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컷칼럼12 “판도를 바꾸는 남자”
(10. 22. 2014)
한 커플이 고아원에 봉사활동을 갔다. 여자는 안타까운 현장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상처입은 어린 아이들을 끌어안고 운다. 밥을 퍼주며 따뜻한 인사말도 건넨다. 하루 종일 울며 아이들을 돌본다. 남자는 어떤가? 물론 남자도 현장에 충격을 받는다. 가슴이 아프긴 하다. 하지만 눈물이 잘 나지 않는다. 여자가 말한다. “넌 감정도 없니? 넌 왜 같이 아파할 줄을 모르니? 넌 가식적이야!” 어리석은 남자들은 여자들의 이런 말에 속는다. “나는 이중적이구나, 나는 눈물이 부족하구나” 자책한다.
착각하지 말라. 남자의 문제는 감성이 부족한 게 아니다. 하나님은 남자를 감성의 일꾼으로 부르시지 않았다. 남자는 결코 여자의 감성을 따라갈 수 없다. 남자의 부르심은 감성이 아니다. 남자의 부르심은 “판도를 바꾸는 것”이다. 그 남자의 관심은 다른 데에 있었다. 당신의 남성성이 살아있다면, 이 남자의 시선을 느껴보라. “저 고아원 원장님 뭐 하는 사람이지? 어떻게 이 건물을 지었지? 왜 이 아이들이 저 원장님을 따르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다니길래 이렇게 후원금이 많이 들어오지?” 남자의 시선은 판도를 바꾸는 사람, 판도가 바뀌는 장소, 바로 그 곳에 있다.
하나님은 남자를 위로만 하는 사람으로 부르시지 않았다. 남자는 가난의 판도, 상처의 판도, 죄악의 판도를 뒤바꾸는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로 부르셨다. 그 남자의 결정에 가난을 평생 벗어나는 것, 그 남자의 가르침에 인생의 진로가 바뀌는 것, 그 남자의 헌신 때문에 한 가정과 교회와 나라의 판도가 바뀌는 것. 그것이 남자의 부르심이다.
룻이라는 가난한 취준생이 있었다. 취업이 안되자 보아스라는 남자의 집에 이삭을 줍는 알바를 하러 갔다. 보아스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분명히 룻이 불쌍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아스는 “자매님, 요즘 취업 때문에 힘드시죠? 힘내세요!” 이런 감정적 위로에 머무르지 않았다.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룻기 2:15-16)
보아스는 룻이 가난을 벗어나도록 판을 다시 짰다. 일부러 게임이 유리하게 진행되도록 만들었다. 이삭을 더 줍게 만들어줬다. 돈을 더 벌 수 있게 해줬다. 일시적 위로, 일시적 격려금이 아닌 가난을 끝장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주었다.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2:18) 룻은 가난한 알바에서 넉넉한 인생으로 변화되었다. 룻이 회복된 것은 글로벌 곡식 풍년 때문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의 격려 때문도 아니었다. 보아스라는 한 사람이 뒤에서 판도를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남자라면 친구에게 던지는 한마디 격려에 만족하지 말라. 가끔 내는 기부금에 뿌듯해하지 말라. 쓰레기만 줍는 봉사활동에 만족하지 말라. 남자는 감정적인 만족에 부르심을 입은 적이 없다. 평생 판도를 바꿀 대상을 찾으라. 한 사람의 판도, 한 가정의 판도, 한 나라의 판도를 바꿀 준비를 하라. 그 대상을 위해 헌신하고 준비하라. 돈과 시간을 태우라. 슬쩍 판도를 바꾸어 놓으라. 언제나 판도를 바꾸는 사람, 판도가 바뀌는 장소, 판도가 바뀌는 시기에 주목하라. 그곳에서 배우라. 그리고 당신도 그런 사람이 되라. 남자의 사명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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