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구하기
(10. 13. 2024.)

에스겔 36:26

 

이것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있다. 바로 그 ‘마음’이다. 마음은 내 마음대로다. 저 사람을 미워하는 건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 끌려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이다. 내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 누가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 마음만큼은 모두가 자신이 주인 되어 산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주인 되시는 분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에스겔 36:26) 마음에 주인이 있다면, 마음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상황마다, 사람마다, 그 마음을 가지는 것이 맞는지 묻고,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구하는 것이 마음의 주인이 하나님 되신 자의 삶이다.

 

마음을 구하는 연습을 해보라. 마음 가는 대로 살면 안 되고, 그 마음이 맞는지 물어야 한다. 그 마음에 굴복하지 말고, 바람직한 새 마음을 부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시기하는 것이 내가 가져야 할 바른 마음이 맞는가? 계속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 주신 마음인가? 계속된 불평과 고집은 주님이 허락하신 마음인가? 이 사건과 사람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기를 원하시는가? 전인적인 순종은 마음을 구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예수님은 마음가는 대로 살지 않으신 분이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가복음 14:36) ‘이 잔’을 마음가는 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십자가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구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 순종하시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나도 이제 확신할 수 있다. 나도 예수님 안에 있다면, 나의 원래 마음보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 순종할 때 동일하게 이 땅에서도 구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마음의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 마음을 구할 때, 그의 뜻이 내 삶에 펼쳐지리라.

 

[1] 마음만큼은 자기 마음대로 다루는 시대입니다. 내 삶의 상황과 사람에 대해 내 마음 속을 내 마음대로 다스렸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분노, 미움, 두려움 …)

 

[2-3] 에스겔 36장 26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가 스스로 마음을 경계하지 못하고 합리화 시키며 주인됨을 행세하기 쉬운 삶의 영역은 어디인지 나누어 봅시다.

 

[4-5] 마가복음 14장 36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주시기 위해 구하셨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나도 내 삶에서 무엇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새로운 마음을 주셨던 경험이나, 새 마음을 구해야 할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공개된 불행
(10. 6. 2024.)

로마서 12:3

 

예전엔 알 수 없었던 것들이 모두 공개되어 있다. 친구가 어디 가서 뭐하고 놀았는지 몰랐다. 이제 인스타 보면 다 나온다. 전 세계 사건 사고가 실시간 뉴스로 뜬다. 부자가 어떻게 사는지도 너무 자세히 나오고, 병들고 가난한 자들의 생활도 낱낱이 보인다. 내가 접하는 정보의 범위가 훨씬 넓어진 시대에 산다.

 

하나님은 생각의 범위를 통제하라고 명하시는 분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로마서 12:3) 정보, 소식, 소문의 인풋이 너무 많으니, 온갖 불안과 염려, 시기와 질투도 함께 증가한다. 기도는 없고 생각만 많으니, 내가 정한 길의 확신은 없고 유망한 길들만 너무 많이 보인다. 예전엔 몰라서 불행했다. 이제는 공개된 불행의 시대로 바뀌었다.

 

너무 많은 정보가 주는 생각을 통제하라. 조너선 하이트는 『불안세대』라는 책에서 세상은 훨씬 더 안전 해졌지만, 두려움을 조장하는 뉴스가 발달하니 요즘 부모들이 아이들을 훨씬 과잉보호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굳이 몰라도 될 것을,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남이 어디 여행 가는지, 어떻게 사는지, 댓글에서 뭐라고 하는지를 물어보고 찾아보면서 점점 방황하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적용해보라. 그 정보를 접하고, 그 생각을 할수록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에 대한 확신, 감사, 평안이 사라져간다면, 그 생각은 아무리 지적이고 멋있어 보여도 멈추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기가 가장 높아졌을 때, 결코 생각이 흔들리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태복음 16:23)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셨다. 그분은 나의 구원을 생각하셨다. 자신이 십자가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흔들리지 않으셨던 예수님 때문에, 내게 영생의 구원이 주어졌다.

 

그렇다면 오늘 내 인생도 마땅히 그렇게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안다고 행복한 게 아니다. 공개된 불행에서 벗어나라. 하나님이 허용하신 생각의 범위 밖의 것들을 정리하라. 다 모르는 것 같지만, 훨씬 재밌고 행복한 인생이 될 것이다.

 

[1] 모든 정보가 공개된 시대입니다. 예전과 다르게 많은 것들이 공개되어 삶에 새로움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예 – 제품 비교, 연봉 비교, 자녀 교육, 여행 유튜브, 사업보고서 등…)

 

[2-3] 로마서 12장 3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통제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너무나 많은 인풋 때문에 삶에 감사가 사라지고 오히려 혼란과 염려가 늘어났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16장 23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끝까지 흔들리지 않으셨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 생각의 견고함은 무엇을 이루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범위를 넘어선 나의 생각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눈물을 담는 시간
(9. 29. 2024.)

시편 56:8

 

아기는 울면서 태어난다. 가장 무력하니까 그렇다. 무력의 끝에는 눈물이 있다. 연약할 땐 울어야 하는데, 세상에서는 울지 말고 강해지라 한다. 그래서 강해졌는가? 모두 눈물을 참고 있을 뿐, 훨씬 고난 앞에 약해졌다.

 

하나님은 사람의 눈물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편 56:8) 부모 앞에서 울 수 있는 자녀가 훨씬 건강하고 강해진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 앞에서 울게 하신다. 마귀는 내 눈을 가려 울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고 속인다. 나의 비참한 영적 상황을 숨기는 것이다. 내 비참함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눈물이 회복된다. 눈물을 담는 시간 자체가 우리에게 치유의 시간, 승리의 시간, 회복의 시간이다.

 

울 때까지 기도해보라. 눈물로 찬양해보라. 울 때까지 예배해보라. 눈물에 힘이 있다. 이것은 이론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너무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그냥 눈물을 담는 시간으로 들어가라. 회심하고, 회복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공통적인 일이 있다. 예배당에 들어오자 마자 눈물이 난다. 예배 드리다가 갑자기 눈물이 한없이 흐른다. 오늘 마음도 메마르고, 사랑도 없고, 인생에 재미도 없고, 열정도 사라지지 않았는가? 근본 원인은 하나다. 눈물이 사라져서 그렇다. 나와 주변의 모든 처지를 두고 울라. 눈물 자체를 달라고 기도하라. 이상하게 눈물이 회복되면, 모든 응답과 회복이 뒤따라 찾아온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에 어떠셨을까?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마가복음 14:32-33) 예수님이 십자가 앞에서 우셨다. 기도하며 울었더니, 뒤집어졌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42) 예수님의 구원은 눈물을 통과한 구원이었다.

 

예수님의 눈물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음을 믿는가? 나도 이 고난 앞에 그렇게 구원받을 것이다. 도대체 이 상황에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가? 울어야 한다. 울어야 산다. 눈물을 담는 시간으로 들어가라. 승리의 문이 열릴 것이다.

 

[1] 사회 생활을 하면서 사람의 눈물은 수치스러움이 되었습니다. 언제 많이 울었습니까? 언제 많이 눈물이 사라졌습니까? 언제 울고 싶은데 참았습니까?

 

[2-3] 시편 56편 8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사람이 점점 울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눈물을 통해 변화가 나타났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가복음 14장 32-33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에 무엇을 경험하셨습니까? 42절을 읽어봅시다. 그 이후에 무엇이 찾아왔습니까? 삶의 눈물의 회복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며 어떻게 삶이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요즘 어떤 기도제목에 가장 많은 눈물이 납니까?

“뭐라고 말해도 그건 불평
(9. 22. 2024.)

시편 37:8

 

말은 그 사람 평생의 습관이다. 재밌는 사람은 계속 재밌고, 우울한 사람은 계속 우울하다. 감사하는 사람은 불평을 입에 대지 않고, 불평하는 사람은 감사를 표현할 줄을 모른다. 사람은 말로 영향을 주고받다 보니, 부정적인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결정한다. ‘이 사람 말 계속 들어주기 너무 힘들다. 가까이하면 안되겠구나.’

 

하나님은 ‘불평’과 ‘원망’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치명적인 죄로 보신다. 불평이란 무엇인가? ‘상황’이마음에 들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시편 37:8) 원망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야고보서 5:9) 어떤 상황에도 불평해선 안되고, 원망해선 안된다. 이걸 너무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절대로 금하시는 명령인데, 사람은 다 그런 거라고 핑계 댄다.

 

원망과 불평이 아닌 척하지만, 뭐라고 말해도 원망이고 불평인 부분들을 회개하라. “이런 망할 놈의 회사, 망할 놈의 나라, 망해버릴 대표, 망할 놈의 입시제도!” 그냥 화나서 한 이야기라고? 이것이 바로 원치 않는 모든 상황을 불평으로 해결하는 나의 죄악된 언어습관이다. 옆사람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말하는가? “아 진짜 부모 잘못 만나서 이게 뭐냐고!”, “아내가 그 정도 밖에 못 해주는 게 마음에 안 들어.”, “내 자식이지만 정말 걔 때문에 내가 미쳐버리겠어”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한 것 뿐이라고 포장하지 말라. 성경은 그걸 원망이라고 한다.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차지 않아 못마땅함을 밖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원망과 불평을 어떻게 안 할 수 있는가? 원망과 불평 할 상황에 다른 방법으로 승리하신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 왜 의인이 십자가를 지나?(상황) 예수님은 불평하지 않으셨다. 왜 죄인을 위해 내가 죽어야 하나?(원망) 예수님은 원망하지 않으셨다. 구원은, 원망과 불평으로 오지 않았다.

 

당신은 예수님을 구주로 모셨는가? 그렇다면 구원받았는가? 맞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처한 상황에도 구원이 임할 것을 믿는가? 분명 그럴 것이다. 구원이 원망과 불평으로 오지 않았음도 믿는가? 맞다. 그러니 원망과 불평하지 말라. 당신도 예수님의 구원을 경험할 것이다.

 

[1] 언어는 중요한 삶의 태도 중에 하나입니다. 대화 속에서 큰 힘을 얻고 친밀해지고 싶었던 경험이나, 대화를 그만 듣고 싶고 피하고 싶었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시편 37편 8절과 야고보서 5장 9절을 읽어봅시다. (1) 불평이란 무엇입니까? (2) 원망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그냥 있는대로 말할 뿐이라고 포장하며 죄를 짓는 언행의 범죄를 나누어 봅시다.

 

[4-5] 히브리서 12장 2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까? 나도 오늘 이 상황에서 구원이 임할 것임을 믿는다면, 당장 버려야 할 삶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1) 상황에 대해서 (2) 사람에 대해서 내가 죄악을 버리고 삶의 태도와 언행을 어떻게 새롭게 할지 나누어 봅시다.

“적게 받은 자의 죄
(9. 15. 2024.)

마태복음 25:24-25

 

주인이 사라지면 권리만 남는다. 스승이 있던 시절 제자는 권리를 말하지 않았다. 권리는 스승으로부터 오는 것이니까. 자녀는 부모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다. 부모로부터 권리가 주어질 뿐이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시대이다. 인생의 주인이 사라졌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모두가 내 권리만 찾는다. 나도 부자 될 권리, 나도 편안할 권리, 나도 힘든 일 안 할 권리, 나도 놀 권리. 인생의 주인이 사라지니, 남보다 내 삶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남이 내 인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나님은 내가 처한 모든 형편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다. 주인이 그 재능에 맞게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었다. 가장 적게 받은 자가 죄를 짓는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태복음 25:24-25) 왜 내게 한 달란트를 주을까? 내가 판단할 권리가 없다. 그 자체가 화가 난다면, 내 인생의 주인이 없어지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다는 증거이다.

 

내가 현재 처한 형편에 감사하지 못하고, 계속 화가나는 부분을 회개하라.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해야 하는지는 주인이 판단하시는 일이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why) 질문 자체가 틀렸다. 그건 주인이 생각하실 일이다. “나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how) 이것이 주인이 있는 사람의 질문이다. 더 실천적으로 적용해보겠다. 각 영역의 주인을 인정하라. 자녀라면 성인이 되기 전에 부모에게 함부로 토 달지 말라. 가정에선 부모가 주인이다. 부모와 잘 지낼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아르바이트생인 주제에 사장의 결정에 뚱한 표정 짓지 말라. 적어도 그 회사에선 그 사장이 주인이다. 어떻게 주인 마음에 들지를 고민해야 맞다. 교수와 선생님의 강의 앞에서는 그 방향을 일단 따르려고 하라. 그 수업 시간에는 그 교수님이 주인이다. 회사가 싫다고? 회사는 나를 좋아하는지를 묻는 것이 맞지 않을까? 각 영역의 주인과 윗사람을 인정하는 것이 적게 받은 자가 순종해야 할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를 가나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지 않고 주인을 인정한다. 왜? 자격 없는 자로서 주인에게 구원 받았음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하나님 앞에 가진 것 없는 내가 영생을 거저 얻었음을 알기에, 이 땅에 적게 받은 상황을 나는 결코 불평할 수 없다.

 

모두가 자기 삶의 주인이라고 하니, 회사와 학교와 조직이 도저히 운영될 수가 없는 시대이다. 시대는 적게 받은 자의 온전한 순종을 찾고 있다. 어디 가서 제발 주인 좀 인정하라. 주어진 것 감사히 받고 일해보라. 아마 훨씬 빨리 주인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1] 나에게 권리가 없음을 인정하며 살다가, 모든 게 내 권리라고 생각될 때 시대는 어떻게 바뀌게 되었습니까? 모두가 권리만 주장하며 자신의 형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대의 변화를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25장 24-25절을 읽어봅시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을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지은 죄는 무엇입니까? 내 삶에 가장 불평이 많아지고,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삶의 영역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로마서 5장 8절을 읽어봅시다. 신자가 인생의 주인에게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내 영적인 정체성을 회복할 때, 그것을 믿을 때, 오늘 적게 받은 상황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평가받을 수 있는 귀
(9. 8. 2024.)

잠언 9:9

 

무서워서 남에게 뭐라고 말도 못하는 시대이다. 청소년이 담배피면 지나가는 어른들이 꾸짖었다. 지금은 그랬다간 천국에 빨리 간다. 분명 나보다 아랫사람인데, 내 말을 듣질 않는다. 뭐라고 한마디 하면 모두 상처받았다고 한다. 바야흐로 책망 불가의 시대이다.

 

하나님은 책망 받는 것이 지혜라고 말씀하신다.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언 9:9) 지적만 당하고 살라는 말인가? 이렇게 이해하면 좋다. 나에 대해 평가받을 수 있는 귀를 언제나 열어놓으라는 말이다. 내가 요즘 어떤 상태에 있는 것 같은지, 무엇이 부족한 것 같은지, 나의 강점은 무엇인 것 같은지 상대의 평가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놓는 것이 겸손이다.

 

이렇게 실천해야 한다. 요즘 서로 무서워서 먼저 말을 안 건다. 그러니까 먼저 말을 걸고 먼저 질문해야 한다. 처음부터 안 친한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으면 충격 받을 수 있으니, 나를 확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라. 내가 잠잠히 듣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라. “요즘 집에서 내 상태가 어떤 것 같아?”, “팀장님, 요즘 제가 잘 하고 있나요? 어떤 부분들에 신경을 더 쓰면 좋을지 편하게 이야기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제가 요즘 공부를 이렇게 하고 있는데, 이 방향성이 맞을까요?” 아무도 서로 간섭하지 않는 시대에, 먼저 간섭해달라고 달려오는 사람이 있다니! 그 사람은 어디를 가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만이 사람의 평가를 자유롭게 받을 수 있다.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로마서 8:33)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의롭다 평가 받게 되었음을 믿는가? 그것만이 절대적이기에, 나는 이 세상의 평가에서 자유롭다. 상대가 나를 평가할 때 나의 세상적인 부족함을 의연히 받아들이고 겸손히 노력할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인 평가가 아니라서 그렇다. 상대의 평가가 틀렸어도 과도하게 서운하지 않을 수 있다. 절대적인 평가자는 하나님 뿐이시니 괜찮다.

 

PT 선생님에게 운동 자세가 괜찮은지 봐달라고 말하지만 말고, 인생의 자세가 괜찮은지도 물어보라. 물으면 훨씬 좋게 나아진다. 평가 받으면 훨씬 빨리 전진한다. 평가받을 수 있는 귀를 열고 살라. 먼저 평가를 요청하라.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지혜이다.

 

[1] 남에게 함부로 뭐라고 말을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말했다가 욕먹었거나, 말 하려다가 참았거나,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해서 기분 나빴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잠언 9장 9절을 읽어봅시다. 성경은 누가 지혜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에 사라져버린 것은 무엇입니까? 타인의 평가가 개입되면서 내가 성장하거나 변화되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로마서 8장 33절을 읽어봅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의 평가는 절대적입니까 상대적입니까? 예수님 안에서 내 정체성을 새롭게 하고, 나의 현재에 대해 평가를 겸손하게 요청해야 할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주변 사람에게 나에 대해 무엇을 물어보면 좋을까요?

“폄하하지 않기
(9. 1. 2024.)

빌립보서 2:3

 

모든 관계의 깨짐은 폄하에서 시작된다. 상대가 하는 일의 가치를 깎아 내리는 것이다. 학생의 고단함을 폄하한다. “공부 좀 했다고 뭘 그렇게 피곤해 해?”, 아내의 가치를 깎는다. “집에서 애만 보는데 뭐가 그렇게 어려워?”, 잘 나가는 사람에게도 시비건다. “돈도 많으면서 너도 우울할 게 있니?” 기분 나쁘고, 손절하고 싶은 관계 속에는 언제나 폄하가 숨어있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명하신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립보서 2:3) 남을 낫게 여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상대가 하는 일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타인을 ‘자신’과 비교하여 평가한다. “쟤는 나보다 가치 없는 일을 해, 나보다 못해, 나보다 돈을 못벌어” 반면 신자는 ‘하나님’ 앞에 선 그 사람을 바라본다. 어린아이도, 청소년도, 싱글도, 부자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감당하는 과정에 있기에 가치 있다.

 

내 자신을 기준으로 상대의 수준이나 실력을 폄하하지 말라. 상대가 하는 일들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언어를 배우라. “어떻게 이렇게 매일 운동을 하세요? 대단해요.”, “학생 때가 원래 제일 고민 많을 때야. 지금 너는 정말로 잘하고 있는 거야”, “나는 이 시기에 너처럼 버티지 못했는데, 네가 나보다 훨씬 낫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더 힘차게 감당할 수 있도록 격려하라. 그것이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사람들의 권세이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죄인인 나를 폄하하지 않으신 분이다. 죄인인 나의 인생이, 예수님의 생명과 교환될 가치가 있다고 보셨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5,8) 그분이 나를 대하신 방식 때문에 내가 영생을 얻었음을 믿는다면, 나는 그 누구도 결코 폄하할 수 없다.

 

사람은 자기가 당한 대로 남에게 행하며 산다. 부모와 사회에서 비난만 받았던 사람은 남을 폄하할 줄만 안다. 가치를 인정받은 사람은, 상대의 가치도 인정한다. 예수님이 내 인생을 폄하하지 않으셨음을 기억하며, 사랑받은 대로 행하라.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다시 일어서게 될 것이다.

 

[1] 폄하 때문에 기분 나빴던 적이 있습니까? 반대로, 내가 쉽게 남을 폄하함을 스스로 인식하며 놀랐던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빌립보서 2장 3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객관적으로 상대가 나보다 못할 때에도, 상대가 하는 일을 폄하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남을 바라보는 기준은 어떻게 바뀌어야 합니까?

 

[4-5] 빌립보서 2장 5절과 8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나의 인생은 어떤 가치가 있습니까? 내가 받고 있는 사랑을 근거로,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겠습니까? 내가 변화를 다짐해야 할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시작은 속히, 실행은 꾸준히
(8. 25. 2024.)

에베소서 5:15-16
 

삶의 열매를 빼앗아가는 최악의 실수는 무엇인가? 시작과 실행의 속도를 착각하는 것이다. 늦게 시작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저축, 취업, 건강관리… 빠르게 시작해야 할 일들에 여유를 부린다. 반면, 실행은 한두 번 해보고 포기한다. 공부, 언어, 예배, 투자, 기도… 꾸준히 해야 하는데 결과가 너무 느리게 나오니 쉽게 지친다.

 

하나님은 내 삶에 주어진 기회를 분별하라고 명하시는 분이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베소서 5:15-16)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기회를 잘 살려라’는 말이다. 꾸준히 해야 기회를 살릴 수 있는 일이 있고,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기회를 놓치는 일도 있다. 내 삶에 오늘 주신 기회가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적용적으로, 속히 해야 할 일과 꾸준히 해야 할 일을 분류해보라. 당장, 일단 시작해야 하는데 해보지도 않고 미루고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는가? 계획하기 전에 일단 시작하는 것만으로 삶 전체가 바뀔 수 있다. 반대로, 이미 잘 하고 있고, 꾸준히만 하면 될 일인데 너무 조급해지고 실행을 포기해 버리는 일에는 무엇이 있는가? 지겹다고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냥 계속 가면 승리할 수 있는 길이다.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나보다 앞서 시작하신 분이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립보서 1:6)”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 인생의 선한 일을 앞서서 시작하셨다. 꾸준히 실행하고 계심도 확신하겠는가? 오늘 내 삶도 그렇게 바라보아야 한다. 앞서 시작하신 그 분을 신뢰함으로 오늘 속히 시작하고, 꾸준히 실행해야 한다.

 

하던 일 계속 하면 되는데 조급해지면서 망치지 말라. 나중에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시작을 미루지 말라. 내게 주신 기회를 잘 살리는 것, 그것이 세월을 아끼는 성도의 참된 모습이다.

 

[1] 시작과 실행의 속도는 다릅니다. 내 인생에 시작을 미뤘던 경험들과, 실행에 있어서 너무 조급해졌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에베소서 5장 15-16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오늘 내 삶에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시작’과 ‘실행’으로 분류해봅시다. 무엇을 속히 해야 하고, 무엇을 꾸준히 해야 합니까?

 

[4-5] 빌립보서 1장 6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내 삶의 기회를 잘 살릴 때, 열매를 거둘 수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미 시작된 예수님의 구원이, 오늘도 꾸준히 실행되고 있음을 믿으십니까? 그 신뢰함 속에 내 삶을 향한 새로운 다짐, 도전의 계획들을 나누어 봅시다.

“하나님을 잃는 자리
(8. 18. 2024.)

시편 139:7-8

 

휴가철 바닷물은 과연 깨끗할까? 물 밖에서 웃으며 노는 저 사람이 물 속에서 무슨 일을 행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만 잘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저 사람을 막을 재간이 없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두 악해지고, 약해진다.

 

하나님은 나를 어느 자리에서나 지켜보시는 분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편 139:7-8) 삶의 이중성은 죄이다. 죄는 내 삶의 기쁨을 앗아간다. 그래서 이중적일수록 기쁠 것 같은데, 오히려 불행해지고 우울해진다. 내 삶의 모든 이중적인 모습은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삶의 일관성, 삶의 진실함으로부터 오는 기쁨은 어느 자리에서나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할 때에만 회복된다.

 

특별히 내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자리를 찾으라. 운전대를 잡을 때, 교회 사람들 없는 직장에 출근할 때, 혼자 스마트폰을 할 때, 윗사람이 없고 아랫사람들만 함께 있을 때 … 하나님을 잃어버린 그 자리가 내 삶의 열매를 계속 가로막는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없으니, 세상에서도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하나님 앞에서 일관된 경건을 회복할 때, 삶의 자신감과 능력이 생긴다.

 

베드로가 예수님 부인할 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친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누가복음 22:61-62) 베드로는 왜 울었을까? “너 딱 걸렸어!” 들켜서 부끄러워서? 아니다.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음에도 자신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혼자서 실패했을 때, 자책하지 말고 다시 예수님의 시선을 보라. “난 네가 넘어질 것을 이미 보았음에도, 너를 놓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사랑의 시선이 없다. 이렇게 바라보아 주시는 주님 앞에, 인생 헛되이 살 수 없다. 하나님을 잃는 자리에, 다시 예수님과 시선을 맞추라. 하나님의 시선 앞에 일관된 삶은 평생의 복이다.

 

 

[1]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사람은 변합니다. 누군가 지켜보는 것의 차이가 행동의 변화를 일으켰던 나와 주변의 이야기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시편 139편 7-8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 삶의 이중성이 가장 극심해지는 삶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는 모습이 삶의 자신감과도 연결되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누가복음 22장 61-62절을 읽어봅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베드로는 왜 울었을까요? 내 모습을 이미 보셨음에도 사랑하시는 분의 시선 앞에서 내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환대, 받아주는 사랑
(8. 11. 2024.)

히브리서 13:2

 

가장 힘들면 어디로 가는가? 나를 받아주는 곳으로 간다. 부모님 집, 술집, 친구 집, 심지어 내연녀의 집을 들락거린다. 장소는 달라 보여도 모두 같은 곳이다. 받아주는 사랑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내가 오늘 갈 곳이 마땅치 않다면, 나를 받아주는 곳이 없다는 말이다. 내게 찾아온 누군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대접하는 것, 그것을 환대라고 한다.

 

하나님은 환대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브리서 13:2) 아브라함이 천사가 방문했을 때 잘 대접하여 아들을 얻게 된다. 환대를 통해 삶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내게 주신 기회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환영하고 대접해야 한다. 환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의무이자, 하나님이 일부러 계획하신 복의 통로이다.

 

내 삶의 모든 구조를 환대 중심적으로 바꾸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누군가가 쉽게 집에 올 수 있게 하고, 주기적으로 사람을 초대해야 한다. 내 사무실에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지 말고, 누구나 잠시 방문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평생 환대를 잃어서는 안 된다. 인생이 전부 무너졌다가 새로 신앙을 갖게 된 어떤 형제가 교회의 팀 모임을 이렇게 표현했다. “교회 공동체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매주 저를 조건 없이 기다리며 환대하는 곳이었어요.” 환대는 사람을 살린다.

 

이 바쁜 인생에 왜 내가 환대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나를 환대하셨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태복음 9:11) 이 세상에서 외모로, 실력으로, 나이로, 학벌로 조건을 걸고 나를 거부할 때, 주님은 나를 받아 주셨다. 예수님이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는 하나님 나라에서 환대 받는다. 그분이 받아 주셨기 때문에 내가 살았음을 생생히 인식한다면, 나는 이 땅에서 결코 환대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쎈 척, 도도한 척 좀 그만하라. 튀어나온 입 좀 집어넣고 웃으며 눈을 맞추라. 어딜 가서 사람을 만나면 일단 먼저 인사하라. 먼저 이름을 물으라. 먼저 어색함을 깨고 나아가라. 낯선 사람을 환대하고 받아주라. 환대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 나의 구주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이다.

 

[1] 어려울 때, 받아주는 사랑 때문에 살아나게 됩니다.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누구에게 환대 받으며 회복되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히브리서 13장 2절을 읽어봅시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창세기 18:5, 9절) 내 삶이 누군가를 환대하는 구조인지 나누어 봅시다. 폐쇄적으로 바뀌어 가는 부분들도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9장 11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낯선 사람들을 환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통해 내가 받게 되는 궁극적인 환대는 무엇입니까? 그 사랑 안에서, 환대를 그리스도인의 의무로 바라보고 내가 변화되어야 할 삶의 태도와, 구체적인 환대의 계획들을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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