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 감사는 원망이다."

(7. 31. 2016)

 

신입사원 교육을 받던 어느 날 회사는 커다란 백지를 나눠줬다. 감사할 것들 100가지를 적어보라는 것이다. 감사를 적으며 불평을 시작했다. 하기도 싫은 감사 억지로 시킨다고 삶이 달라지겠는가? 감사는 감사 뒤의 무언가를 먼저 다루어야 한다.

 

감사는 인위적인 행동이 아니라 신앙이다. "감사할 거리"를 찾는다는 말은 모순이다. 어떤 것은 감사할 만하고, 어떤 것은 감사하지 않을 만하다는 "나의 가치판단"이 이미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감사를 고르는 순간, 내가 하나님이 된다. 부분적으로 감사하는가? 그 자체로 이미 감사가 아니다. 부분 감사는 원망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식으로 감사하지 않는다.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the will of God in Christ Jesus for you, 데살로니가전서 5:18)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라고 한다. 이것은 감사가 안 나오는데 꾹 참고 주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상황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임을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에서 나오는 것이다. 신앙인은 환경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환경을 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판단한다." 자신의 아들 예수를 버리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분을 본다. 그 하나님의 성품을 받아들이기에 상황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황의 수준에 따라 감사를 결정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부분 감사는 없다. 영국 소설가 G. K. 체스터튼이 이렇게 말했다. "내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아침에 일어나 자기들의 양말에 사탕을 넣어 준 것을 고마워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데, 나는 내 양말 안에 두 다리를 넣어 준 것을 감사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가?" 체스터튼은 양말에 찔러 넣을 두 다리부터 감사를 시작한다. 존재로부터 감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오스 기니스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자연의 어떤 부분도 스스로 창조되거나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가?" 원래 내 것이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말이다.

 

당신의 원망을 점검해보라. 얻지 못한 것들이 분명히 있다. 왜 원망스러운가? 지금 소유한 것은 마치 내가 만들어 냈다는 착각 때문이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린도전서 4:7) 처음부터 내가 만들어낸 것은 없었다. 다 하나님께로 왔다. 부분 감사는 없다. 모든 것을 감사하느냐, 모든 감사를 거부하느냐. 인생에는 두 가지 길 뿐이다.

 

감사하는 척하지 말라. 대충 감사를 고백하면 기분이 좋아지겠지? 그럴 일 없다. 원망만 생긴다. 감사는 신앙이다.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하나님이 내게 가장 좋으시기에, 내게 주신 환경도 가장 좋은 것임을 받아들여야 '범사의 감사'가 나온다. 부분 감사는 없다. 부분 감사는 원망이다. 정신차리라. 내 존재 전부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1] 주변에서 억지로 감사하라길래 짜증난 적이 있습니까? 왜 짜증이 났습니까? 불만이었던 상황들은 무엇이었나요?

 

[2-3] 감사는 단순한 행동입니까 믿음에서 나오는 고백입니까? 그 믿음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상황을 믿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믿는 것입니까? 내 눈은 어디를 향해 있나요?

 

[4-6] 감사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합니까? 내게 주신 상황부터입니까, 아니면 존재부터입니까? 내가 감사를 대하는 태도들을 어디서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지 나누어봅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