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었을 때
(5. 25. 2025.)

창세기 3:6

 

인생은 선을 넘는 여정이다. “한번만 더 술 마시면 같이 못 살 줄 알아!” 또 술 마시고 들어온다. “한번만 더 장난치면 엄마한테 혼날 줄 알아!” 한번 더 장난친다. “이번에도 점수 떨어지면 알아서 해!” 점수가 더 떨어진다. 아무리 선을 세워도, 인간은 그 선을 넘는다.

 

복음이란 선을 넘었을 때 다르게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고 경고하셨다. 먹으면 선을 넘는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세기 3:6) 선을 넘었으니 죽어야 하는데, 오히려 보호받았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21) 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나, 육체적으로는 바로 죽지 않았다. 선을 넘었을 때에도, 구원하시기 위한 은혜의 계획이 실행되기 때문이다.

 

상대가 선을 넘었을 때, 극단적으로 반응하지 말라. 선을 넘지 않게 해야겠지만, 넘었다면 그 다음 계획도 세워야 한다. 그 다음 계획이 포기인 것은 복음이 아니다. 회복의 계획, 용서의 계획, 은혜의 계획이 있어야 한다. 상대가 업무적으로 큰 실수를 했더라도, 너무 빈틈없이 몰아붙이지는 말라. 부부 사이에 말도 안되는 실망이 있었는가? 다시 풀어볼 수 있는 대화의 여지를 주라. 자녀가 아무리 말을 안 들어도, 편하게 밥먹고 집 안에서 쉴 수 있는 한결 같은 사랑을 유지하라. 선을 넘어도 언제나 새로운 길이 있다! 그것이 복음을 믿는 자들의 여유로움이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상대가 선을 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을 넘은 사람이었음을 인정하는 죄인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에베소서 2:3-5)

 

내가 죄인이었지만, 나 대신 죽음을 넘으신 그분 때문에 나도 현세의 경계를 지나 영생으로 넘어갈 것을 믿는가? 오늘의 구원도 그렇게 올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그어둔 선에서 멈추지 말라. 실망시키고, 범죄하고, 기대를 저버렸어도 그 선을 넘었을 때 주실 새로운 은혜를 구하라. 선을 넘었어도 살 길이 열릴 것이다.

 

[1] 인간은 아무리 선을 그어 놓아도, 그 선을 못 지키고 넘어갑니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끊임없이 선을 지키지 못하고 넘어가며 실망을 안겨줬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창세기 3장 6절을 읽어봅시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어떤 결과가 예정되어 있었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21절을 읽어봅시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가 신앙을 가졌음에도, 내가 볼 때 선을 넘은 행동과 상황에 너무 극단적으로만 반응하는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에베소서 2장 3-5절을 읽어봅시다. 우리가 선을 넘은 상황에서 다르게 반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을 넘을 때에도 새로운 은혜의 계획이 펼쳐질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선을 넘은 실망스러운 내 자신과, 실망스러운 상대방을 어떤 방식으로 다시 대할 수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성내는 것
(5. 18. 2025.)

야고보서 1:20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화를 내는 것이다. 부하 직원이 문제를 일으켰다. 화내면 된다. 애가 말을 안 듣는다. 화내면 된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다. 화내면 된다. 화는 분명 세상이 제시하는 해결의 방법이다.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 아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야고보서 1:20)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손에 쥔 카드에서 한 장은 내려 놓아야 한다. 그것은 화를 내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화를 낸 후 무언가가 해결되는 듯할 때, 다시 한 번 생각하라. 분노는 하나님이 문제를 풀어가시는 방식이 아니다. 성내는 것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계획이 시작된다.

 

나는 언제 가장 화가 나는가? 그 순간을 이제 다시 정의해보라. 가장 화가 나는 순간은, 사실 ‘내가 아직 다른 해결 방식을 배우지 못한 순간’이다. 화만 나는 순간은 아직 다른 해결의 카드를 사용해보지 못한 순간이라는 말이다. 그것만 보고 자랐거나, 그렇게만 행동해 본 것이다. 그 순간 이렇게 물어보라. “이 상황에서 어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방법은 다양하다. 친절함, 인내, 한결 같은 사랑, 용서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다. 내가 분노 앞에 연약해지는 다양한 순간을 생각하고, 다양한 해결의 방식들을 듣고 배워야 한다.

 

내가 분노라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승리할 것을 보장해주신 분이 예수님이다.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요한계시록 15:1) 하나님이 마땅히 분노하실 것에 분노하신다. 그 진노의 대상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3) 내 삶이 진노가 아닌 십자가라는 방법으로 구원을 받았음을 믿는가? 일상의 구원도 그렇게 임할 것을 믿어야 한다. 내가 영생을 얻은 방법으로, 진노가 아닌 방법으로, 오늘의 해결도 가능할 것이다.

 

성내는 것이 세상살이의 보편적인 해결방식이라는 말에 동조하지 말라. 신자가 되었다면, 당신만은 다른 길을 걸으라. 화만 났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1] 요즘은 언제 가장 화가 납니까? 크게 분을 냈다가 후회하고, 일이 꼬이고, 삶이 어려워졌던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야고보서 1장 20절을 읽어봅시다. 사람이 성내는 것은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나의 분노에는 분명 보고 배운 것, 습관이 된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 온 좋고 나쁜 주변의 영향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계시록 15장 1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마지막에 무엇을 행하십니까? 에베소서 2장 3절을 읽어봅시다. 그 진노의 대상은 누구였습니까? 나는 이 진노에서 어떻게 면제되었습니까? 오늘 내 삶에 화가 나는 상황 속에, 어떤 방식으로 다르게 반응할 수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낙심하지 않는 구조
(5. 11. 2025.)

갈라디아서 6:9

 

세상에서 제일 약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넌 성격이 별로야” 한 청년이 어렸을 때 부모에게 들었던 말이 성인이 되어서도 평생 상처로 남았다고 한다. 하늘로 솟았다가도 1분 뒤 땅으로 꺼지는 것이 사람 마음의 연약함이다.

 

선한 일을 행할 때에 찾아오는 낙심과 피곤을 관리해야 한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 마음이 무너진다고 포기하지 않아야 열매를 거둔다. 그러므로 신자는 신앙생활 이후 늘 좋은 상황만 생기기를 기대해선 안 된다. 나쁜 상황이 당연히 생길 수 있음을 인지하고, 그것을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언제 가장 낙심하고 포기하게 되는지를 분석하라. 주변에 사람이 없어 외로울 때인가? 격무에 시달릴 때인가? 신랄한 평가와 비난을 들을 때인가? 그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곱씹으며 무너지는가? 아니면 마음을 일으키는 나만의 방법이 있는가? 낙심하지 않도록 구조를 짜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지혜이다. 개척교회 목사님은 모두 외로움에 무너진다.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현수 목사님은 오래 전부터 친한 선후배 사이였다. 그래서 가장 외로운 시간을 너무 외롭지 않게 지나갔다. 낙심하지 않는 구조를 통해 거둔 승리였다. 낙심을 이길 수 있는 나만의 구조를 짜보라. 원하는 운동 충분히 하기, 정해진 기도 시간 갖기, 사랑하는 사람과 수다 떨기,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격려 받기… 낙심을 이기면 승리는 따라온다.

 

아무리 힘을 내도 살아나지 않는 순간이 온다. 하나님과 영원히 떨어지는 순간, 죽음이다. 그러나 우리 대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을 계속 공급 받을 자격을 얻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이사야 40:28-29) 그러므로 확신하라. 오늘 내 삶에 당면한 문제에 대해, 하나님은 무조건 감당할 힘을 주실 것이다.

 

힘을 더하실 것을 믿고, 낙심하지 않는 구조를 짜라. 어떻게든 선한 일을 포기하지 않는 실행을 계속하라. 낙심만 피하면,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힌다.

 

[1] 사람 마음이 참 연약합니다. 순간적인 말과 상황에 모든 마음이 무너져 내렸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갈라디아서 6장 9절을 읽어봅시다. 삶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피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내 삶에서 마음과 생각이 가장 쉽게 무너질 때는 어느 때입니까? 나누어 봅시다.

 

[4-5] 이사야 40장 28-29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약속이 내게 유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이 끊어지지 않을 것을 믿고, 오늘 내 삶의 선한 일을 어떤 식으로 계속할 수 있을지 나만의 지혜와 구조를 나누어 봅시다.

“어색함에 적응하기”
(5. 4. 2025.)

잠언 18:1

 

옛날엔 가족과 동네사람끼리 농사 지으며 살았다. 지금은 줌으로 외국인과 회의한다. 나와 다름을 만나면 어색함을  느낀다. 적응해 보려다가 너무 힘들면, 다시 친한 사람들끼리만 지내고 싶다. 어색한 관계는 늘 어렵다.

 

하나님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잠언 18:1) 새번역엔 이렇게 되어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하고,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을 적대시한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면서 지혜가 생긴다. 내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 다짐해야 할 것이 있다. 관계 속에서 생기는 어색함들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는 것이다.

 

어색하다는 이유로 관계를 끊어내지 말라. 윗사람과 어른은 무조건 싫지 않은가? 너무 답답해서 말을 이어 나갈 수가 없지 않은가? 내 윗사람과 어색한 상태를 통과해야 한다. 대화하고 지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내 아랫사람을 다룰 줄을 모르니, 맨날 호구 잡힌다. 과도하게 억압적이거나, 반대로 끌려 다니기만 한다. 어색함을 지나갈 때 아랫사람도 나를 환영한다. 성격과 나이로 가르고, 성별로 가르고, 출신으로 가르면서 친밀한 사람들 속에만 머물러 있지 말라. 헤어졌다고 교회 떠나지 말라.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데 나에게 고백했다고 너무 매몰차게 내치지 말라. 어색함을 견딜 때 삶이 풍성해진다.

 

진짜 어색하셨던 분이 있지 않을까? 예수님이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태복음 9:11) 이 땅에서 죄인들과 어울리시면 어색하셨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스타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색함에 적응하셨기에, 내게 구원이 임했다. 믿는가? 내 오늘의 구원도 그렇게 임할 것이다. 아직 어색한 사람 붙여 주셨을 때, 너무 냉소적이 되지 말라. 열린 마음으로 어색한 기간을 좀 통과해 보라. 그 사람이 내 최고의 친구가 될지 모른다.

 

그 사람 나름 좋은 사람이다. 지금 보이는 그 앞의 그 사람,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다. 한사람교회에 다닌다면, 게다가 등록하고 모임까지 참석하는 존재라면, 적어도 80점은 주고 시작하라. 대단한 사람들이다. 참 귀한 사람들이다. 한사람교회에 어색함을 환영하는 성도가 넘쳐나길 기대한다.

 

[1] 내가 최고로 어색해 하는 상황은 어떤 상황입니까? 그런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한 경험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잠언 18장 1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어떤 상황에서 생기게 됩니까? 하나님이 주신 어색한 상황에서 내 마음대로 관계를 끊어내고 갈라치며, 적응을 거부했던 나의 지난 모습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9장 11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무엇에 적응하셨습니까? 그 결과로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되었습니까? 내 오늘의 구원도 그렇게 임할 것을 믿으며, 내가 하나님이 주신 어색함에 어떤 방식으로 적응해 나갈지 결단을 나누어 봅시다.

 

 

분명히 승리할 거야
(4. 27. 2025.)

고린도전서 15:57

 

승패가 나뉘는 듯한 순간을 맞이할 때가 있다. 문과인과 이과인가? 일산인가 분당인가? 바이(buy)인가 셀(sell)인가? 인생의 분기점마다 생기는 실패감은 당혹스럽다. 승리를 놓쳤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주시는 분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victory)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린도전서 15:57) 승리가 있다는 말은 나를 패배하게 만드는 것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승리를 주신다는 말은, 내 인생을 패배하게 만들 것 같은 모든 요소를 이기고 내 삶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오늘 나에게 패배를 안겨줄 것 같은 삶의 요소들에 승리를 선포하라. 승리는 나의 자격과 나의 선택에 달려있지 않다. 나의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승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삶에서 승리하기를 원한다면, 이 말씀의 약속을 먼저 믿음으로 받으라. 승리할 줄 믿는가? 이 질병과 이 사고 때문에 우리 가정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가난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이 막히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어둠을 뚫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승리에 대한 약속이 내 삶을 일으킨다.

 

삶에 승리를 막는 힘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죽음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5) 우리 삶의 실패는 사망에서부터 온다. 죽으면 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 대신 죽으심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마지막날 승리할 것을 믿는가? 그 승리의 권능이 오늘도 임하고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예수님 안에서 겪게 되는 죽음보다 덜한 이 모든 여정에서도, 주님은 패배할 것 같은 모든 상황을 이기고 우리에게 승리 주실 것이다.

 

죽음도 이기신 분과 함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는 유효하다. 승리 주시는 여정임을 믿고, 담대히 전진하라. 분명히 지지 않았음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1] 삶의 분기점마다 승리와 패배가 나뉘는 듯한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분기점에서 살아남았다고 느꼈거나, 후회되고 패배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고린도전서 15장 57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 분이십니까? 승리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내가 요즘 생각하기에 내 인생을 패배로 이끌 것 같은 내 삶의 가장 두려운 요소는 무엇입니까? (예: 무능, 가난, 나이, 업황, 가족의 불화, 질병, 자녀의 방황 등)

 

[4-5] 고린도전서 15장 55절을 읽어봅시다. 우리의 인생에서 원래 승리를 거머쥐는 세력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그 세력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예수님의 승리가 오늘도 유효함을 믿고, 내가 승리의 고백을 먼저 해야 할 삶의 영역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기
(4. 20. 2025.)

요한복음 5:23

 

사랑은 그 주변의 것을 함께 사랑하게 만든다. 지드래곤을 좋아하면 지드래곤이 들고 다니는 키링까지 따라 산다. 동료와 친해지면 그 친구의 자녀까지 더 챙겨주고 싶다. 사랑은 그와 관련된 주변을 대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성경은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임을 말한다.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한복음 5:2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을 통해 나타난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알아갈 때, 우리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된다. 주변에 찐 신앙인을 판별하는 방법이 있다. 하나님 믿는다는 이야기 실컷 하면서, 예수님이 하신 일들에 별로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은 거르라. 그 사람은 아들을 공경하지 않기에, 하나님도 공경하지 않는 자이다.

 

우리의 삶에 이렇게 적용해 보자. 상대가 사랑하는 것을 존중하고 사랑해주라. 그것이 상대를 사랑하는 길이다. 내 남편은 내가 관심 없는 분야에 너무 열정적이다. 스포츠 경기 보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 쓸데없는 일 그만하라고 말하지 말고, 상대가 사랑하는 분야를 함께 존중해보라. 엄청 고마워 할 것이다. 맨날 말하는 것만 좋아하는 아내가 있는가? 계속 맞장구치며 대화를 이어나가 보라.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신경 써줄 때 그를 진정 사랑하는 것이다. 어떤 교회에 전화가 왔다. 부목사가 무슨 일이시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아 무슨 일인지 알 거 없고, 담임목사와 통화하고 싶으니 바꿔주세요.” 그의 요청은 거절 당했다. 상대가 존중하는 부목사를 무시하는 자는 담임목사도 무시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셨던 것이 또 있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요한복음 17:6)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우리를 함께 사랑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아버지가 사랑하시는 것을 예수님도 사랑하셨기에, 내게 구원이 주어졌음을 믿는가? 내 인생의 구원과 행복도 그렇게 올 것이다. ‘상대방을’ 사랑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면, ‘상대방이’ 사랑하고 관심 갖는 것들을 무시하지 말고 관심 가져보라. 존중해보라. 가정과 관계가 살아날 것이다.

 

“나는 그를 사랑하는가?” 이렇게 질문을 바꾸어 보라. “나는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가?”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이 더 넓어질 때이다. 상대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존중하고 인정해주라. 좋은 뜻으로 많이 변했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1] 사랑은 그 주변의 것까지 사랑하게 만듭니다. 내가 누군가를 향한 애정과 관심 때문에, 그 주변의 것까지 관심과 애정이 생겼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요한복음 5장 23절을 읽어봅시다. 아들이신 예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무엇과 같은 말입니까? 내 방식대로만 상대를 사랑하다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과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지난 날을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17장 6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무엇을 사랑하셨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을 함께 사랑하셨습니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들을 소개해봅시다. 그 존재를 사랑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내게 주신 구역
(4. 13. 2025.)

시편 16:5-6

 

시기심의 가장 큰 해악은? 내가 가진 것이 하찮고 나빠 보이는 것이다. 화목하고 부유해 보이는 가정을 보면, 우리 집은 초라하고 부끄럽다. 멋진 커리어를 쌓아가는 사람을 보면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있는 내 손이 지친다. 나는 언제쯤 여기에서 탈출해보나?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허락하신 구역을 지정하시는 분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선을 그어 주신 영역에 만족함을 이렇게 노래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편 16:5-6) 세상은 좋아 보이는 곳을 향해 내 마음대로 선을 넘어갈 수 있다고 속인다.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 평생에 내게 주신 직장, 내게 주신 집, 내게 주신 사람, 내게 주신 영역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지금 그것이 내게 가장 좋은 것이다.

 

무조건 움직이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먼저 내게 주신 구역의 아름다움을 고백하라. 다른 구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듣다가 오늘 감사할 제목을 모두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내게 지금 허락하신 가장 좋은 직장임을 고백하면서 미래가 열린다. 다른 자녀와 비교하지 않고 끝까지 이 자녀를 사랑할 때 자녀를 통한 하나님의 비밀한 일이 시작된다. 내일의 아름다움에 취해 오늘 주신 아름다움을 빼앗기지 말라. 오늘의 감사를 빼앗아가는 내일의 꿈은 다 거짓말이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구역에 감사로 순종하셨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한복음 18:11) 생명에 구역에 계셨던 분이, 죽음의 구역으로 들어가셨다. 그 구역에 머무르신 것 때문에, 내가 죽음 이후 생명의 구역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음을 믿는가? 오늘의 삶도 확신해야 한다. 오늘 내게 허락하신 구역은, 예수님 안에서 절대 죽음의 구역이 될 수 없다. 이 구역에 감사로 머무를 때,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다 감사한 마음 있지~”라고 퉁치고 넘어가지 말라. 구체적으로 내게 무엇을 주셨는지 말하고, 그 주신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말로 표현하라.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다운 것임을 고백할 때, 이 구역에서 하나님이 하실 멋진 일도 드러나게 되리라.

 

[1] 다른 사람들의 영역에 기웃거리며 내 것이 싫어지고, 내 것을 잃어버리는 방황에 빠졌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예 – 유망 직업, 인기 학과, 유행하는 헤어스타일…)

 

[2-3] 시편 16편 5-6절을 읽어봅시다. 다윗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고백합니까? 자신에게 주신 구역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고백하고 있지 못한 삶의 구역을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18장 11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구역에 계셨던 분이십니까? 그분은 우리를 위해 어떤 구역으로 들어가셨습니까? 예수님 믿고 내가 죽으면 어떤 구역으로 들어갑니까?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서 오늘 내게 주신 구역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내게 주신 구역 중에 하나님이 주셨음을 분명하게 다시 고백하고, 그분 앞에서 어떤 태도로 오늘의 삶을 감당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머리 굴리는 죄
(4. 6. 2025.)

잠언 21:30

 

세상살이를 위한 온갖 전략과 생존비법이 많다. 새벽 6시 30분 전까지는 지하철이 할인된다는 것을 아는가? 공무원은 7시를 1분이라도 지나면 야근 식대가 나와서 그걸 챙긴다고 한다. 알바에게 시급 줄 때, 연말정산 때 계산 잘못해서 세금 폭탄 맞아봤는가? 정신차리지 않으면 손해가 막심하다. 머리 굴리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머리 굴리는 것에 당하시지 않는 분이다. “지혜로도 못하고, 명철로도 못하고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하지 못하느니라”(잠언 21:30) 머리 나쁜 사람은 머리 좋은 사람을 못 당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피하기 위해 머리 굴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이다. 똑똑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야 인생에 복이 있다.

 

지혜로움을 우상으로 삼지 말라. 있는 그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리저리 꼬아서 해석하며 회피하는 것에 하나님은 결코 당하지 않으신다. (1) 시간: 나름대로 시간을 철저히 계획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 기도의 시간을 외면하다가 더 바빠진 것 아닌가? (2) 돈: 그렇게 아낀다고 십일조 헌금 무시하다가 사고로 다 날려본 적은 없는가? (3) 사랑: 교회 밖에서는 사람 무시하고 미워하다가 하나님이 크게 깨닫게 하시고 겸손하게 하신 적은 없는가? 단순하고 무식해보이는 말씀의 순종이 있는지 확인하라. 그것이 없다면 당신은 머리 굴리는 죄에 빠져 있는 것이다.

 

지혜보다 순종이 우선이셨던 분이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지혜 자체이셨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로새서 2:2-3) 지혜로우신 분이 성부 하나님의 요구 앞에 순종하신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한복음 18:11) 지혜를 우상으로 삼지 않으신 예수님의 순종 때문에 내가 영생을 얻게 되었음을 믿는가? 그 은혜를 기억할 때, 내 삶의 방식도 변한다. 아무리 머리 좋아야 성공한다고 말해도, 그것이 단순한 말씀의 순종보다 우월할 수 없다.

 

짱구는 그만 굴리자. 잘나가고 똑똑하며, 세상 사람들과 잘 지낸다는 그리스도인일수록, 말씀 앞에 한없이 순수하고 단순한 순종을 해야 한다. 무식하고 투박한 순종을 기대한다. 하루 종일 말씀보고 기도하며, 시간 쓰고 돈 쓰며, 헌신하고 사랑하는 순종을 시작하라. 하나님 앞에서 머리 굴리는 것은 죄이다.

 

[1] 지혜롭고 약삭빨라야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내가 경험한 세상살이의 치열함과, 나만이 알고 있는 삶의 지혜와 비법을 나누어 봅시다.

 

[2-3] 잠언 21장 30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무엇보다 우월하신 분이십니까? 내 삶의 영역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삶의 지혜로움과 스마트함이 우선된 부분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골로새서 2장 2-3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요한복음 18장 11절을 읽어봅시다. 그 분은 십자가 앞에서 무엇을 우선하셨습니까? 계산과 머리굴림을 넘어선 순종을 한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오늘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도 나누어 봅시다.

부끄러움 없는 삶
(3. 30. 2025.)

빌립보서 1:20

 

세상 바라보면 한없이 내 삶이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능력자들 앞의 초라한 무능, 젊은이들 앞에 힘없는 늙어감, 부유함 앞의 연약한 가난… 아무도 나에게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말없이 다가오는 인생의 부끄러움이 우리를 더 비참하게 만든다.

 

예수님을 믿은 후 내 삶의 처지는 절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전하다가 옥에 갇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잘나가는 주변 사역자와 비교해서 부끄러워할 법한데, 다른 고백을 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립보서 1:20) 예수님 만나고 바울의 삶의 목표가 달라졌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해지는 것이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부끄럽지 않다. 그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높이는 것이 유일한 목표이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예수님을 높일 수 있는 일만 생각하라. 예수님 만난 후 내 삶은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병든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병상에서도 예수님 뜻대로 행할 수 있다. 말씀과 기도로 매일을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 안에 위대한 일이다. 직업이 없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나의 인도자 되신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과정이기에 무직의 상태에서도 예수님을 높일 수 있다. 내 삶의 진짜 문제는 세상 앞에 내 자신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가려주시는 예수님이 없는 것이다.

 

뻔히 세상의 부끄러움이 있는데, 어떻게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내 마지막 부끄러움을 가려주시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브리서 2:11) 인생에 가장 큰 부끄러움은 천국 문 앞에서 예수님이 날 모른다고 말씀하시는 순간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나를 형제로 불러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분이 나의 오늘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는가? 내 부끄러운 죄악을 모두 가려주신 예수님 사랑이 너무 크기에, 오늘 나의 모든 삶은 예수님을 존귀하게 높이는 것만이 목표가 된다.

 

오늘의 처지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라. 주 안에서 당신의 처지를 절대 부끄러워해선 안된다고 서로 권면하라. 날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 예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오늘을 살자. 진정 행복한 삶이다.

 

[1] 세상을 바라볼 때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요즘 나는 어느 부분에서 그런 것을 느낍니까?

 

[2-3] 빌립보서 1장 20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의 현재 상황은 어떠합니까? 그 상황에서 어떤 고백을 합니까? 요즘 내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부분이 있다면, 내 삶의 궁극적인 목표와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드는 걸까요? 생각해 봅시다.

 

[4-5] 히브리서 2장 11절을 읽어봅시다. 사람이 마지막으로 부끄러워지는 순간은 어느 때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어떻게 대해주셨습니까? 오늘의 삶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존귀하게 하기 위해 삶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문은 여기에
(3. 23. 2025.)

요한복음 10:7,9

 

인생은 문으로 들어가는 싸움이다. 입시의 문, 취업의 문, 성공의 문… 인생에 불행과 불안을 느끼는 영역이 있다면, 문을 찾지 못하겠다는 마음 때문이다. 다음으로 가는 문이 있다는 확신만 생기면, 사람은 소망을 회복한다.

 

예수님은 내 삶의 모든 상황에 문이 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I am the gate.)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한복음 10:7,9) 문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예수님을 의지하면 들어가고 나올 수 있고, 먹을 풀(=꼴)도 얻을 수 있다. 막혀 있는 상황이 있는가? 순간 순간 예수님을 나의 문으로 모셔야 한다.

 

추상적인 말이기에 구체적으로 적용해보겠다. 삶에 문이 없다고 느낄 때마다, 예수님을 의지하여 그 순간 주시는 생각과 인도하심에 집중하면, '예수님만이 이유가 되시는 결과'가 나타난다는 말이다. 갈등의 상황에 뭐라고 말해야 하지? 순간 예수님 의지하라. 문이 열린다. 어떤 결정 해야하지? 어디로 가야하지? 예수님 의지하라. 모두 가는 길이 아닌 다른 문이 열린다.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예수님 의지한다.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 문이 닫힌 것인가? 아니다. 견고한 심령과 알 수 없는 평안으로 나를 지키시기도 한다. 예수님만이 이유가 되시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직접 문이 되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문으로 삼을 때 언제나 먹을 거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나 대신 죽는 문으로 들어가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히브리서 2:14) 들어가면 죽는 문이라는 것을 이미 아셨다. 알고도 들어가신 그분의 사랑이 내게 흐르고 있음을 믿는가? 예수님 때문에 내 마지막 죽음의 문도 천국 문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오늘도 확신할 수 있다. 세상에 온갖 그럴 듯 해 보이는 문 열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 따라 결정할 때, 내게 생명의 문이 열리리라.

 

인간적인 목표만 가지고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매일 예수님을 문으로 모시고, 하나씩 결정하고 실행해보라. 당신이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곳에서 꼴을 얻으리라. 저쪽으로 간다고 문이 열리는 게 아니다. 문은 예수님 계신 여기에 있다.

 

[1] 삶의 문이 열리지 않아 고생했던, 방황했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요한복음 10장 7절과 9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그 문으로 들어가면 무엇을 얻습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1) 순간적인 생각이나, (2) 거시적인 방향성에 마음을 두지 않고, 세상적인 기준과 목표에만 집중하는 나의 모습이 있다면 돌아봅시다.

 

[4-5] 히브리서 2장 1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내 대신 들어가신 문은 어떤 문입니까? 그분을 믿고 따라가면 내가 들어갈 죽음에 문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예수님만 신뢰하고, 오늘 내 삶의 문이 여기에서 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할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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