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이 더 좋았다는 핑계"
(8. 14 2016)
일본은 우리나라를 많이 괴롭혔다. 그렇다면 일제 전에는 어땠나? 동네 앞에 도로를 만들면 상놈들은 끌려가서 일했다. 그러나 양반들은 노동에서 면제되었다. 왜? 신분의 사회였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오자 상황이 달라졌다. 일본인들 눈에는 양반이나 상놈이나 다 삽을 들어야 할 똑같은 조선놈으로만 보였다. 일본은 양반이 우스웠다. 절대 면제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게 평등이 왔다. 일본은 참 나쁜 일 많이 했다. 그렇지만 신분제도 끔찍했다. 일본이 오기 전엔 다 좋았다? 거짓말이다.
트럼프가 득세한다. 자유무역 때문에 미국이 힘들다며, 보호무역의 깃발을 올린다. 그렇다면 자유무역 전에는 어땠나? 두 번의 세계대전 사이에 보호무역과 경제 보복이 있었던 곳에서는 언제나 교역 수준이 감소하고 소득이 낮아졌다고 한다.[1] 자유무역의 문제는 자유무역에서 풀어야 한다. 자유무역이 안 되니 보호무역으로 돌아가면 좋아진다? 그것도 거짓말이다.
사람은 늘 이런식이다. 현재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옛날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그게 더 나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전도서의 저자는 늘 우리에게 경고한다.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전도서 7:10) 오늘이 별로니, 옛날이면 되는가? 현실을 뚫고 앞으로 가지 않으려는 회피행위이다.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태도와 행동들이 있다. 그렇게 살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해석이 안 된다. 점점 위기가 온다. 왜 내가 하나님이라는 너무 큰 존재를 내 삶과 엮었을까! 차라리 옛날이 낫다? 나의 현실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다. 회피이다.
예수님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셨다. 말씀에 순종하자, 체포의 칼날이 자신을 겨눴다. 그러나 옛날에 병 고치고 기적을 행할 때가 나았음을 한탄하시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한복음 18:11) 십자가의 행적에는 돌이킴이 없다. 상황이 아니라 아버지를 본다. 내 삶의 구원은 "내 삶의 왔던 길"에 있지 않다. 나의 구원은 "내 삶의 길의 끝"에 있다. 앞으로 가야 한다.
지금 힘드니까 옛날의 습관, 옛날의 만남, 옛날의 그 어떤 것을 찾아가려는 생각이 있거든, 다시 생각하라. 바른 것을 찾아가는 것인가, 현실에 대한 회피인가? 일어나라. 계속 가라. 현실에서 치열하게 부딪치라. 영광은 앞에 있다.
[1-3] 내 삶의 전성기가 있었습니까? 그때 난 얼마나 잘나갔나요?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까?
[1-4] 전성기에 비해 내 삶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전성기와는 달리 잃어버린 것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신 현실의 삶을 "옛날이 좋았다" 라는 말로 부정하며 원망하는 나의 모습은 무엇이 있습니까?
[5-6] 예수님은 나의 구원을 위하여 삶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하셨습니까? 과거보다 좋지 않아진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지금 내가 옛날이라는 단어를 버리고 다시 하나님과 현실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부딪혀야 할 삶의 영역은 무엇입니까?
[1] 이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필요하다면 연세대 경제학과 성태윤 교수의 글을 참고하라. 성태윤, "보호무역주의에 대응하는 세 가지 방법", 매일경제 2016년 8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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