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가 정의에 우선한다
(9. 21. 2014)

 

우리는 정의롭지 않은 사회에 분노한다. 차별 없는 채용, 공정한 경쟁, 안정적인 노후생활이 가능한 사회를 꿈꾼다. 내가 못생겼다는 이유로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해보라. 학연, 지연, 혈연에 밀려서 낙오되었다고 생각해보라. 늙었는데 살아갈 돈이 없어서 걱정한다고 생각해보라. 이보다 더한 답답함은 없다. 그래서 세상을 살면, 숨이 막혀온다. 사회의 답답함이 너무 커서 말이다.

 

경영을 잘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CEO가 있었다. 사업 영역이 비슷하여, 서로가 경쟁의 관계였다. 대기업 CEO의 횡포 때문에 중소기업 CEO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공정하지 못한 경쟁이라고,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중소기업의 사정은 더 어려워져서, 그 중소기업 CEO는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는 계약기간이 끝나고 재신임 되지 못했다. 노후를 걱정해야 할 신세가 되었다.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대기업 CEO가 부당 거래 혐의로 구속을 당했다. 당장 그 사업을 잘 이해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대기업은 궁여지책 끝에 낙오된 중소기업 CEO를 차기 CEO로 모셔왔다. 그 대기업은 위기를 극복했고, 자리를 옮긴 그 중소기업 CEO는 존경을 받았다.

 

중소기업 CEO는 대기업의 횡포 때문에 고생했다. 그러나 그 횡포 때문에 본인은 오히려 노후에 큰 자리를 차지했다. 당신이 그 중소기업 CEO였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 질문에 답해보라. “당신이 지금 받고 있는 존경은 그 사람의 나쁜 짓덕택 아닙니까? 그 사람의 악이 없었다면 당신은 실패한 중소기업 회장으로 남지 않았을까요?” 그 사람의 실패 때문에 내가 이룬 선, 내가 이룬 업적, 이것은 과연 정의인가 아닌가?

 

선에서만 선이 나오는가? 성경은 그것보다 더 큰 세계가 있음을 말한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로마서 11:6) 옳고 그름 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세계, 착한 행위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세계. 그것이 은혜의 세계이다. 세상은 정의로만 해석할 수 없다. 정의라는 안경만 가지고서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우리에겐 은혜의 안경이 필요하다.

 

경쟁이 정의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아버지는 실력이 없었다. 그러나 호봉제 때문에 회사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당신의 학비를 댈 수 있었다면, 당신은 정의의 수혜자인가 은혜의 수혜자인가?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정당이 정권을 잡았다. 그 정당을 정말 싫어했다. 그런데 그 정당이 갑자기 인문학 열풍을 일으켰다. 그 덕에 역사학과였던 내가 운 좋게 취업했다. 당신은 정의의 수혜자인가? 은혜의 수혜자인가?

 

나에겐 정의만 있는가? 남에게 정의만 강요할 수 있는가? 세상엔 과연 불의만 있는가? 정의만 외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라. 정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삶. 그리고 그 정의를 뛰어넘는 것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삶. 그것이 은혜의 삶이다. 차원이 다른 은혜의 세계로 오라.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라. 정의를 뛰어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은혜는 언제나 정의에 우선한다. 우리는 모두 은혜로 먹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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