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없는 삶
(3. 30. 2025.)

빌립보서 1:20

 

세상 바라보면 한없이 내 삶이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능력자들 앞의 초라한 무능, 젊은이들 앞에 힘없는 늙어감, 부유함 앞의 연약한 가난… 아무도 나에게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말없이 다가오는 인생의 부끄러움이 우리를 더 비참하게 만든다.

 

예수님을 믿은 후 내 삶의 처지는 절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전하다가 옥에 갇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잘나가는 주변 사역자와 비교해서 부끄러워할 법한데, 다른 고백을 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립보서 1:20) 예수님 만나고 바울의 삶의 목표가 달라졌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해지는 것이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부끄럽지 않다. 그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높이는 것이 유일한 목표이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예수님을 높일 수 있는 일만 생각하라. 예수님 만난 후 내 삶은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병든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병상에서도 예수님 뜻대로 행할 수 있다. 말씀과 기도로 매일을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 안에 위대한 일이다. 직업이 없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나의 인도자 되신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과정이기에 무직의 상태에서도 예수님을 높일 수 있다. 내 삶의 진짜 문제는 세상 앞에 내 자신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가려주시는 예수님이 없는 것이다.

 

뻔히 세상의 부끄러움이 있는데, 어떻게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내 마지막 부끄러움을 가려주시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브리서 2:11) 인생에 가장 큰 부끄러움은 천국 문 앞에서 예수님이 날 모른다고 말씀하시는 순간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나를 형제로 불러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분이 나의 오늘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는가? 내 부끄러운 죄악을 모두 가려주신 예수님 사랑이 너무 크기에, 오늘 나의 모든 삶은 예수님을 존귀하게 높이는 것만이 목표가 된다.

 

오늘의 처지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라. 주 안에서 당신의 처지를 절대 부끄러워해선 안된다고 서로 권면하라. 날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 예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오늘을 살자. 진정 행복한 삶이다.

 

[1] 세상을 바라볼 때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요즘 나는 어느 부분에서 그런 것을 느낍니까?

 

[2-3] 빌립보서 1장 20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의 현재 상황은 어떠합니까? 그 상황에서 어떤 고백을 합니까? 요즘 내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부분이 있다면, 내 삶의 궁극적인 목표와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드는 걸까요? 생각해 봅시다.

 

[4-5] 히브리서 2장 11절을 읽어봅시다. 사람이 마지막으로 부끄러워지는 순간은 어느 때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어떻게 대해주셨습니까? 오늘의 삶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존귀하게 하기 위해 삶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문은 여기에
(3. 23. 2025.)

요한복음 10:7,9

 

인생은 문으로 들어가는 싸움이다. 입시의 문, 취업의 문, 성공의 문… 인생에 불행과 불안을 느끼는 영역이 있다면, 문을 찾지 못하겠다는 마음 때문이다. 다음으로 가는 문이 있다는 확신만 생기면, 사람은 소망을 회복한다.

 

예수님은 내 삶의 모든 상황에 문이 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I am the gate.)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한복음 10:7,9) 문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예수님을 의지하면 들어가고 나올 수 있고, 먹을 풀(=꼴)도 얻을 수 있다. 막혀 있는 상황이 있는가? 순간 순간 예수님을 나의 문으로 모셔야 한다.

 

추상적인 말이기에 구체적으로 적용해보겠다. 삶에 문이 없다고 느낄 때마다, 예수님을 의지하여 그 순간 주시는 생각과 인도하심에 집중하면, '예수님만이 이유가 되시는 결과'가 나타난다는 말이다. 갈등의 상황에 뭐라고 말해야 하지? 순간 예수님 의지하라. 문이 열린다. 어떤 결정 해야하지? 어디로 가야하지? 예수님 의지하라. 모두 가는 길이 아닌 다른 문이 열린다.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예수님 의지한다.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 문이 닫힌 것인가? 아니다. 견고한 심령과 알 수 없는 평안으로 나를 지키시기도 한다. 예수님만이 이유가 되시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직접 문이 되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문으로 삼을 때 언제나 먹을 거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나 대신 죽는 문으로 들어가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히브리서 2:14) 들어가면 죽는 문이라는 것을 이미 아셨다. 알고도 들어가신 그분의 사랑이 내게 흐르고 있음을 믿는가? 예수님 때문에 내 마지막 죽음의 문도 천국 문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오늘도 확신할 수 있다. 세상에 온갖 그럴 듯 해 보이는 문 열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 따라 결정할 때, 내게 생명의 문이 열리리라.

 

인간적인 목표만 가지고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매일 예수님을 문으로 모시고, 하나씩 결정하고 실행해보라. 당신이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곳에서 꼴을 얻으리라. 저쪽으로 간다고 문이 열리는 게 아니다. 문은 예수님 계신 여기에 있다.

 

[1] 삶의 문이 열리지 않아 고생했던, 방황했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요한복음 10장 7절과 9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그 문으로 들어가면 무엇을 얻습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1) 순간적인 생각이나, (2) 거시적인 방향성에 마음을 두지 않고, 세상적인 기준과 목표에만 집중하는 나의 모습이 있다면 돌아봅시다.

 

[4-5] 히브리서 2장 1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내 대신 들어가신 문은 어떤 문입니까? 그분을 믿고 따라가면 내가 들어갈 죽음에 문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예수님만 신뢰하고, 오늘 내 삶의 문이 여기에서 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할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정죄 대신 은혜
(3. 16. 2025.)

로마서 8:1-2

 

예수님 믿은 이후에도 변화가 잘 안 된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제일 안 변한다. 그때 정죄감에 빠진다. ‘정죄(condemnation)’란 ‘유죄판결’이란 뜻이다. 그 행동 때문에 따라오는 형벌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너무 많이 실망하셨을 거야, 하나님이 가만 두지 않으실 거야…’ 다른 사람도 똑같이 바라본다. ‘저렇게 살면서 무슨 신앙인이래?’ 나를 정죄하는 사람은, 상대도 정죄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영원히 나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예수님 안에서는 더 이상 정죄가 없다. 미래에 다시 죄를 지으면? 여전히 정죄가 없다. 영원히 없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실망스러운 모습 때문에 나를 버리시거나, 마음이 바뀌시거나, 형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1) 나를 스스로 정죄하지 말라. 예수님 안에서 내 인생의 남은 모든 순간은 그 행동 이후에 따라오는 은혜만 남아있다. 죄를 짓고도 잘한 일이라고 말하라는 게 아니다. 죄는 죄이다. 뼈아프다. 그러나 아픈 죄의 결과가 펼쳐져도, 그것은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통로가 될 것이다. 낙심 말고 기대함으로 일어서라. (2) 상대방을 정죄하지 말라. 그 죄 때문에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자로 대하지 말라는 말이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상대의 삶에 펼쳐질 하나님의 은혜를 막는가? 당신 생각엔 막혔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 상황을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다. 은혜가 정죄를 이긴다.

 

정죄가 없으니, 마음대로 죄짓고 살면 되는가? 정죄 없는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깨달으면, 죄를 짓기 싫어진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한복음 13:1) 나에게 정죄가 없음은, 예수님이 유죄판결로 죽으셨기 때문이다. 내가 주님 떠나도, 인생 망쳐도 마지막까지 붙드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 내가 의지할 유일한 그분의 사랑을 묵상할수록, 그 사랑의 아름다움 앞에서 나는 점점 죄를 끊고 싶어지는 것이다.

 

내게 남은 인간적인 정죄의 시각을 끝장내라. 하나님은 나를 그렇게 바라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그렇게 바라보시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사랑받는 자임을 묵상하라. 그리고, 그렇게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해보라. 그 사람을 향한 정죄의 시각을 끝장내라. 은혜가 모든 것을 이긴다.

 

[1] 내 자신이나 타인의 변하지 않는 모습 속에서, 정죄감을 느꼈거나, 남을 정죄하는 일에 빠졌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로마서 8장 1-2절을 읽어봅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가 누리는 특권은 무엇입니까? 정죄의 시각 때문에 나와 주변 사람들을 은혜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모습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13장 1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정죄가 없다는 이유로 죄에 계속 남아있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나와 주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다르게 바라보아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매력의 함정
(3. 9. 2025.)

사사기 16:17

 

매력이 있으면 살기 쉽다. 그래서 세상은 불공평하다. 한 회사 인사팀장이 면접 지원자에게 말했다. “장담하는데, 너는 그냥 대충 가도 뽑힐 거야.” 매력은 남보다 나를 우월하게 만드는 힘이다.

 

하나님보다 매력을 의지하면 망한다. 삼손은 머리가 길고 힘이 셌다. 머리 자르면 힘도 빠진다. 하나님이 주신 매력임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매력 앞세우다가 망한다.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사사기 16:17) 남보다 더 가지고, 더 잘하고, 더 우월한 부분이 있는가? 그것이 내 인생을 무너뜨리는 함정이 된다.

 

매력을 철저히 하나님 앞에 절제하라. 매력을 의지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매력을 이렇게 정의해보라. 매력이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덜 필요해지는 것’이다. 돈이 있어서 기도 덜해도 된다. 외모가 되기에 언제나 어필이 가능하다. 젊고 체력이 좋아서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다. 머리가 좋아서 일처리가 빠르다. 바로 그 방식으로 망한다는 뜻이다. 매력을 의지하면 머리가 잘린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매력을 자랑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진다.

 

하나님 앞에 서면 매력의 기준이 바뀐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의인의 매력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나는 하나님 눈에 매력을 끌 수 없었으나, 예수님이 나 대신 자신의 매력을 내게 주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4) 그분이 완전한 사랑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가? 비로소 그 때에 세상의 매력을 의지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

 

매력으로 하나님을 막지 말라. 주신 매력에 갇혀, 하나님의 매력이 드러나지 않는 함정에 빠지지 말라. 당신을 통해 드러내실 하나님의 영광은 지금 그 매력보다 훨씬 크다.

 

[1] 매력 있으면 살기 쉽습니다. 내 매력을 의지하거나, 누군가의 매력이 부러웠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재능, 외모, 키, 재력, 언변 등…)

 

[2-3] 사사기 16장 17절을 읽어봅시다. 삼손의 매력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매력은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지금 하나님이 덜 필요해지고, 나의 매력을 의지하여 일을 감당해 나가는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로마서 3장 10절을 읽어봅시다. 이 땅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에서 매력 있는 존재는 누구입니까? 2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복음 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하나님보다 나의 매력을 앞세우지 않기 위해 삶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감정을 지배하시는 하나님
(3. 2. 2025.)

시편 30:11

 

감정은 통제할 수 없다. 상황을 마주할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연인과 헤어졌는데 갑자기 기쁜 사람은 없다. 취업에 성공하거나, 병이 나으면 너무나 기쁘다. 정서는 마음의 반사작용이다. 내가 오늘 특정한 감정을 느낀다면, 그 감정을 만들어내는 무엇을 먼저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시는 분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편 30:11) 살면서 당연히 느껴지는 감정을 뒤집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슬퍼 마땅한 일을 경험해도 하나님을 함께 경험하면 감정이 바뀐다. 분노하는 것이 당연한 일을 경험해도 하나님을 함께 경험하면 평안과 담대함이 생긴다. 내가 참된 신앙인인지 검증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하나님으로 인해 내 감정이 다스려지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다.

 

나의 감정에 ‘프리패스’ 이용권을 주지 말라. 당연한 감정의 순간에, 하나님을 함께 경험하여 새로운 감정의 지배를 사모하라.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히브리서 10:34) 소유를 빼앗길 때 어떻게 기쁨이 함께하는가? 하나님 안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영구한 소유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오늘 당신의 통제되지 않는 감정의 순간은 무엇이 있는가? 질투, 분노, 정욕, 우울, 자기연민의 순간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사모해보라. 새로운 감정이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당신의 구원을 엄중하게 다시 바라보라.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립보서 3:8) 구원이란 내가 원하는 다른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예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으며, 그분이 나를 영원히 자신의 자녀 삼으셨다는 것을 믿는가? 당신은 구원 받았는가? 그분을 사모함으로부터 오는 감정의 새로운 지배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아직 구원받은 증거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그 구원을 사모하라. 주실 것이다.

 

세상의 일을 경험하며 따라오는 뻔한 감정을 반복하며 살지 말라. 그 상황과 상관없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할 때 주어지는 새로운 정서를 느끼며 살라. 새로운 정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세상은 이 선물을 줄 수 없다.

 

[1] 기분은 통제하기가 어렵습니다. 특정한 상황 속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감정의 지배를 경험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분노, 우울, 불안 등)

 

[2-3] 시편 30편 11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내 기분을 나아지게 하기 위해 상황을 회피하거나 통제하려고 했던 잘못된 해결의 시도들을 나누어 봅시다. (도망가기, 다른 자극을 찾기 등)

 

[4-5] 히브리서 10장 34절을 읽어봅시다. 신자가 경험하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빌립보서 3장 8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실 때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나는 참된 구원을 받았습니까? 상황을 바라보는 새로운 감정을 경험했거나, 그 구원을 사모해야 할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작은 저항
(2. 23. 2025.)

출애굽기 1:17-19

 

세상은 너무 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작다. 내 삶의 의미를 나의 역량으로 평가하는 시대다. 매출 얼마 나와? 논문 몇 개 썼니? 회사에서 무슨 일 해? 한달에 얼마 버니? 높이 올라간다고 비참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외국계 증권사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중학생 정도면 할 수 있는 마우스 클릭 업무를 하루 종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작은 행동을 사용하시는 분이다. 이집트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이 늘어나자 위협을 느끼고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다 살해하라고 명령한다. 바로 왕과 맞짱을 뜨거나, 나라를 뒤엎을 순 없었다. 할 수 있는 저항을 한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출애굽기 1:17) 바로 왕이 왜 아기가 안죽었냐고 묻자 어설픈 핑계를 댄다.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19) 이런 말이다. “제가 일부러 안 죽인게 아니라 제가 오기 전에 출산이 이미 끝난 거예요.” 바로에게 죽을까봐 덜덜 떨며 대답한 이 힘없는 저항 속에 모세가 나왔다.

 

내게 주신 할 수 있는 작은 순종의 행위를 찾고, 지속하라. 그것이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크신 분이기에, 우리의 작은 일을 크게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다. 어떻게든 회사와 학교에 사랑과 기쁨, 용서가 흐르게 하라. 나 혼자라도 웃고 다니라. 최대한 따돌림과 뒷담화가 없게 하라. 틈만 나면 전도하고, 나쁜 비리와 음해, 비성경적인 가치들이 최대한 줄어들게 하라. 어설픈 핑계를 대면서라도 악을 막아내라. 뒤에서 수를 써서 좋은 가치들이 심겨질 수 있도록 일하라. 믿는 자들과 연합하고, 바른 가치를 추구하라. 적은 시간과 물질을 떼어 이웃을 섬기고 헌금하라. 나의 작은 발버둥 속에, 모세의 출애굽이 만들어진다.

 

마지막에 순종으로 저항하신 우리의 왕이 계신다. 예수님이다.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마가복음 15:30) 십자가에서 인내로 순종하신 작은 저항이, 죽음을 생명으로 뒤집었다. 그 영생의 수혜자임을 믿는가? 나도 내 행동의 무게를 인간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작은 저항이지만, 그것은 순종이기에, 분명 하나님의 크신 일하심이 나타날 것이다.

 

작은 저항을 가치 없다 여기고 타협하거나 안주하지 말라. 순종의 큰 위력을 무시하지 말라. 산파와 같이 내게 주신 특별한 상황이, 특별한 하나님의 일을 만들어내는 모판이 될 것이다.

 

[1] 일주일 내내 하는 일들이 보잘 것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나의 작음을 느꼈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출애굽기 1장 17절을 읽어봅시다. 바로가 히브리 남자 아기들을 죽이라고 했을 때 산파들은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내가 속한 곳의 분위기와 관행에 휩쓸려 하나님의 뜻대로 저항하기 어려웠던 삶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가복음 15장 3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어떻게 저항하셨습니까? 그 작은 저항 때문에 우리가 얻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크신 하나님을 믿고, 내가 결단할 수 있는 삶 속의 작은 순종, 작은 저항들은 무엇이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다시 공급되는 힘
(2. 16. 2025.)

잠언 24:16

 

무언가를 계속하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계속 사랑하는 일. 매일 밥하는 일. 매주 피부관리 받으러 가는 일. 매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 계속하는 것은 힘들기에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내 일상에 포기하는 일은 점점 늘어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하시는 분이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언 24:16) 의인과 악인의 차이는 다시 시작함에 있다. 모두가 실수하고, 모두가 포기하지만, 하나님은 의인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13)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 힘이 없다고 가만히 있지 않고, 다시 힘을 주실 것이라고 믿고 시도하고 행동해보라. 너무 미운 가족에게 절대 나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성도가 있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닌 것 같아 내키진 않는 마음을 가지고 연락했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풀어주셨다고 한다. 새 힘을 공급하신 것이다. 힘이 없다고 가만히 있지 말라. 힘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해야 할 일 앞에 다시 서 보라. 힘은 내 안에서 오지 않고 다른 데서 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직전 그 모든 압박감을 감당할 수 없으셨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기도한 후, 다르게 말씀하신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26:46)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공급하시는 힘으로 십자가까지 가셨기에 내게 구원이 주어졌음을 믿는가? 나도 동일한 구원을 경험할 것이다. 내 삶의 여정을 마칠 때까지, 하나님은 끊임없이 내게 필요한 힘을 다시 공급하실 것이다.

 

다시 공급받고 싶은 힘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라. 지혜? 재정? 여유? 사랑? 성실? 인내? 기쁨? 평안?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은 그 힘을 공급하실 수 있는 분이다. 무너졌던 곳에 다시 힘을 공급받을 것을 믿고 나아가라. 이전과 다른 힘을 경험하게 되리라.

 

[1] 계속하는 힘을 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힘에 부쳐 중도에 포기한 삶의 여정들을 나누어 봅시다. (관계, 학습, 기상 등등…)

 

[2-3] 잠언 24장 16절을 읽어봅시다. 의인과 악인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공급하십니까? 내 스스로 내 안에 있는 힘만을 바라보며 선뜻 다시 나서고 있지 못한 내 삶의 영역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26장 46절을 읽어봅시다. 십자가 지시기 직전 예수님이 기도하신 후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힘을 통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안에서 내 삶에도 동일한 일이 일어날 것을 믿고, 다시 공급되는 힘을 사모하며 직면해야 할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사물에 임하는 은혜
(2. 9. 2025.)

창세기 39:5

 

하나님은 어디까지 내 삶에 함께하시는가? ‘전부’ 함께 하신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 삶의 영역들이 있다. 내가 주문하는 메뉴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 내가 고르는 유튜브 영상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가? 내가 주문하는 제품, 내가 매수하는 부동산과 주식에 하나님은 함께하실까?

 

하나님은 사람과 자연 뿐만 아니라 생기가 없는 사물에도 함께하신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을 관리하자, 요셉을 통해 임한 은혜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세기 39:5) 여호와의 복이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쳤다. 모든 소유물이 복된 소유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이 단순한 물건에까지 미친다는 또 다른 근거 구절이 있다.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신명기 28:5)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쓰는 쇼핑백과 밥그릇에까지 임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시키라.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항공기 고른다. 사고를 피한다. 하나님 은혜가 사라지면 불량품 사고, 물건 쉽게 부서지고, 상한 것 먹는다. 내가 어제 상한 것 먹었는데 저주 받았다는 뜻인가? 내 아이패드 고장 났는데 저주하신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저주를 가져가셨기에, 예수님 안에서 경험하는 부정적인 것들마저 내게 유익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물건에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히 유효함을 깨달아야 한다. 온갖 기계적이고 생명 없어 보이는 곳에까지 언제나 은혜를 구하라!

 

순종하는 자에게만 이 은혜가 가능했다. 불순종한 자에게는 저주가 임해야만 했다.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혼란과 책망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하게 하실 것이며”(신명기 28:20) 그러나 예수님이 나 대신 저주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라디아서 3:13) 물건을 통해서도 저주를 받아야 했던 내 인생을 예수님이 구원하셨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오늘 담대히 은혜를 전 영역속에서 사모하라. 내가 보는 영상, 내가 타는 비행기, 내가 사는 물건마저 복이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좁은 곳에 갇혀 있는 은혜에 대한 생각을 풀어놓으라. 은혜가 내 삶 전 영역을 뛰어다니게 하라. 당신이 가는 곳마다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복이 임할 것이다.

 

[1] 여기까지 하나님이 함께 하실까? 라는 의심에 하나님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영역이 있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창세기 39장 5절을 읽어봅시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일을 시작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복이 임한 범위는 어디까지였습니까? 내가 은혜를 구하는 영역이 넓어졌던 계기가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신명기 28장 20절을 읽어봅시다. 원래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는 무엇이었습니까?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읽어봅시다. 우리 삶에 벌어지는 모든 일이 저주가 아님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의지하여 내 삶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구해야 할 영역들을 구체적으로 넓혀서 이야기 해 봅시다.

숨겨진 목표, 사랑
(2. 2. 2025.)

요한일서 4:19-20

 

인생에는 직접 추구하지 않았는데 배워지는 것들이 있다. 눈치. “난 이제 눈치를 배워야지” 다짐하는 사람 없다. 그냥 살다 보면 눈칫밥이 늘어간다. 인내. 특별히 노력 안해도 나이들면 화가 좀 줄어든다. 너그러움, 유머, 사회성… 삶은 직접적인 학습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삶을 통해 궁극적인 하나의 목표, 사랑을 가르치신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한일서 4:19-20)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을 배우지 못한 것은 곧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내가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언제나 내 삶의 숨겨진 목표에는 사랑을 배우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내 관심사만을 기준으로 오늘의 삶의 숨겨진 목표를 부정하지 말라. 간접적으로 무엇을 가르치시고 계신지 민감해지라. 바쁜 상황 속에서, 상대의 자격 없음 속에서, 상황의 열악함 중에서, 누군가를 배려하며 내가 사랑해야 할 상대와 부대끼게 하신다. 커리어, 편안함, 재미, 재정을 기준으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내 삶의 목표가 있다. 하나님이 이 상황 속에 사랑이라는 다른 목표를 함께 진행시키고 계시다면, 내 삶의 오늘은 결코 헛되지 않다.

 

도대체 그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죄인일 때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죄인인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사랑 깨닫고 배우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이다. 그 사랑 받았는가?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아마 내 삶에 다른 죄인을 만나면서 깨닫게 될 것이다.

 

오늘의 삶과, 주어진 상황을 긍정하라. 세상의 다른 기준으로는 실패로 보여도, 분명 가치 있는 여정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내가 배울 수 있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연휴 때 가족이랑 시간을 보내면서 참 답답한 상황 많지 않았는가? 불평 말라. 잘 하고 있다. 하나님의 숨겨진 목표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1] 삶에는 직접 추구한 것이 아닌데 얻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예 – 눈치, 친절, 생존력, 근성…)

 

[2-3] 요한일서 4장 19-20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을 가르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제외하고 내 삶을 내 기준대로 판단하고 있는 모습이 있다면 돌아봅시다.

 

[4-5] 로마서 5장 8절을 읽어봅시다. 나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그 사랑 앞에서 오늘 내 삶의 숨겨진 목표를 발견해봅시다.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계십니까?

성령의 감동
(1. 26. 2025.)

사도행전 16:6-7

 

이론을 안다고 현실을 살 수는 없다. 살아봐야 아는 또 다른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론상 한 달에 얼마씩 모으면 부자 된다. 이론상 하루에 몇 시간 공부하면 서울대 간다. 이론상 아이는 이렇게 키워야 한다. 그렇게 된 사람 아무도 없다. 현실엔 다른 문제들이 있다.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다. 바울이 선교지를 두고 고민할 때 성령이 마음에 감동을 주신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사도행전 16:6-7) 어디에서 말씀을 전하라는 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바울은 알 수 있었다. 성령의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내용을 다 안다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매일의 성령의 감동으로 인도함 받는다.

 

성령의 감동을 경험하고, 이것에 민감해지라. 말씀이 객관적인 인도하심이라면, 성령은 말씀에 기반한 주관적인 인도하심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객관적인 인도하심이지만, ‘지금 부모님께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를 고민하는 것은 주관적 인도하심이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2:12) 일상에 수시로 성령의 임재를 구하라. 말하기, 판단, 방향성, 마음, 통찰 모두 성령님이 주셔야 한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생각과 마음이 맞는지 검증이 어려울 때가 많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말라. 검증이 어렵다고 성령의 감동이 없다고 말하면 안 된다. 분명 성령은 우리에게 감동하셔서 주관적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예수님은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알고 계신 분이셨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끊임없이 인도하심을 구하고 경험하며 사셨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마가복음 1:12)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포함되어 있음을 믿는가? 그분이 성령을 따라 십자가까지 가셔서 내게 영생이 주어졌다. 오늘 나의 구원도 성령의 감동을 따를 때 경험하게 될 것이다.

 

차가운 신앙생활을 벗어나라. 신앙생활은 결코 이론에 머무르지 않는다. 매일의 행동, 순간의 판단 속에 성령의 감동을 사모하라. 성령을 사모하는 자에게 넘치도록 채워 주시리라.

 

[1] 이론을 안다고 삶을 잘 살 수 없습니다. 실제 살아가는 것은 이론과 다르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사도행전 16장 6-7절을 읽어봅시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선교지를 고민할 때 어떤 경험을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어떤 종류가 있습니까? 평소에 성령의 감동을 따라갈 수 있는 내면의 준비가 되어 있는지 돌아봅시다.

 

[4-5] 마가복음 1장 12절을 읽어봅시다. 모든 말씀을 아시는 예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인도함 받으셨습니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내 삶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또 지금 그 인도하심을 구해야 할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성령의 감동을 받기 위해 매일의 일상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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