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컷칼럼22 “남자, , 고난
(12. 31. 2014)

 

남자는 모든 것을 술로 푼다. 그래서 금주라는 덕목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많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에베소서 5:18)라고 말씀을 이야기한다. 그러면 취하지 말라고 했지 마시지 말라고는 안 했다!”라는 수십 년이 넘은 지겨운 대답을 한다. 취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기분이 알딸딸해진다는 것 아닌가? 취하지 "않기" 위해, 알딸딸해지지 않기위해 술을 마신단 말인가? 그런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는가? 솔직하지 않은 핑계는 그만 대자. 술이 끌린다고 그냥 인정 하자. 우리는 모두 취하려고 술을 마신다.

 

취하는 것이 왜 나쁜가? 기분 좋은 것이 왜 나쁜 것인가? 왜 기독교는 술의 철학과 충돌하는가? 이 문제는 고난에서부터 풀어야 한다.

 

이 시대 최고의 가치는 무엇인가? ‘나의 행복이다. 좋은 가치관 아닌가? 그런데 이 삶의 목표를 누리기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나의 행복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고난이다. 사람이 불합격, 실패, 질병, 사고를 당하면 충격에 빠진다. 왜? 나의 행복 플랜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고난을 행복의 적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고난에 대해 1)어떻게든 최소화 시키거나 2)어떻게든 피하거나, 그것마저 실패하면 3)자살해버린다. 고난의 벽을 넘을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술과 고난이 무슨 상관인가? 승진에 실패하면 술 마신다. 실연에 빠지면 술 마신다. 취업에 실패하면 술 마신다. 무슨 말인가? 고난 때문에 내 행복이 막혔으니까 술로 나를 기분 좋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마시고 풀어버리자는 것이다. 마시면 풀리는가? 기분이 좋아지면 끝인가? 그것은 해결이 아니라 망각이다. 그것은 해결이 아니라 회피이다. 고난이 잘 가던 나의 길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너무 슬프고 원망스럽다. 한스럽다. 그 모든 기분을 술에 담자는 것이다. 그리고 기대한다. “다음 고난은 절대 나에게 찾아오지 않기를!” 그런가? “행복 가치관의 치명적인 한계가 이것이다. 이 술의 철학은 고난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한다. 고난을 없애주지도 못한다. 술은 잠시 기분이 좋아진 후 절망이다. 행복 가치관의 끝은 허무이다. 끝까지 내 삶의 고난을 책임져주지는 않고 기분만 좋아지라고 말한다. 이것이 술의 철학이다.

 

기독교는 고난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로 본다. 애매한 말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훨씬 영적이고, 매우 현실적이다. 기독교는 애초에 고난을 다 이해하거나 미리 막을 수 있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하는 고난이 있음을 받아들인다. 피할 수 없는 고난도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고난은 하나님 손에 있음을 믿는다.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하고 싶으신 것이 있음을 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좋은 것을 얻어 갈 수 있게 하신다. 그래서 고난이 오면 긴장한다. 그분을 만날 때이자, 좋은 것을 얻을 타이밍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 있는 메시지를 파헤친다. 취할 시간이 아니라, 정신차려야 할 시간임을 깨닫는 것이다.

 

전 세계무역센터 부총재 이희돈 장로가 있다. 유럽으로 유학을 갔으나 돈도 없고, 공부도 못했다. 재정의 고난, 학벌의 고난이었다. 그러나 유럽에 오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고난 가운데 전진했다. “해외에 왔으니 술 퍼 마시고 놀자, 내가 기분 좋으면 그만이다.” 하지 않았다. 캠퍼스를 돌고 돌았다. 어렵게 옥스퍼드 학장을 만났다. 그가 말했다.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학장이 대답했다. “등록금이 비싸다. 그리고 실력은 되냐?” “부족하면 배우겠습니다.” “돈은 있냐?” “이 학교에서 장학금을 주면 되지 않습니까?당찬 모습에 감동한 학장이 말했다. “잘 곳을 구해오면 입학시켜 주겠다.” 그는 중국인 전도를 준비하던 옥스퍼드 청년을 만나 숙소를 얻고, 입학을 체험한다. 그는 취하지 않고 하나님과 고난을 '살았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고난에 대한 남자의 태도이다.

 

취하는 것은 결코 당신이 고난에 직면할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이 술의 철학과 기독교 철학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당신은 삶의 고난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당신의 삶을 평가 받고 싶다면, 당신이 고난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당신이 가진 세계관이 고난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행복 추구의 끝에서는 언제나 고난이라는 넘사벽을 만나게 된다. 그 술의 철학으로는 결코 고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남자는 고난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good for me)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남자에게 유익이 되는 고난을 정면으로 만나라. 자꾸 술로 기분을 희석시키지 말라. 100% 슬픔, 100% 아픔, 100% 실패를 그대로 하나님께 가져가라. 그 고난의 벽을 뛰어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라. 그것이 남자의 고난관이다.

 

수컷칼럼21 “배타적인 남자 vs. 이기적인 남자
(12. 24. 2014)

 

한 커플이 있었다. 선배가 다가와서, “교회에서는 웬만하면 따로 있는 게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 커플은 화를 냈다. “저희 사이를 질투하세요? 사랑하는 게 뭐가 어때서요?” 맞다. 사랑은 배타적이다. 그녀도 사랑하고 그녀의 친구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 공동체에는 공동체만의 가치가 있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신앙이 성장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다. 커플이 함께 있을 때 공동체의 가치가 존중 받으면 배타적인 사랑이다. 그러나 함께 있을수록 공동체의 가치가 깨지면 이기적인 사랑이다.

 

배타적인 것과 이기적인 것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둘 다 타협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차이점은 무엇인가? 남자의 수준은 여기에서 나뉜다. “다른 가치에 대한 배려가 있으면 배타적인 것이고, 다른 가치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 이기적인 것이다.

 

다른 가치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 콧방귀를 내뱉는 사람들이 많다. 난 그런 거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과연 그럴까? 회사에서 서로 교제하는 커플이 있었다. 교회도 안 다니는 사람들이니까 마음대로 행동할 줄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들키지 않으면서 교제하려고 노력한다. 지나쳐도 눈도 안 마주친다. 일부러 일에 집중한다. 더 조심한다. 왜 그런가? “회사는 연애가 최고의 가치가 될 수 없는 곳이다라는 직관적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이제 알겠는가? 그 교회커플은 그런 가치를 몰랐던 게 아니다. 그 공동체의 가치를 속으로 무시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여자는 쉽게 이기적이 된다. “나만 사랑해줘, 나만 쳐다봐줘, 나하고만 연락해줘여자는 배타적인 마음을 넘어서서 이기적인 마음이 되기 쉽다. 남자는 여자의 그 이기심을 배타적인 곳까지만 머무르게 만들어줘야 한다. 그리고 개방적인 곳으로 이끌어 줘야 한다. “수업시간에 맨 뒷자리에서 스킨십 하면 안돼. 강의 듣는 시간이야”, “교회에서 우리 둘 만 말하는 거 아니야. 팀 모임 전체를 즐겁게 해주자”, “회사에선 업무 도중에 서로 카톡은 좀 참자. 끝나고 보자남자는 더 큰 가치를 설명하고, 다른 가치를 설명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설명해줘야 한다. 이것이 남자가 여자에게 줄 수 있는 배타성이라는 선물이다.

 

성경은 이기심을 멀리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고린도전서 13:5) 내 유익만 구하면 사랑은 독단이 된다. 이기심을 버려야 매력 있는 남자가 된다. 배타적인 곳에 머물러야 오래간다. 넓어진다. 그래야 안전하다. 이기적이 아닌 배타적인 남자가 되라. 여자의 이기심을 녹이고, 배타성을 선물하라. 서로의 관계는 오히려 깊어지고, 다른 가치에 대해서도 눈을 뜨는 성장을 경험할 것이다.

 

수컷칼럼20 “나이키가 망하기 힘든 이유
(12. 17. 2014)

 

먹고 살기 힘들다는 남자들이 많다. 그 말을 조금만 바꾸면 이렇게 들린다. “살기 힘든데 신앙적인 가치들을 지키란 말은 그만 해달라이것이다. 영업하기도 어려운데 술 마시지 말라고 그만해라. 결혼도 못해서 성욕을 참기도 어려운데 야동보지 말라고 그만 해라. 돈 벌기도 어려운데 주일성수 하라고 그만 해라. 도대체 힘든 삶에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고 묻는다. 그 기준을 지키면 삶에 오는 풍성한 열매가 많다고 해도 이해를 못한다.

 

중국이 돈을 벌기 시작했다고들 한다. 애플, 삼성을 넘어 이제 샤오미가 대세라고들 한다. 중국이 내수소비를 시작하면 중국 내수소비 기업들이 성장할 것이고, 이것은 글로벌 브랜드들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내가 묻겠다. 당신이 중국인이다. 생애 처음 번영을 경험했다. 돈을 벌었다. 가난했던 내 아내와 자녀에게 폰을 사주고 싶다. 샤오미를 사겠는가 애플을 사겠는가? 다시 한번 묻겠다. 지금까지 자녀 운동화가 없었다. 그런데 난 이제 부자다. 당신은 중국 리닝 운동화를 사주겠는가 나이키를 사주겠는가? 소득수준이 개선되면 싼 것을 사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명품 브랜드를 산다. 브랜드란 무엇인가? 수준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왜 듣보잡 대신 나이키를 사는가? 타협하지 않는 최고의 품질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나이키가 자신들의 기준을 포기하고 보급형으로 포지셔닝 하지 않는 한, 나이키는 망하기 어렵다. 중국이 잘 될수록 나이키는 더 잘 될 것이다. 이것이 타협하지 않고 버텨냈을 때의 가치이다. 타협하지 않고 버티면, 나중엔 그 기준이 오히려 브랜드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최근 미국 전역에 라틴계 복음주의 교회들이 폭발적으로 부흥하고 있다. 라틴계 미국인 5천만명 중 2/3는 카톨릭이었으나, 현재 정통 복음주의 교회들로 성도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 기세라면 2030년까지 복음주의자들이 라틴계 미국인의 절반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한다. 왜 이 교회들이 부흥하는가? 타임지에서는 부흥하는 남미의 복음주의 교회 세 목사들의 목회를 분석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1)혼전 성관계 금지(against premarital sex), 2)알코올, 마약 금지(against drugs and alcohol), 3)여성차별 금지. 라틴계 사람들한테 말이 되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는가? , , 차별 이 세가지는 라틴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절대적인 하나님의 가치를 붙들고 그대로 선포했다. 그러자 그대로 순종하여 삶에 영광이 임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술 안 마시는 남자를 만나고 싶은 여자들이 교회에 오기 시작했다. 난잡한 성 생활 하지 않는 여자를 만나고 싶어서 남자들이 자신의 난잡함을 청산하고 교회로 왔다. 여자들이 차별 받기 싫어서 교회로 왔다. 이제 알겠는가? 이것이 타협하지 않고 버텨냈을 때의 가치이다. 타협하지 않고 버티면, 그 자체가 파워가 된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나보고 술 좀 마시라는 사람이 많았다. 안 마신다고 했다. 1학년에 가니 3학년이 조롱했다. 군대에 가니 지휘관이 조롱했다. 제대하고 나니 취업한 선배가 조롱했다. 그 때 깨달았다. "평생 위협은 계속 있겠구나." 그래서 그냥 계속 타협하지 않았다. 취업을 하니 1년차 선배가 위협했다. 2년차가 되니 인사권자가 위협했다. 임원이 위협했다. 버텼다. 대신 대리운전 해줬다. 술을 따라 드리며 양해를 구했다. 사이다 마시며 흥을 돋궜다. 이제 아무도 뭐라고 안한다. 안 마시는 것 자체가 내 이미지가 되었다. 버팀은 신뢰로 이어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해한다. 이제 시간이 지날수록 난 유리해진다. 이것이 타협하지 않았을 때 생기는 모멘텀이다.

 

온 세상에 남자들보고 타협하라는 말만 들린다.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다 타협하란다. 그렇게 살아온 지금옆에서 같이 일하고 공부하는 남자와 당신이 다를 바가 무엇인지 쳐다보라. 바쁘다고 신앙인의 기준도 다 져버리고, 피곤하다고 기도의 무릎도 사라진지 오래이다. 남자는 그렇게 보급형이 되어 가는 것이다. 돈으로 역전해보겠다, 명예로 역전해보겠다는 그 속임수에 다 속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남자를 결코 보급형으로 부르시지 않았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레위기 11:44) 남자의 수준은 거룩이다. 남자의 수준은 하나님이다. 보급형을 박차고 나와라. 끝까지 하나님의 기준을 놓지 말라. 결코 타협하지 말라. 이것이 남자의 영광이다. 기준을 지키는 나이키는 망하기 힘들다. 기준을 지키는 남자는 망하기 어렵다.

 

하나님이 남자를 만나시는 곳
(12. 9. 2014)

 

남자는 어디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남자를 신앙의 고민 속에서 만나신다. 하나님은 남자에게 치열한 신앙의 고민을 던지신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고민하길 원하신다. 그리고 그 고민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남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면고민을 품어야 한다. 남자 내면에 고민이 있는가? 분명히 그곳에 하나님이 찾아오신다. 고민은 남자가 하나님을 만나는 성소이다.

 

가슴에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을 품은 남자가 있었다. 에디오피아 여왕의 재정 관리 내시였다. 예루살렘에 예배 드리러 갔다가 귀국하면서 성경을 읽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겐 믿음이 없었다. 성경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성경을 궁금해 했다. 알고 싶어 했다.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사도행전 8:28) 너무 어려웠다. 하나님은 그 남자를 놓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 내시에게 빌립이라는 사람을 보내신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8:29) 빌립은 그를 만나 성경구절을 설명해준다. 내시는 복음을 이해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고, 이해 안되고, 고민하던 남자 내시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셨다. 하나님은 가슴에 고민을 품은 남자를 절대 놓지 않으신다.

 

하나님에 대한 몇 가지 고민들이 있다. 난 늘 이런 의심이 있었다. 기독교는 성경에 절대적 권위를 둔다고들 한다. 문제는 그 성경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고민 아닌가? 하나님은 고민을 품은 나에게 책으로 찾아오셨다. 복음서의 기록시기는 예수의 부활 당시 사람들이 모두 살아있었을 때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마가복음”이 꾸며낸 것이라면, 그 때 살아있던 사람들이 뭐라고 했겠는가? “나 그 현장에 있었는데? 당신 그거 잘못 쓴 거야라고 반박했을 것이다. 당신이 조금이라도 꾸며냈다면 그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을 것이다. 실제가 아니라면 복음서는 결코 퍼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신의 친구가 죽었다. 그리고 절대 부활한 적이 없는데, 어떤 사람이 그 친구가 부활한 것이 확실하다고 소리치고 다닌다면 당신은 뭐라고 말하겠는가? “미쳤냐?” 절대 가짜 이야기는 퍼질 수 없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그 이야기는 조금도 퍼질 수 없었다. 동시대 사람들이 모두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그 고민을 푸는 순간, 하나님이 더 깊이 다가왔다.

 

한 가지 고민을 더 살펴보자. “예수님은 왜 노예 제도에 반대하지 않으셨나요?” 이런 질문들이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에베소서 6:5) 이런 말씀은 예수님이 노예제도를 강제로 묵인하신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고민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생기는 오해다. 예수님이 계시던 1세기 로마제국에서의 노예란 우리가 지금 말하는 인신매매가 아니었다. 그 때 노예는 사회와 격리되지도 않았고, 임금을 모아 자유를 살 수도 있었고, 평생 노예로 지낸 사람도 없었다. 훨씬 많은 자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 때 예수님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은 그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진짜로 문제가 되는 노예제도는 식민지 시대에 생겼다. 기독교인들은 바로 그 때 들고 일어나서 노예 제도롤 폐지시켜버린 것이다. 몇 가지 고민을 풀고 나니, 신앙에 급격한 성장이 있었다.

 

이해되지 않는 신앙의 고민이 있는가? “그냥 못 믿겠어라고 내팽개쳐두지 말라. 고민을 가슴에 품으라.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내가 품은 이 고민을 풀어 주옵소서하나님은 그 남자를 결코 놓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고민하는 그 남자의 답을 풀어주신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이사야 1:18) 남자의 냉철한 이성은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 이성의 상쾌함은 하나님만 주실 수 있다. 하나님은 남자 가슴속에 있는 고민을 좋아하신다. 고민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오라. 그리고 질문하라. 그것이 남자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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