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내 자신이 불쌍해 보일 때"
(11. 23. 2015)
퇴근길에 나의 삶이 불쌍해보일 때가 있다. 몸은 너무 지쳐 있다. 아침에 탱탱했던 얼굴은 다 어디가고 모니터 앞에서 달궈진 얼굴 기름이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지하철과 버스에 앉을 자리마저 없을 때는 피곤함이 배가 된다. "내일도 똑같이 이 피곤한 삶을 살아야 하다니!" 여기가 바로 지옥이 아닐까?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라. 피곤함은 불쌍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아침에 활기찼던 몸은 퇴근 후 수척해지는 것이 정상이다. 하루 종일 많은 업무와 갈등을 해결한 후에는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온 몸이 늘어지기 시작하고, 얼른 침대에서 단잠을 자고 싶고, 아무거나 집어 먹고 싶은 배고픔을 느끼는 당신은 '매우 정상'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안심하라. 당신은 완벽히 정상이다. 당신은 잘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상황을 잘못된 나의 정체성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내가 지금 피곤하기 때문에 "나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나는 능력이 부족한 존재"이라고 생각한다. 힘들게 일하고 받는 월급 말고는 재산이 없기 때문에 "난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좌절한다. 다시 생각해보라. 우리가 왜 퇴근 길에 힘든 것인가? 피곤함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다. 내가 처한 상황으로부터 밀어닥치는 나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 때문에 힘든 것이다.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어 한다. 아무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주변 상황과 나의 상태를 살펴보고 내가 나를 정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겠다. 1)주변 상황과, 2)나의 상태를 살펴보고 나를 정의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 안에 일어나는 정체성의 장난이다.
성경이 말하는 나의 정체성은 다르다. 성경이 말하는 나는 1)돕는자가 있는 존재이며(시편 121:2), 2)죄가 없어진 존재이며(로마서 3:24), 3)영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로마서 8:15)임을 말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성경은 좋은 말만 가져다가 놓은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우리 삶에 적용된다. 왜 이것이 실제적으로 적용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 때문이다. 나 대신 하나님은 1)예수님을 돕지 않고 버리셨으며(마태복음 27:42), 2)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셨으며(요한복음 1:29), 3)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마태복음 27:46)이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이라고만 부를 수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 이 십자가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실제로 다시 연결되었다.
아들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얻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라. 하나님이 선언하신 나의 정체성을 마음 열어 맞이하라.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나의 상황도 아니고, 나의 상태도 아니고, 내 스스로의 힘 없는 다짐도 아니다. 회사의 상태와 나의 정체성을 동일시하지 말라. 나의 컨디션과 내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라. 아들을 버리는 하나님 사랑이 내 안에 있다. 이것을 묵상하라. 이것이 내 삶에 실제로 다가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그 정체성이 주는 무한한 기쁨을 알았던 모세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명기 3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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