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으로 말하는 죄
(2. 18. 2024.)

누가복음 3:8

 

사람은 연륜이 생길수록 사람들의 속마음이 읽힌다. ‘저 알바생은 분명 대충 하고 돈이나 많이 벌고 싶어 하겠지?’, ‘이 일을 시켜서 속으로 엄청 욕하고 있겠지?’ 속마음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사람의 스트레스 해소 창구가 된다.

 

하나님은 속마음을 알고 판단하시는 분이다. 세례 요한의 첫 사역은,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춰내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누가복음 3:8) 유대인들은 속으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우월하다는 자기 의에 빠져 있었다. 속마음이 바뀌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다.

 

속으로 말하는 죄를 살피라. 겉으로 참고 웃는 것은 매너 있는 지성인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속을 정결케 하는 것은 신자가 해야 할 일이다. 웃어주지만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다. 겸손한 척하지만 속으로 자랑하며 우월감에 만족하는 것은 마귀가 준 것이다. 내 속으로 말하는 죄를 인지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신자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된다.

 

어떻게 내 속마음이 바뀌는가? 속마음으로부터 나를 사랑하신 분을 만나면 바뀐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복음 18:35)” 나는 결코 마음으로부터 그 사람이 용서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마음으로부터 나를 미워하지 않으심을 보여주셨다. 당신은 십자가를 볼 때마다 확신해야 한다. 보잘 것 없고, 잘한 것 없는 내 인생을, 주님은 미워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깨끗한 마음이 보이는가? 마음으로부터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는가? 속이 깨끗하신 그 분 만날 때 비로소 내 인생도 변화의 갈망이 생긴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진다. 마음으로부터 깨끗하고 싶다는 갈망이 생긴다. 내가 만나는 상대에게 매너만 선물하지 말고, 깨끗한 속마음도 선물하라. 그것이 이 시대가 찾는 깨끗함이다.

 

[1] 살아갈수록 상대의 속이 훤히 보이고, 내 속을 감추며 겉을 포장하는 지혜도 늘어만 갑니다. 상대의 더러운 속이 뻔히 보였거나, 내 안에 더러움과 악을 감추며 겉을 포장했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누가복음 3장 8절을 읽어봅시다.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하며 처음 지적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기준을 핑계로 내 속마음을 정당화하는 부분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18장 3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 속마음은 언제 변할 수 있습니까? 그분의 진실된 마음을 경험하거나 느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나도 이 땅에서 속이 깨끗한 자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선악을 뛰어넘는 인도하심
(2. 11. 2024.)

창세기 31:24

 

세상의 세계관은 단편적이다. 앞으로 가면 좋다. 뒤로 가면 나쁘다. 위로 가면 좋다. 떨어지면 나쁘다. 선악도 마찬가지다. 선한 것은 좋은 것이다. 악한 것은 나쁜 것이다. 그래서 내 삶에 생기는 모든 부정적인 일들은 내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하나님의 세계관은 입체적이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도망쳤다. 라반 입장에선 나쁜 일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반이 야곱을 바라봐야 할 새로운 관점을 주신다.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창세기 31:24) 순간적인 선악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야곱과 라반 사이의 관계를 직접 다루고 계시다는 확신을 주신 것이다.

 

선악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라. 그 상사가 잘못한 것 맞다. 그 자녀가 잘못 나가고 있는 것 맞다. 선악을 기준으로 보면 다 나빠 보인다. 그러나 야곱과 라반의 인생은 선악을 뛰어넘어 하나님 앞에 붙들려 있었다. 오늘도 내가 다 통제할 수 없는 모든 선악의 상황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내 삶에 펼쳐진 갈등과 방황, 온갖 부정적인 일들 속에서 하나님이 입체적으로 행하실 일들이 분명 있다. 선악 간에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할 수 있는 그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만 선하시면 된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주신 악한 일을 선악 간에 판단하지 않으신 분이 계시다. 예수님이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태복음 27:46) 선악의 관점으로는 억울한 죽음일 뿐이다. 그러나 묵묵히 십자가를 지신 그분의 삶에 선악을 뛰어넘는 인도하심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죄인이었던 나의 구원이다. 그 구원을 보장받은 존재임을 믿는가? 나머지 삶도 선악을 넘어선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명절이다. 가족과 친지들의 온갖 군상이 다 보여 답답한 때이기도 하다. 선악 간에 함부로 말하면서 우리 가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하지 말라. 당신도 악인이었는데 구원받았음을 언제나 기억하라. 입체적인 세계로 들어오라. 분명히 내 삶의 모든 여정에 선악을 뛰어넘어 유익을 주실 것이다.

 

[1] 세상의 시각은 단편적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삶을 바라보는 단순한 시각에 허무함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내가 자꾸 내 삶을 단편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삶의 영역은 어디입니까?

 

[2-3] 창세기 31장 24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라반에게 야곱에 대해 어떤 새로운 관점을 주셨습니까? 단순히 나쁘게만 볼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체적인 일하심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27장 46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단편적으로, 그리고 입체적으로 해석해봅시다. 그의 죽음은 나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습니까? 그 구원을 믿으며, 오늘의 나의 삶과, 가족 친지들, 그리고 주변의 일들을 어떻게 새롭게 바라보아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성경을 보는 단 하나의 관점
(2. 4. 2024.)

요한복음 5:39

 

성경을 읽을 때마다 헷갈린다. 여기서는 축복, 저기서는 저주다. 여기서는 번영, 저기서는 멸망이다. 말씀을 통해 위로 받으며 확신을 얻다가도, 이 말씀을 도대체 어떻게 내 삶의 빛으로 삼아야 할지 헷갈린다.

 

성경은 오직 예수님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읽을 때에만 이해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한복음 5:39) 예수님이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의 모든 구절을 예수님과 연결시켜 읽을 때에 내 삶에 유익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두 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1) 저주를 읽어도 소망이다. 나는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였으나, 예수님이 내 모든 저주를 받으셨다. 저주를 읽을수록 나의 무력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 심각한 저주를 나 대신 감당하신 예수님이 계시니, 나는 오늘 하루 벌어진 이 모든 상황이 내게 저주가 되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을 ‘당하신 순종’이라고 한다. (2) 약속을 읽어도 의심하지 않는다. 약속만 읽으면, 그 약속이 실행되기 위해서 내가 충분히 잘 살고 있는지 늘 불안하다. 그러나 나는 충분치 않아도, 이 모든 여정 속에 약속하신 복이 내 삶에 모두 펼쳐질 것을 믿는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 모든 율법에 순종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행하신 순종’이라고 한다.

 

내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가져가지고, 그 분이 누리셔야 할 모든 복을 내게 주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한복음 19:30) 다 이루셨음을 믿어야, 오늘 내 삶에 펼쳐진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다. 고난도 저주가 아니요, 잘됨도 내 공로 아니다. 오직 그분이 내 삶에 다 이루실 계획만 신뢰하며 담대할 수 있다.

 

예수님 빼고 성경을 읽다가, 좋은 곳만 발췌하고 나쁜 곳은 덮어두지 말라. 다 읽어도 된다. 예수님 때문에 모두 은혜로 읽을 수 있다. 이것이 성경을 보는 단 하나의 관점이다.

 

[1] 성경을 집중해서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 축복과 저주가 교차되어 헷갈리거나, 내가 원하는 구절만을 찾아 붙들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요한복음 5장 39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하고 계십니까? 행하신 순종과 당하신 순종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삶의 해석을 어떻게 변화시킵니까?

 

[4-5] 요한복음 19장 3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그 시선 속에서 성경을 읽으며 새롭게 깨달았던 점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내 삶의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도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개선의 저주
(1. 28. 2024.)

마태복음 12:43-45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열악했던 삶이 개선될 때이다. 위기가 왔으나 건지시고, 병들었으나 고치시고, 백수였으나 돈 벌게 하신 개선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왔다. 잘 되게만 해주신다면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

 

하나님 없는 삶의 개선은 저주이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태복음 13:43,45) 예수님은 내 삶을 망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 주셨다. 그러나 그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오히려 삶은 더 강한 악의 세력에 사로잡힌다.

 

개선되는 내 삶과 하나님은 비례하고 있는지 점검하라. 개선의 저주란 하나님을 찾게 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더 많이 생긴 만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시간을 쏟고 있는가? 삶이 더 견고해진 것에 비례하여, 기도시간도 충분히 늘어나고 있는가? 살려주신 만큼, 하나님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고 있는가? 개선에 취하면, 더 이상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반대로 표현도 가능하다. 하나님이 개선되지 않고 머무르게 하신 자리는, 더 하나님을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나를 훈련시키시는 과정이다.

 

죄인이 받아야 할 심판은 무엇인가? ‘개선되지 않는 저주’이다. 그것이 죽음이다. 죽으면 끝이다. 죽음은 좋아질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죽음을 영생으로 개선하셨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한복음 6:40) 이제 내 삶은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개선이 보장되어 있음을 믿는가? 오늘의 삶도 확신해야 한다. 내 삶에 모든 ‘좋아지는 것’은 하나님께만 있다. 더 좋아지려면, 주님만 사랑해야 한다.

 

현재의 개선에 안주하는 미련함을 버리라. 죽음도 개선하신 분이, 내 삶을 더 좋게 개선하실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두려운 경고로만 받지 말고, 초대와 사랑으로 받아들여 보라. 더 좋아지고 싶지 않은가? 끝까지 하나님께만 매달리라. 그것이 개선의 저주를 피하는 길이다.

 

[1] 지나보면 하나님이 예전보다 형편을 훨씬 개선시켜 주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확실히 개선되었던 내 삶의 변화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마태복음 13장 43절과 45절을 읽어봅시다. 귀신이 쫓겨나간 사람 안에는 무엇이 없었습니까? 그러자 무엇이 들어왔습니까? 내 삶이 현재 개선의 저주에 빠져 있는 상황은 없는지 살펴봅시다.

 

[4-5] 요한복음 6장 4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나 대신 죽음을 통해 받으신 저주는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님 믿을 때 영원히 보장되는 약속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개선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을 기대하기 위해 변화되어야 할 내 삶의 생각과 태도를 나누어 봅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