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의 자기 의
(11. 3. 2024.)

로마서 2:1

 

관계도 실력이다. 놀이터에서 어떤 아이가 옆에 있던 친구를 때렸다. 맞은 친구 엄마는 너무 화나서 때린 아이를 째려보며 속으로 그 아이 엄마를 욕했다. 함께 있던 지혜로운 남편이 아이에게 말했다. “친해지고 싶구나? 그럴 땐 때리지 말고 먼저 인사하면 되는 거야” 못 배운 아이에겐 때리는 것이 친밀함의 표시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성격과 매너도 자기 의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신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로마서 2:1) 나는 화를 잘 내지 않는다. 그런데 함부로 화를 내는 사람에게는 가장 화가 난다. 화 안 낸다며? 이것이 자기 의다. 나는 매너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매너가 좋지 않은 사람만 보면 가장 욕이 나온다. 내가 가장 잘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상대방을 정죄하는 도구가 된다.

 

성품의 우월함을 가지고 상대를 정죄하지 말라. 상대가 돈이 없다고 무시하고, 못 배웠다고 무시하는 것과 똑같은 죄이다. 입이 좀 거친 사람들을 부드럽게 품어내야 한다. 무조건 편가르려는 사람에게 끝까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배려하지 못하고, 무질서하거나 산만한 사람들을 끝까지 질서 있게 기다려줘야 한다. 내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성품이 상대를 무시하지 않게 하라.

 

예수님은 성품의 완성이셨다. 우리를 성품으로 비난하지 않으셨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베드로전서 2:23) 맞대어 나에게 욕하지 않으신 예수님 때문에 내가 구원을 얻었다. 오늘 내가 나의 부족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사랑받고 있음을 믿는가? 신자로서 나도 그렇게 행해야 한다. 내 성품은 내가 이룬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은혜로 배우게 하신 것이다. 나도 거저 받은 것인데, 그것으로 남을 정죄할 수 없다.

 

내가 좀 더 매너 있고 고상하고 잘 안다고 우월한 척 좀 하지 마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신앙의 핵심이다. 매너의 자기 의를 벗어나라. 그게 진짜 하나님 나라의 매너다.

 

[1] 관계도 배워야 하는 것임을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학창시절, 직장에서, 부모로부터, 매너와 관련된 실수, 깨달음, 에피소드 등을 나누어 봅시다.

 

[2-3] 로마서 2장 1절을 읽어봅시다. 사람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은 무엇입니까? 그 죄를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부분과, 그것이 상대를 정죄하는 방향으로 흘렀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베드로전서 2장 23절을 읽어봅시다. 욕하는 자 앞에서 예수님이 대응하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분의 사랑을 통해 내가 얻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은혜로 얻은 구원 앞에서, 나도 신자로서 성품의 우월함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어둠을 깨닫는 법
(10. 27. 2024.)

요한복음 8:12

 

어렸을 때 집에 엄마가 오더니 말한다. “왜 이렇게 어두워? 불 좀 키고 있지!” 난 몰랐는데, 밖에서 들어온 엄마는 어두운 걸 안다. 북향 집 어두운 것은 남향 집 만나봐야 안다. 더 나이 들어야 젊을 때 행동이 미련했음을 안다. 사람은 스스로 어두움 속에 있는지 잘 모른다. 어두움을 깨닫는 유일한 길은 다른 빛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 8:12) 예수님을 만나면 삶에 빛이 임한다. 예전엔 어둡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구체적인 가르침이 없어도, 빛은 삶 전영역의 어두움을 들춰내기 시작한다.

 

세부적인 답변부터 찾지 말고, 매일 빛 가운데 거하는 싸움을 하라. 이 행동이 옳은지, 이 방식대로 일하는 것이 맞는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지 묻는 것은 순서가 아니다. 내 자신이 어둠 가운데 있으면 옳은 답도 옳게 보이질 않는다. 예배와 기도로, 묵상과 경건생활로 빛 가운데 나를 내놓으라. 그럴 때 어둠으로 보이지 않았던 많은 문제들도 드러나며, 내 시각 전체가 교정되기 시작한다. 보잘 것 없게 보였던 상황이 감사로 다시 보이며, 문제로 보였던 사람이 기회로 보이기도 하고, 괜찮은 상황이라 생각했던 내 삶이 영적인 위기로 보이기도 한다. 빛을 만나야 어둠이 물러간다.

 

내 삶의 어둠은 무조건 물러간다. 빛 되신 예수님이 내 삶의 가장 어두운 곳, 죽음으로 나 대신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베드로전서 1:21) 빛이 비치니 죽음도 물러갔는데, 내 삶의 어둠도 물러가지 않을 리가 없다.

 

내 생각 안에서만 갇혀 내 삶이 괜찮은지 고민하지 말라. 구체적인 생각을 멈추고 먼저 빛 가운데 나오는 연습을 하라. 나도 모르게 적응되어 있던 어둠은 물러가고, 예수님이 비추시는 빛이 삶 전체를 감쌀 것이다.

 

[1] 밝은 것 보기 전엔 어두운지 잘 모릅니다. 특정한 공간이나 분위기 속에서 밝고 어두움이 대조 되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자기보다 어린 사람들을 보며 '어려서 아직 깨닫지 못하는구나' 느꼈던 경험도 나누어 봅시다.

 

[2-3] 요한복음 8장 12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을 따를 때 약속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빛에 내 자신을 노출시키며 삶의 여러가지 상황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베드로전서 1장 21절을 읽어봅시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어둠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내 삶의 영생을 확신하며, 오늘도 빛 가운데 거하기 위해 내 삶의 습관들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지 나누어 봅시다.

“실수인가 실패인가
(10. 20. 2024.)

로마서 7:24

 

우린 언제나 시험을 보면 실수로 틀린다. 그게 실수가 아니라는 것을, 실수를 100번 하고서야 깨닫는다. 그냥 실력이 부족한 실패였던 것이다. 험한 말, 분노, 질투, 미움, 다툼 … 가끔 상황이 안 좋아서 저지르는 내 실수라 생각한다. 그러나 살다 보면 느껴진다. 더 이상 이건 나의 작은 실수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자임을 인정하게 만드시는 분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가끔 실수한다고 포장하지 않았다. 사망 속에 있는 몸, 즉 실패한 몸이라는 것이다. 원래 잘 하는데 순간 실수했다고 덧칠하지 말라. 인생의 진짜 실력, 진짜 성장은 내가 하나님 앞에 결코 바로 설 수 없는 실패자임을 빠르게 인정하는 데에 있다.

 

계속 실수로 넘기고 있는 삶의 영역을 돌아보라. 원래 나는 화를 잘 안 내는데, 요즘 가끔 화가 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분노를 통제할 수 없는 죄인이자 실패자이다. 철저히 죄악을 자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회개해야 한다. 가끔 남이 미운 것이 아니다. 상대를 인정하고 사랑할 마음이 없는 죄인이자 실패자임을 인정해야 회복이 가능하다. 요즘에만 우울한 것이 아니다. 난 원래 기쁨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한 번 넘어졌을 때, 실수라고 말하지 말고 나는 앞으로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실패자임을 인정하라. 나의 힘으로 억지부리지 말고, 실패를 자복하고 도움을 구할 때 새 길이 열린다.

 

실패를 인정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달라진다. 내 인생이 실패 때문에 무너지지 않도록 붙드신 분을 의지하게 된다. 그게 예수님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 4:15) 예수님은 나와 같은 유혹 속에 결코 실패하지 않으셨다. 그분을 믿고 따를 때, 내게 없었던 새로운 힘과 능력으로 실패를 딛고 순종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 부르러 오셨다. 실수한 사람 부르러 오지 않으시고 실패한 사람 부르러 오셨다. 난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존재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도움을 구해보라. 훨씬 더 많은 사랑과 은혜가 밀어닥칠 것이다.

 

[1] 사람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합니다. 사실 실패인데, 내가 실수라고 생각하며 계속 덧칠했던 삶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로마서 7장 24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은 자신의 몸을 무엇이라고 묘사합니까? 하나님은 무엇을 깨닫게 만드십니까? 특별히 요즘 내가 실패를 인정해야겠다고 느껴지는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4-5] 히브리서 4장 1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시험에서 어떤 결과를 이끌어 내셨습니까? 그분을 믿을 때 나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실패를 겸손히 인정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했거나, 앞으로 그 도우심을 기대해야 할 삶의 주제들을 나누어 봅시다.

“마음 구하기
(10. 13. 2024.)

에스겔 36:26

 

이것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있다. 바로 그 ‘마음’이다. 마음은 내 마음대로다. 저 사람을 미워하는 건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 끌려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이다. 내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 누가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 마음만큼은 모두가 자신이 주인 되어 산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주인 되시는 분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에스겔 36:26) 마음에 주인이 있다면, 마음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상황마다, 사람마다, 그 마음을 가지는 것이 맞는지 묻고,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구하는 것이 마음의 주인이 하나님 되신 자의 삶이다.

 

마음을 구하는 연습을 해보라. 마음 가는 대로 살면 안 되고, 그 마음이 맞는지 물어야 한다. 그 마음에 굴복하지 말고, 바람직한 새 마음을 부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시기하는 것이 내가 가져야 할 바른 마음이 맞는가? 계속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 주신 마음인가? 계속된 불평과 고집은 주님이 허락하신 마음인가? 이 사건과 사람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기를 원하시는가? 전인적인 순종은 마음을 구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예수님은 마음가는 대로 살지 않으신 분이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가복음 14:36) ‘이 잔’을 마음가는 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십자가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구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 순종하시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나도 이제 확신할 수 있다. 나도 예수님 안에 있다면, 나의 원래 마음보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 순종할 때 동일하게 이 땅에서도 구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마음의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 마음을 구할 때, 그의 뜻이 내 삶에 펼쳐지리라.

 

[1] 마음만큼은 자기 마음대로 다루는 시대입니다. 내 삶의 상황과 사람에 대해 내 마음 속을 내 마음대로 다스렸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분노, 미움, 두려움 …)

 

[2-3] 에스겔 36장 26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가 스스로 마음을 경계하지 못하고 합리화 시키며 주인됨을 행세하기 쉬운 삶의 영역은 어디인지 나누어 봅시다.

 

[4-5] 마가복음 14장 36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주시기 위해 구하셨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나도 내 삶에서 무엇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새로운 마음을 주셨던 경험이나, 새 마음을 구해야 할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공개된 불행
(10. 6. 2024.)

로마서 12:3

 

예전엔 알 수 없었던 것들이 모두 공개되어 있다. 친구가 어디 가서 뭐하고 놀았는지 몰랐다. 이제 인스타 보면 다 나온다. 전 세계 사건 사고가 실시간 뉴스로 뜬다. 부자가 어떻게 사는지도 너무 자세히 나오고, 병들고 가난한 자들의 생활도 낱낱이 보인다. 내가 접하는 정보의 범위가 훨씬 넓어진 시대에 산다.

 

하나님은 생각의 범위를 통제하라고 명하시는 분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로마서 12:3) 정보, 소식, 소문의 인풋이 너무 많으니, 온갖 불안과 염려, 시기와 질투도 함께 증가한다. 기도는 없고 생각만 많으니, 내가 정한 길의 확신은 없고 유망한 길들만 너무 많이 보인다. 예전엔 몰라서 불행했다. 이제는 공개된 불행의 시대로 바뀌었다.

 

너무 많은 정보가 주는 생각을 통제하라. 조너선 하이트는 『불안세대』라는 책에서 세상은 훨씬 더 안전 해졌지만, 두려움을 조장하는 뉴스가 발달하니 요즘 부모들이 아이들을 훨씬 과잉보호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굳이 몰라도 될 것을,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남이 어디 여행 가는지, 어떻게 사는지, 댓글에서 뭐라고 하는지를 물어보고 찾아보면서 점점 방황하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적용해보라. 그 정보를 접하고, 그 생각을 할수록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에 대한 확신, 감사, 평안이 사라져간다면, 그 생각은 아무리 지적이고 멋있어 보여도 멈추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기가 가장 높아졌을 때, 결코 생각이 흔들리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태복음 16:23)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셨다. 그분은 나의 구원을 생각하셨다. 자신이 십자가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흔들리지 않으셨던 예수님 때문에, 내게 영생의 구원이 주어졌다.

 

그렇다면 오늘 내 인생도 마땅히 그렇게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안다고 행복한 게 아니다. 공개된 불행에서 벗어나라. 하나님이 허용하신 생각의 범위 밖의 것들을 정리하라. 다 모르는 것 같지만, 훨씬 재밌고 행복한 인생이 될 것이다.

 

[1] 모든 정보가 공개된 시대입니다. 예전과 다르게 많은 것들이 공개되어 삶에 새로움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예 – 제품 비교, 연봉 비교, 자녀 교육, 여행 유튜브, 사업보고서 등…)

 

[2-3] 로마서 12장 3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통제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너무나 많은 인풋 때문에 삶에 감사가 사라지고 오히려 혼란과 염려가 늘어났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16장 23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끝까지 흔들리지 않으셨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 생각의 견고함은 무엇을 이루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범위를 넘어선 나의 생각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눈물을 담는 시간
(9. 29. 2024.)

시편 56:8

 

아기는 울면서 태어난다. 가장 무력하니까 그렇다. 무력의 끝에는 눈물이 있다. 연약할 땐 울어야 하는데, 세상에서는 울지 말고 강해지라 한다. 그래서 강해졌는가? 모두 눈물을 참고 있을 뿐, 훨씬 고난 앞에 약해졌다.

 

하나님은 사람의 눈물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편 56:8) 부모 앞에서 울 수 있는 자녀가 훨씬 건강하고 강해진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 앞에서 울게 하신다. 마귀는 내 눈을 가려 울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고 속인다. 나의 비참한 영적 상황을 숨기는 것이다. 내 비참함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눈물이 회복된다. 눈물을 담는 시간 자체가 우리에게 치유의 시간, 승리의 시간, 회복의 시간이다.

 

울 때까지 기도해보라. 눈물로 찬양해보라. 울 때까지 예배해보라. 눈물에 힘이 있다. 이것은 이론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너무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그냥 눈물을 담는 시간으로 들어가라. 회심하고, 회복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공통적인 일이 있다. 예배당에 들어오자 마자 눈물이 난다. 예배 드리다가 갑자기 눈물이 한없이 흐른다. 오늘 마음도 메마르고, 사랑도 없고, 인생에 재미도 없고, 열정도 사라지지 않았는가? 근본 원인은 하나다. 눈물이 사라져서 그렇다. 나와 주변의 모든 처지를 두고 울라. 눈물 자체를 달라고 기도하라. 이상하게 눈물이 회복되면, 모든 응답과 회복이 뒤따라 찾아온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에 어떠셨을까?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마가복음 14:32-33) 예수님이 십자가 앞에서 우셨다. 기도하며 울었더니, 뒤집어졌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42) 예수님의 구원은 눈물을 통과한 구원이었다.

 

예수님의 눈물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음을 믿는가? 나도 이 고난 앞에 그렇게 구원받을 것이다. 도대체 이 상황에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가? 울어야 한다. 울어야 산다. 눈물을 담는 시간으로 들어가라. 승리의 문이 열릴 것이다.

 

[1] 사회 생활을 하면서 사람의 눈물은 수치스러움이 되었습니다. 언제 많이 울었습니까? 언제 많이 눈물이 사라졌습니까? 언제 울고 싶은데 참았습니까?

 

[2-3] 시편 56편 8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사람이 점점 울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눈물을 통해 변화가 나타났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가복음 14장 32-33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에 무엇을 경험하셨습니까? 42절을 읽어봅시다. 그 이후에 무엇이 찾아왔습니까? 삶의 눈물의 회복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며 어떻게 삶이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요즘 어떤 기도제목에 가장 많은 눈물이 납니까?

“뭐라고 말해도 그건 불평
(9. 22. 2024.)

시편 37:8

 

말은 그 사람 평생의 습관이다. 재밌는 사람은 계속 재밌고, 우울한 사람은 계속 우울하다. 감사하는 사람은 불평을 입에 대지 않고, 불평하는 사람은 감사를 표현할 줄을 모른다. 사람은 말로 영향을 주고받다 보니, 부정적인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결정한다. ‘이 사람 말 계속 들어주기 너무 힘들다. 가까이하면 안되겠구나.’

 

하나님은 ‘불평’과 ‘원망’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치명적인 죄로 보신다. 불평이란 무엇인가? ‘상황’이마음에 들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시편 37:8) 원망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야고보서 5:9) 어떤 상황에도 불평해선 안되고, 원망해선 안된다. 이걸 너무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절대로 금하시는 명령인데, 사람은 다 그런 거라고 핑계 댄다.

 

원망과 불평이 아닌 척하지만, 뭐라고 말해도 원망이고 불평인 부분들을 회개하라. “이런 망할 놈의 회사, 망할 놈의 나라, 망해버릴 대표, 망할 놈의 입시제도!” 그냥 화나서 한 이야기라고? 이것이 바로 원치 않는 모든 상황을 불평으로 해결하는 나의 죄악된 언어습관이다. 옆사람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말하는가? “아 진짜 부모 잘못 만나서 이게 뭐냐고!”, “아내가 그 정도 밖에 못 해주는 게 마음에 안 들어.”, “내 자식이지만 정말 걔 때문에 내가 미쳐버리겠어”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한 것 뿐이라고 포장하지 말라. 성경은 그걸 원망이라고 한다.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차지 않아 못마땅함을 밖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원망과 불평을 어떻게 안 할 수 있는가? 원망과 불평 할 상황에 다른 방법으로 승리하신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 왜 의인이 십자가를 지나?(상황) 예수님은 불평하지 않으셨다. 왜 죄인을 위해 내가 죽어야 하나?(원망) 예수님은 원망하지 않으셨다. 구원은, 원망과 불평으로 오지 않았다.

 

당신은 예수님을 구주로 모셨는가? 그렇다면 구원받았는가? 맞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처한 상황에도 구원이 임할 것을 믿는가? 분명 그럴 것이다. 구원이 원망과 불평으로 오지 않았음도 믿는가? 맞다. 그러니 원망과 불평하지 말라. 당신도 예수님의 구원을 경험할 것이다.

 

[1] 언어는 중요한 삶의 태도 중에 하나입니다. 대화 속에서 큰 힘을 얻고 친밀해지고 싶었던 경험이나, 대화를 그만 듣고 싶고 피하고 싶었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시편 37편 8절과 야고보서 5장 9절을 읽어봅시다. (1) 불평이란 무엇입니까? (2) 원망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그냥 있는대로 말할 뿐이라고 포장하며 죄를 짓는 언행의 범죄를 나누어 봅시다.

 

[4-5] 히브리서 12장 2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까? 나도 오늘 이 상황에서 구원이 임할 것임을 믿는다면, 당장 버려야 할 삶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1) 상황에 대해서 (2) 사람에 대해서 내가 죄악을 버리고 삶의 태도와 언행을 어떻게 새롭게 할지 나누어 봅시다.

“적게 받은 자의 죄
(9. 15. 2024.)

마태복음 25:24-25

 

주인이 사라지면 권리만 남는다. 스승이 있던 시절 제자는 권리를 말하지 않았다. 권리는 스승으로부터 오는 것이니까. 자녀는 부모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다. 부모로부터 권리가 주어질 뿐이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시대이다. 인생의 주인이 사라졌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모두가 내 권리만 찾는다. 나도 부자 될 권리, 나도 편안할 권리, 나도 힘든 일 안 할 권리, 나도 놀 권리. 인생의 주인이 사라지니, 남보다 내 삶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남이 내 인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나님은 내가 처한 모든 형편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다. 주인이 그 재능에 맞게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었다. 가장 적게 받은 자가 죄를 짓는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태복음 25:24-25) 왜 내게 한 달란트를 주을까? 내가 판단할 권리가 없다. 그 자체가 화가 난다면, 내 인생의 주인이 없어지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다는 증거이다.

 

내가 현재 처한 형편에 감사하지 못하고, 계속 화가나는 부분을 회개하라.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해야 하는지는 주인이 판단하시는 일이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why) 질문 자체가 틀렸다. 그건 주인이 생각하실 일이다. “나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how) 이것이 주인이 있는 사람의 질문이다. 더 실천적으로 적용해보겠다. 각 영역의 주인을 인정하라. 자녀라면 성인이 되기 전에 부모에게 함부로 토 달지 말라. 가정에선 부모가 주인이다. 부모와 잘 지낼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아르바이트생인 주제에 사장의 결정에 뚱한 표정 짓지 말라. 적어도 그 회사에선 그 사장이 주인이다. 어떻게 주인 마음에 들지를 고민해야 맞다. 교수와 선생님의 강의 앞에서는 그 방향을 일단 따르려고 하라. 그 수업 시간에는 그 교수님이 주인이다. 회사가 싫다고? 회사는 나를 좋아하는지를 묻는 것이 맞지 않을까? 각 영역의 주인과 윗사람을 인정하는 것이 적게 받은 자가 순종해야 할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를 가나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지 않고 주인을 인정한다. 왜? 자격 없는 자로서 주인에게 구원 받았음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하나님 앞에 가진 것 없는 내가 영생을 거저 얻었음을 알기에, 이 땅에 적게 받은 상황을 나는 결코 불평할 수 없다.

 

모두가 자기 삶의 주인이라고 하니, 회사와 학교와 조직이 도저히 운영될 수가 없는 시대이다. 시대는 적게 받은 자의 온전한 순종을 찾고 있다. 어디 가서 제발 주인 좀 인정하라. 주어진 것 감사히 받고 일해보라. 아마 훨씬 빨리 주인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1] 나에게 권리가 없음을 인정하며 살다가, 모든 게 내 권리라고 생각될 때 시대는 어떻게 바뀌게 되었습니까? 모두가 권리만 주장하며 자신의 형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대의 변화를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25장 24-25절을 읽어봅시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을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지은 죄는 무엇입니까? 내 삶에 가장 불평이 많아지고,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삶의 영역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로마서 5장 8절을 읽어봅시다. 신자가 인생의 주인에게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내 영적인 정체성을 회복할 때, 그것을 믿을 때, 오늘 적게 받은 상황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평가받을 수 있는 귀
(9. 8. 2024.)

잠언 9:9

 

무서워서 남에게 뭐라고 말도 못하는 시대이다. 청소년이 담배피면 지나가는 어른들이 꾸짖었다. 지금은 그랬다간 천국에 빨리 간다. 분명 나보다 아랫사람인데, 내 말을 듣질 않는다. 뭐라고 한마디 하면 모두 상처받았다고 한다. 바야흐로 책망 불가의 시대이다.

 

하나님은 책망 받는 것이 지혜라고 말씀하신다.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언 9:9) 지적만 당하고 살라는 말인가? 이렇게 이해하면 좋다. 나에 대해 평가받을 수 있는 귀를 언제나 열어놓으라는 말이다. 내가 요즘 어떤 상태에 있는 것 같은지, 무엇이 부족한 것 같은지, 나의 강점은 무엇인 것 같은지 상대의 평가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놓는 것이 겸손이다.

 

이렇게 실천해야 한다. 요즘 서로 무서워서 먼저 말을 안 건다. 그러니까 먼저 말을 걸고 먼저 질문해야 한다. 처음부터 안 친한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으면 충격 받을 수 있으니, 나를 확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라. 내가 잠잠히 듣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라. “요즘 집에서 내 상태가 어떤 것 같아?”, “팀장님, 요즘 제가 잘 하고 있나요? 어떤 부분들에 신경을 더 쓰면 좋을지 편하게 이야기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제가 요즘 공부를 이렇게 하고 있는데, 이 방향성이 맞을까요?” 아무도 서로 간섭하지 않는 시대에, 먼저 간섭해달라고 달려오는 사람이 있다니! 그 사람은 어디를 가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만이 사람의 평가를 자유롭게 받을 수 있다.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로마서 8:33)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의롭다 평가 받게 되었음을 믿는가? 그것만이 절대적이기에, 나는 이 세상의 평가에서 자유롭다. 상대가 나를 평가할 때 나의 세상적인 부족함을 의연히 받아들이고 겸손히 노력할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인 평가가 아니라서 그렇다. 상대의 평가가 틀렸어도 과도하게 서운하지 않을 수 있다. 절대적인 평가자는 하나님 뿐이시니 괜찮다.

 

PT 선생님에게 운동 자세가 괜찮은지 봐달라고 말하지만 말고, 인생의 자세가 괜찮은지도 물어보라. 물으면 훨씬 좋게 나아진다. 평가 받으면 훨씬 빨리 전진한다. 평가받을 수 있는 귀를 열고 살라. 먼저 평가를 요청하라.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지혜이다.

 

[1] 남에게 함부로 뭐라고 말을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말했다가 욕먹었거나, 말 하려다가 참았거나,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해서 기분 나빴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잠언 9장 9절을 읽어봅시다. 성경은 누가 지혜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에 사라져버린 것은 무엇입니까? 타인의 평가가 개입되면서 내가 성장하거나 변화되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로마서 8장 33절을 읽어봅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의 평가는 절대적입니까 상대적입니까? 예수님 안에서 내 정체성을 새롭게 하고, 나의 현재에 대해 평가를 겸손하게 요청해야 할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주변 사람에게 나에 대해 무엇을 물어보면 좋을까요?

“폄하하지 않기
(9. 1. 2024.)

빌립보서 2:3

 

모든 관계의 깨짐은 폄하에서 시작된다. 상대가 하는 일의 가치를 깎아 내리는 것이다. 학생의 고단함을 폄하한다. “공부 좀 했다고 뭘 그렇게 피곤해 해?”, 아내의 가치를 깎는다. “집에서 애만 보는데 뭐가 그렇게 어려워?”, 잘 나가는 사람에게도 시비건다. “돈도 많으면서 너도 우울할 게 있니?” 기분 나쁘고, 손절하고 싶은 관계 속에는 언제나 폄하가 숨어있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명하신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립보서 2:3) 남을 낫게 여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상대가 하는 일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타인을 ‘자신’과 비교하여 평가한다. “쟤는 나보다 가치 없는 일을 해, 나보다 못해, 나보다 돈을 못벌어” 반면 신자는 ‘하나님’ 앞에 선 그 사람을 바라본다. 어린아이도, 청소년도, 싱글도, 부자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감당하는 과정에 있기에 가치 있다.

 

내 자신을 기준으로 상대의 수준이나 실력을 폄하하지 말라. 상대가 하는 일들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언어를 배우라. “어떻게 이렇게 매일 운동을 하세요? 대단해요.”, “학생 때가 원래 제일 고민 많을 때야. 지금 너는 정말로 잘하고 있는 거야”, “나는 이 시기에 너처럼 버티지 못했는데, 네가 나보다 훨씬 낫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더 힘차게 감당할 수 있도록 격려하라. 그것이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사람들의 권세이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죄인인 나를 폄하하지 않으신 분이다. 죄인인 나의 인생이, 예수님의 생명과 교환될 가치가 있다고 보셨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5,8) 그분이 나를 대하신 방식 때문에 내가 영생을 얻었음을 믿는다면, 나는 그 누구도 결코 폄하할 수 없다.

 

사람은 자기가 당한 대로 남에게 행하며 산다. 부모와 사회에서 비난만 받았던 사람은 남을 폄하할 줄만 안다. 가치를 인정받은 사람은, 상대의 가치도 인정한다. 예수님이 내 인생을 폄하하지 않으셨음을 기억하며, 사랑받은 대로 행하라.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다시 일어서게 될 것이다.

 

[1] 폄하 때문에 기분 나빴던 적이 있습니까? 반대로, 내가 쉽게 남을 폄하함을 스스로 인식하며 놀랐던 적이 있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2-3] 빌립보서 2장 3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객관적으로 상대가 나보다 못할 때에도, 상대가 하는 일을 폄하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남을 바라보는 기준은 어떻게 바뀌어야 합니까?

 

[4-5] 빌립보서 2장 5절과 8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나의 인생은 어떤 가치가 있습니까? 내가 받고 있는 사랑을 근거로,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겠습니까? 내가 변화를 다짐해야 할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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