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구멍의 하나님
(5. 11. 2014)

 

젊은이들이 흔히 하는 생각이 있다. 세상의 큰 흐름 속에 나도 끌려가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큰 착각이다. 출근시간 지하철은 붐빈다. 그러나 붐비는 지하철에도 앉아서 가는 사람들이 있다. 취업이 어렵다, 결혼이 어렵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자신만의 길을 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쥐구멍의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다.

 

세상의 큰 목소리들이 그대로 나의 삶에 영향을 준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대학생 시절 너무 가난했다. 내 학비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88만원 세대책이 딱 그 때 나왔다. 그 책을 읽으니 내 젊음엔 미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이 다 나의 적으로 보였다. 화가 났다. 그러나 화를 내봐야 해결 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내가 투쟁해도 아무도 봐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내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었다. 며칠 후 학교 게시판에서 좋은 장학재단을 만났다. 장학금을 신청했다. 4년간 학비를 한번에 얻었다. 투쟁 대신 하나님 앞에 머무르니, 바닥에서 쥐구멍이 열렸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느끼는가? 맞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문제는 당신의 대응 방법이 틀렸다는 것이다. 세상이 불공평하게 싸우겠다는데 공평만 외친다고 변화될 것 같은가? 전혀 먹히지 않는다. 세상의 불공평을 깨는 방법이 있다. 불공평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9:8) 은혜는 공평하지 않다. 은혜는 나에게만 무조건적으로 부어진다. 차별적이다. 편애한다. 독점적이다. 불공평한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야 세상의 불공평과 싸울 수 있다.

 

은혜란 나만의 쥐구멍을 만나는 것이다. 세상이 어려우니 투쟁하고 원망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선동당하지 말라. 은혜 없이 세상에 나가니 분노만 생기는 것이다. 역사는 어느 시기에나 어려움이 있었고, 언제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쥐구멍을 여셨다. 쥐구멍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투쟁으로 인생을 낭비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자들은 준비하면서 쥐구멍을 기다린다. 그래서 미래의 영토는 은혜를 붙드는 젊은이들의 것이다.

 

젊은이들은 정신 똑바로 차리라. 당신에겐 두 가지 길이 있다. 세상에 분노하다가 사라지는 길과, 하나님이 주신 나만의 쥐구멍을 기다리는 길이 있다. 사회는 구조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개인적이다. 세상의 거대담론에 속지 말라. 큰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라. 어렵다, 망했다, 길이 없다는 말에 속지 말라. 하나님은 언제나 쥐구멍에서 세미하게 나를 부르신다. 그 쥐구멍으로 들어가라. 승리를 얻을 것이다. 오늘 당장 이렇게 기도하라. "주여, 나에게도 쥐구멍을 열어 주옵소서!"

 

 

내 편이 있으면 두렵지 않다
(5. 4. 2014)

 

상처는 매우 상대적인 것이다. 나를 욕하는 직장 상사를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 직장생활 해야 하나 싶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 팀 사람들, 다 그 사람 싫어해. 너도 당했어? 나도 똑같이 당했어. 너 아까 무시당하는 거 보는데 내가 다 화나더라그때부터 묘한 힘이 난다. 당하면 당할수록 힘이 난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당할 때, 그 마음을 아는 동료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더 이상 상처는 상처가 아니다. 오히려 어려움 때문에 서로가 친밀해 진다. 괴롭게 하는 그 상사를 함께 험담하면서 오히려 새 힘을 얻는다.

 

왜 사람들이 친구를 만나면 자기 힘든 이야기를 하는가? 단순히 답답함을 풀려는 게 아니다. 내가 처한 상황을, 내가 당한 어려움을 공감 해주는 나의 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환경이 좋아진다고 만족하지 않는다.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만족하지 않는다. 환경이 좋아져도, 대우가 좋아져도 어려움은 늘 있다. 세상이 찾는 것은 내 어려움이 무엇인지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어려움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라. 아픔을 직접 겪어본 사람이 되라. 그러면 무조건 리더가 된다.

 

하나님은 나를 남을 이해하는 사람으로 키우신다. 예수님은 남을 잘 이해하는 분이셨다. 하늘에만 계신 게 아니라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그렇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아신다. 몸이 아픈게 어떤 것인지, 돈이 없는게 어떤 기분인지, 유혹 받는 마음이 얼마나 힘든지, 어려움 속에서도 승리하는 법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 4:15) 그래서 예수님께 가면 공감이 가능하다. 이해가 가능하다. 승리가 가능하다. 그것이 예수님의 매력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은 대통령도 아니었고, 기자도 아니었고, 다이빙 벨을 만든 이종인도 아니었다. 직접 아들을 잃어본 천안함 유족들이었다. 그들은 책임소재를 따지지 않았다. 분노하지 않았다. 묵묵히 유가족 옆에서 모든 잡일들을 감당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천안함 유가족들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을 아는 자들이었다.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나의 편을 만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의 편이 되어주셨다. 나도 이제 누군가의 편이 되어주어야 한다.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주변의 아픔을 아는 자가 되라. 아픔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라. 늘 내 주변 사람들의 편이 되어주라내 편이 있으면 두렵지 않다.

필요를 관리하라
(4. 27. 2014)

 

삶에는 필요가 있다. 자연스러운 욕구가 있다. 수면욕, 성욕, 식욕은 삶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필요는 관리하지 않으면 부추겨진다. 관리하지 않으면 삶의 주인이 되어버린다. 필요를 최소화시켜야 한다. 필요를 나의 발 아래에 두어야 한다. 필요를 관리해야 승리할 수 있다.

 

첫째, 잠을 관리하라. 사람은 잠을 자야 한다. 그러나 잠이 많아지면 사명을 이룰 기회를 잃는다. 대기업 피트니스 센터 관리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피트니스 센터가 가장 붐비는 시간은 새벽 5~6시 사이라고 한다. ? 회사의 모든 임원이 그 시간에 나와서 운동을 한다고 한다. 시장터처럼 북적인다고 한다. 임원들은 부지런함과 건강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일반 직원들은 7시가 넘어서야 운동을 하러 온다고 한다. 왜 임원이 되지 못하는가? 간단하다. 잠을 많이 자서 그렇다.

 

20대는 돈보다 시간을 확보해야 하는 시기다. 돈을 팔아서라도 시간을 사라. 내가 경험하고, 내가 독서하고, 내가 사고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라. 시간을 확보하는 데에 최악의 대적은 수면이다. 대학생이기 때문에 늦잠과 게으름이 인정된다는 세상의 목소리는 사기이다. 세월을 아끼라. 시간을 아끼라. 수면시간을 관리하라. 미래가 당신의 것이다. 게으름엔 결코 미래가 없다.

 

둘째, 성욕을 관리하라. 진짜로 공부해보겠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겠다는 형제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싸움의 끝판왕은 성욕이라고 이야기 한다. 세상은 성욕이 적으면 남자로서의 능력이 없는 것처럼, 욕구를 발산하며 사는 것이 남자의 진정한 모습인 것처럼 속이고 있다. 한번 진짜로 살아보라. 성욕이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음란한 생각을 하며 보낸 시간과 체력이 아까울 뿐이다. 문란하게 살았던 20대가 인생에 뼈아픈 후회로 남는다. 하나님 앞에 사명자로 서기 원한다면 시대의 음란한 세력에 싸움을 걸어야 한다.

 

성욕은 input을 차단해야 승리할 수 있다. 성욕을 부추기는 모든 것을 중단하라. 성욕은 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할수록 늪에 빠지게 된다. 음란한 곳에 가지 말라. 음란한 친구들과 어울리지 말라. 음란한 사이트에 가지 말라. 성욕은 보면서 참는 것이 아니라 input을 끊어서 말려 죽여야 하는 것이다. Input을 지속하면서도 성욕을 관리할 수 있기를 바라는 가식적인 행동을 그만하라. 크리스천 축구선수 카카는 일부러 파티에 가지 않고, 절대적으로 금주하는 생활을 한다고 한다. 스스로 input을 관리하는 것이다. 성욕을 부추기는 모든 input을 끊어버리라. 모든 루트를 차단하라.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남자가 될 것이다.

 

셋째, 식욕을 관리하라. 맛집 탐방의 전성시대에 살고 있다. 먹는 것을 생각하다가, 먹는 것을 고르다가, 먹는 것에 시간을 쓰다가 인생의 중요한 생각들을 모두 놓친다. 식욕은 건강을 잃게 만든다. 식욕은 절제를 잃게 만든다. 당신 뱃살의 무게는 당신 미래의 무거움의 무게와 같다. 가벼워야 승리한다. 대충 먹고 기뻐하라. 대충 먹고 사명에 집중하라.

 

20대는 당장 삶에 변할 수 있는 실질적인 지침들을 실행해 나가야 한다. 청춘을 위한 복잡한 자기계발서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일찍 일어나라. 음란한 행동 좀 그만하라. 그만 좀 먹어라이 단순한 외침을 붙들라. 단순함을 붙들고 실행해나갈 때, 쉽게 승리를 거둘 것이다. 당신의 승리를 응원한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린도전서 9:25)

 

당장 최선이 가능하다
(4. 20. 2013)

 

기도하면 최선을 뽑아낼 수 있다. 최선이란 무엇인가? 낭비 없이 집중하는 것이다. 내 힘으로 살면 낭비하지만, 기도로 살면 최선이 나온다. 열심히 영어공부 했더니 회사에서 영어성적 안보기로 바꿨단다. 열심히 스펙 쌓았더니 무스펙 전형으로 채용하겠단다. 열심히 살았어도 낭비만 한 꼴이다. 인생의 낭비는 내가 예측할 수 없다. 기도해야 낭비를 막는다. 기도해야만 최선이 가능하다.

 

내 삶을 복구하기엔 너무 많은 것을 망쳐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때 공부 했어야 하는데 너무 놀았다. 그 때 효도 했어야 하는데 너무 늦었다. 그 때 절약했어야 하는데 너무 낭비했다. 시간은 너무 흘렀고, 기회는 아예 사라졌다. 이제는 노력해봐야 소용없을 것 같아서 더욱 낙심이 된다. 괜찮다. 앞으로 낭비하지 않으면 역전이 가능하다. 낭비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 있다. 기도로 다시 삶을 세우는 것이다.

 

한 주간 안산에 큰 슬픔이 있었다. 너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 온 국민이 충격에 빠졌다. 안산은 부흥하는 교회가 많은 곳이다. 특히 세월호에는 안산의 각 교회 중고등부에 소속된 수많은 단원고 학생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유가족들과 구조된 학생들의 삶은 평생 회복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치유의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안산에서는 각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 그 배에 탔다가 구조된 학생, 단원고 학생들, 자녀를 잃은 부모님까지. 모든 고통을 하나님께 아뢰고 있다. “이에 그들이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편 107:19-20) 그들은 최악의 고통마저도 낭비하지 않았다. 원망과 한탄 대신 기도의 무릎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았다. 우린 이 모습을 배워야 한다. 그들의 삶은 결코 상처 때문에 주저 앉지 않을 것이다. 잠깐의 슬픔이 있겠지만 분명히 다시 일어날 것이다. 분명히 그 학생들에게서 최선이 나올 것이다.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닥의 상황에서 최선을 원하는가? 기도하라. 기도 없이는 최선이 나오지 않는다. 기도하면 인생의 모든 부분에서 최선을 끌어낼 수 있다. 원망과 탄식대신 계속 기도를 심어라. 망쳐버린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다. 무너진 모든 것들이 다시 세워질 것이다. 기도가 길이다. 기도가 핵심이다. 기도가 모든 것이다. 당신의 기도의 무릎으로, 이 땅에 기도의 계절이 오길 기대한다.

하루 빨리 대학을 떠나라
(4. 13. 2014)

 

대학의 시대는 끝났다. 이미 예전부터 끝나있었다. 그걸 지금 당신만 모른다. 최근 포스코에서 서울대에 항의를 했다. 지금 서울대 공대에는 포스코에서 당장 필요한 철강 지식을 가르치는 교수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포스코에서 돈을 낼 테니 포스코 출신 현장 전문가를 교수로 뽑아달라고 했더니 못한단다. ? 논문 실적이 없으면 교수가 될 수 없는 한국 학계의 구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최근 공대 혁신방안이 검토 중이다. 앞으로는 기업 경력을 연구 실적으로 환산하여 교수를 뽑겠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앞으로는 직장에서 일한 전문가가 교수가 된다는 말이다. 이제 알겠는가? 교수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내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아무나 교수가 되는 것이다.

 

대학과 학문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 대학교수는 어떤 존재인가? 평생 한 분야를 연구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역사학과 교수를 만나보라. 이 사람이 세계의 모든 역사를 알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역사 중에서도 한국사, 한국사 중에서도 조선시대, 조선시대 중에서도 조선 후기, 조선 후기 중에서도 조선 후기 경제사를 평생 연구하며 산다. 내게 주어진 작은 분야에서 평생 연구를 통해 성과를 내는 직업이 대학 교수이다. 그것이 당신의 사명인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 지금 싸울 곳을 잘못 찾은 것이다. 대학은 당신의 필드가 아니다.

 

대학 재학시절 경영학과 교수가 말했다. “대학 경영학과는 대기업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벤처를 다루기 어렵다.” 우리나라 거의 모든 사람이 벤처와 중소기업, 자영업에 종사하는데 대학에서 배운 대기업 프레임으로 뭘 하겠는가? 그래서 지금 어떤 꼴이 났는가? 20대 벤처기업 종사자가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각종 프렌차이즈 성공가들이 대학에 와서 강의를 개설한다. 교수는? 바보가 된 것이다. 벤처를 책으로만 배웠으니까!

 

진짜 돈 좀 모아서 치킨집을 하는게 꿈인가? 그러면 치킨집에서 알바를 하며 BBQ에서 만든 치킨대학에 가라. BBQ치킨대학은 치킨이 만들어지는 이론부터 실습, 사업 준비까지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스무살 때 대학에서 글로벌 경영 전략과 같은 헛소리나 하는 수업을 듣는 사람보다는 장사를 잘 할 것이다. 대학 교육을 다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필요한 공부를 해나가라는 말이다. 진짜 까페하고 싶으면 까페에서 20년을 일해야지 왜 유학을 가서 학위를 따는가? 20년도 투자 안하고 날로 먹겠다는 것인가? 그게 바로 사기꾼 심보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결국 이 문제의 끝은 영적인 문제다. 당신은 한 분야의 일을 정말 잘하고 싶은 사람인가, 아니면 대충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스펙과 학위를 좇기에 급급한 사람인가? 젊었을 때 이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서야 한다. 빨리 겉멋을 버리라. 빨리 바보 같은 대학을 떠나라. 내가 필요한 지식만 배우고 하나님이 주신 당신만의 일을 시작하라! 그곳에 당신의 미래가 있다.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잠언 19:2)

모든 길을 가보라는 유혹
(4. 6. 2014)

 

경험이 우상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 어떤 경험을 해보았느냐가 사람의 위아래를 결정짓는 역할을 한다. “그 곳도 안 가봤어? 이런 것 안 해봤어? 이것도 안 먹어봤어?” 나도 유럽을 다녀 와야만, 나도 루이비통을 사야만, 나도 강남에 살아야만 자신감이 생긴다. 경험의 우위가 인생의 우위가 되어버렸다.

 

목적 없는 경험은 집착을 낳는다. C. S. 루이스의 책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는 예술가였던 유령이 나온다. 천국을 꿈꾸며 그림을 그렸던 예술가다. 원하던 천국 언저리에 왔다. 꿈꾸던 곳에 왔으니 천국을 즐기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그림에 집착하려 한다. 그림 그리는 일 자체에 중독된 것이다.

 

견고한 영이 조언한다. “시인이나 음악가나 예술가에게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자기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에 대한 사랑에서 점점 멀어져, 이야기하는 일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되지요. 아시다시피 그들은 그림에 관심을 갖는 데서 그치지 않거든요. 그들은 더 깊이 추락해서 자기 개성에 관심을 갖게 되고, 급기야 자기의 명성 말고는 아무 데도 관심을 갖지 않는 지경이 되고 맙니다.”

 

교제가 중요한가 술이 중요한가? 교제가 중요하다. 그러나 직장 상사는 술이 없으면 교제가 안 되는 줄 안다. 그래서 술 마시는 것에만 집착한다. 이것이 술 지옥이다. 경험이 중요한가 삶의 길을 찾는 게 중요한가? 길을 찾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길을 찾았는데도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느냐에만 집착한다. 이게 경험 지옥이다.

 

열심히 직장을 탐색해서(경험) 취업을 했다(천국). 그런데 괜찮은 직장 들어가서도 자기 인생에 경험이 부족한 것 같으니 사표내고 다른 직장을 탐색한다(다시 경험). 이게 미친 짓이다. 열심히 여자친구를 찾아서(경험) 결혼을 했다(천국). 그런데 결혼 하고 조금 마음에 안 든다고 다른 여자를 찾는다(다시 경험). 이게 미친놈이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모든 길을 가보라는 유혹을 버리라. 경험의 종착역에 하나님을 모셔두라. 경험의 집착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알아가는데에 집중하라. 오히려 더 유익한 경험을 하고, 더 넓은 세계로 전진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세아 6:3)

 

청춘을 기도로 채우라
(3. 30. 2014)

 

청춘은 빠르게 성장해야 한다. 늘 두 가지를 기억하라. 1)빨라야 하고, 2)성장해야 한다. 최근 삼성에서 인문과학 전공자들을 뽑아 소프트웨어 전문가 교육을 시작했다. 친구에게 어떻게 교육 받는지 물었다. “한 학기 동안 배울 과목을 한 주 만에 끝내삼성은 이미 느릿느릿 바보처럼 가르치는 대학 교육에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요즘은 외국 석사과정도 1년짜리가 있다. 1년에 3개월씩 4학기 과정을 가르치는 것이다. 스피드와 성장, 두 단어에 젊음의 미래가 있다.

 

어떻게 하면 빠르게 성장하는가? 삶에 기도를 심어야 한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야고보서 5:16) 영어 성경에서는 의인의 기도가 1)힘이 있고(Powerful), 2)효과적이다(Effective)라고 표현한다. 빠르게 성장하려면 효과적으로 살아야 한다. 효과가 없으면 삶이 뒤쳐진다. 효과가 없으면 성장하지 못한다. 공부를 해도, 일을 해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 당장 기도하고 공부하고, 기도하고 일해보라. 효과가 나타난다.

 

한 남자 대학생이 전역한 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회계사 공부를 할까 고민하며 기도했다.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응답이 들렸다. “인생에 넘기 어려운 장애물을 억지로 넘으려 하지 말라그 메시지를 듣고 회계학 책에 눈길도 주지 않고 바로 취업을 준비했다. 몇 년 후, 회계사 전망이 어두워져서 친구들이 3년간 헛고생 할 때 이 대학생은 쉽게 취업했다. 기도로 3년을 번 것이다.

 

한 새내기가 좋은 대학을 못 가서 학기 초부터 학벌로 고민했다. 기도 중에 답을 얻었다. “학교를 빨리 졸업하고 무조건 주어지는 일을 열심히 하자남들이 어떻게 하면 좋은 직장을 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 이 친구는 기도의 응답을 믿고 주어지는 일부터 성실히 시작했다. 그는 지금 25살에 벤처기업의 CEO가 되었다. 기도하면, 효과가 나타나는 인생을 산다.

 

효과를 원하는가? 청춘을 기도로 채우라. 기도하지 않는 사람 말을 믿지 말라. 그 사람 말 들으면 헛고생 할 것이니 하루 빨리 그 친구 곁을 떠나라. 대신 누가 기도하자고 하면 무조건 따라가라. 기도 잘하는 사람 옆에 앉으라. 기도 응답을 이야기하는 사람 옆에 서있으라. 인생에 효과가 나타나고, 농도가 짙어지고,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기도하는 청춘을 기대한다.

 

수학 선생님이 형편없을 때
(3. 23. 2014)

 

우리나라 입시에선 언제나 수학이 문제였다. 다른 과목을 잘해도 수학을 못하면 좋은 대학 가기 어려웠다. 수학을 못하고 싶어서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수학 선생님 말씀이 이해되지 않으니 자연스레 포기하게 된 것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형편없을 때가 있다. 수학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수학 선생님이 형편 없다. 영어는 참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영어 선생님이 답답하다. 하나님은 참 선하신 분이다. 그러나 목사를 보면 참 화가 난다. 언제나 우리는 본질과 전달자 사이의 괴리에서 고민한다. 그래서 결국 수학 포기, 영어 포기, 신앙 포기의 길로 간다.

 

성경 시대에도 그랬다. 유다의 지도자들이 형편없었다.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의 재판장들은 저녁 이리요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스바냐 3:3-4) 지도자 모두 한심했다는 것이다. 수학을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는, 교회를 다니고 싶어도 다닐 수 없는 지도자의 부패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수포자(수학 포기자), 신포자(신앙 포기자)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스바냐 3:5) 부패한 현실이지만 내 마음 한 가운데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이다. 아침마다 바른 길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더러움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는 것을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간주한다. 부패한 사람이나 포기한 사람이나 둘 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에서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좋은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라. 그리고 좋은 지도자가 되라.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형편없는 지도자 밑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되라. 지도자를 핑계로 자신의 신앙 포기를 정당화하려 하지 말라. 하나님이 부패한 지도자와 똑같이 취급하신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팔로워를 기대한다. 그 사람이 미래의 지도자다.

 

고난이 주는 유익
(3. 16. 2014)

 

고난은 초대장을 들지 않고 찾아온다. 오라고 한 적이 없는데 온다. 어렸을 때 왜 간호사 누나가 엉덩이를 톡톡 치고 나서 주사를 놓는지 궁금했다. 간호사 누나가 답해줬다. “살이 놀라지 않게 하려고 그런 거야나는 그런 거 필요 없다고 말했다. 내 엉덩이는 놀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엉덩이를 치지 않고 주사를 바로 맞았다. 한 달 간 엉덩이에 멍이 들었다.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주사 바늘이 더 아프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는 고난이 더 아프다. 고난은 그런 것이다. 엉덩이를 멍들게 만든다. 그러나 주사 바늘은 몸 전체를 건강하게 한다. 고난은 아프지만 내 삶 전체를 새롭게 하는 힘이 있다.

 

고난은 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한다. 세상은 인과관계의 프레임에 사로잡혀있다. “착하게 살았더니 잘 풀리는 거 봐”, “그렇게 사람 못살게 굴더니 벌 받았네모든 사람은 이유를 설명하고 싶어한다. 기독교는 이유를 뛰어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인과관계의 프레임을 벗어나게 한다. 삶을 살아보라. 왜 그런지 다 설명할 수 없다. 인과관계가 딱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성경의 아삽이라는 인물이 그걸 일찍부터 깨달았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시편 73:12) 그래서 기독교는 왜 그 아픔을 당하는지, 왜 잘 되는지 함부로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성경은 고난의 원인에 관심이 없다. 성경은 고난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집중한다.

 

고난의 목적은 삶을 영원한 것으로 채우는 것이다. 고난 당하면 돈이 사라진다. 친구가 사라진다. 명예가 사라진다. 심지어는 가족도, 사랑도 사라진다. 그러나 영원의 세계가 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편 73:26) 영원히 남는 내 삶의 재산은 하나님 밖에 없다. 그것을 깨닫는 시간이 고난이다. 그래서 고난 당하면 삶이 단순해진다. 고난이 너무 커서 감당하기 어렵다 보니 즐기던 취미, 관심 갖던 쇼핑, 늘어지는 게으름이 사라진다. 고난 감당과 기도. 두 가지 밖에 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면서 영원하지 않은 나의 삶의 부분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고난은 영원을 향한 문을 연다.

 

고난 당하면 모든 것을 잃기만 하는 것일까? 이유 없는 고난을 당한 욥이라는 사람이 있다. 재산을 다 잃고, 아들 일곱, 딸 셋이 죽었다. 고난이 지난 후 하나님은 재산을 딱 두 배로 늘려주셨다. 하지만 자녀는 다시 아들 일곱, 딸 셋 그대로 낳았다. 왜 하나님이 자녀는 두 배를 주시지 않았을까? 그 자녀들 다 천국에 살아있다는 뜻이다. 그 자녀들 잃은 것 아니라는 뜻이다. 고난은 결코 잃어버리는 싸움이 아니다. 고난은 영원을 얻는 싸움이다. 고난을 통해 없어져버릴 유한한 것을 버리라. 그리고 영원한 소유를 얻으라. 하나님이 당신의 영원한 전부가 되어주실 것이다.

글로벌과 영향력의 허상
(3. 9. 2014)

 

한 때 조기유학이 유행했다. 유학 팜플렛엔 이런 글귀가 있었다. “자녀를 글로벌 리더로 키우세요!” 그 말 한마디에 너도나도 유학 가고, 교환학생 가고, 세계를 돌아다녔다. 열심히 살았는데 허무감뿐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계가 느껴진다. 글로벌과 영향력. 지금 사회는 이 두 가지 단어로 젊음에게 사기를 치고 있다.

 

글로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신명기 32:8) 하나님이 나의 삶의 경계를 정해주셨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글로벌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이유가 있다. 서울에 살게 하신 뜻이 있다. 유학을 가게 하신 이유가 있다. 각자에게 주신 지역에서 충성하는 것이 글로벌이다. 나의 경계를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내 마음대로 유행 따라 자리를 옮기니 열매가 없는 것이다. 내 친구의 경계를 부러워하지 말라. 내 부모를 친구의 부모와 비교하지 말라. 교환학생 못 갔다고 억울해 하지 말라. 내 자리에서 열매를 맺으라. 하나님이 충분히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다. 그것을 믿는 것이 글로벌이다.

 

영향력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사람은 가치관을 가진 존재이다. 가치관이란 사람의 내면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 무엇이다. 사람은 가치관을 통해 영향을 미치며 산다. 하나님을 내면에 품은 사람은 하나님을 전한다. 돈을 품은 사람은 돈을 전한다. 공산주의를 품은 사람은 공산주의를 전한다. 가치관이 바뀌면 사람의 행동이 바뀐다. 내가 UN에 들어간다고 해서, 벤처기업의 사장이 된다고 해서 영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런 타이틀로는 사람을 채용하고 해고할 순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유학 다녀오면 영향력이 생긴다고? 좋은 학교 나오면 영향력이 생긴다고? 당신은 권력과 영향력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젊음은 권력과 영향력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나와 함께 있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영향력이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다니엘 12:3) 하나님은 우리를 권력이 아닌 영향력의 사람으로 키우길 원하신다.

 

세상이 말하는 글로벌과 영향력에 속지 말라. 하나님 없는 글로벌, 하나님 없는 영향력은 스펙과 권력을 좇는 탐욕일 뿐이다. 내게 주신 경계를 점검하라. 내면에 하나님을 품으라. 그리고 경계 안에 있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변화시키라. 글로벌과 영향력은 바로 그곳에 있다. 글로벌한 사람이 되라.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라. 그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품을 때에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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