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컷칼럼14 “끝까지 플레이어로 남으라
(11. 5. 2014)

 

남자의 삶에 실패가 많다. 불합격을 변명할수록, 실패의 이유를 설명할수록 야유의 목소리는 더 커진다. "적당히 해라. 정도껏 해라. 조용히 좀 있어라." 그래서 결심한다. "정리하자. 그만두자. 포기하자. 플레이어(Player)는 그만하자. 옵저버(Observer)가 되자" 주변에 관객이 많을수록 배우는 또 실패할까봐 떨리는 법이다. 그래서 플레이어가 되기를 포기한다. 무대 위로 올라오기를 포기한다. 배우로 참가하기보다는 관객의 티켓을 끊는다. 관객은 야유할 자유가 있다. 욕먹기 싫어서 다 옵저버가 된다. 옵저버 사회, 그것이 이 시대 남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옵저버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끝까지 남자를 플레이어로 부르신다. 예수님은 남자의 실패를 용납하신다. 그러나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가지 않는 것에 분노하신다. 변명을 싫어하신다.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누가복음 21:14) 사명 앞에서 실패를 핑계로 옵저버가 되는 것, 미리 변명을 생각하는 것, 미리 발 뺄 준비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남자의 모습이 아니다.

 

삼손은 혼돈의 시대에 이스라엘의 힘 센 판관이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남자였지만 교만했다. 힘을 남용하여 사회를 혼란스럽게 했다. 결국 블레셋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두 눈을 뽑히고 재주를 부리는 신세가 된다. "블레셋 모든 방백들도 거기에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 명 가량이라 다 삼손이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사사기 16:27) 삼손은 판관 역할을 포기하고 싶어졌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부담스러웠다. 블레셋 밑에서 재주부리며 옵저버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삼손은 재주를 부리다가 깨닫는다. “블레셋 대중들에게 재주나 부리고 살아봐야 평생 내가 회복될 일은 없겠구나.” 삼손은 시선을 옮겼다. 대중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하나님께 마지막 기회를 달라고 기도한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사사기 16:28) 삼손은 승리하고, 장렬히 전사한다. 삼손은 재주부리는 옵저버가 되지 않았다. 끝까지 플레이어로 싸웠다.

 

MC몽이 복귀를 했다. 나도 그가 잘못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찬반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의 신곡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을 들어보라. 그는 기독교인이다. 능력 있고, 잘나가다가 넘어진 자신을 고백한다. 더 혼나야 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그러나 MC몽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이성에게 고백하는 가사라고 보기엔 너무 깊은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한다. “그대가 있음에 하나도 안 두려워” “이상해 그때가 안 그리워” “이제야 내 모습이 안 더러워이것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만 할 수 있는 고백이다. 이것은 가스펠이다. MC몽은 대중에게 더 욕먹을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전진하다가 죽겠다는 것이다. 끝까지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내게 주신 필드의 플레이어로 남겠다는 것이다. MC몽은 옵저버가 되기를 거부했다.

 

MC몽을 열심히 욕하라. 열심히 멸공의 횃불을 부르라. 죄값을 덜 치렀다고 생각되면 더 욕하라. 비꼬는게 아니라 진심이다. 욕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한 가지만 예언하겠다. 당신이 곧 MC몽이 될 날이 온다. 당신이 삼손이 될 날이 온다. 그때 주변에 똑같이 욕설이 들릴 것이다. 그때, 옵저버 되지 말고 MC몽처럼 행동하라. 그때, 옵저버 되지 말고 삼손처럼 행동하라. 대중은 결코 당신이 자숙한다고, 옵저버로 산다고 용서해주지 않는다. 당신이 영원히 죽기를 바란다. 당신이 일어서기를 바라는 것은 예수님 한 분 뿐이다. 그러니 욕먹을 각오 하고 다시 일어서라. 반드시 다시 일어나라. 죽더라도 플레이어로 죽으라. 끝까지 플레이어로 남으라. 그것이 실패 후 예수님 만난 남자의 영광이다. 두 눈이 뽑혀도 무대 위로 다시 올라오라. 당신을 무대 위에서 기다리겠다. 그것이 남자의 영광이다. 그것이 남자의 복음이다.

 

수컷칼럼13 “여자의 눈을 뜨게 하는 남자
(10. 29. 2014)

 

여자는 평생 도울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다. 여자는 늘 돕다가 손해보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여자는 도울수록 자존감이 생긴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친구를 돕는다. 남편을 돕는다. 자녀를 돕는다. 평생에 무엇인가를 위해 헌신한다. 그리고 도와준 그 사람에게서 사랑 받는 것, 그것이 여자의 최고의 기쁨이다.

 

여자의 약점은 무엇인가? 도울 줄은 아는데, 누구를 도와야 하는지는 모른다는 것이다여자는 눈 먼 사랑만 할 줄 안다. 나를 사랑해주기만 하면 다 줄 수 있는 것이 여자이다그래서 나쁜 남자는 여자의 기쁨이 무엇인지 잘 안다. 그리고 그것을 악용한다. 젊었을 때 돈 많은 여자를 사랑하는 척 하여 그 여자친구에게 살림을 뜯어 내고, 여자를 버리는 친구를 보았다. 이 여자는 왜 당했는가? 눈 먼 사랑을 했기 때문이다.

 

여자는 하나님의 남자를 만나야 눈이 열린다. 남자는 하나님을 만나야 여자의 눈을 뜨게 만들 수 있다. 남자는 여자의 눈을 열어줘야 한다.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 무엇을 도와야 하는지 알려줘야 한다. 그것이 남자의 사명이다. 남자가 여자의 눈을 뜨게 하면, 여자는 최고의 영광을 맛본다.

 

예수님은 늘 제자들과 함께 하셨다.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하였고”(누가복음 8:1) 제자들은 모두 남자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자를 무시하셨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남자의 입 발린 소리보다 눈이 열리는 것임을 잘 아셨다. 그래서 여러 여자를 만나고, 위로하고, 치료하셨지만 궁극적 목표를 잃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언제나 여자의 눈의 열어주셨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8:2-3) 예수님을 만난 여자들은 섬겨야 할 대상을 찾았다. 예수님을 만난 여자 모두 자기 소유를 통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섬기는 데에 인생을 투자했다. 예수님의 자매 사역은 탁월했다. 예수님을 만난 여자들은, 모두 여자로서의 눈을 뜬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남자인지 확인하고 싶다면, 당신이 스치고 지나간 여자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확인하라. 그 여자가 지금 어디를 쳐다보고 있는가? 또 다른 남자인가? 취업인가? 통장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그것이 남자로서 여자를 다루는 당신의 실력이다. 여자를 다루는 스킬을 배우고 싶다고? 변태 같은 선배 형들의 조언은 집어치우고 예수님께 배우라. 여자의 눈을 뜨게 만들어 주라. 하나님을 향하게 하라. 그것이 여자를 다루는 남자의 영적 스킬이다.

 

수컷칼럼12 “판도를 바꾸는 남자
(10. 22. 2014)

 

한 커플이 고아원에 봉사활동을 갔다. 여자는 안타까운 현장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상처입은 어린 아이들을 끌어안고 운다. 밥을 퍼주며 따뜻한 인사말도 건넨다. 하루 종일 울며 아이들을 돌본다. 남자는 어떤가? 물론 남자도 현장에 충격을 받는다. 가슴이 아프긴 하다. 하지만 눈물이 잘 나지 않는다. 여자가 말한다. “넌 감정도 없니? 넌 왜 같이 아파할 줄을 모르니? 넌 가식적이야!” 어리석은 남자들은 여자들의 이런 말에 속는다. “나는 이중적이구나, 나는 눈물이 부족하구나자책한다.

 

착각하지 말라. 남자의 문제는 감성이 부족한 게 아니다. 하나님은 남자를 감성의 일꾼으로 부르시지 않았다. 남자는 결코 여자의 감성을 따라갈 수 없다. 남자의 부르심은 감성이 아니다. 남자의 부르심은 판도를 바꾸는 것이다. 그 남자의 관심은 다른 데에 있었다. 당신의 남성성이 살아있다면, 이 남자의 시선을 느껴보라. “저 고아원 원장님 뭐 하는 사람이지? 어떻게 이 건물을 지었지? 왜 이 아이들이 저 원장님을 따르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다니길래 이렇게 후원금이 많이 들어오지?” 남자의 시선은 판도를 바꾸는 사람, 판도가 바뀌는 장소, 바로 그 곳에 있다.

 

하나님은 남자를 위로만 하는 사람으로 부르시지 않았다. 남자는 가난의 판도, 상처의 판도, 죄악의 판도를 뒤바꾸는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로 부르셨다. 그 남자의 결정에 가난을 평생 벗어나는 것, 그 남자의 가르침에 인생의 진로가 바뀌는 것, 그 남자의 헌신 때문에 한 가정과 교회와 나라의 판도가 바뀌는 것. 그것이 남자의 부르심이다.

 

룻이라는 가난한 취준생이 있었다. 취업이 안되자 보아스라는 남자의 집에 이삭을 줍는 알바를 하러 갔다. 보아스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분명히 룻이 불쌍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아스는 자매님, 요즘 취업 때문에 힘드시죠? 힘내세요!” 이런 감정적 위로에 머무르지 않았다.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룻기 2:15-16)

 

보아스는 룻이 가난을 벗어나도록 판을 다시 짰다. 일부러 게임이 유리하게 진행되도록 만들었다. 이삭을 더 줍게 만들어줬다. 돈을 더 벌 수 있게 해줬다. 일시적 위로, 일시적 격려금이 아닌 가난을 끝장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주었다.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2:18) 룻은 가난한 알바에서 넉넉한 인생으로 변화되었다. 룻이 회복된 것은 글로벌 곡식 풍년 때문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의 격려 때문도 아니었다. 보아스라는 한 사람이 뒤에서 판도를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남자라면 친구에게 던지는 한마디 격려에 만족하지 말라. 가끔 내는 기부금에 뿌듯해하지 말라. 쓰레기만 줍는 봉사활동에 만족하지 말라. 남자는 감정적인 만족에 부르심을 입은 적이 없다. 평생 판도를 바꿀 대상을 찾으라. 한 사람의 판도, 한 가정의 판도, 한 나라의 판도를 바꿀 준비를 하라. 그 대상을 위해 헌신하고 준비하라. 돈과 시간을 태우라. 슬쩍 판도를 바꾸어 놓으라. 언제나 판도를 바꾸는 사람, 판도가 바뀌는 장소, 판도가 바뀌는 시기에 주목하라. 그곳에서 배우라. 그리고 당신도 그런 사람이 되라. 남자의 사명은 거기에 있다.

 

수컷칼럼11 “잘 쪼개는 남자
(10. 15. 2014)

 

국가마다, 시대마다 유행하는 남자의 모습이 있다. 옛날엔 가부장적 남자가 멋있었다. 가정 밖의 큰 목표를 이루는 남자가 멋있었다. 요즘은 어떤가? 한 남자의 포부를 들어보라. “The best father in the world!” 무슨말인가? 가정과 아이에만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어떤 남자의 모습이 성경적인가? 가부장적인 것도 아니고, 가정만 신경쓰는 것도 아니다. ? 살아보라. 현실적으로 남자는 여러가지 일들을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남자는 자신이 지켜왔던 스타일, 고집, 자부심을 내세워서는 결코 삶이 세워지지 못한다. 그 스타일을 유지하다가 다른 모든 삶이 무너진다. 기억하라. 남자는 필요에 따라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잘 쪼개는 남자의 특징이다.

 

쪼갠다는 것이 무엇인가? 애덤스미스의 책 국부론은 경제학의 뿌리가 되는 중요한 책이다. 중요도 만큼 두껍기도 하다. 그 많은 하고 싶은 말 중에 첫 테마가 무엇인 줄 아는가? “분업이다. 분업의 핵심이 무엇인가? “쪼개서 일하면 전체가 커진다는 것이다. 더 큰 남자가 되고 싶은가? 내 자신의 역할을 쪼개라. 나 자신을 다양한 모습으로 쪼개라. 그러면 전체적으로 더 큰 가정, 더 큰 역할, 더 큰 사명을 이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사명을 감당하셨다. 십자가를 앞두고 철야 기도회, 산상 제자 팀모임, 가버나움 신유집회 같은 중요한 사역이 많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겉으로 중요해 보이는 이런 일에만 집착하지 않으셨다. 한가지 스타일에만 집착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을 자신의 모습을 여러가지로 쪼개셨다. 그래서 더 많은 일을 하셨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 후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 모습을 보시고 부활한 몸을 보여주느라 바쁜데 저런 애들 챙기는게 중요한 게 아니야. 핵심에 집중하자. 베드로는 버리자!”라고 다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자기를 쪼개셨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요한복음 21:9) 예수님은 부활 직후 그 중요한 시점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쪼개어 파티 플래너가 되셨다. 스스로 혼자 다 세팅하셨다. 숯불을 구하셨다. 불도 붙이셨다. 생선도 따로 사오셨다. 떡도 준비하셨다. 예수님의 자아 분열 증세인가?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스타일을 쪼개셨다. 하나의 예수님, 하나의 마음이었지만 다양한 삶의 모습 속에 그 마음을 담아내셨다. 그것이 예수님의 매력이다.

 

자아 분열을 체험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의 자녀로서 나의 자아는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바라보는 나의 이미지, 내가 유지하고 싶은 나의 이미지에 너무 갇히지 말라. 남자가 커지려면 내 자신을 쪼갤 줄 알아야 한다. “난 그런 건 안 하는 사람이야이것 만큼 큰 교만이 없다. 한 번 쯤은 같이 설거지 해주라. 한 번 쯤은 안 웃겨도 웃어주라. 동행해주라. 눈 맞춰주라. 한 번 쯤은 같이 스타일 구겨주라. 잘 쪼개는 남자가 되라.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남자의 자유이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린도전서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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