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적 만남, 복음적 만남

(8. 12. 2018.)

요한1 4:19

 

젊음의 주요 이슈는 무엇인가? 만남이다. 친구든 배우자이든, 연애든, 만남이 인생의 기쁨과 슬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스트레스와 고민도 만남에서 온다.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자들과 만남의 철학이 다르다. 이것을 이해해야 삶의 기쁨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그러려면 율법적 만남과, 복음적 만남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율법적 만남이란, (1)조건을 통해, (2)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이다. (1)하나님께 잘 보여야, (2)하나님이 구원해주신다. (1)돈이 있어야, (2)그녀가 사랑해준다. (1)예뻐야, (2)그가 결혼해 준다. 만약 1번이 깨지면, 2번도 없다. 그래서 만남의 성공, 최고의 결과를 이루어내기 위해 최선의 행동을 한다. 그래야 성공하고, 그래야 결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전에 온갖 행동과 물질을 다 쏟아 부어야 한다. 만족시키지 못하면, 원하는 만남을 이룰 수 없다.

 

복음적 만남이란 그 반대다. (1)이미 정해진 약속 안에서, (2)서로가 가진 조건을 누리는 것이다. (1)이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믿기에, (2)그의 뜻에 내 삶을 맞춘다. (1)이미 상대를 사랑하기에, (2)서로가 가진 약점을 이해하고 상대에게 헌신한다. (1)이미 신뢰하기에, (2)서로의 뜻과 상황을 존중한다. 조건이 먼저가 아니라 깨지지 않는 약속과 사랑이 먼저다.

 

만남에는 왜 과정이 필요한가? 율법적인 사람은 1번을 통해서 2번을 성취하는 것이 만남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만남의 과정은 언제나 율법에서 복음으로 넘어가는 훈련의 과정이다. (1)조건 때문에 (2)서로 계산하다가, 과정을 통해 (1)사랑의 약속 때문에, (2)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복음적인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만남의 완성이다. 과정 속에서 율법에 머무르지 말라. 복음을 훈련해야 한다. 한 사람만 노력하면 안 된다. 서로가 이것을 깨달아야 모든 조건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지속적인 만남이 가능하다.

 

현실적으로 적용하겠다. 왜 그리스도인은 연인과 숙박이 있는 여행을 가지 않는가? 왜 동거와 혼전 성관계를 하지 않는가? 동거와 혼전 성관계가 연인과의 관계 지속에 더 좋다고 생각했던 32살 여자의 고백이다. 4년간 동거하며 뜨겁게 살았다. 결혼하자마자 이혼했다. 4년간 동거를 이렇게 표현했다. “저에게 동거는 끝나지 않는 오디션이었습니다.” ? 이 관계는 감정에 기반 했기 때문에 자유로울 줄 알았다. 결혼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 사랑해주기만 한다면 자연스럽게 결혼이 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감정만큼은 계속 살려야 한다는 조건’(율법적 1)이 숨겨져 있던 것이다! 헌신과, 무조건적인 약속이 있는(복음적 1) 구조가 아니었다.

 

매일매일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감정이 어떠냐에 따라 이 동거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다. 더 이상 여행이 재미 없다면? 더 이상 성관계가 재미 없다면? 헤어지겠지? 결혼 못 하겠지? 감정에 기반하는 것이, 헌신과 약속에 기반하는 것보다 훨씬 사람을 초조하게 만든다. 실제로 동거를 경험한 커플의 이혼율이 훨씬 높다. 이혼을 안 하더라도 결혼에 더 만족하지 못하는 통계가 있다. 그 뒤에는 관계를 해석하는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왜 그리스도인이 결혼 전에 함부로 숙박을 하는 여행을 가지 않는가? 왜 혼전 성관계를 하지 않는가? 왜 동거하지 않는가? 역으로 묻겠다. 실컷 관계하고도 그녀가 만족하지 못했다면? 좋은 곳에 여행 갔으나, 그가 즐거워하는 것 같지 않다면? 최고의 감정 고조로도 안 된다면, 그럼 결혼도, 우리의 만남도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약속이 확인되기 전에 최고의 것을 누리는 것을 절제한다. 율법적 관계는 결코 지속될 수 없고, 복음적 관계만이 영원함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결혼 전에는 조건을 이기는 훈련을 해야 한다. 여행이 아니라 오히려 열악한 상황이 필요하다. 거기서 서로가 다듬어진다. 그리고 결혼한다. 감정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내가 지켜내야 한다. 결혼의 약속은 그 약속이 나를 지킨다. 이것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이다.

 

내가 조건을 지켜 하나님께 사랑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 조건과 관계 없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한1 4:19) 먼저 사랑하신 것은 예수님이다. 그 사랑의 약속을 알기에(복음적 1) 나는 하나님과 끊어지지 않는다. 조건 없는 그 사랑이 고마워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한다(복음적 2).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십자가를 아는 사람만, 상대를 약속에 기반하여 먼저 사랑할 수 있다. 조건을 이기는 사랑이 예수 안에 있다. 만남의 지속성은 오직 복음 안에서 담보된다.

 

[1-3] 율법적 만남은 무엇입니까? 복음적 만남은 무엇입니까? 순서의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만남을 위해 힘썼던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나누어봅시다.

 

[4-7] 만남의 과정에서는 무엇을 해야합니까? 현실적으로 왜 그리스도인들은 만남에서 그런 습관들을 견지하는 것입니까? 나만의 만남의 과정 속에 있었던 복음적인 기쁨과, 율법적인 후회는 무무엇이 있습니까?

 

[8] 깨지지 않는 약속, 조건이 없는 사랑은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한 사람만 이 사랑을 안다면 관계가 어떻게 될까요? 왜 믿는 사람과의 교제 혹은 결혼이 중요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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