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를 인정하라”
(9. 28. 2014)
“난 남을 질투하지 않아”, “난 열등감 같은 건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정말 그런지 점검하는 방법이 있다. “우월함에 대한 반응”을 보면 된다. 나보다 잘 하는 것, 내가 입은 것보다 비싼 것, 나보다 더 예쁜 것에 대한 당신의 반응은 무엇인가? “남자가 저렇게 몸만 만든다고 되나, 공부를 해야지, 쯧쯧”, “저렇게 비싼 가방 들고 오는 쟤는 뭐야? 집 잘 산다 이거야?”, “예쁘면 다야? 외모는 중요하지 않아, 기도도 잘 못하는 주제에!” 온갖 우월함을 물어뜯고 있다면, 우리는 모두 질투의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모두 다르게 창조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개별적 차이를 지지한다. 평등이라는 좋은 단어를 빌미로 개인의 차이를 희생시키는 일들은 모두 재앙을 가져온다. 차이는 불평등의 위험이 있다. 그러나 그 위험 때문에 차이를 박멸하는 선택은 역사적으로 모두 실패했다.
헤겔은 ‘시대정신’이라는 관념적 신을 만들고, 개인을 무시해버렸다. 그것은 히틀러의 나치즘으로 이어져 유대인 학살의 결과를 낳았다. 마르크스는 세상을 계급의 프레임으로만 보았다. 그러자 특정 계급에 속했다는 이유로 수 많은 개인이 목숨을 잃었다. 어떠한 사상을 이용해서라도 개인을 무시하게 만드는 것. 마귀의 최종 목표이다.
한 사회가 개인의 차이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주목하라. 떠오르는 중국을 보라. 중국 지도자는 어렸을 때부터 철저히 구별되어 길러진다. 차이를 넘어 차별에 가까울 정도이다. 차기, 차차기 지도자까지 철저하게 훈련된다. 중국인들은 사회주의 속에서도 차이를 인정한다. 그러니 많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친다.
우리나라가 개인을 더 중요시한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나라는 너무 많이 벌면, 너무 똑똑하면, 너무 잘나가면 오히려 비판 받는다. “나보다 네가 잘 될 수는 없다”는 질투이다. 그래서 오히려 사회주의보다 더 독재적인 “대중의 독재”가 행해지고 있다. 대중과 다른 너, 대중보다 튀는 너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은 다 숨어버리고, 실력 없는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었다.
모세와 아론은 지도자였다. 그러나 대중이 “너만 지도자냐?”며 그들을 질투했다. “대중의 그들이 진영에서 모세와 아론을 질투하매”(시편 106:6) 하나님은 그들에게 분노하셨다. 하나님도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에게 분노하실 수 있다.
왜 하나님은 질투를 경계하시는가? 질투는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삶에 메마름을 가져온다. 돈 많이 벌었다고 질투하면 누가 당신에게 돈을 나눠주겠는가? 혼자 똑똑한 척하지 말라고 욕하면 누가 당신에게 지식을 공유하겠는가? 차이를 무시하는 질투는 오히려 자기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오늘부터 잘 되는 사람을 기뻐하라. 나와 그 사람의 차이를 충분히 인정하라. 나보다 이런 면에서 훨씬 뛰어나고, 저런 부분은 훨씬 잘한다고 일부러 표현하라. 배우고 싶다고, 존경한다고, 더 선한 일을 해주길 바란다고 격려하라. 차이를 인정할 때부터 감사가 나온다. 그 때부터 상대방의 우월함이 나의 삶에도 밀려들어온다. 돈이 공짜로 온다. 지식이 공짜로 온다. 차이를 마음껏 인정하라. 당신이 꿈꾸는 그 평등이 오히려 더 빨리 찾아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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