심적, 사명 중심적이다. 남자는 정보를 나눌 때 동역자가 된다. 남자는 사명을 나눌 때 친구를 얻는다.

 

남자는 결코 친하지 않은 사람과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 어떤 사업을 할 것인지, 어디에 투자할 것인지, 어떤 공부법을 활용하는지 절대 말해주지 않는다. 남자가 남자에게 정보를 의도적으로 흘린다는 것은, 상대방을 친구로, 동역자로 신뢰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예수님에겐 열두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동역자는 따로 비밀을 보게 하셨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마가복음 5:37) 세 명의 제자들만 따로 부르셨다. 따로 정보를 공유하셨다. 따로 경험하게 하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신뢰하는 제자들을 대하시는 방법이다. 기억하라. 예수님은 모든 제자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중요한 제자들은 남들과 다르게 대하셨다.

 

남자는 같이 골프친다. 같이 등산한다. 여자는 이해를 못한다. 골프가 그렇게 재미있는가? 등산이 그렇게 재미있는가? 골프와 등산이 중요한 게 아니다. 골프는 정보가 유출되는 시간이다. 등산은 사명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남자는 이야기를 흘리는 것만으로 동역자가 된다. 정보를 흘리는 것만으로 친구가 된다. 남자에게 중요한 정보를 듣는 남자는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아, 이 사람이 나를 신뢰하기 시작했구나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남자 세계의 핵심이다.

 

남자들은 기억하라. 남자 선배나 어른이 괜히 놀자고 나를 부르면 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생각해보라. 그 선배가 무슨 낙이 있다고 후배를 부르겠는가? 그 어른이 무슨 즐거움을 누리겠다고 당신을 찾겠는가? “왜 재미없게 등산해요? 전 안 갈래요.” 이런 철 없는 대답 하지 말라. 평생 재미있는 것만 하며 살 수는 있겠지만, 결코 동역자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남자 동역자를 얻고 싶은가? 상대가 비밀을 흘릴 때 귀담아 들으라. 어떻게든 당신에게 비밀을 말하게 하라. 신뢰할 수 있는 남자 동역자를 세우고 싶은가? 그에게 먼저 정보를 흘리라. 그의 귀가 비밀 정보로 가득차게 하라. 남자에게 특별한 남자는 따로 있다.

 

수컷칼럼9 “두려움을 녹이는 남자
(10. 1. 2014)

 

남자의 세계는 경쟁이다. 경쟁에서 도태되면 죽는다. 그래서 실력이 없으면 남자 세계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축구 못하면 중고등학교 때 친구 사귀기 어렵다. 공부 못하면 공부 이야기 하는 학생들 사이에 낄 수 없다. 축구를 같이 못하니 갈수록 더 운동에서 멀어지고, 공부 이야기를 같이 못하니 시간이 갈수록 양아치가 된다. 도태된 남자는 갈수록 더 도태되는 것이 세상 논리다. 도태된 남자는 두렵다. 도태된 남자는 서럽다.

 

남자는 실력이 있으면 남을 도태시킬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자를 남을 도태시키는 자로 부르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남자를 두려움을 녹이는 자로 부르셨다. 하나님은 당신이 가진 실력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신다. “당신은 어떻게 실력을 사용하는가?” 이 질문에 답해보라. 이것이 남자의 근본을 가르는 중요한 질문이다.

 

헬스장에 처음 간 20대 청년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 느낌을 이렇게 표현한다. “아무 것도 안 했는데 도태되는 느낌 아세요?” “가만히 서있는데도 따돌림 당하는 것 같은 느낌 아세요?” 그는 간신히 벤치프레스를 들었다. 손은 떨리고, 숨은 어떻게 쉬는지도 몰랐다. 더 쪽 팔리는 일이 발생했다. 덩치 큰 자기 또래 남성이 일부러 옆에서 50kg, 60kg를 쉽게 들어올리더라는 것이다. 남자는 이렇게 실력으로 남을 공격할 수 있다. 그것이 남을 도태시키는 남자의 악함이다.

 

그 친구에게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트레이너였다. “처음 오셨죠? 자 같이 해봅시다. 제가 자세를 봐 드릴게요.” 두려움이 녹았다. 이 헬스장에서 대장인 사람이 다가와주니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다. 상황은 결코 좋지 않았다. 너무 힘이 없어서 봉만 들어올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감이 생겼다. 봉만 들어올리는 것도 얼마나 중요한 운동인지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트레이너는 막연함과 두려움을 녹여준 것이다. 트레이너는 매우 친절했다. 일부러 시간을 더 쏟았다. 왜 자세를 그렇게 잡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일부러 옆의 그 자랑하는 친구에게 자세가 바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 헬스트레이너는 분명 도태시키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두려움을 녹이는 남자였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 갑자기 아이들이 찾아와 소란스럽게 했다. 제자들이 실력을 내세우며 도태시켰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마가복음 10:13) 이런 뜻이다. “지금 예수님을 만질 때냐 이 어린 것들아? 우리가 지금 얼마나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분위기 깨지 말고, 저리 꺼져!”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들을 도태시키는 제자들을 꾸짖으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마가복음 10:15-16) 예수님은 결코 남을 도태시키지 않으셨다. 일부러 어린 아이들을 안으셨다. 일부러 제자들 보는 앞에서 축복하셨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늘 남을 도태시키려는 시도들을 무력화시킨다. 그것이 진짜 실력이다.

 

어디를 가나 두려움을 녹이는 자가 되라. 공부를 잘하는가? 공부 못하는 친구에게 다가가라. 모든 노하우를 다 알려주라. 공부에 대한 두려움을 녹여주라. 인간관계가 좋은가? 일부러 친구가 없는 사람을 당신 옆에 두라. 당신이 최고로 소중히 여기고 있음을 일부러 드러내라. 관계의 두려움을 녹여주라. 축구를 잘하는가? 게임이 좀 어려워져도, 자꾸 공을 주고 기회를 주라. 축구에 대한 두려움을 녹여주라. 당신이 실력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그 선택을 아무도 욕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 때문에 도태되는 사람들은 살아나고, 모든 편가름이 녹아 내릴 것이다. 실력의 사람이 되라. 그리고 상대방의 두려움을 녹이는 사람이 되라. 남자의 실력은 그렇게 쓰는 것이다.

 

수컷칼럼8 “중독과 싸우는 남자
(9. 24. 2014)

 

창녀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예외 없이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영국 작가 체스터튼의 말이다. 남자는 늘 자신을 흥분시킬 무언가를 찾으며 산다. 하나님을 떠나면 그 흥분은 게임 중독, 성 중독, 담배 중독, 술 중독으로 드러난다. 내 몸에 내가 지배당하는 그 기분. 그것이 중독이다.

 

남자는 기질적으로 싸움을 좋아한다. 그러나 마귀는 그 싸움의 방향을 틀어놓았다. 남자의 싸움은 타인을 향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내면의 악과 싸워야 한다. 남자의 싸움 대상은 중독이다. 중독에 대해 몇 가지 실질적인 지침을 살피고자 한다. 중독을 벗어나서 하나님을 찾는 싸움, 그것이 남자의 싸움이다.

 

첫째, 중독과 내 정체성을 연결시키지 말라. 이 시대에 중독이 왜 더 위험한가? 커리어의 높이와 중독의 깊이 차이가 더 심해져서 그렇다. “내가 이렇게 훌륭한데, 이렇게 일 잘하는데, 이렇게 예쁜데!” 이런 사람이 중독에 빠질수록 더 절망이 심하다. 전 제주지검장이 공공장소에서 음란행위를 하다가 적발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한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그럴 수 있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지방검찰청검사장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선 안 된다. 중독에 빠진 모습도 정체성이 되어선 안 된다.

 

우리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용서하신 예수님에게서 출발한다. 중독에 빠진 나를 먼저 사랑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라. 커리어와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라. 커리어의 높이와 중독의 깊이는 상관없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 그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둘째, 어쩔 수 없다는 최악의 태도를 버리라. 하나님은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제일 싫어하신다. “다들 술 한 잔씩은 하잖아”, “다들 야동 보던데?” 당신 기준은 사회 분위기가 아니다. 당신의 기준은 예수님이다.

 

당장 끊지 못해도 예수님이 옳다고 인정하라. “이 정도는 문제 되지 않는다고 자꾸 말해보라. 결코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태복음 9:13) 쉽게 읽어보라. “나는 정상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중독에 빠진 사람을 부르러 왔노라부르심을 받고 싶으면, 빨리 인정하라. 인정하는 것이 최고의 겸손이다.

 

셋째, 영적인 모멘텀을 회복하라. 현재 나의 상태와 관계 없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라. 밤 새서 야동 보고 새벽기도 가라. 술 마시고 와서 선교에 가라. 여자랑 자고 와서 예배 드리라. 담배 피고 와서 팀모임 하라. 일단 그것부터 시작하라. 당신은 결코 세상에서 중독에서 벗어날 모멘텀을 얻을 수 없다.

 

모멘텀은 예수님이 주신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립보서 1:6) 착한 드라이브를 거시는 분은 예수님이다. 예수님께 무조건 가까이 가야 중독을 벗어날 힘을 얻는다. 기억하라. "지금 내 상태와 관계 없이" 가까이 가야 한다.

 

넷째, 육체를 분석하라. 내 안에 마귀만 떠나면 내 몸이 자유로워 진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우리는 영혼과 동시에 육체가 있는 존재다. 육체는 습관이 남는다. 인간의 쾌락에 가장 중요한 기관은 뇌이다. 뇌는도파민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거! 그거! 그거!’라고 욕구를 자극하는 물질이 도파민이다. 뇌는 가을의 갈대숲과 같다. 갔던 길은 편해진다. 안 갔던 길을 가려면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편하고 기분좋은 길만 가려고 한다. 중독 때문에 실제로 뇌의 모양이 그렇게 변한다. 그래서 변화에 시간이 걸린다.

 

중독에 빠진 한 청년에게 물었다. “만일 당신의 뇌가 정말로 중독이 필요하도록 길들여져 있다면 어떡하시겠어요?” 청년이 답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꽤 괜찮은 일이죠. 그렇다면 내가 완전히 패배자란 느낌이 들지는 않을 것 같아요.” 당신은 패배자가 아니다. 뇌를 재조정하는 싸움을 하고 있을 뿐이다. 육체에 대해서 명확히 파악하라. 승리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싸움에 도전해보라. 중독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쳐보라. 피로, 우울, 집중력 감소, 성적 흥분, 분노, 긴장, 신경과민, 두통, 숨 가쁨, 짜증이 몰려올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 제대로 싸우고 있다는 신호이다. 네 가지 기준을 붙들고 담대히 전진해보라. 남자가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승리는 마귀를 이기는 승리 뿐이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브리서 12:4)

 

 

수컷칼럼7 "기준의 근원이 다른 남자"

(9. 17. 2014)

 

 

로랑 베그의 흥미로운 실험을 소개한다. 알콜에 대한 심리실험이다. 실험 대상에게 무알콜음료, 저농도알콜음료, 고농도알콜음료를 마시게 했다. 실제 알콜 도수는 알려주지 않았다. 무작위로 알콜 농도를 속여서 통보했다.

 

그리고 연구자 중 한 사람이 실험대상들을 도발한 후 공격성을 측정했다. 누가 가장 공격적이었을까? 고농도알콜에 취한 사람이 가장 공격적이었을까? 아니다. 술과 무관하게 원래 공격성이 높은 사람이 강한 공격성을 보였다. 그리고 스스로 마신 술의 양이 많다고 생각한 사람이 공격적으로 반응했다. 진짜 마신 술의 양은? 전혀 관련이 없었다.

 

성적 흥미를 높이는 실험을 연구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객관적인 술의 양은 중요하지 않았다. 스스로 술을 많이 마셨다고 생각하는 주관적 판단이 중요했다. 무알콜이었음에도, "난 독한 술을 많이 마셨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성적인 반응을 가장 높게 보였다. 이제 알겠는가? 사람들은 진짜 술에 취해서 행동 하는게 아니라, '술을 마시면 이럴 수 있다'고 평소에 생각했던 그 행동을 하는 것이다.

 

술 마시면 사고칠 수 있다고 후배 대학생에게 계속 말해보라. 그런 사회 분위기 속의 대학생들은 앞으로 술 마시면 분명 사고를 칠 것이다. 술 마셔도 그런 행동은 절대 못 봐준다, 술 마셔도 일반적으로 그런 행동은 안한다고 계속 이야기해보라. 사회 분위기가 그러면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술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목소리가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당신은 누구 목소리를 듣는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목소리도 들리지만, 세상의 목소리도 같이 들린다.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마태복음 13:25) 곡식 안에는 가라지가 섞여 있다. 인생에는 원수의 목소리, 마귀의 목소리가 분명히 있다. 그 목소리로 남자의 행동을 규정하면 안 된다. 남자 행동 기준은 하나님이 규정하셔야 한다.

 

남자를 향한 마귀의 목소리가 무엇인가? 스트레스 받으면 술 좀 마실 수 있다, 성욕을 못 참으면 여자랑 잘 수도 있다, 술 마시면 사고칠 수 있다, 남자는 화나면 폭력 좀 쓸 수도 있다... 그런가? 주변을 살펴보라. 친구 중에 음란한 행동 하지 않고, 술 안 마시고, 폭력적이지 않은 친구를 떠올려보라. 그 친구가 정말 성욕과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그렇게 산다고 생각하는가? 절대 아니다! 넘치는 욕구와 넘치는 스트레스가 있다. 미칠 것 같은 분노와 고민도 있다. 그럼에도 행동은 다르다. 왜? "나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기준에 대한 근원이 달라서 그렇다.

 

당신의 행동의 이유를 물을 때, 그 이유에 대한 대답이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 생각은 당신 생각이 아니다. 당신 생각은 세계 최초가 아니다. 누군가 이전에 했던 생각을 따라갈 뿐이다. 그 중에 진짜와 가라지가 있을 뿐이다. 당신은 지금 누구 생각을 따르고 있는가? 그 기준의 근원이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인가? 칼 막스인가? 존 로크인가? 헤겔인가? 루소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인가! 목소리의 근원을 점검하라. 기준의 근원을 점검하라. 기준의 근원을 예수님께 두라. 결코 흔들리지 않는 남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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