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의 영성”
(10. 19. 2014)
신앙생활을 하면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하나님은 피해자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와 간음하였다. 그리고 우리야는 다윗에게 속아서 죽임을 당한다. 하나님이 범죄한 다윗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우리야는 무슨 죄인가? 우리야의 아내는 무슨 죄인가? 그냥 자기 집 옥상에서 목욕한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남자의 정욕 때문에 우리야의 가정이 풍비박산 났다. 하나님은 다윗만 사랑하시는가? 도대체 피해자의 아픔을 아시기는 하는 것인가? 왕에게 끌려가 모욕당한 아내의 상처, 남편을 잃은 아내의 상처를 아시기는 하는 것인가? 도대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신뢰가 가지 않는다.
살다보면 억울함이 많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다. 남의 잘못 때문에 내 인생이 꼬였다.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왜 이러한 아픔을 겪게 하시는가? 성경이 말하는 이 세가지를 기억하라. 첫째, 분명히 하나님은 당신의 그 억울함을 알고 계신다. 둘째, 억울함은 세상적인 복수로 결코 회복되지 않는다. 셋째, 억울한 피해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풀기만 하면 위대한 영광을 맛 볼 수 있다.
우리는 가해자임과 동시에 피해자이다. 우리야와 간음했던 다윗은 가해자였지만 사실 피해자이기도 했다. 다윗이 일을 잘했다. 그래서 남에게 인정받았다. 사울은 다윗의 인기를 질투했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칼침을 놓으려 했다.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사무엘상 18:11) 나의 팀장님이 칼을 들고 나한테 휘둘렀다고 생각해보라. 청년 다윗에게 그 사건은 평생의 충격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사울에게 복수하지 않는다. 사울을 끌어내리지 않는다. 억울함을 감당하기로 했다. 끝까지 그를 섬겼다. 그러자 사울은 하나님이 알아서 다루셨고,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준비하셨다.
한나라는 여자는 아이를 낳지 못하여 주변에서 무시당하는 자매였다. 그 아픔을 가지고 오래 기도했다. 기도하며 중얼거리는 모습이 술에 취해서 주사를 하는 것으로 착각한 목사가 와서 말했다. “술 좀 끊어라!” 한나는 아기를 낳지 못해 억울했다. 피해자였다. 그러나 목사에게 또 말로 상처를 입는다. 내 아픔을 못 알아주는 목사 때문에 더 억울했다. 그러나 복수하지 않았다. 조용히 끝까지 그 목사를 인정하고 용서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목사의 축복기도를 통해 한나가 임신하게 하셨다. 그 목사의 잘못된 부분은 하나님이 처리하셨다. 그리고 한나는 위대한 사무엘을 낳는 역사적인 여성이 된다.
나아만이라는 사람은 시리아의 국방부 장관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소녀를 포로로 잡아 노예로 삼았다. 소녀가 무슨 죄인가? 그 소녀는 어렸을 때부터 피해자 인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아만이 한센병에 걸렸다. 드디어 하나님이 복수하시는구나, 되갚아주시는구나 생각할 만하다. 그러나 소녀는 나아만에게 당한 피해를 복수로 갚지 않았다. 한센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조용히 즐기려하지 않았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열왕기하 5:3) 소녀는 나아만을 살리려 했다. 날 가족과 영원히 떨어지게 만들었던 사람, 내 인생을 어렸을 때부터 노예로 만든 그 나아만을 살리려 했다. 내 인생의 모든 아픔은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가서 고침을 받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예수님은 억울하게 죽임 당하셨다. 재판 중에 변론할 기회도 없었다. 재판 중에 얻어맞았다. 최소한의 인권도 지켜지지 않은 원천무효인 재판이었다. 그러나 그 억울함을 안고 가셨다. 예수님은 피해자였다. 피해자가 그 억울함의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이 공짜로 왔다. 착각하지 말라. 구원은 공짜가 아니다. 은혜는 공짜가 아니다. 받는 사람은 공짜로 받는다. 그러나 주는 사람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우리 대신 예수님이 값을 지불하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피해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자리에 선다는 것이다. 그 대가를 내가 치르면 용서가 되고, 그 대가를 남이 치르게 하면 복수가 된다.
성경은 성공의 이야기가 전혀 없다. 성경은 온통 억울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성경은 정복자, 가해자의 편을 들지 않는다. 성경은 언제나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뒤에서 묵묵히 사라져가는 피해자들에게 집중한다. 억울함을 감당하기로 했던 사람들을 통해 역사가 이루어진다. 용서하기로 했던 사람들을 통해 생명이 살아난다. 성경은 그 용서의 본이 되어주신 예수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님을 닮아가고 싶은가? 그렇다면 피해자가 될 준비를 하라. 억울해질 준비를 하라. 그것이 피해자의 영성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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