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인격을 묻히라”
(5. 25. 2014)
사람은 옳고 그름보다 좋고 싫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 사람을 왜 사랑하는가? 그 사람이 옳아서라기 보단, 그냥 그 사람이 좋아서 그렇다. 그 사람을 왜 무시하는가? 그 사람이 나쁜 행동을 했기 때문이라기 보단, 그 사람이 그냥 싫은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감성의 시녀이다.
학점과 영어실력이 뛰어나면 채용이 잘 될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대학생들이 있다. 학점은 이성의 영역이지만, 채용은 감성의 영역이다. 회사는 절대 이성적으로 채용하지 않는다. 공채란 “우리가 뽑고 싶은 사람 뽑을 거야”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행사다. 그런 곳에서 이성을 들고 나가니 매번 실패하는 것이다. 취업 게시판에 글이 올라왔다. “저 사람은 다른 스펙이 저랑 다 똑같고 저보다 학점이 낮은데 왜 붙었죠?” 내가 댓글을 달았다. “그냥 님보다 그 사람이 더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 난 진리를 알려줬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신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다시 찾아오셨다. 이성적인 문책이 있어야 하는게 당연하다. 제자 청문회를 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접근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요한복음 21:13) 그냥 밥을 먹었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하기로 마음 먹으셨던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격이 그들을 품으니, 모든 문제가 해결 되었다. 갈등은 이성이 아닌 인격과 감성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무신론자 리차드 도킨스가 피해 다닐 정도로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 윌리엄 크레이그라는 사람이 있다. 그가 무신론자 로젠버그 박사와 토론을 했다. 로젠버그 박사는 토론회에서 “신이 악을 허락한 이유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다면 나는 크리스찬이 되겠다”고 말했다. 크레이그 박사는 악의 존재에 대해 설득력 있게 설명했고, 토론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로젠버그는 믿지 않았다. 모든 크리스찬들이 토론의 승리만을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갈 때, 무신론에서 회심한 방청객 한 사람이 말했다. “난 크레이그 박사가 무신론의 파산을 깨닫고 그를 깊이 사랑하는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되길 기도한다.” 모두가 의미 없는 이성적인 승리만을 기뻐할 때, 이 사람은 로젠버그의 인격과 감성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토론의 승리, 이성의 승리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격의 승리, 감성의 승리로 나아가야 한다. 그 방청객은 그것을 간파한 것이다.
당신이 하는 일에 조금씩 인격을 묻히라. 직장 상사가 시키는 일만 하지 말고, 가끔 커피를 대접해 보라. 음식점 아주머니에게 음식 더 달라고 요구만 하지 말고,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고 칭찬을 건네보라. 교수님의 강의 평가만 하지 말고, 가끔은 감사의 이메일을 드려보라. 이성보다는 감성을 늘 먼저 생각해보라. 철옹성 같은 마음의 벽들이 쉽게 무너져 내리고, 모든 갈등은 덮어질 것이다. 인격과 감정을 이해하는 청년이 되라. 미래는 바로 그 사람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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