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컷칼럼26 “척하지 말라
(1. 28. 2015)

 

남자는 모두 척한다. 척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모르는 데 아는 것처럼, 없는데 있는 것처럼, 안 해봤는데 해본 것처럼 말한 다는 것이다. 무(無)인데 유(有)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척이다. 척은 그래서, 거짓말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척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가 신인(God-Man)’교리이다.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지만, 100%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님은 사람인 척하신 분이 아니라, 직접 경험으로 배우신”(learning by experience)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센 놈한테 맞았다. 그 굴욕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신이라면, 신과 함께 공감할 수 있겠는가? 가난을 겪었다. 그 아픔이 뭔지 모르는 신이라면, 당신은 그러한 신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가? 하나님에 대한 오해 중 하나가 이것이다. “자신은 전혀 힘들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만 고난 당하게 만든다!” 그렇지 않다. 신학자 D. A. 카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은 고난이 무엇인지 잘 아신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경험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경험하신 하나님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그래서 진리이다.

 

남자가 예수님을 닮으려면, 척부터 버려야 한다. 예수님은 사람인 척 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되셨다. 구원하는 척하지 않으시고 목숨 버려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다. “너도 나를 닮으려면, 나를 따르는 척하면 안 된다.”(마태복음 16:24) 하나님 닮은 척 하는 남자는 아무 소용 없다. 척 하면 남자는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댄 매카트니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 사람을 배우셨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예수님을 배운다.” 이제 고난에 참여한다”(에베소서 3:10)는 말을 이해하겠는가? 고난에 참여한다는 말은 척이 아닌 경험으로 삶을 디자인하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남자가 되고 싶은가? 척하지 말고 경험하기로 다짐하라. “사랑하는 척 말고 사랑하려니 정말 어렵구나”, “겸손한 척 말고 겸손해지려니 정말 어렵구나”, “자존심 없는 척 말고 자존심 버리려니 정말 어렵구나” 척하는 남자는 필요 없다. 가식을 내려놔야 회복이 있다. 경험의 남자가 필요하다. 배우는 남자가 필요하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Son though he was, he ‘learned’ obedience from what he suffered)”(히브리서 5:8) 경험과 배움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남자가 되라. 척하지 않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수컷칼럼25 “남자에게 오신 예수
(1. 21. 2015)

 

김건모의 핑계도 있지만, 포맨의 핑계도 있다. ‘신촌을 못가’, ‘가수가 된 이유등 애절한 표현을 음악에 담아낸 민연재 작사가의 작품이다. 이 가사에서 그는, 헤어진 후 미안한 마음조차 들지 않는 남자의 차가운 가슴을 보여준다. “입을 맞추면서 아무 맛도 못 느꼈던 나의 맘을 용서하지마”, “어쩜 미안하단 말도 핑계야음악 속의 남자는 자신의 행동과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듯하다. 그러나 미안하지 않다. 머리 속으로는 알겠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감각이 사라진 삶. 남자의 삶이다.

 

남자는 아무에게도 미안하지 않을 수 있다. 남자는 삶을 게임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이기고 지는 데에 미안함이 어디 있나? 그 생각이 깨지기 전까지는 남자는 결코 남에게 미안해하지 않는다. 잘못하면? 보상하면 되는 것이다. 처벌하면? 맞으면 되는 것이다. 심지어 죄를 지어놓고도 평생 벌 받고 살면 되는 것 아니냐!”라며 책임 질 수 없는 막말을 한다. 말로, 위세로, 몸으로 때우는 무식한 사람이 남자다.

 

다윗은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 남자였다. 다윗은 유부녀와 불륜을 저지르고, 그 남편까지 간접 살해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다윗은 미안해하지 않는다. ? 다윗에겐 이것도 게임이다. 축구 게임에서 반칙을 하면 어떻게 하는가? “나 반칙했어요!” 손 드는가? 심판이 휘슬을 불기 전까지 그냥 달린다. 어떻게든 반칙 안 한 척하고 달린다. 미안? 그런 건 없다. 게임에서 이기면 된다. 그게 남자다.

 

다윗의 부하들이 고발하고, 밧세바가 소리치고, 그녀의 남편이 살아 돌아온들 다윗이 사과했을 것 같은가? 어리석은 기대감이다. 남자는 사람과 싸우면 절대 반성하지 않는다. “시시비비만 가리려고 한다. “불륜 저지른 건 맞지만 여자도 허락한 거 아니냐”, “나만 잘못했냐? 아내 교육 잘못시킨 남편도 잘못 있다라며 게임을 유리하게 끌고 갈 생각만 한다. 반성? 진심? 그런 건 없다. 기억하라. 심판과 처벌, 감시와 훈계로는 남자를 진심의 순간으로 이끌어낼 수 없다. 남자의 진심은, 하나님을 만나야 살아난다.

 

남자의 이 게임은 언제 끝나는가? 게임으로 이길 수 없는 존재를 만나야 깨진다. 세상의 모든 대상이 다 만만하게 보였다. 그런데 남자를 압도하는 존재를 만날 때 그 벽이 깨진다. 다윗의 범죄는 결코 이슈화되지 않을 범죄였다. 그는 왕이었다. 다윗의 행동에 대해 아무도 시비 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 나단이 다윗을 공개적으로 책망한다. 다윗은, 더 이상 숨길래야 숨길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 책망의 뒤에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는다. 그제서야 게임을 중지한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사무엘하 12:13)

 

, 모든 죄악이 폭로되었다. 남자가 책임져야 할 순간이다. 성경은 그것으로 끝나는가? 남자는 이제 죄값을 치르면 되는 것인가?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사무엘하12:14) 용서? 웬 갑자기 용서인가? 말 한마디로 회개하면 끝인가? 죄에는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맞다. 그래서 다윗 대신 누군가가 죽었다. 나단은 말한다. “당신의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12:14)

 

남자는 그 때에 또 한 번의 만남을 경험한다. 다윗의 모든 책임감과 죄악을 끌어안고 대신 죽으신 분. 미안함이라고는 결코 모르는 다윗의 겉멋을 녹이기 위해 십자가로 가셔서 뜨거운 피를 흘리신 분. 다윗의 자녀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한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은 그렇게 말없이 남자를 위해 죽으셨다. 남자의 차가움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녹아 내린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남자의 차가운 삶, 바로 당신을 위해, 예수님은 그렇게 이 땅에 오셨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안함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갈수록 모든 감각이 사라져간다고 생각될 때, 예수님을 부르라. 남자는 그때부터 따뜻해진다. 남자는 그 때부터 미안해진다. 끊을 수 없는 핑계의 삶을 녹이는 예수님의 용서를 만나라. 남자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 남자는 예수님께 용서받아야 한다. 남자의 사랑은 그때부터 다시 시작한다. 오늘 핑계를 들으며 남자의 차가움을 느끼라. 그리고 그 차가움을 녹이신 예수를 묵상하라. 다시 일어서게 될 것이다.

수컷칼럼24 "랭킹을 버리고 용광로로 가라"

(1. 14. 2015)

 

 

남자는 늘 랭킹 매기고, 점수 매기기 좋아한다. 이상형 배틀 앱을 기억하는가? 여자보다 남자에게 훨씬 인기가 좋다. 남자는 새로운 집단에 들어가기만 하면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가장 예쁜 애가 누구야?" "우리 학교에서 누가 가장 공부 잘해?" "우리 회사에서 누가 제일 돈 많이 받아?" 남자의 생각은 언제나 위아래이다.

 

문제는 삶 전체도 이렇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주변 친구들의 수준을 보면서 순위 매긴다. “A는 아직 백수네, B는 연봉 별로네, C는 아직 집이 없네내가 이 그룹에선 1등이야!”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삶을 매우 단편적으로 해석하는 남자의 나쁜 태도이다.

 

당신에게 묻겠다. 남자의 삶이란 게 그렇게 단순한 순위로 평가 받을 수 있는 가치 없는 것인가? A는 백수 맞다. 그러나 내면의 우울증을 극복하고 스스로 취업준비 하려는 친구라면 백수라는 비난이 합당한가? B는 젊었을 때 많이 방황했지만 이제라도 정신차리고 처음 받는 연봉이다. 정말 숫자적인 의미밖에 없는가? C는 집안 형편이 나빠져서 월급에서 조금씩 떼어 가정을 살리느라 집을 마련 못한 친구다. 이 남자의 실력을 과연 집만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랭킹프레임은 남을 깔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더 나쁜 영향을 미친다. 요즘은 고난도 랭킹으로 해석한다. 무슨 말인가? 고난의 내용은 생각 안하고, 잠시 고난 때문에 2등이 되었지만 치료약을 써서 다시 1등할 생각만 한다는 것이다. 1등이었는데 우울증 때문에 2등이 되었다. 왜 우울증이 왔는지 관심 없다. 이것을 통해 무엇을 돌아봐야 할지 관심 없다. 약만 먹으면 다시 1등 될 수 있다. 재산 1등이었는데 아빠 사업 실패 때문에 3등이 되었다. 모든 분노가 아빠한테 간다. 가정 경제는 버려두고 일단 독립하고 혼자 돈 모은다. 그러면 다시 1등 될 수 있다. 가정의 회복은 관심 없다. 주변의 어려움은 관심 없다. 이렇게 랭킹프레임은 모든 고난을 랭킹 방해물로만 여긴다. 고난은 삶에 방해물일 뿐이라는 위험한 랭킹의 철학 속에서, 삶이 좀먹기 시작한다.

 

삶의 프레임을 랭킹에서 용광로로 바꾸어보라. 당신의 프레임은 "랭킹"이지만, 하나님의 프레임은 "용광로"이다. 세상은 당신을 경쟁으로 몰아가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불구덩이로 몰아가신다. 세상은 당신을 커리어로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순도로 평가하신다. 당신의 목표는 "1등"이지만, 하나님의 목표는 "순금"이다. 랭킹이 아니라, 당신 삶의 퀄리티 자체를 높이신다는 뜻이다. 용광로로 가야 남의 삶을 여유있게 바라본다. 불구덩이로 가야 나의 삶의 어려움 속에서 가치를 발견한다. 남자가 빠지기 쉬운 랭킹 프레임을 버리고, 용광로의 프레임으로 삶을 해석하라. 삶의 모든 영역의 끝에 순금을 거두게 될 것이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 23:10)

수컷칼럼23  도시 남자의 우상
(1. 7. 2015)

 

왜 남자는 조직 속으로 들어가는가? 더 큰 존재가 되고 싶어서 그렇다. 조직은 개인보다 더 큰 일을 한다. 남자는 그래서 조직의 상징인 기업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 기업들이 모여서 상호작용하는 곳이 어디인가? 도시이다. 그래서 남자는 도시로 간다. 한국경제 논설위원 정규재씨는 그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서울 서초동의 밤을 밝히는 고층 빌딩이 아니라면 삼성전자는 그토록 일사불란한 지휘 아래 수많은 전자제품의 생산과 공급을 세계적으로 결합해 낼 수 없다. 지식과 창의를 교환하면서 개인의 한계를 초월해가는 도시인의 생산 방식을 생각해보라. 고층 빌딩을 올려다 보면서 청년들이 가슴속에 벅차오르는 무엇가를 느끼는 것은 자신도 그렇게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다는 뜻이다.”

 

더 큰 일,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위대한 일을 하려면 사람이 중심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유일하게 사람 속에만 하나님의 창조적인 영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7) 하나님의 창조의 속성은 오직 사람에게만 있다. 그래서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면 좋은 도시, 좋은 작품이 나온다.

 

그러나 작품이 너무 대단하다. 도시가 너무 크다. 그러다보니 남자는 조직, 업적, 도시 자체를 우상화시킨다. 개인이 모여 만든 거대한 것을 아이돌로 만들어 버린다. 만들고 나니 불상의 눈빛이 나를 뚫어보는 것 같다. 만들고 보니 나보다 스마트폰이 똑똑한 것 같다. 만들고 나니 타워의 높이에 비해 내가 너무 왜소해 보인다. 그곳에 절한다. 인간을 무시한다. 건물만 만든다. 제품 개발에만 몰두한다. 개발하는 남자들은 정작 지쳐 죽어간다. 그것이 현대판 남자의 아이돌이다.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하박국 2:19)

 

세상도 창조적 속성은 사람에게 있음을 간파한 듯하다.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그의 저서 도시의 승리에서, 진정한 도시의 힘은 사람으로부터 나옴을 말한다. “휘황찬란한 새 건물은 쇠퇴하는 도시의 미관을 멋있어 보이게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도시의 근본 문제를 치유하지는 못한다. 쇠퇴하는 도시의 대표적 특징은 경제 규모에 비해서 주택과 인프라가 과도하게 많다는 점이다. 주택과 인프라 공급은 많은데 수요는 거의 없는 상황에서 더 많은 건물을 짓기 위해서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건물 중심으로 도시를 개편하려는 어리석은 행동은 도시는 구조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무슨 말인가? 제품 개발, 인프라, 작품이 사람보다 더 중요해지면, 그때부터 도시는 쇠퇴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작품을 우상화시키지 말라. 기업을 우상화시키지 말라. 아무리 높고, 아무리 위대해도 그것은 모두 사람의 피조물이다. 기업의 최종 목표는 언제나 사람을 세우는 방향이어야 한다. 도시의 최종 목표는 위대한 인프라가 아니라 위대한 사람을 길러내는 쪽으로 흘러야 한다. 작품은 사람을 존귀하게 만드는 쪽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창조성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쪽으로 굴복해야 한다. 창조의 질서 안에 머무르라. 남자의 회복, 도시의 번영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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